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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7/24 23:23
^^; 제가 워낙 글을 불친절하게 쓰는 거 같아요. 게다가 위 글은, 오이디푸스 신화를 아는 이가 아니라 희곡 오이디푸스를 읽어본 이를 독자로 상정해서 쓴 글이니 더욱 그러려나요. 여담이지만 의외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를 읽는 경우가 좀 드물죠. 본문에서 언급된 문헌 중 피지알러에게 가장 많이 읽혔을 법한 문헌은 오이디푸스라기보단 되려 카뮈의 시지프 신화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13/07/24 23:27
으음, 재미있네요. 브레히트의 바램을 대입해 오이디푸스에서 시지프스의 모습을 찾아내는 글이라니.
게다가 본문에서도 말씀하셨지만, 비극적인 영웅으로서의 오이디푸스의 면모가 더욱 부각되는 효과까지. 까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를 정말 감명 깊게 읽은 입장에서 정말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비극적인 영웅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재미있는 법이지요. 흐흐;; PS. 사실 저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철학과생인데도요 ㅠㅠ
13/07/24 23:33
그리스 비극에서 주인공에게는 도덕적 결점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요건이었죠. 그게 그리스어 하마르티아(도덕적 결함)의 문제로 알고 있습니다. 이건 보통 '화살이 과녁에 벗어남'의 의미이고, 신학에서는 '죄'로 번역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이게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는 도덕적 법적 죄로 쓰이지 않았다는 견해가 유력합니다(시학에 나온 용어라서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의미가 중요함).
브레히트의 의문은 아마도 시학에 나온 '하마르티아'의 문제와 연결될 것도 같습니다. 과연 당시 비극을 봤던 그리스인들이 오이디푸스에게 도덕적 결함이 없다고 봤을지 궁금합니다. 지금 제 시각에서 오이디푸스에게 도덕적 결함이 있다고 느껴지거든요. 아버지를 죽이게 된 상황은 지금 시각에선 단지 격정범일 뿐이죠. 영웅의 분노와 그에 따른 행동이 당연시 되던 시기도 있었겠지만, 분명 그리스 비극이 상연되던 시기는 복수자유주의에서 법에 따른 통제로 이행되던 시기이기도 하니 아리스토텔레스의 영웅의 조건은, 저로서는, 신화시대에는 맞을지 모르지만 고전기 그리스 시대에는 잘못 짚은게 아닌가 싶어요.
13/07/24 23:44
그렇다면 콜로노스의 숲의 오이디푸스는 어떤 맥락에서 읽어내야할까요? 단지 주어진 건 텍스트밖에 없기에 말하기 난감한 부분이 없잖아 있긴 합니다만.
13/07/25 00:00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제대로 읽지 않아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한때 테베 이야기의 전체 줄거리를 알기 위해 애쓴 거 빼고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아서요;;
윗 댓글은 단지 서두에 제기된 베르히트의 발제문에 국한된 겁니다. (뻘쭘하지만 우리나라 말로 써진 그리스비극에 대한 가장 좋은 글은 그리스사 전공자이신 작고하신 김진경 교수의 논문이라 생각합니다. <서양고대사 강의>에도 있고 하니 쉽게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위의 하마르티아는 영문학자 이경식 교수의 시학강의라는 책에 나온 얘기입니다. 독창적이지 않지만 망라적이어서 참고로 보시길)
13/07/24 23:54
신들이 정해놓은 운명과 개인의 자유의지간에 갈등, 하지만 어차피 신들은 짱짱신이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란 한낱 사소한 것일뿐이지만
운명이 정해놓은 파국일지라도 그걸 수용하고 짊어지는 데서 영웅적 면모를 볼 수 있다라고 수업시간에 배웠었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오이디푸스는 전 잘 모르겠어요. 시지푸스에게서 보이는 영웅적 면모는 오히려 아가멤논이 더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13/07/24 23:58
그러시다면, 본문은 어떻게 오이디푸스에게서 영웅적 면모를 찾을 수 있는가란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음, 읽어도 납득이 안 된다는 말씀이시라면 제 부덕의 소산이로군요.
13/07/25 00:59
시지푸스에게서 원래의 오이디푸스를 찾는건 힘들겁니다. 오이디푸스는 모르고 하며, 스스로에게 장님이되고 떠돌이가되는 형벌을 내림으로써 영웅이 되지만 시지푸스는 알면서도 행하며, 생으로써 형벌을 감내하는 모양새니까요. 다만 오이디푸스가 알면서도 행했다는가정의 희곡이니까 오이디푸스에게서 시지푸스를 볼수 있겠죠.
다만 까뮈가 바라본 시지푸스와 희곡에서의 오이디푸스의 면모가 완벽히 일치한다 말하려면 오이디푸스가 스스로에게 형벌을 가하되 어머니와 계속 삶을 이어가는 결말이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13/07/25 01:13
[다만 까뮈가 바라본 시지푸스와 희곡에서의 오이디푸스의 면모가 완벽히 일치한다 말하려면 오이디푸스가 스스로에게 형벌을 가하되 어머니와 계속 삶을 이어가는 결말이 필요하지 않을까]란 의문에 대한 답이라면 이미 카뮈 자신이 시지프 신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대신할 수 있을 겁니다.
[거역할 길 없는 진리들도 인식됨으로써 사멸한다. 이렇듯 오이디푸스도 처음에는 영문을 알지 못한 채 그의 운명에 복종한다. 그가 알게 되는 순간부터 비극은 시작된다. 바로 그 순간에 눈멀고 절망한 오이디푸스지만 자기를 이 세상에 비끄러 매어놓는 유일한 끈은 한 처녀의 싱싱한 손이라는 것을 안다. 이 때 기가 막힌 한 마디 말소리가 울린다. “그 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나의 노령과 나의 영혼의 위대함에 의하여 판단하노니 만사가 다 잘되었도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도 도스토예프스키의 키릴로프와 마찬가지로 부조리의 승리를 표현한다. 고대의 예지가 현대의 영웅주의와 만난다. 부조리를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행복의 안내서를 쓰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니 뭐라구! 이처럼 좁은 길들을 통해서...?” 그러나 존재하는 세계는 오직 하나뿐이다. 행복과 부조리는 같은 땅이 낳은 두 아들이다. 이들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행복은 반드시 부조리의 발견에서 태어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일 것이다. 부조리의 감정이 오히려 행복에서 태어날 수도 있다. “내가 판단하노니 만사가 다 잘되었다”, 오이디푸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은 신성하다. 이 말은 인간의 사납고 한정된 세계 안에서 울린다. 또 모든 것이 밑바닥까지 다 소진되는 것은 아니며 또 소진되지도 않았음을 가르쳐준다. 그리하여 그것은 불만과 무용한 고통에 대한 취미를 가지고 들어온 신을 이 세계로부터 추방한다. 그 한 마디는 운명을 인간의 문제로, 인간들끼리 처리해야 할 문제로 만드는 것이다. 시지프의 말 없는 기쁨은 송두리째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들은 침묵한다. 문득 본연의 침묵으로 되돌아간 우주 안에서 경이에 찬 작은 목소리들이 대지로부터 무수히 솟아오른다.]
13/07/25 01:27
처녀의 싱싱한 손. 까지는 생각을 못했네요. 평론가 신형철의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아 그 프레임에 갇혀있던것 같습니다. 많이 배우네요.
카뮈의 시지프신화를 전부 읽어본적이 없는데 읽어봐야겠습니다. 혹시 올려주신글이 어느출판사의 번역인지 알 수 있을까요 ?
13/07/25 01:35
김화영 번역, 책세상 출판입니다. 최근에 새로 출판된 카뮈 전집 시리즈구요. 제가 주워 듣기로 카뮈는 책세상이 독점권을 갖고 있어 다른 판본은 없다고 압니다만, 그래도 역자인 김화영 교수의 번역관이 달라진 만큼(한자어 사용을 지양하고 한글 구어체 활용을 적극 받아들이는 등, 일반이 접근하기에도 비교적 수월하게) 최근 판본을 추천합니다. 여담입니다만, 그 덕분인지 저 역시 근래 인터넷 돌아다니면서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카뮈를 인용하는 네티즌들을 비교적 많이 찾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13/07/25 00:33
글을 읽고나니 만약 브레히트의 아쉬움을 박찬욱이 해결했다면 올드보이가 더 좋았을거란 생각이 드네요. 미도와 오대수의 관계가 그들의 대화나 정보수집과정에서 오대수에게 제시되고 오대수의 직관과 부정이 묘사되었다면 결말이 좀 더 설득력있었겠네요.
13/07/25 02:19
세익스피어의 다른 비극적 영웅들과 비극적 영웅이 되기를 거절한 맥베스를 비교한 가라타니 고진의 글이 떠오르네요. 오이디푸스에 가장 비슷한 영웅은 오셀로일까요?
"...... 맥베스는 마녀와 싸우는 것을 그만 두지만, 동시에 그는 그것으로부터 되돌아가라는 맥더프의 유혹을 거절한다. 그가 거부한 것은 자기존재가 무의미다 라는 생각이며, 그는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그가 최후에 벗어난 것은 이른바 '비극'이라는, 자기와 세계 사이에 그럴싸한 거리를 설정한 후, 그것을 바탕으로 화해에 이르게 하는 기계 장치다. 그는 '비극'을 거절한다. 하지만, 우린 '비극'을 거절하는 것마저 '비극'이라고 불러야 할까? 어쩜 그럴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비극'을 없앨 방법이 없다는 건 확실하다."
13/07/25 03:02
고진의 맥베스론을 님의 말을 듣고 찾아봤습니다. 아주 흥미롭네요.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논지와 접점은, 찾으려면 찾을 수도 있겠지만 바라보는 방향이 같지 않은 만큼(도리어 고진이 지적한 바, 정반대인 만큼) 좀 의구심이 듭니다.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데)고진 자신의 글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의도와도 무관할 거 같구요. 그보다 저는 고진의 맥베스론을 읽으며 콘래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이 떠올랐습니다. 그 해석의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가장 위대한 영화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었던 지옥의 묵시록을 그저 시대의 단면을 드러낸 준작 수준으로 격하시킨 소설의 후반부가 말이지요.
13/07/25 02:24
어렵네요;; 여기서 오이디푸스의 심리는 직관은 진실을 꿰뚫었지만, 이성은 진실을 보지 않으려고 억지로 고개를 돌리고, 감정은 억누를 수가 없는, 요런 상태라는 건가요..? 마치 관객들이 뒷 내용 스포(귓뜸)를 아는 상태에서(물론 오이디푸스는 극중에서 스포를 때리지만..) 설마 진짜 이렇게 전개될라고.. 하면서 조마조마하게 보는 상태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운명을 안다고도 할 수 없고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부조리한 심리상태가 비극적 영웅의 조건이라는 거..군요...
13/07/25 08:45
장난삼아...
글이 어려워 재미없어요. 저같음 반성으로 테베 왕가의 저주를 소개하는 이야기를 독립적인 글로 쓰겠네요. 뭐 전에 눈시님이 그리스신화 쓴다고 뻥 쳤으니 대신 쓰던가, 뭐;; 그럼 저주받은 오이디푸스 출생이 다소 해명될 겁니다. 아트레우스(아가멤논) 가문의 저주와 비교하거나, 교만--응보(복수?/ 휘브리스--미메시스)와 이와 같은 길을 가면서 극복한 그리스도교 영웅 예수를 비교하면 재밌을 겁니다. 는 농담이고, 오이디푸스같은 고전은 읽는 시기의 잣대에 따라 달리 읽힙니다. 하지만 당대의 심상에 따른 주인공 성격분석이 일차적인 게 사실입니다.
13/07/25 10:50
카뮈의 표현을 변용해 마지막 문장에 답하자면 "그 외에 다른 것은 (내게) 중요치 않다"는 겁니다. 저는 여기서 그리스 희곡의 캐릭터 분석을 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으며 이는 제 주요 논거가 브레히트의 꽁트라는 것에서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글은 분명 특정 소재를 특정한 방식으로 독해할때 우리가 얻을 인식에 대해 다루고 있지, 그 소재에 포괄될 모든 것들을 말미암진 않습니다. 이 과정에서 배제될 독자들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전 이 글이 그 모두에게 향유되어야한다거나 그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에 대한, 그러한 식의 접근(예수에 대해서라면 뭔들 많지 않겠습니까마는)은 이미 너무 많아 제가 일획 더해야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다만 오이디푸스의 경우 부조리한 인간으로서 자주 인용되나 정작 그의 부조리와 이 사이에서 비치는 영웅적 면모를 논술한 글은 찾기 어려우니까요(하기는 시지프에 대한 카뮈의 접근이 차라리 드물텐데요). 선비님께서 말씀하신 고진의 맥베스론처럼 그리 독해되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다른 접근을 논파한는 식으로 써내려갔다면 물론 더 좋겠습니다만, 상술한 바, 이 글은 그러한 식의 엄밀성을 의도치 않았고 그러함에도 굳이 부연하기엔 너무도 지난한 과정이라 시도조차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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