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안 써질 땐 역시 장군님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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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4월 1일 맑음. 옥문을 나오게 되어 남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으로 갔다. 봉, 분, 울과 사행, 원경과 한방에 같이 앉아서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이 와서 위로했다. 비변랑 이순지가 찾아왔다. 슬픔이 더해짐을 이길 수 없었다. 윤 지사가 돌아갔다가 식사 후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기헌도 왔다. 정으로 권하며 위로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양할 수가 없었다. 억지로 마셨더니 몹시 취했다. 이 영공 순신이 술병을 차고 또 왔으므로 함께 취하며 간담했다 (류성룡 등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술에 취하여 땀이 몸을 적셨다.
이후 그는 아산 고향집으로 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고향에 도착하니 친척과 친구들, 마을 사람들이 반겼죠.
9일 맑음. 동네 안 사람들이 각각 술병을 들고 와서 먼길 떠나는 것을 위로하는 정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몸시 취하여 파했다. 홍군우는 노래를 부르고, 이 별좌도 노래를 불렀다. 나는 노래를 듣는데도 즐겁지 않았다.
11일 맑음. 새벽에 꿈이 너무나 번거뤄오 다 말할 수가 없다. (중략) 마음이 매우 좋지 못하여 취한 듯 미친 듯 진정할 수가 없으니 이 무슨 징조일까. 병환중에 계신 어머님을 생각하니 눈물이 흘러내림을 깨닫지 못했다.
12일에 어머니의 소식이 들려와 안도했지만, 슬프게도 예감은 빗나가지 않습니다.
13일 (전략)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고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날뛰었으나 하늘이 캄캄했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이미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슬픔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다 적을 수가 없다.
16일 흐리고 비가 내렸다. 배를 끌어 중방포 앞에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본가로 돌아오며 마을을 바라보고 통곡하니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오.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리고 나니 비가 크게 퍼부었다. 나는 기력이 고달프고 쇠진했다. 남쪽으로 갈 일도 급박해졌다. 부를짖어 통곡하며 다만 속히 죽기만을 기다릴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는 갈 길이 너무나도 급했고, 멀었습니다. 3년상? 꿈도 꿀 수 없었죠.
19일 맑음.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호곡했다.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천지간에 나와 같은 사정이 어디에 있으리오.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 하다.
그 날로 길을 떠나 남으로 남으로 갑니다. 20일에 공주에, 22일에 전주에, 24일에 남원에, 27일에 순천까지 갔죠. 일기의 대부분은 누구를 만났고 뭘 했다는 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끝에는 자신의 심정을 덧붙였죠.
21일 한밤중에 홀로 앉아 있노라니 비통한 마음을 어찌 견디리오
24일 애통한 마음을 어찌하랴
26일 밤에 앉아 있으니 비통함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하리오
5월 2일 홀로 빈 동헌에 앉아 있으니 비통한 마음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4일 비. 이날은 바로 어머님 생신이니 비통한 마음을 어찌 감당하랴. 닭이 울자 일어나 앉아 눈물만 줄줄 흘렸을 뿐이다.
그리고 우치적, 이복남 등을 만나며 원균에 대한 소식도 듣게 되죠.
27일 (우치적이 오고) 정사준도 와서 원공의 본분에 어긋나고, 망령되고, 전도된 상황을 많이 말했다.
5일 늦게 충청 우후 원유남이 한산도로부터 와서 원공의 흉측하고 패악한 점을 많이 전하고, 또 진중의 장졸들이 뱁나하고 떠나므로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측량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날은 단오절이다. 그러나 먼리 천리 밖 천애에 와서 예절을 전폐하고 곡하고 우는 것도 뜻대로 할 수 없으니 이 무슨 죄로 이런 갚음을 당하는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에 짝이 없을 것이니 가슴이 찢어질 듯하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6일 맑음. 꿈에 돌아가신 두 형님을 뵙고 서로 붙들고 울었는데, 애통해하시면서 하는 말씀이 장사를 치르짖도 않고 천리 밖에 종군하고 있으니 누가 그 일을 주장하겠으며 통곡한들 어찌하리오 하시는 것이었다. 이 두 형님의 혼령이 천리 밖에까지 따라오셔서 근심하시고 애타게 여기심을 이와 같이 해 주시니 비통함을 금치 못 하겠다. (중략) 형님들의 혼령이 그윽히 염려해 주심이니 슬픔을 더욱 깊게 했다. 아침 저녁으로 그립고 비통한 마음에 눈물이 엉기어 피를 이루건만 하늘은 어찌 막막하여 내 사정을 살펴 주지 못 하는 것인가? 어째서 속히 죽지도 않는 것일까?
그 때문일까요. 그 날과 7, 8일 일기엔 원균에 대한 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슬픔과 원균에 대한 욕, 이 두개 외에 감정이 담긴 부분은 없습니다. 호칭도 원공에서 원흉이 돼 가죠. 원균을 증오하며 수군을, 나라를 걱정하는 것만이 그가 살아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을지도요. 뭐 그게 아니더라도 원균의 행동은 미친 짓으로 가득차 있었지만요.
6일 저녁에 정원명이 한산도에서 돌아와 흉측한 사람의 하는 짓을 많이 이야기했다.
8일 음흉한 원균이 편지를 보내어 조문하니, 이것은 바로 원수(권율)의 명령에서였다. 이견신이 한산도로부터 와서 흉측한 원균의 일에 대한 말을 많이 했다. 또 원균이 데리고 온 서리를 곡식 사들이라는 명목으로 육지에 보내놓고 그 처를 사통하려 했으나 그 처가 악을 쓰며 따르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면서 큰 소리를 질렀다고 하는 것이었다. 원균은 온갖 계략을 다 써서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역시 운수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로 가는 길에 잇닿았으며, 나를 모함하고 헐뜯는 일이 날로 심해 가니 스스로 때를 못 만난 것만 한탄할 따름이다.
11일 소문은 다 흉측한 사람 원균에 대한 것이었다.
13일 어젯밤에 부체찰사가 말하기를, 상사가 보낸 편지에서 영공(원균)의 일을 많이 탄식했다는 것이다.
20일 체찰사(이원익)가 또 말하기를, 흉악한 사람 원균의 하는 일이 무고가 극심한데도 임금이 굽어살피지 못하니 나라일을 어찌하리오 하는 것이었다.
23일 아침에 정사룡, 이사순이 찾아와서 원공의 일을 많이 전해주었다.
28일 또 원균의 하는 일에 미친 짓이 많음을 말했다.
... 이건 뭐 끝이 없군요. 이건 뭐 6월에는 수군 출동이 본격적으로 가면서 출동에 관한 부분이나 원균에 대한 비판이 구체적으로 변해갑니다. 그러면서 가족에 대한 부분은 찾기 힘들죠. 중순에 아산에서 편지가 와 다시 슬픔에 잠긴 정도입니다. 가족 생각을 미뤄둘 정도로 바쁜 게 차라리 나았겠죠. 아무리 원균이라도 부디 이겨주길 바랐을 거구요. 하지만... 6월 25일에 김축의 부상과 안홍국의 전사 소식을 듣게 됩니다.
25일 놀랍고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 적을 하나도 잡지 못하고 먼저 두 장수를 잃어버렸으니 통탄스러움을 어찌 말하랴.
7월 초에는 다시 부모님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2일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신이었고, 어머니의 제사가 다가왔기 때문이었죠.
3일 맑음. 새벽에 안자 있으니 싸늘한 기운이 뼈에까지 스며들어 비통한 마음이 더욱 극심해졌다. 제사에 쓸 조과와 밀가루를 장만했다.
6일 홀로 텅빈 집에 앉았으니 그립고 비통한 마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랴.
9일 맑음. 내일 열(아들)을 아산으로 보내려고 제사에 쓸 과일을 살펴서 봉했다. 이날 밤 달빛이 낮과 같이 밝아서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슬픔으로 눈물을 흘렸다.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10일 저녁에 홀로 빈 방에 앉아 있노라니 심사가 몹시 사나워서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이면서 밤을 밝혔다.
하지만 그럴 시간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7월 7일 꿈에 원공과 한자리에서 만났는데, 내가 원공의 윗자리에 앉아 음식상을 받을 때 원공은 기쁜 기색을 띠었으니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창작물이라면 그래도 둘이 좀 화해하고 원균이 그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런 복선이 될 수 있었겟습니다만...
14일 초 7일에 왜선 5백여척이 부산으로 나오고, 초 9일에 왜선 1척이 합세하여 우리 수군과 절영도 앞바다에서 맞붙어 싸웠는데, 우리 전선 5척이 두모포에 표류해 대었고, 7척은 간데없다고 했다. 이 말을 들으니 분함을 이길 수가 없었다.
15일 (중군 이덕필로부터) 수군의 배 20여척이 적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통분할 노릇이다. 통제하고 방어할 방책이 없으니 매우 한스럽다.
16일, 격군이었던 종 세남이 서생포에서 살아 돌아옵니다. 그는 서생포에 표류한 수군 7척이 전멸했다고 전합니다.
우리나라가 믿는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수군이 이와 같으니 다시 바랄 것이 없다. 반복해서 생각할수록 분하여 가슴이 온통 찢어질 것만 같다.
그리고...
18일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기를, 16일 새벽에 수군이 야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및 여러 장수 등 다수가 해를 입어 수군이 대패했다고 하니 들려오는 것마다 통곡이 나오는 것을 이길 수가 없다. 이윽고 원수가 와서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리오 하면서 오전 10시경까지 이야기했으나 뜻을 정할 수가 없었다.
권율이 바란 거야 뻔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걸 어찌 대놓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새벽부터 10시즈음까지, 권율은 같은 말만 반복했나 봅니다. 도저히 말할 수 없었던, 하지만 유일한 희망을 기다리면서요.
나는 내가 연해안 지방으로 가서 듣고 보고 한 뒤에 결정하겠다고 고했다. 원수는 더할나위 없이 기뻐했다.
너무도 담담한 말입니다. 그의 심정에 대한 건 물론이고 잘 싸우겠다는 다짐 같은 것도 보이지 않겠습니다. 그저 자기가 하겠다고 했을 뿐이죠. 그 하나에 너무도 많은 것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그 날로 바다로 떠납니다. 18일부터 삼가, 단성, 진주를 지나 21일에 곤양에 도착하죠. 이윽고 노량에 이르러 패한 수군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21일 거제 현령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10여명의 사람이 와서 통곡하고, 피해 나온 군사들과 백성들이 호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경상 수사(배설)는 도망가서 보이지 않고 우후 이의득이 찾아왔거늘, 패하게 된 상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는 먼저 달아나 뭍으로 올라가고 여러 장수들도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 이런 극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대장의 과오를 말하는 것은 입에 담아 형언할 수 없고, 그 살점을 뜯어먹고 싶다고 했다.
그저 들은 말에 대한 서술 뿐, 그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는 건 그가 눈병을 얻었다는 말 뿐입니다. 23일에는 남해현령 박대남과 조방장 배흥립이 찾아옵니다. 이들은 병에 걸려 칠천량 해전에 참가할 수 없었죠.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25일에는 조방장 김언공이 찾아옵니다. 수군을 증원하기 위한 제석산성의 병력을 이끌고 온 것이었죠. 하지만 이순신은 받을 수 없었습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라도 통제사는 원균이었으니까요.
8월 2일 잠깐 날이 개었다. 홀로 수루에 앉았으니 그리운 회포가 어떠하리오. 비통한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이날 밤에 왕명을 받게 될 조짐이 있는 꿈을 꾸었다.
"임금은 이같이 이르노라. 아아! 나라가 의지하고 든든함으로 삼는 것은 오직 수군 뿐이었노라. 그런데 하늘이 아직도 화 내린 것을 후회하지 않았으니, 적의 칼날이 다시 번뜩여 삼도의 대군이 한번 싸움에 모두 흩어지고 말았도다. 앞으로 바닷가 고을들을 누가 지켜주랴? 한산을 이미 잃었으니 적이 무엇을 두려워하랴?"
"생간건대 경은 일찍이 수군절도사를 제수받은 날로부터 널리 알려졌고 임진년 대첩이 있고 나자 다시 그 이름을 크게 떨쳤도다. 이로써 변방의 군사들은 경을 장성처럼 든든히 믿었노라."
"그런데 근자에 경을 직책에서 물러나게 하고 죄를 진 채 종군하도록 처벌한 것은 역시 사람의 꾀가 두텁지 못한 데서 비롯됐노라. 그래서 오늘날 이렇게 패배의 욕됨에 이르렀으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러서야 그를 다시 등용하겠다는 말, 그는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일단 상중이었어요. 그냥 한 번 빼기만 해도 별 상관 없었죠. 그 때문인지 참 파격적인 내용입니다. 임금이 신하에게 잘못했다고 하고 할 말이 없다고 한 거니까요. 뭐 선조 자신의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래놓고 정 2품까지 올라갔던 품계를 돌려주지도 않습니다. 수군절도사의 원래 품계인 정 3품 뿐이었죠. 임진년의 승리로 수군에는 정 3품이 참 많았는데 말이죠.
3일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서 교서를 가져왔는데, 밀지 내용은 바로 겸상도통제사로 임명한 것이었다. 숙배한 후 받자온 서장을 써서 봉해 올리고 바로 그날로 길을 떠나 곧장 두치 가는 길로 들어섰다.
그에 대한 생각부터 결심까지, 그는 단 한 줄도 할애하지 않습니다. 그저 명령을 받았고, 명령에 따랐다는 말 뿐이었죠. 이 작은 결정이 나라를 구합니다.
그가 간 곳은 전라좌수영 경내였습니다. 5일에는 옥과에, 7일에 순천에, 9일에 낙안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건 최대한 얻습니다. 전라병사 이복남은 다른 곳들은 다 청야했지만 순천부만은 남겨둡니다. 이복남이 도망가지 않고 남원에서 전사한 걸 보면 그를 위해 남겨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가져갈 수 있는만큼 가져가고 나머지는 불태웁니다.
그가 통제사에 재임명된 8월 3일은 일본군이 진주를 함락한 날이었고, 그가 간 곳은 모두 일본군의 진격로, 혹은 점령지였습니다. 일본군을 피해다니긴 한 모양인데, 누가 도운 건지는 몰라도 단 한 번도 일본군을 만나지 않습니다. 이런 운은 곧 조선이 살아날 유일한 가능성이었습니다.
7일에는 선전관 원집을 만납니다. 수군의 상황을 적은 장계 7통을 서울로 보내죠. 13일에는 숨어 있는 수군의 위치를 알게 됐죠. 그런 가운데서 어사 임몽정을 만나러 보성으로 갑니다. 14일에 그를 만났고, 15일에는 선전관 박천봉을 만나죠. 수군을 폐하고 육지로 와도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8월 7일자였으니 일본군의 진격을 조정에서 알고 수군이 나서봤자 방법이 없다는 거라고 판단, 명령을 내린 거겠죠. 여기서 그는 일필휘지로 답장을 보냅니다.
"5~6년간 적은 감히 호남으로 곧바로 쳐들어오지 못 하였습니다. 이는 수군이 그 길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 죽기로 힘을 다 해 싸운다면 오히려 해 볼 만 합니다. 만일 수군을 폐한다면 이것은 적이 가장 기뻐하는 바로써, 호남을 거쳐 한강으로 올라올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비록 전선의 수가 적지만,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 할 것입니다.微臣不死則不敢侮我矣."
그는 역사를 바꿀 이 때를 그저 "즉시 받자왔다는 장계를 작성했다"고 간단히 적습니다.
17일 수사 배설이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장흥 사람이 많은 군량을 훔쳐내어 옮겼으므로 잡아서 곤장을 쳤다. 날이 이미 저물어 그곳에서 머물러 잤다. 배설이 약속을 위반한 것이 아주 한스럽다.
18일 늦은 아침에 회령포에 갔는데 배설은 배멀미를 핑계로 나오지 않았고 다른 여러 장수들은 만나 보았다.
배설은 핑계를 대며 뒤늦게 나옵니다. 그리고 겨우 만나게 되었을 때, 경악할만한 행동을 하죠.
19일 맑음.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교서에 숙배하게 했다. 배설은 예를 받들지 않으니 그 건방진 태도가 매우 경악할 일이다.
그저 배설이 겁먹은 것 같지만, 임금의 글에 절하지 않은 것은 임금을 부정하는 행위였습니다. 배설의 생각이 뭐였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임금을 위해 싸우지 않겠다는 것은 확실했죠.
그동안의 피로 때문이었을까요. 본격적으로 무거운 책임을 지게 돼서였을까요. 그의 몸은 최악으로 치닫습니다.
20일 몸이 몹시 불편하여 식사를 폐하고 신음했다.
21일 새벽 2시경에 곽란이 일어났다. 찬것에 다쳐서 그런 줄로 생각해 소주를 마셔서 치료하려 하다가 인사불성이 되었다. 거의 구하지 못할 지경에 이를 뻔했다. 토하기를 10여차례 하고 밤새도록 앓았다.
22일 곽란으로 인사불성이 되었고 대변도 볼 수가 없었다.
23일 병세가 매우 위태로웠다. 배에 거차하기가 불편했고 실상은 전쟁때가 아니어서 포구 밖에서 잤다.
하지만 그의 몸을 생각할 시간은 없었습니다.
26일 당포의 보자기가 놓아 먹이던 소를 훔쳐 끌고 가면서 적이 왔다고 거짓으로 고했다.
그는 이 둘을 처형하고 효시합니다. 상황은 좀 안정됐지만 배설은 그 말을 듣자마자 달아나려 했죠. 그래도 건들 순 없었습니다. 배설이 지휘하는 게 남은 조선 수군의 주력이었으니까요. 26일에는 신임 전라 우수사가 도착합니다. 김억추였죠.
28일 새벽 6시경에 적선 8척이 뜻밖에 돌입하여 어려 척의 배들이 겁을 잔뜩 집어먹고 물러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깃발을 휘두르며 추격하라고 명하니, 여러 배들이 뒤쫓아 갈두에 이르자 적선이 멀리 도망하므로 끝까지 쫓지 않았다. 뒤따르던 배는 50여 척이었다고 한다.
남원을 공략한 일본 수군은 이제 마지막 남은 조선 수군을 집어삼키려 옵니다. 전라도의 바다를 뚫고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였죠. 장수들이 겁을 먹어서 그 자신이 나서야 했습니다.
30일 늦게 배설이 적이 크게 몰려올것을 우려하여 도망가려 했으나 관하의 어려 장수들이 찾기도 하고 나도 그 사정을 알았지만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계책이 아니므로 몰래 참고 있는데, 배설은 그의 종으로 하여금 소지(所志)를 바치게 하고 병세가 매우 위중하여 조리하려 한다고 했다. 나는 육지로 올라가서 조리하라고 처리하여 보냈다. 배설은 우수영에서 육지로 올라갔다.
13척밖에 없는 조선 수군의 1인자와 2인자, 싸우려는 자와 도망치려는 자, 이 때 둘 사이에는 이미 얘기가 끝난 모양입니다. 직접 얘기한 것이든, 암묵적인 것이든간에요.
9월 2일 맑음. 배설이 도망갔다.
이후 배설은 고향에서 무언가를 꾸미려다 붙잡혀 처형당합니다. 그는 배설의 도주에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습니다. 예상한, 혹은 알고 있던 것이겠죠.
7일 임중형이 고하기를, 적선 55척 중 13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이르렀는데 그 뜻이 반드시 우리 수군을 노리는데 있는 것 같다고 하므로 여러 장수들에게 전령을 내려 두번 세번 엄중하게 경계하게 했다. 오후 4시경에 적선 12척이 과연 이르거늘 우리 배들이 닻을 들고 바다로 나와 추격하니 적들이 뱃머리르 돌려 달아나는 것이었다. 벽파진으로 돌아와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으고 약속하기를, 오늘 밤에 반드시 적의 기습이 있을 터이니 여러 장수들은 각각 미리 알아서 방비하되 조금이라도 명령에 위배되는 점이 있다면 군법대로 시행하겠다고 했다. 밤 10시경에 적이 과연 야습을 단행해 포환을 많이 쏘아대며 덤볐다. 내가 탄 배가 앞장을 서서 지자포를 쏘아대니 산천이 진동했다. 적도들은 침범할 수 없음을 알고 네 번이나 나왔다 물러갔다 하면서 화포만 쏠 따름이었다. 새벽 1시가 가까워져서야 아주 물러갔다.
칠천량 해전은 일본군의 기습으로 조선 수군이 붕괴된 전투입니다. 단 13척밖에 없었음에도 일본군은 같은 방식을 노렸죠. 하지만 이번엔 상대가 달랐습니다. 결국 일본군은 결전을 시도합니다.
8일 여러 장수들을 불러들여 대책을 의논했다. 우수사 김억추는 기껏해야 일개 만호로나 적합할까 대장의 직임을 준다는 것은 불가한데, 좌의정 김응남이 서로 정다운 사이라고 해서 억지로 제수해 보냈으니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9일에는 적선 2척이 정찰해 옵니다. 곧바로 영등포 만호 조계종이 추격해서 쫓아냈죠.
11일 흐리고 비가 올 기미가 있었다. 홀로 배 위에 앉았으니 그리운 회포로 눈물을 흘렸다. 천지간에 어찌 나 같은 사람이 있으리오. 아들 회가 내 심정을 알고 몹시 언짢아했다.
역사 속에 이런 현실에 처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그런 기적을 만들어 낸 이는 또 얼마나 있었을까요.
13일 맑았으나 크게 불어서 배가 안정되지 못했다. 꿈이 범상하지 않았다. 임진년에 크게 승전할 때의 꿈과 대략 같았으니 이 몽조를 알지 못하겠다.
14일 정찰병이 와서 고하기를 적선 50여척이 벌써 어란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또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온 김중걸이 전한 말의 내용에는, (중략) 각처의 배를 불러모아 수군을 모조리 죽인 뒤 바로 경강으로 가자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 말은 비록 다 믿을 수는 없으나 또 그럴 리도 없지 않으므로 즉시 전령선을 보내 피난민들을 급히 뭍으로 올라가게 했다.
그리고 15일. 그는 우수영에 도착합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습니다.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에 진을 옮겼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아 약속하기를, 병법에는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고, 또 한 사람이 길을 지키면 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으니必死則生 必生則死. 一夫當逕 足懼千夫 지금 우리를 두고 이름이라."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영을 어긴다면 즉각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일망정 요납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두번 세번 엄중하게 약속했다. 이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어떠한 신인이 지시하면서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크게 이기고, 이와 같이 하면 지게 된다는 꿈이었다.
조선의, 수군의, 그의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하삼도는 초토화 돼 갔고 한양을 방어할 것은 명군 수천이었죠. 일본군은 땅으로만 오지 않았습니다. 바다로 수많은 배를 끌고 한양으로 갈 계획이었죠.
그에 맞설 조선 수군은 단 13척이었습니다. 이것도 칠천량의 패전으로 적을 두려워했고, 패한 장수들을 처형하겠다는 조정의 명령을 두려워했던 이들이었습니다. 장수들부터 병사들, 격군들까지, 승리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겁니다. 그저 일본군이 툭 치면 이번에도 달아날 것이었죠.
그런 조선 수군의 대장이자 유일한 구심점은 몸과 마음의 상처로 지칠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고문과 과로의 후유증은 그의 생명을 갉아먹었습니다. 어머니께 불효했다는 죄책감과 슬픔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죠. 그 개인에게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겁니다. 그가 자결한다 한들 누가 그를 욕하겠습니까.
도망쳐도 그를 비겁하다 할 수 있는 이는 없었습니다. 자결한다 해도 마찬가지였죠. 그냥 무식하게 일본군에게 덤벼도 됐습니다. 죽기 위해서라면요. 설령 조선이 일본에 점령된다 해도 훌륭한 장수로 이름을 남겼을 겁니다. 일본사에서 말이죠. 그 자신을 위해서라면 어떤 선택지든 상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죠. 죽어서도 안 됐고, 져서도 안 됐습니다. 이겨야 했습니다. 나라를, 백성들을 위해서 말이죠.
1597년 음력 9월 16일
"이른 아침에 별진군(정찰병)이 보고하기를, 적선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명량을 거쳐 바로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을 향하여 들어온다고 했다. 즉시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들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척이 우리의 배를 에워쌌다."
그렇게 다짐했음에도 부하들은 물러납니다. 김억추는 아예 저 멀리 도망갔죠. 적과 싸우는 건 그가 이끄는 배 단 한 척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명령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저 적과 싸우라는 것.
아마 그 뿐이었을 겁니다. 아직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이는요.
억울하게 옥에 갇힌 후, 명량까지 참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모든 게 최악이었던 상황에서 기적을 만들어내죠.
"이것은 실로 천행이었다.此實天幸 "
무엇을 빌 때나,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을 때나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봅니다. 네, 정말 하늘에서 결정한 게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그는 조선에서 그 누구보다 하늘에 가까웠던 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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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와 새마을운동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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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나와 있습니다. 새마을 운동 관련된 걸 모두 넣은 거죠. 세계기록유산은 인류 전체의 재산이고 후세에 남겨야 될 것들을 선택하는 거라서 시대는 딱히 상관 없습니다. 잡지나 비디오도 상관없구요.
이전에 5.18 민주화 운동 기록물도 등재됐구요
예전에 대학교때 어떤 강사님이 대한민국에서 성공하는 5가지 방법이라는걸 말씀하셨었습니다.
5. 노력 - 노력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있다.
4. 머리 - 노력을 아무리 많이 해도 머리 좋은 사람이 더 성공하기 쉽다.
3. 인맥 -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인맥이 좋은 사람이 더 성공하기 쉽다.
2. 운 - 인맥이 아무리 좋은 사람도 운빨 있는 사람은 당할 수가 없다.
1. 천명 - 한반도 역사를 보면 운이 아무리 좋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가끔 나타난다. 그건 천명이다.
좋은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나중에 써주실거라고 믿지만 이순신 장군님의 전사 상황에 대해서 궁금증이 있는데요
선조 등의 계속된 압박에 일부러 기함을 돌출시켜 조총탄을 맞으려 했다는 자결설과 단순히 마지막 전투라 발악하는 왜군에게 총탄을 맞으신 전사설 중
현재는 어떤 설이 더 유력한가요?
그 시절로 돌아가서 보고 왔으면 싶을정도로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