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연재게시판에 왜구가 쳐들어 온 이야기를 끝내고 조선 함선이 어떻게 발전했는가에 대해
글을 쓴다 해놓고 여지것 쓰지 못했네요.
이제야 그에대해 써보겠습니다.
시리즈물이 될 가능성이 높아보이네요.
평소와 다르게 재미만을 위한 글은 아닙니다. 그래도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하네요.
-----------------------------------------------------------------
바다는 어느 나라나 중요하지만, 한반도 국가는 특히나 중요했습니다.
세금이나 공물등을 수도로 올리기 위해서 해로를 이용하는 것보다 편한 일이 없기 때문이었죠.
아직도 이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많지만,
임진왜란에서 왜군이 북진에 결국 실패했던 이유는 조선 수군에 의해 해로가 막혀 보급이 불가능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시가 아닌 평시에도 해로의 사용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는데,
가장 대표적 이유가 왜구의 출몰 때문이었습니다.
태종 1년, 박돈지의 상소문에서 그 내용이 자세히 나타납니다.
"삼한 시절부터 공물과 세금을 위해 큰 물건을 실어 나를 때는 언제나 바닷길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려말 왜구가 성행하자 해로 대신 육로를 이용하게 하였는데,
사람과 짐승이 물건을 지고 싣는 데 지쳐 운반하다 죽는 폐단이 계속하여 발생하였습니다..
조선 개국 이후 왜구가 줄어들어 해로를 다시 이용하게 하자 물건이 훨씬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근래 태풍으로 인해 해로 이용이 힘들어 다시 육로를 이용하게 하였으나,
이제 다시 수로를 이용하여 물건을 나르게 하옵소서."
(실록 기사를 보기 좋게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앞으로 거의 모든 실록 기사 인용은 최대한 보기 좋게 현대어로 수정할 것입니다.)
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수로의 용이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컸다.
그리고 그 수로의 이용을 방해하는 두 요소는 왜구라는 인위적 요인과 태풍이라는 자연적 요인이었다.
자연적 요인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인위적 요인은 할 수 있는만큼 최선을 다해 막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에 필요한 것이 바로 수군이었고, 수군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병선이었습니다.
자.. 이렇게 수로를 사용하여 물건을 옮기게 하였는데,
바로 조선 남쪽 바다에선 왜구가 성행하기 시작합니다.
태종 2년엔 부산포에 왜구가 쳐들어와 병사 10명이 죽고,
태종 3년 10월엔 감북포에 침입하여 병선 3척을 불태우고 병사 12명을 죽이고,
같은 달 두모포에선 왜구가 침입하여 사수 2명을 사로잡고 병선 5척을 불태웁니다.
같은 해 12월엔 전라도에 침입하여 만호 임원룡을 잡아가고 병선 4척을 불태운데다 86명의 군인이 죽고,
같은 달에 또 전함 5척을 빼앗기기까지 합니다.
고려후기 왜구가 내륙에서 성행하던 것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충분히 개판이 따로 없었죠.
물론 조선이라고 당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왜구를 격파하여 적선을 침몰 시키고 수십명을 죽이는 전과를 종종 올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침략당한 숫자에 비해 격파한 숫자가 현저히 적으니 왜구의 숫자는 쉬이 줄어들 줄 몰랐죠.
왜구 격퇴에 미진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체계적이지 못한 수군 제도.
왜적은 어디에서 올지 짐작할 수도 없고 만약 한 포인트에 여러 왜구 수십척이 한 번에 침입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각 포구마다 연합작전을 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빠른 통신을 이용하여 상황을 주고받고 각 포구의 군함들을 빠르게 운집하는 것이 필요했고,
함선의 적절한 배치로 최대한 효율을 높이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두 번째는 함선의 문제입니다.
당시 조선의 주력 함선은 맹선이라하는 대형 선박이었고 그 크기가 왜선보다 크다보니 함선의 숫자는 적고 속도는 느렸습니다.
왜구의 빠른 선박 1~20척의 배가 쳐들어오면 몇몇 포구에선 그것을 격퇴할 함선의 숫자가 부족하고,
어떤 포구에선 격퇴할 숫자가 되더라도 속도에 미치지 못해 적이 도망치면 따라가질 못하게 됩니다.
특히 이 속도가 무척이나 중요했는데요.
조선함선과 조선으로 귀화한 왜인이 만든 함선을 비교하여 속력을 측정해본 결과,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 3~40보 정도를 뒤지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몇 백보나 뒤질 만큼 속도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여줬습니다.
그렇기에 태종은 쾌선이라하여 작고 속도가 빠른 배를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태종의 수군 제도 개편과 함선의 생산으로 인해 태종 8년이 넘어가면 왜구가 나름 잠잠해집니다.
이러다보니 조정에서 느리고 둔하기만한 대형선보다는 작지만 빠른 쾌선을 선호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건 당연했겠지요.
여하튼 태종의 이런 노력은 왜국의 숫자를 현저하게 줄어들 게 하는 성과를 올립니다.
그러나 이런 평화도 잠시일 뿐 조선 조정을 뒤집어 놓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세종 1년 5월 5일 충청도에 왜선 50여척이 침략한 사건입니다.
이정도 규모는 태종 이후 유례가 없는 규모였고,
이를 막는데 실패한 충청좌도 도만호인 김성일은 참형까지 당하게 되었죠.
이 때문에 갓 왕이 된 세종은 아예 수군을 폐지해버리자는 것을 대신들과 의논합니다.
세종은,
"각도와 각 포구에 비록 병선이 있으나, 그 수가 많지 않고 방어가 허술하니,
변을 당하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오히려 침략만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전함을 폐지하고 육지에서 단단히 방어하는 게 어떻겠는가." 라고 의견을 묻습니다.
이제 막 왕이 된 풋내기 왕이 내놓을만한 주장이었습니다.
당연히 대신들은 안 된다는 의견을 내놓지만, 세종은 수군의 운용에 회의적인 입장이었습니다.
당시 상왕으로 있었던 태종은 대신들을 불러다 좀 더 현실적인 대책을 세웁니다.
바로 대마도 정벌이었죠.
태종은 미기적거리지 않고 단숨에 정벌을 결정합니다.
충청,전라,경상 3도에서 200여척의 배를 모으고,
배를 타는 것에 익숙하면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양반부터 백정까지 모두 모아 정벌을 감행하지요.
5월 5일에 왜구가 침략했고, 5월 14일에 대마도 정벌을 결정한 후,
6월 19일 모든 준비를 마치고 거제도에서 출진했으니 얼마나 빠른 결정과 실행인지 짐작이 가시겠죠.
대마도 정벌에 대해서 좀 아시는 분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엄청난 성과는 아니고 실책으로 인해 많은 사망자를 내기도 한 것이라는 걸 아실 겁니다.
7월 10일 대마도에서 180명이 전사하는데다 태풍에 배 7~8척이 소실됐다는 소식까지 들려왔죠.
이에 태종은 7월 말 각도의 병선을 수리하여 10월쯤 재침공하기로 계획까지 합니다.
완전히 끝장을 내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9월 대마도에선 항복의 서신을 보내고 조정에선 이걸 받아들일지 아닐지 의논을 하죠.
태종은 이들의 항복이 거짓이라 느끼고 완전 섬멸을 주장한 반면,
허조는 그래도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뉘앙스를 내세웁니다.
후에 태종의 행동을 보면 병조에 명하여 2차 정벌을 구체화하며 준비하는 동시에
조말생에게 명하여 항복 권고를 구체적으로 받아올 수 있도록 준비하게 합니다.
항복을 받아들이든 재정벌을 하든 미리 준비하여 차질이 없게 하려고 한 모습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재정벌로 인해 대마도로 출정하고 싶어하지 않아했고,
대마도측에서도 대마도가 경상도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고 신하의 예를 보이는데다,
문제가 됐던 해적을 처분하기 위한 준비까지 마쳤으니 조선에서 관원을 보내 처리해달라는
완전 항복을 청했기에 태종은 이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재침공을 계획하기도 하고,
대마도에서 사신이 와도 글이 공손하지 못하다 하며 조공으로 올리는 예물도 받지 않는 등
대마도 길들이기에 나섭니다.
모든 왜적이 대마도에서 오는 게 아니었기에 왜구가 완전히 끊긴 건 아니었으나,
과거처럼 수십척의 배가 와 약탈을 하거나 하는 일은 한동안 발생하지 않게 됩니다.
비록 전투 자체에선 큰 피해가 있었으나,
정벌의 성과 자체는 굉장히 성공적이었습니다.
대규모의 왜국이 침략하지 않게 되자 조선의 병선 체계도 조금씩 변화합니다.
크기만하고 느린 대형선보다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소형선을 선호하게 되지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비거도선이었습니다.
평시에는 고기를 잡을 때 쓰고, 전시에는 군사들의 전함이 되는 것이었죠.
하지만 이 비거도선은 병선이라기보단 고기잡이 나룻배에 가까워서
무기도 제대로 싣지 못하는 그런 배였습니다.
그래서 전투에 최적화된 검선 한 척에 비거도선 2~3척 정도를
한 소대처럼 만들어 운용케 하여, 왜적이 나타나면 일단 비거도선으로 빠르게 추격하여 붙잡은 후,
뒤따라오는 검선이 적을 섬멸하는 식의 전술을 사용합니다.
이때부터 조선의 선박 체계는 대형선이나 맹선, 검선에는 반드시 비거도선이 따라붙어
보좌하는 식의 운영이 성행하게 됩니다.
막 즉위했을 때 전함을 없애자는 소리를 한 세종도
12년엔 중국 배의 제도를 채용하여 병선을 제조할 것을 추진했고,
16년에 가서는 동자갑선, 상쾌선, 왕자갑선 등의 새로운 병선을 개발하기에 이릅니다.
또 유구국(지금의 오키나와) 출신의 선장에게 부탁하여 그 지방에서 사용하는 배를 제조하여
조선 수군에 도입하려는 등의 구체적인 조선 전함의 발전을 꾀하지요.
조선 초기 병선의 발전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대형선부터 소형선이 복합적으로 쓰였고 여전히 조선의 주력 선박은 대형선이었으나,
소수의 빠른 왜구를 막는데에는 조선 역시 작고 빠른 배가 용이했고,
그 때문에 새로 제작되는 배의 대부분은 소형선이 될 수 밖에 없었죠.
조정에서도 새로운 배를 만들 때마다 그 속도를 측정하여,
얼마나 빠른지 시험하는 것에 가장 촛점을 맞추었습니다.
대마도 정벌 이후로 왜구는 현저히 줄어들고
그나마 한두척의 규모로 오는 왜구도 어렵지 않게 소탕하였습니다.
나중에는 굳이 왜적을 추격하다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는 것보다
그냥 지키기만 하고 감히 접근하지 못하게만 하는 쪽으로 방어정책을 구성할 정도로
조선의 왜구로부터의 평화는 꽤나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이에 조선 병선의 체계도 딱히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오랫동안 이어집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한 함선의 모습입니다.
검선의 모습 (추정)
비거도선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mineall/70103139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