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파는 자가 자초(子初)이며 형주 영릉군 증양현 출신입니다. 영릉이면 흔히 형남이라고 부르는 형주 남부 일대에서도 남쪽으로 치우쳐진 곳이라 당시 기준으로는 꽤 촌구석인 셈이죠. 그런데도 유파는 젊어서부터 그 명성이 대단하여 중원에까지 알려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유표가 형주의 주인일 때 몇 차례나 거듭 초빙하여 벼슬을 주려 했습니다만 유파는 그때마다 거절합니다.
이후 조조가 형주를 공격하고 유비가 남쪽으로 달아났을 때, 유파는 뜻밖에도 자기 발로 조조를 찾아갔습니다. 자신이 바라던 주군이 바로 조조였던 것일까요. 조조는 그런 유파를 자신의 연(掾), 즉 부서장 격으로 임명합니다.
그러나 조조는 적벽에서 대패하여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유파를 데려가는 대신 고향인 영릉으로 파견하지요. 영릉과 장사, 계양 등 형남의 세 군이 자신에게 귀순하도록 설득하라는 지시와 함께 말입니다.
그렇게 무척이나 어려운 임무를 맡긴 걸 보면 유파의 명성이 형남 일대에서 어지간히도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당사자로서는 그야말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파는 즉시 반발했습니다. 유비가 차지하고 있는 형남을 대체 무슨 수로 설득하겠느냐고 항변했지요. 더군다나 병사 한 명도 없이 말입니다. 하지만 조조는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유파는 어쩔 수 없이 일단 고향인 영릉으로 왔습니다. 하지만 이미 유비의 세력 하에 편입된 형남에서 유파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유비는 이미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군사중랑장{軍師中郞將) 제갈량을 임증으로 보내 영릉/장사/계양 세 군을 관할하도록 한 상황이었지요. 형남은 명실상부하게 유비의 영토였습니다. 명령을 이행할 방법을 찾을 길이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궁지에 몰린 유파는 결국 성을 바꾸고 멀리 남쪽 교주로 도망치기로 결심합니다.
이때 평소부터 유파의 명성을 들어왔던 제갈량이 유파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차라리 유비의 부하가 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설득이었습니다. 그러나 유파는 이렇게 말하며 거절합니다.
“명을 받아 왔지만 이루지 못하였으니 떠나감이 마땅하오. (受命而來, 不成當還, 此其宜也)”
그렇게 길을 떠난 유파는 기나긴 여정 끝에 간신히 교주에 도착합니다만, 하필 교주의 실력자 사섭과 사이가 틀어지는 바람에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유랑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명확한 사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유파의 성격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 봅니다. 여하튼 기껏 형주에서 교주까지 갔던 유파는 다시 방향을 틀어 이번에는 익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다행히도 익주목 유장은 그를 후대해 주었습니다. 유파도 오랜만에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런데 얼마 후 갑자기 유장이 유비를 불러들여 장로를 공격하겠다고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번에도 역시 어이가 없어진 유파는 스스로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격이라며 몇 번이나 거듭해서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예전과 마찬가지로 주군의 고집을 꺾지 못했습니다. 유파는 머리를 싸매고 아예 집에 드러누워 버렸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유파의 예견대로 유비는 유장을 공격했습니다. 마침내 성도가 함락되자 유파는 유비에게 지난날의 일을 사죄합니다. 유비는 그를 질책하지 않았지요. 과거 두 차례나 유비의 반대편에 섰던 유파는 이로써 그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사 삼국지 본전과, 배송지의 주석으로 인용된 영릉선현전의 기록에는 다소 상충되는 면이 있습니다. 정사의 묘사만으로 보면 유비는 자신을 적대시했던 유파를 꽤 고깝게 보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갈량이 유파를 몹시 존경하면서 몇 차례나 거듭 칭찬했기에 마음을 바꾸어 그에게 중책을 맡기지요. 반면 영릉선현전의 묘사를 보면 유비는 예전부터 유파를 무척이나 원했으며, 심지어 성도에 유파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절대로 그를 해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유파를 얻게 되자 무척이나 기뻐했다고 합니다. 과연 어느 쪽이 맞는 이야기일까요?
저는 본전의 기록이 더 사실에 가깝다고 봅니다. 생각해 보면 유비는 일평생에 걸쳐 헛된 명성만 지닌 이를 경멸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쓸 때는 그 사람의 능력을 최우선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젊어서부터 명성을 떨쳤던 유파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비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유파는 명성에 걸맞은 재주를 지닌 유능한 인재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익주의 주인이 된 유비는 재정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는데, 나라는 국고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고 백성들은 물가의 상승으로 고통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유파는 단위가 큰 돈을 새로 주조하여 유통하고 동시에 관에서 관리하는 시장의 물가를 고정시키게 함으로써 이런 재정적인 문제들을 단숨에 해결합니다. 그래서 단지 몇 개월 만에 부고가 충실해졌다고 하지요. 국가적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겁니다.
또 유파는 제갈량, 이엄, 법정, 이적과 함께 협력하여 촉한의 법률인 촉과(蜀科)를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라의 중요한 문서를 모두 직접 짓는 등 글 솜씨도 무척이나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유파에게는 뛰어난 능력으로도 덮을 수 없는 뚜렷한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좋게 말해서 주관이 뚜렷한 성격이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괴팍하고 제멋대로였습니다. 또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특히 무인(武人)들과 사귀는 걸 내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대에 손꼽히는 맹장이자 주군 유비의 왼팔과도 같은 장비가 방문했는데도 모른 척 외면하며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지요.
물론 장비는 그러한 유파의 처사에 무척이나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제갈량이 나서서 사태를 수습하려 합니다. 그는 유파를 찾아가 말하지요.
“장익덕이 비록 무인이지만 그대를 무척 경모하고 있습니다. 주공께서 지금 문무를 결집시켜 바야흐로 큰일을 이루고자 하시는데, 그대는 고아한 천성을 지니고 있지만 지나치게 굽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상하게 표현했지만 제발 그놈의 성질머리 좀 죽이고 유하게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유파는 그런 지적을 받고도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렇게 뻗대는 것이었습니다.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마땅히 사해의 영웅들과 사귀어야 합니다. 어찌 무장 따위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겠습니까?”
아무 잘못 없이 무시당한 장비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아니겠습니까. 유비 역시도 그 말을 듣고는 무척 화가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는데 자초는 오히려 천하를 혼란스럽게 하는군. 조조에게로 돌아가기라도 할 작정인가? 어째서 세상에 혼자만 있는 것처럼 멋대로 행동하는 건가? 자초의 재주와 지혜는 탁월하지만 나 같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런 인물을 제대로 쓸 수 없을 것이다.”
짜증을 내면서도 재주와 지혜가 있는 사람(才智絕人)이라고 말하는 걸 보아하니 과연 능력 하나만큼은 인정해야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훗날 유파는 양의와 충돌하는데, 두 사람 모두 유비가 직접 재능을 인정했을 정도로 유능하면서 동시에 성질머리가 더럽기로 둘째가라면 서운할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비는 양의를 좌천시키면서까지 유파의 편을 들어줍니다. 그만큼 유파를 아낀 것이겠지요.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자 유파는 상서(尙書)가 됩니다. 이후 법정을 대신하여 상서령(尙書令)에 임명됨으로써 상당한 권한과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상서령은 행정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이니만큼 실권이 대단했지요. 하지만 유파는 본디 스스로 원해서 유비를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오해를 막고자 청렴하게 살았으며 다른 이들과 사적으로 교류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비가 황위에 오른 이듬해인 222년에 유파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촉한으로서는 안타까운 죽음이었지요.
유파는 참으로 특이한 인물입니다. 스스로 조조를 찾아가 벼슬을 구하면서 유비와 적대하는 입장에 섰고,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유비의 휘하에 들었으면서도 막상 그다지 내켜하지 않았습니다. 괴팍한 성격 때문에 다른 이들과 화합하지 못하여 유비의 분노를 사기도 했고, 심지어 유비의 한중왕 즉위에 반대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리 잘 봐 주려 해도 유비의 충신이라고는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면서도 유파는 유비 휘하에서 자신의 뛰어난 재주를 발휘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인사, 경제, 법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면서 그야말로 혁혁한 공을 세웠지요. 그 결과 상서령이라는 중임까지 맡았으니, 상사와 사적으로는 마음이 맞지 않아 종종 충돌하면서도 공적인 업무만큼은 확실하게 해냈다고 인정받은 셈입니다.
그리고 유비 또한 걸물임이 틀림없습니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싫어하는 데다 성격마저 형편없는 인물을 과감하게 중용하고, 또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하며, 그로써 거둔 성과를 인정하여 확실하게 포상하는 건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행동입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면 유비는 훌륭한 인재를 얻었지만, 유파 또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게 해 줄 진정한 주군을 만난 셈입니다. 그야말로 환상의 짝꿍이라고나 할까요. 과연 신하에 어울리는 주군이면서 또한 그 주군에 어울리는 신하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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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선현전 자체가 우리 동네 위인전 같은 느낌이니만큼 아무래도 허풍이나 지어낸 이야기가 많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말씀하신 대로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죄다 출처가 영릉선현전이기도 하지요. 배송지 역시 영릉선현전을 인용하면서도 때로는 이거 말이 안 되는 것 같다고 지적하기도 했고요.
그러나 본전의 기록만으로 보더라도 최소한 유파가 유비 대신 조조를 선택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비가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는 것, 그리고 제갈량이 그를 무척이나 존중했다는 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화에 능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서화란건 서예 솜씨/그림 잘그리는 솜씨를 의미하지요.
이른바 서책을 읽고 경세를 논하는 그런 종류의 인텔리랑은 다른 쪽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보니까 춘추나 손자병법을 통달했다는데 정사엔 그런 내용 안 나오니 믿을 순 없고...
게다가 부하들을 쥐잡듯 패고 댕긴 것도 엄연히 정사에 나오는 내용이라 품위랑은 거리가 멀었다고 봐야 될듯 싶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