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최근들어 니체에 삘이 꽂혀서 관련 책들을 읽고 있습니다.
철알못인 입장으로서 봐도 니체의 경구들이 너무 인상적이고 마음에 와닿는 점들이 많더라구요.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는데 책을 보다보니까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차츰 이해가 가면서 재밌어졌습니다.
특히 유물론적인 저의 입장에서 이 사람의 사상이 무언가 울컥하게 만드는 감동스러운 점들이 분명 있는 것 같습니다.
피지알에 생각보다 철학 소개하는 글들이 없는데 제 짧은 식견으로도 감상이나 해석을 남기고 싶어서 적습니다.
걍 재미로 봐주세요.
니체의 철학
실존주의의 원형,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 언어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사실상 모든 현대철학의 근간을 이루게 해준 그의 사상들을 살펴보시죠.
니체가 서양 철학사에서 특별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제 생각에는 기본부터 비뚤어진 사람이었던 게 큰 이유같습니다.
기존 철학자들은 세상을 바라볼 때 근본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대상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고 다른 사람들도 그 대상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다면 그 대상 안에는 아름다움이라는 본질적인 무엇인가의 속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겠죠?
기존 철학자들은 그 아름다움의 속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탐구를 하였고 그것이 현실에 어떻게 반영이 되었는지 이론을 짰습니다..
그래서 황금비 이 지랄을(니체 입장에서)을 떨어댄 것이죠.
그리고 그 최종 완성물로서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원형의 세상에 완전한 아름다움이 존재하고 그것이 현실세계에 반영된다고 여기었습니다.
이 사상이 기독교 신앙과 결합되고 기독교가 서구 사회를 지배하면서 전 근대 이전의 모든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변주에 그치지 않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 니체선생은 질문을 약간 비틀어 우리가 왜 그런 속성들을 아름답다고 인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우리가 당연시하게 여겨졌던 것들, 그것들이 언제부터 당연시하게 되었는가.
그러기 위해서 고문헌들을 뒤져서 역사적으로 뿌리까지 추척하는 방법론을 계보학이라고 합니다.
니체는 이 계보학을 통해 여러가지 철학사에서 혁명적인 사상들을 전개하나가기 시작합니다.
권력에의 의지
니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사상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 개념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권력에의 의지란 주체적인 나의 의지를 외부로 확장시키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권력에의 의지는 모든 사람에게 존재합니다.
니체에게 있어서 삶은 권력에의 의지 그 자체입니다.
번식에 대한 욕구. 인정받고 싶은 욕구. 생애의 의지 모든 욕구들은 권력의지로 환원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친구들과 당구장에 가 당구를 치다가 배가 출출한다고 느낍니다.
어떤 한 친구가 중국집에다 짜장면을 시켜 다 같이 먹자고 합니다. 다른 친구들은 다 동의합니다.
당신은 사실 짬뽕이 더 땡깁니다. 하지만 괜히 분위기를 깨서 모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네요.
그래서 참고 짜장면을 시킵니다. 짬뽕의 의지가 타인의 의지에 의해 억압되었네요.
이런 사소한 일들에게까지 권력에의 의지는 모두에게 존재합니다.
그 의지는 한 사람의 내면 안에서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혼자 집에 있다 배가 출출해 중국집에 전화를 겁니다. 당신의 내면에는 두가지 의지가 떠오릅니다.
짜장면을 시킬지. 짬뽕을 시킬지. 짜장면도 먹고 싶고 짬뽕도 먹고 싶습니다.
몇 분 간 내면에서 의지가 치열히 싸우다 당신은 짜장면을 선택합니다.
이번에도 짬뽕의 권력의지가 억압당하였네요.
모든 사람에게는 권력에의 의지가 존재합니다. 그냥 존재하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일종의 디펄트 값이라고 말할 수 있죠.
또 다른 예를 한 번 들어보죠.
당신이 대형마트에 가서 아주 군침도는 핫도그를 발견합니다.
당장 가서 먹고 싶지만 아쉽게도 당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돈이 텅 비어있습니다.
당신은 몰래 핫도그를 숨겨 집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만든 법이라는 제도는 당신을 억제합니다.
시스템도 권력의지가 작동하기 때문에 외부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시키고 싶어합니다.
당신은 법을 어기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핫도그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심지어 사람이 아니어도 만들어지면 일단 권력의지는 작동합니다.
권력의지는 모든 식물, 동물을 포함한 자연, 심지어 물질에 기반을 두지 않는 관념이나 체계에도 작동합니다.
여기에는 옳고 그름도 없고 단순히 물리적인 충동만이 있을 따름이죠.
니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말을 들어라, 더없이 지혜로운 자들이여! 내가 생명 자체의 심장부 속으로 그리고 그 심장의 뿌리에까지 기어들었는지를 진지하게 눈여겨보라!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권력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심지어 누군가를 모시고 있는 자의 의지에서조차 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했다."
권력에의 의지는 너무나 본질적이어서 우리가 아는 어떠한 가치체계들보다 선행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이 권력의지로 환원하여 볼 수 있습니다.
니체의 사상. 니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인 이 개념을 이해하면 니체의 도덕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자연스럽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니체의 도덕관에 대해서 알아보져.
니체의 도덕관을 알아보기 이전에 기존에 서구 사회에서 존재했던 도덕관이라는 게 어떠한 것이었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좋음'과 '나쁨'이 '선'과 '악'과는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이클 샵에서 비싸게 산 튼튼한 자전거는 좋은 거지만 동네 친구 집에서 빌린 허름한 자전거는 나쁜 것입니다.
하지만 튼튼한 자전거가 선한 것이고 낡은 자전거는 악한 것 이라는 것에는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만 봐도 '선악' 은 조금 더 고차원적인 개념에 속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선악 보다 좋음과 나쁨이 더 원시적인 속성이라는 것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선은 영어로 goodness 고 악은 evil 입니다.
evil은 악마로도 쓰입니다.
영어 뿐만 아니라 대부분 서구 사회에 모든 선 악의 기준점이 되는 단어의 어원은 기독교적 개념에서 유래됩니다.
그 말은 서양 도덕관 자체가 기독교적 전통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는 뜻이 되겠죠?
한마디로 신이 나쁘다고 말한 것이 악이 되는 것, 좋다고 하는 것이 선입니다.
또 알 수 있는 사실로는 좋음과 나쁨이 선과 악이랑 그렇게 철저히 분리되지 않고 혼용되면서 쓰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흥미로운 견해는 서구 사회에서 신의 부정은 도덕개념 자체의 부정 의미로도 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니체는 선악이 탄생하기 이전 원시적인 속성(좋음과 나쁨)만이 존재했던 그 시대를 여러 고문헌을 통해서 추적해나갑니다.
그리스도교가 탄생하기 이전, 그리스로마 시대를 말이죠.
그리스 로마 시대, 거기서는 권력의지에 대해서 솔직하게 표출할 수 있는 시대라고 니체는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권력의지를 거림낌없이 표출하였고 당연하게도 각 사람마다 능력치는 다르기때문에 누군가의 권력의지는 억압당하게 됩니다. 세상은 주인과 노예들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주인은 강력한 자들로서 자신의 권력의지를 당당히 표출합니다.
진취성. 능동성. 경쟁심 이 모든 것들이 주인의 좋음을 나타나는 단어이죠.
이 모든 것들의 반대는 노예의 나쁨입니다.
이들은 약한 존재들로서 자신의 의지를 외부로 표출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느껴도 감히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죠.
이들의 의지가 주체적으로 외부로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하면 바로 채찍으로 귓뺨맹이가 날라가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권력의지가 사라졌을까요?
앞서 니체의 글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니체는 이 권력의지가 너무나 근본적이고 강력하여 절대 사라질 수 없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권력의지는 비뚤어진 방식으로 살길을 모색합니다.
약자들이 모여서 만든 권력의지의 표현방식이 선악이란 개념의 시작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도덕이란 개념의 탄생 이면에는 노예들의 원한이 얽혀있다는 뜻입니다.
순종, 헌신, 희생, 용서, 양심은 당시 억압받던 유대교(기독교의 기원)의 주요테마였으며 이들은 그들의 권력의지를 외부로 배출하지 못하자 안으로 방향을 돌리는 잔인한 본능을 발현해 이러한 테마들을 완성해나갔습니다.
약자들이 모이면 어떻게 되죠? 강자가 됩니다.
곧 약자들의 원한에 의한 연대를 통해 강자가 된 이 비뚤어진 권력의지는 도덕이란 이름의 철퇴를 휘둘러 다른 권력의지를 억압하기 시작합니다. 그 전까지 강자들은 적에게 존경을 표하였지만 이 시점부터 약자의 도덕체계에서 적은 악이라는 이름으로서 반드시 절멸해버려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합니다.
"노예들은 자신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대상을 찾아 비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들과 대립관계에 있는 것을 우선 '악'으로 규정하고, 반대편에 있는 자신들을 '선'이라고 부른다. 귀족들이 '좋음'과 '나쁨'으로 불렀던 것을 노예들은 '선'과 '악'으로 부른다. 귀족들이 말하는 '나쁨'에 연민과 동정이 담겼다면, 노예들이 말하는 '악'에는 저주와 원한이 담겨있다 -중략- 귀족들은 자신들이 기준을 세운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좋음'의 규정을 끌어낸다. 반면 노예들은 다른 자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선'을 끌어낸다. 귀족들이 자신들로부터 시작한다면 노예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시작한다."
"귀족들은 자신으로부터 '좋음'을 규정하다 보니 '좋음'의 규정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들은 스스로 '미덕'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의 주인이다. 반면에 노예들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에서 시작하다 보니 '선'에 대한 규정이 막연하고 모호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비난받는 특성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뿐 스스로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이 기독교적 권력의지는 곧 서구사회를 지배하였고 오랜 기간동안 권력의지 그 자체의 본능에 충실해 다른 권력의지들을 짓밟기 시작합니다.
결국엔 상대적인 개념으로 권력의지는 서로 물고 물리게 되지만 니체는 이러한 상황이 건강하지 못한 사회라고 평합니다.
원한에 의한 의지는 귀책사유를 자기자신에게 돌림으로서 기존에 약자가 느꼈었던 고통에 죄책감이라는 짐까지 더 얹어버렸거든요.
니체 철학의 근본에는 선악이 이데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이 기존 플라톤 철학과의 가장 큰 차이이며 니체는 선도 악도 권력의지의 한 표현방식이며 추함이나 아름다움도 권력의지의 싸움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가치와 관념은 이데아의 세상에 실재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권력의지의 각기 다른 변주에 지나지 않으며 그 싸움 결과의 현장을 보는 것일 따름입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한번 살펴보자, 존재,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내면을 한번 들여다보아라. 권력에의 의지에 불과하다."
하지만 진실이 이러한들 이러한 세계관을 어떻게 납득시킬 것입니까?
사람들에게 세상이란 권력의지의 구현방식일 뿐이며 어떠한 목적과 의미, 가치도 각기 다른 버전의 권력의지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리는 게 도움이 될까요?
"다른 사람들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선한 규정을 끌어내듯이, 그들은 개별적인 것을 부정해서 보편적인 것을 얻는다. 그들은 개별적인 인간들의 판단과는 상관없는 보편적인 가치 기준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보편적인 기준이 없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치판단을 멋대로 제시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세상은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일반화할 수 없는 것들까지 일반화하려 하기 때문에 도덕이 항상 기괴한 모습을 띠는 것."
저 살벌한 글들에도 불구하는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던 거짓비전이 사라졌을 때 올 수 있는 재앙에 대해서도 염려를 하였죠.
이것은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며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 책 속의 광인은 신은 죽었다는 것을 한탄하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가르쳐주리라. 우리가 신을 죽여버렸다—너희와 내가! 우리 모두는 신을 죽인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일을 행하였단 말인가? 어떻게 우리가 바닷물을 전부 마셔버릴 수 있었단 말인가? 누가 우리에게 지평선 전체를 쓸어내어 버릴 스펀지라도 주었는가? 우리가 이 지구를 해로부터 풀어주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것은 이제 어디로 움직이는가? 우리는 어디로 움직이는가? 모든 항성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가? 우리는 계속해서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중략 -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당시에 이미 과학의 발견들로 신앙이 무너져가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신앙이 무너져간다는 것은 서구사회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도덕)에 대한 지침 역시 몰락해가고 있다는 뜻이죠.
따라서 신이 죽었다는 말은 우리 삶의 모든 근거가 발밑에서 사라져버리고, 우리가 의지하고 믿었던 중심이 없어져버리고,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수 있게 해 준 지평선이 사라져버렸다는 의미입니다.
니체는 이러한 세속화 시대에 다가오는 무서운 재앙을 예견합니다.
"허무주의는, 너희가 믿는 것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이런 세속화 시대의 허무주의는 우리에게 다가올 무시무시한 손님 중 하나일 것이다."
결국엔 니체에게 있어서 이 서구사회의 질병을 끝냄과 동시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방안이 필요하였습니다.
신이 죽은 시대에서 니체가 제시하는 해결책이란 무엇인지, 여기서부터 정말 흥미로운 대목들이 많이 나오는데 반응 좋으면 2편에서 함 다루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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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예전에 새벽 티비 돌리다가 어떤 교수님이 니체 강연에서 권력의지를 설명하시면서,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다 본인만 해도 아내가 설거지 시키면 일부러 못하는 척해서 생활의 주도권을 잡는다고.. 그것이 파워게임, 힘에 대한 갈망이다 진지하게 예를 드시길래 파삭 식었어요. 왜 그러셨어요 교수님..
(수정됨) 노예의 원한으로 지칭되는 기독교적 도덕관 얘기는 현대의 PC주의자나 페미니즘도 잘 설명해주네요. 자의적 기준을 일반화, 보편화, 성역화하는 점. 스스로의 미덕을 제시하지 못하고 타자를 끌어내리는 점. 약자가 권력을 얻어 쇠사슬로 강자를 얽매는 점도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독교적 윤리가 그랬듯 PC에도 훌륭한 가치가 있겠지만 니체는 분명 쇠사슬의 일종으로 봤을 거 같아요.
기독교적 선악론을 부정한 사람들이 신을 죽이고 고아가 되었는데 정도는 덜할지언정 비슷한 쇠사슬이 다시 생겨났다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기존 삶의 체계를 부정하고 튀어나온 68세대라거나 러브 앤 피스를 외치던 히피도 비슷비슷한 종류라고 생각하구요. 신이 죽었다고 한들 뭔가 대단한 혼란이 온 것도 아니고 신을 대체할 시대정신이 튀어나온 것도 아니란 느낌입니다. 신이 죽고 난 뒤로는 신보다도 못한 어중간한 쭉정이들과, 손목에 롤렉스차고 플렉스를 외치며 부를 자랑하는 래퍼같은 물신주의 말고는 별게 없네요.
역시 고아보다는 양친이 잘 계신게 좋은 거 같아요. 인생에 버팀목이 생기잖아요. 요즘 사람들보다는 하느님 잘 믿고 주말마다 성당 잘 가면 구원을 바랄 수 있었을 중세 사람들이 삶의 흔들림이 훨씬 덜했겠죠.
초인이 되는게 꿈이었지만 감당할 자가있을지 모르겠네요.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약간 한명의 메시아같이 세상을 바꿀자를 말했거든요. 니체 철학이 기독교와 반대 위치에 있어보이지만 이런 점은 혹 그를 묘사하는듯 착각도 주죠. 물론 예수가 지구에서 3년반을 설파하고 십자가 처형을 받은 운명을 생각해본다면...
니체도 초인을 말할때 자신이 초인이지 않을까하는 의심과 자각이 있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니체가 자신을 정확이 알았는지. 이 지구에서의 역할 외를 그려보거나 상상해 가본적 있었을까요. 꿈에서라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