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무왕 29년 (서기 628년) 수 십년 간 이어져 온 신라와의 전란이 다소나마 진정되고 있었다.
무왕의 지속적인 확장 정책으로 즉위 3년째부터 크고 작은 싸움이 이어져 왔으나, 직전 해인 서기627년 준비한 대규모 원정이
당나라의 중재로 무마된 이후 짧은 평화기가 찾아온 것이다.
신라의 왕족 출신으로 정쟁에 휘말려 백제로 망명한 항장(降將) 박나손 (朴拿飡, 610 ~ ?)은 야차의 입 언저리에서 가까스로
발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항장의 신분으로 백제 내에서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처지에 물불을 가릴 수 없었고,
누구보다 앞장서서 뛰어든 전장에서 얼마 전까지 동료라 불렀던 적을 벨 수 밖에 없었다. 전장에서 마주친 화랑 동기들이 몇 이던가…
태생이 용맹하고 지휘력이 탁월하였던 박나손은 나가는 전쟁마다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웠으나,
계속된 전쟁은 그의 정신을 극도로 피폐하게 만들었고 몸도 마음도 지친 그에게 더 이상의 전쟁은 무리인 터였다.
다행히 잠시 전쟁은 멈추었고, 그의 상황을 딱하게 여긴 병관좌평(兵官佐平) 곤고구미(金剛組)의 배려로
마로산성(현재의 광양)을 시찰하는 덕솔(德率)로 명을 받아 지친 심신을 달래게 하였다.
당시의 마로지역은 왜(倭)와의 교역이 활발하였던 곳으로 해안지역의 번화가에서 심심치 않게 왜인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교역상이나 호위병(혹은 임시로 호위병을 맡은 왜구)이 대부분으로 여인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이러한 차에 왜의 복식을 한 여인이 주점으로 들어왔으니, 대중의 시선을 끌 수 밖에 없었다.
마침 항구를 둘러보기 위해 시종을 대동하고 나왔던 박나손에게도 왜의 여인은 처음 보는 터였으니 관심이 감은 물론이었다.
아마도 교역상으로 보이는 백제인과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려 말을 걸어보았다.
“나는 백제의 덕솔 박나손이라 하오. 바닷길이 먼데 여인의 몸으로 어찌 이 곳 까지 건너오게 되었소?”
의외로 유창한 백제어가 들려왔다.
“네. 나으리. 저는 왜의 호족 소가(蘇我)의 여식으로 나하(螺何)라 하옵니다.
제가 백제어에 능하고 셈에 밝아 가문의 일을 돕고자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신라에서는 너무 어렸고, 백제로 망명한 이후에는 천덕꾸러기 신세에게 여식을 맡길 귀족 가문은 없었으므로,
여인을 잊고 살았던 박나손에게 매력적인 이국의 여인은 아마도 가슴을 설레게 했으리라.
반면, 여인의 몸으로 바다를 건너올 만큼 개방적인 사고를 가졌던 나하 또한 당시 문화국으로 이름난 백제의 단정한 젊은이에게 끌림은
어쩌면 자연스러운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 백제와의 교역으로 큰 재미를 보고 있던 왜의 소가(蘇我)가문에서 계획한 일종의 미인계라 추측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증명할 수 없는 일.
낯선땅 백제에서 둘은 급속도록 가까워졌고, 특히 박나손에게 나하는 피폐한 삶의 한줄기 빛이었다.
하지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박나손의 임기는 끝이나 가고 있었고, 나하 또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당시의 시대상 백제의 관리와 왜의 여인이 이루어진다는 것 또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므로 둘에게 남은 것은 이별밖에 없었다.
“나하. 조정의 부름에 나는.. 나는 다시 저 머나먼 전장으로 떠나게 되었소.”
울음을 꾹꾹 참으며 어렵게 뱉은 말에 나하는 눈물로 대답한다.
“저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제 이대로 잊고 살아가야 하나요? 아니면, 돌아와서 저를 찾을 기약이 있나요?”
“………..”
“그렇다면 저를 데리고 떠나주세요. 당나라든, 신라든, 고구려든 어디든 당신과 함께라면….”
순간 얼어버린 박나손. 어쩌면 자신이 애틋한 만큼 나하 또한 애틋함을 알게되어 가슴이 떨렸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