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장을 덮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뇌리에 떠오르는 한 마디 강렬한 외침이 있다.
“나는 인간이야...!”라는 처절하고 숭고한 절규다.
작품의 주인공 쿠로사와는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배불뚝이 사십대 중반의 사나이다. 중년의 나이가 다 되도록 변변히 여자를 사귀어 본 적도 없고 당연히 결혼도 하지 못했다. 일하는 직장에서도 찬밥신세이다. 그래도 짬이 찬덕에 현장감독을 맡고 있지만 부하직원들은 쿠로사와를 무시하기 일쑤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가정을 꾸리는 인생의 정상적인 궤도에서 이탈해 바닥을 기는 처지였으니 말이다. 쿠로사와는 못생기고 자신감도 없다. 그의 불행은 대부분 스스로 자초한 바가 크다. 그러나 모두 그의 잘못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미심쩍다. 그도 한때는 꿈 많던 소년이었고 청년이었다. 그도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인생을 향해 대책 없는 기대를 품던 시절이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단지 세상은 생각보다도 더욱 매섭고 잔인했던 것일까. 그것 뿐일까.
중학생 패거리에게 잔뜩 얻어맞은 후 벌벌 기는 수치스러운 모습을 직장후배들에게 들킨 후 쿠로사와는 문득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다. 그리고는 시튼 동물기를 읽은 이야기를 꺼낸다. 너무 부끄럽고 치욕스러워서 무작정 어디로든 도망가려는 생각 중에 여행지 책장에 꽂혀 있던 시튼 동물기를 읽은 일, 여우나 사냥개 같은 포식자에게 언제나 쫒기기만 하는 자신과 닮은 토끼, 그러나 자신과는 달리 결코 비굴하지 않은 토끼의 모습, 포식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것만으로,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승리하는 토끼의 모습 같은 이야기들이다. 시튼 동물기를 읽고 만족한 쿠로사와는 돌아오는 신칸센에서 캔맥주에 도시락을 배불리 먹고는 얼큰하게 취한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미심쩍은 부분이 남아 있던 것이다. 나는 토끼가 아닌데... 짐승이 아닌데... 나는 인간인데...! 단지 생존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인간인데...! 인간에게는 누구나 버릴 수 없는 꿈이 있고 가슴속에 품은 긍지가 있는 법이었다. 쿠로사와는 인간이길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폭행했던 중학생들과 결투를 하기로 결심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린 날 품었던 푸른 꿈들을 점점 잃어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숱한 실망을 거듭하며 자란다. 최강전설 쿠로사와의 결론은 명확하다. 결코 실망하지 말라는 것. 더 나은 인간이길 원하는 마음 속 긍지를 잃지 말라는 것.
일찍이 시인 송승언은 이렇게 썼다.
“그러나 폐기장에서 자신이 인간임을 잊었던 인간은 어느 날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새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숲으로 돌아가려다 자신이 박아 두었던 대못에 날개가 찢어져 피를 흘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