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02/06 17:04:42
Name 22
Subject [일반] 토이 - 모두 어디로 간걸까 감상문
토이 - 모두 어디로 간걸까(feat. 이적) 감상문

(무언가를 그만둠에 대하여)




<가사>

친구들은 조금씩 다 적응해 가고
분주함에 익숙한 듯 표정없어
숨소리를 죽이고 귀 기울여 봐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어디로 모두 떠나가는지 쫓으려해도 어느새 길 저편에
불안해 나만 혼자 남을까 뛰어가봐도 소리쳐봐도

사람들 얘기처럼 세상 살다보면
결국 남는건 너 혼자 뿐이라고
떠나가는 기차에 아무 생각없이
지친몸을 맡긴 채 난 잠이 드네
떠나온 여기는 어딘건지 알 수가 없어 길 잃은 아이처럼
무서워 나만 멀리 왔을까 다들 저기서 내린 듯 한데

말해줘 넌 잘하고 있다고 너 혼자만 외로운건 아니라고
잡아줘 흔들리지 않도록 내 목소리 공허한 울림 아니길 바래

말해줘 넌 잘하고 있다고 너 혼자만 외로운건 아니라고
잡아줘 흔들리지 않도록 내 노래가 공허한 울림 아니길 바래

나는 어디로...너는 어디에...
나는 어디로...너는 어디에...
나는 어디로...너는 어디에...
나는 어디로...너는 어디에...
나는 어디로...너는 어디에...





1.

자기만의 삶을 살려고 하면서도 안정되고 싶어하는 조금은 모순적인 마음가짐 속에서 살아간다.
나는 다르다고 말 하면서도 남들과 같아지고 싶어한다.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라'라는 말에 충실하여 남들과는 관계없이 하고 싶은 걸 하려 하지만 정작 그 남들 때문에 하고 싶은 걸 시도하지 못한다.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려고 기차에 몸을 실었지만 어느 덧 혼자 남은 기차 안에서 내 목적지가 어디였는지 조차 망각하고 군중속에 섞이고 싶다.


2.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산다는게 그렇게 힘든가보다. 혼자 사는 인생이 아니라서. 남들과 함께 사는 삶이라서. 수 많은 사람들을 따라 움직이는 걸로 출발하여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데 어느덧 자기 혼자만 길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을 때를 상상하니 그게 무서워서, 자기도 모르게 남들과 함께 걷는다. 남들이 걸으란 대로 걷는다. 내 목적지는 거기가 아닌데.


3.

노래에서의 이적의 목소리는 다행히도 그렇진 않나보다. 아니, 그러기 직전의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렇게 되기 싫은데 그렇게 되어가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 보게 된건지.
아이러니하게 남들은 모두 기차에서 내리고 자기 혼자 기차 안에 남겨진 상황에서 '넌 잘 가고 있어.'라는 말을 해줄 사람은 옆에 없다.


4.

라캉이라는 사람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잘은 모르지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정확히 모르는 채 남들이 원하는 대로, 주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마치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인 마냥 살아간다는 말일까?

나도 그랬나보다. 어려서부터 흔히 말하는 모범생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은 삶을 살았고 공부 좀 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지내왔다. 내가 하고 싶다기 보단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나름 괜찮은 전문직을 갖게 되었고 주변에선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네.'라는 말이 가끔 들리기도 한다.

그리고 내 주변엔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어디로 가려고 했었는지 잊은 채, 아니 어디로 가야겠다는 생각 조차도 못한채 기차에 타다가 불안감에 휩싸여 남들 조언대로, 남들 하는대로 남들과 함께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

5.

김어준이라는 사람을 생각해봤다. 나로서는 김어준의 정치적 스탠스나 언행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배울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가려고 하는 목적지로 누가 뭐라든 신경쓰지 않고 가는 모습이, 내게는 찾기 힘든 모습이라서 그런가.
'건투를 빈다'라는 책에서 그는 '타자의 욕망대로 살지 말아라.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라.'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우선 자기가 무얼 하고 싶은지 부터 파악하고, 중요한건 '남들의 기대를 져버리는 연습'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노래 속 이적의 목소리는 전자는 해결 되었지만 아직 후자의 조건엔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외로움 속에서 '넌 잘 하고 있어.'라는 말을 듣고픈 건 어찌보면 결과적으로 남들의 기대를 져버리지는 못한게 아닌가.


6.

무리 속에 섞여 걷다가 '이건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아니야.'라는 생각이 든 다면 어떻게 해야될까.

되돌아 가서 타던 기차를 다시 타든, 다른 기차를 타든, 다른 방법을 이용하든 해야겠지만 우선 선행해야 하는 건, '멈춤'이다. 그리고 멈춤과 동시에 같이 움직이던 일행들이 뒤돌아 보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쿨하게 등져야 된다. 자신감을, 또 남들의 기대와 실망을 등져버리는 쿨함을 필요로 한다.


7.

요즘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든다.

그리 긴 인생을 산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삶이 남들 따라 걸어온 건 아닌가 싶어서.
지금 되돌아도 될까, 지금 다른 기차를 타도 될까 싶은, 그러면서도 난 어디로 가고 싶어하는 걸까에 대한 의문.

하지만 아직 멈추고 뒤 돌아설 용기와 쿨함이, 아직 부족하다. 경험치가 낮다.


8.

그런 의미에서 과거 6개월만에 대학원을 그만 둔 경험은 다른 사람에겐 별거 아닐 수 있겠지만 나 자신에게는 큰 경험이었다. 사실 그 전에 멈추고 돌아서려 했지만 그 무리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따라나섰다. 하지만 두번째는 뒤돌아섰다. 무리 속의 삶이 익숙했던 나에겐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다.


과거의 나도 무리속에서 되돌아 가는 사람을 뒤돌아 보며 눈길을 준 적이 있었다. 누군가를 '그만둠의 아이콘'이라고 부르며 희화화 시키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으련다. 오히려 잘 들릴진 모르겠지만 '넌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들이 어딜 가던 원하는 목적지에 닿았으면 좋겠다.


2BACC465-9756-44AC-B07C-CC32140B79DE.png



9.

그리고 요즘, 남들과 함께 정신없이 걷는 와중에 다른 생각을 하며 걷는다. 아직 돌아설 용기는 없지만 만약에 , 아주 만약에 돌아선다면 어딘지 모를 그 곳이 어딘지에 대한 고민을 한다.

10.

내가 돌아선다면 말해줘 "넌 잘하고 있다고, 너 혼자만 외로운거 아니라고, 잡아줘 흔들리지 않도록".

그리고,
그때의 나는 그런 응원에도, 혹은 '거기로 가면 안돼!'라는 비판 섞인 조언에도
무심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또한 무언가를 그만두는 사람들에게 '넌 잘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일이든 사랑이든 그 그만둠이 무엇이던간에.




================

대략 4년전 쯤 블로그에 썼던 글을 약간 수정해서 옮겨봤습니다.

4년이 지난 지금 보니 겉으로 보는 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동안 나름의 경험들이 나의 내실을 채우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네요.

그만두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글 남겨봅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흘레바람
19/02/06 17:15
수정 아이콘
직장 그만둔지 삼개월쯤 됐는데 위로가 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Pluralist
19/02/06 17:22
수정 아이콘
제일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많이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스테비아
19/02/06 18:20
수정 아이콘
이 노래는 정말 라이브 버전이 최고인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아련해지는노래... 음악 속 함성소리들도 가수의 목소리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어디로, 너는 어디에...'가 생각나게 해요.
19/02/06 18:24
수정 아이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게 타국살이 중인데 이것저것 느낄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잘 읽었어요.
19/02/06 22:17
수정 아이콘
고등학교때부터 주구장창 15년 넘게 듣고 있는 앨범인데... 참 주옥같은 곡들이 많죠.
라이브 앨범 듣는 경우가 잘 없는데... 이 앨범만큼은 예외입니다.
글도 감사합니다.
19/02/07 16:32
수정 아이콘
토이 앨범은 안 샀는데 이 앨범은 사서 몇달을 들었던 거 같네요. 정말 좋아했는데 십몇년 전이네요 벌써. 아 세월이여.
유리한
19/02/11 15:56
수정 아이콘
80000번째 글을 축하드립니다 크크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0008 [일반] 소박했던 진정한 영웅을 떠나보내며.... 중앙응급의료센터장 윤한덕 선생님 부고 [65] 여왕의심복12548 19/02/07 12548 126
80007 [일반] 명절에 전 부쳐본 이야기. [38] 듀란과나루드9323 19/02/07 9323 22
80006 [일반] (스포주의)소라의 날개. 이것은 결코 그런 기적의 이야기가 아니다. [12] 삭제됨12166 19/02/07 12166 0
80005 [일반] 유튜브 채널 추천 1탄_ 영화 재해석편 [25] 넛츠10873 19/02/06 10873 7
80004 [일반] 갑상선암 이야기 [31] 삭제됨10568 19/02/06 10568 36
80003 [일반] 다음 세대 아이돌은 CJ의 '프로듀스'와 경쟁할수 있을까 [76] 래리13006 19/02/06 13006 4
80002 [일반] 수출 쓰레기 처리문제로 세금이 투입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네요. [9] 아유8330 19/02/06 8330 3
80001 [일반] 제갈근은 왜 쯔위가 되었는가? [20] 삭제됨11541 19/02/06 11541 27
80000 [일반] 토이 - 모두 어디로 간걸까 감상문 [7] 226627 19/02/06 6627 5
79999 [일반] 2차 북미정상 회담 일정 확정 [64] 한국화약주식회사13711 19/02/06 13711 11
79998 [일반] [삼국지] 아들 바보 제갈량 [24] 글곰11974 19/02/06 11974 18
79997 [일반] 미래에서 온 플레이리스트 (스압) [4] BurnRubber7946 19/02/06 7946 5
79996 [일반] <뺑반>, 감독님 좀 너무한거 아니에요? [31] 김유라12728 19/02/06 12728 17
79995 [일반] (노영양, 이미지 다수) 거기 너, 내 이름을 말해봐라 [18] OrBef12954 19/02/05 12954 6
79994 [일반] 알리타 배틀앤젤 후기(노스포) [38] 이부키11009 19/02/05 11009 1
79993 [일반] 당쟁과 귀양 [23] 유쾌한보살8937 19/02/05 8937 31
79992 [일반] 조카의 재롱잔치 ( 그외 잡다...) [8] 로즈마리10644 19/02/04 10644 22
79991 [일반] 한미 방위비 협상 타결 뉴스가 속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48] 홍승식16332 19/02/04 16332 1
79990 [일반] 연휴에 스카이캐슬을 정주행하고 여친과 싸우게 된 이유는 무엇이란말인가 [68] 캠릿브지대핳생15833 19/02/04 15833 4
79989 [일반] 제 2의 제갈량을 꿈꾸던 "그 즙들." 혹은 "즙갈량" [28] 신불해22120 19/02/04 22120 72
79988 [일반] 도를 믿으십니까? [24] 김아무개7898 19/02/04 7898 9
79987 [일반] 가정폭력] 아는 동생한테 전화가 왔네요 [30] 김아무개13780 19/02/03 13780 21
79986 [일반] (간접스포주의) 킹덤에 관한 감상 [23] 안유진9667 19/02/03 9667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