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글쓰기 이벤트때 쓰고 싶었던 글입니다. 그때 중국에 출장가느라 바빠서 완성 시키지 못했었네요. 이제서야 마무리 했네요. 이벤트보다는 꼭 글을 남기고 싶었기에 지금이라도 올려봅니다.
내 기억의 시발점은 어디일까? 신분증에는 분명히 1992년 10월 1일이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가장 가까운 순간을 떠올려보더라도 생모는 없다.
그래도 나에겐 생명의 은인이 있었다. 34년생인 그녀는 나에게 젖을 먹였다. 그녀는 내 기저귀를 갈아주었으며, 나를 안아주었다. 유년 시절 대부분을 그녀와 함께 논밭으로 다닌 기억이 생생하다. 그녀는 농기구와 비료 그리고 나도 손수레에 태워주었다. 해가 뜰 무렵 출발하기에 느낄 수 있었던 공기는 아직도 서늘하다. 머리보다 높은 곳에 열린 옥수수를 따거나, 고추를 경작하기 위해 철심을 세우기도 했다. 때론 밭에서 응가가 마렵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나를 아무 곳에서나 배변을 보게 하였다. 그러고는 나를 기다리며 조용히 신문지를 잘게 구겨주곤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석양이 너무 뜨거운 탓에, 그녀의 이마 주름 사이로 땀방울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런 땀 때문인지, 두 세 번 씩 쉬었다 가야만 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숨이 가쁜 당신을 재촉하기만 했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사랑으로 받아주었고, 덕분에 내 기억의 시발점 언저리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그녀는 문맹이었다. 나는 어린이집에서 주는 안내문을 그녀에게 건네주곤 했다. 여느 때처럼 우리 둘은 노란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해가 빳빳이 고개를 들어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때까지 노란 차는 나타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 어린이집에 전화했을 때, 모두가 소풍 간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글을 읽지 못하는 탓에 소풍 가는 날인지 몰랐던 것이다. 허겁지겁 어제 지은 밥과 먹다 남은 반찬을 담았다. 비싸서 잘 타지도 않던 택시를 타고 뒤를 따랐다. 늦었다. 이미 모든 친구들이 점심을 먹고 난 뒤였다.
담당 선생님께서 우리를 맞이해주었지만, 이미 내 마음은 울상이었다. 난 도시락 때문에 또 한 번 상처를 입었다. 식은 밥과 하나뿐인 반찬을 보시더니 가여우셨나 보다. “이거 학부모님들이 챙겨주셨어요. 먹다가 김밥이 좀 남았는데 드시겠어요?” 꼴랑 5살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였지만, 연민의 표정을 지은 누군가가 먹다 남은 것은 주겠다는 소리에 비수가 꽂히고 말았다. 무엇보다 날 이렇게 만든 그녀가 괜히 싫었다.
초등학생이 된 이후로도 그녀와 함께했다. 매년 운동회가 있을 때마다 그녀는 밭일을 포기하고서라도 나를 찾아와주었다. 그녀는 나를 ‘부모 없는 자식’으로 키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씩 자라면서, 더 이상 그녀가 나의 엄마가 아니란 것을 느꼈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게 되는 시기에 그녀를 다른 친구들의 엄마와 비교하고 말았다. 그녀의 허리는 수많은 엄마들 중 가장 위태로워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 멀쩡하게 걸어 다니는데, 왜 그녀는 항상 지탱할 것이 필요한 걸까? 이미 앞으로 굽어진 것도 모자라, 곧게 펼 수조차 없어 보였다. 그런 그녀 때문에, 나는 괜히 주눅 들었다.
게다가 보통의 엄마들이 준비하는 도시락과 그녀의 도시락은 달랐다. 김밥과 치킨은 물론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과일들도 보였지만, 내게는 어제 먹던 집 반찬 2개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엄마의 범주 안에서 이해하기란 너무나 어려웠다.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그녀는 평소 친분이 있던 이들과 함께 자리하였다. 나는 또 남의 것을 얻어먹어야만 했다.
중학교를 입학할 무렵, 나는 이미 그녀의 곁을 떠나 있었다. 내게 진정한 핏줄로서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따로 존재하고 계셨고, 그렇게 새로운 터전에 안착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거처를 옮기는 것이 어려웠음에도, 그녀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위해 해야 하는 심부름들이 너무나 귀찮았다. 나를 마지막 단신으로 여기며 모든 것을 쏟아 부어버렸던 그녀는 이미 유모차 없이는 한 걸음도 때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시골에는 5일마다 장이 열리곤 했다. 그녀는 직접 재배한 농작물들 몇 가지와 곡물들을 팔았다. 아침에는 내가 학교에 가야 했기에 도와드리지 못했다. 그래서 하교를 한 뒤에 그녀를 도왔다. 팔다 남은 곡물들을 정리하거나, 다시 집으로 가져가야 할 것들을 손수레에 담았다. 그녀는 돌아가는 길에 호떡을 사주곤 했다. 3개를 샀을 때, 그녀는 항상 반 개만 먹고 나에게 나머지를 다 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녀에게 할머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엄마처럼 느껴졌다.
고등학생이 되며 어쩔 수 없이 기숙사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근로 장학생이 되어 학비와 식비 그리고 기숙사비까지 모두 내가 감당해야만 했다. 그 당시 돈을 받기 위해 해야 했던 일들은 내게 육체적 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 고통까지 안겨주었다. 수백 명 앞에서 그들이 흘리고 간 잔반을 치우고 있노라면, 그 어떤 17세도 이 수치심을 감당하긴 어려울 것이라. 시선에 짓눌려 상처받은 어린 양은 쉴 곳이 없었다. 이렇게 살다간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 다른 친구가 ‘아 엄마가 늦게 깨워 줬으면서 계속 아침밥 먹고 가라 그래서 짜증 나’라며 투정 부릴 때, 너무 얄미웠고 울고 싶었다. 그래도 나는 이를 악물고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곤 했다. 뒤늦게야 알았지만, 그녀 또한 나를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고3이 되던 해부터 자주 다니던 절에 많은 돈을 썼다. 그녀의 염원과 나의 바른 행실이 합해진 덕분에, 나는 훌륭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더욱 그녀를 보기 힘들었다. 1년에 많아야 3번, 적으면 2번이었다. 자주 보지 못하는 것 때문에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70이 넘은 나이에, 심지어 자기 핏줄도 아닌 나 때문에. 자주 볼 수 없다는 것 하나 때문에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의 허리가 왜 그렇게 굽게 되었는지 말해주었다. 그녀는 이미 내 아버지와 형제들(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까지 모두 길러내었다고 했다. 그들이 폐 속으로 공기를 가득 채워 넣을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러고 한숨 돌리나 했더니 나를 품에 안게 되었다고 했다. 34년생인 그녀가 92년생인 나에게 젖을 물렸던 것이다. 이미 삭을 대로 삭아버린 육신이 척추를 곧게 받치기 힘들었던 것 같다. 결정적으로 그녀가 울고 있는 핏덩이를 달래려 나를 업고 밖으로 나가던 중,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청춘을 남의 자식들 키우느라 하얗게 불태워 버린 것만 같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나는 후회했다. 다른 엄마들과 비교하며 허리가 굽어 버린 당신은 더 이상 어머니가 아닌 것 같다며 매몰차게 등 돌려 버린 내 모습을…….
여전히 나는 그녀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다. 만원이라도 손에 쥐어 줘야 자기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이웃들에게 받은 과일들을 서슴없이 내어준다. 자기는 있어도 먹지 않는다며. 살을 조금만 빼면 좋겠다고 하지만, 음식은 좋을 것을 먹어야 한다며 자신이 직접 만든 참기름을 꺼낸다. 타지 생활하면서 돈이 부족하면 남의 물건에 욕심을 낼 수 있다며, 꼬박꼬박 통장으로 돈을 넣어주신다. 어쩌면 나를 낳고 떠나가 버린 생모보다 그녀가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더 크다는 속담이 꼭 들어맞는 것 같다.
요즘 지치고 힘들 때면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곤 한다. 무엇 때문에, 왜 때문에 살아가는지 모르고 방황하는 날이 많아진다. 그럴 때마다 또렷하게 그녀가 생각난다. 아직까지 나를 길러주던 그곳에 계시는 어머니. 그녀가 편히 잠들 수 있을 때까지는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다 보면 흔들리는 오늘도 어느새 다시 일상을 되찾지 않을까.
p.s 아직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못해봤는데... 당장이라도 전화드리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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