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새 11월이다. 문학을 전공하며 동물에 일가견이 있는 유명한 양반이 지금 내 나이때쯤 썼던 글에서 그랬다.
달력에 표시되지 않는 날들에 대해서, 기억하지 않아도 기록되는 일들에 대해서 망설이게 되었다고.
이유야 다르겠지만 망설임만은 같다. 나 뿐만 아니라, 그 홀가분하며 위태로운 마음은 누군들 불쑥 찾아오곤 할 터인데
지나고 나면 나조차도 기억해주지 않을 날들. 이를테면 2017년 11월 1일 같은 날들.
그 아무것도 아닌 날들을 대함에 있어서, 괜히 마음이 뻐근하고 불편한 기분이 든다.
요즘 들어 사는 게 뻑뻑하다고 느낀다. 한참은 식어버린 퍽퍽살 같다.
응석 부릴 나이가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왠지 목이 메인 목소리가 나올 것 같다. 사는게 왜 이렇냐. 싶다
#2
4년하고도 반을 아쉽게 채우지 못한 연애가 끝이 났다.
보통의 연애가 으레 그러하듯이, 우리는 그저 그런 사람이였고, 그저 그런 빛이나 빚이나 어둠이나 아둔함이 있었다.
결코 대단하진 않았으나, 그래도 좋았다. 나는 그 아이가 좋았고, 그 아이도 나를 좋아했으니. 그게 참 좋았다. 그래서 좋았다.
당연하게도 내게는 아주 소중하고 특별했다. 다시는 없을 것 같은 감정들에 온 마음이 열렬하게도 떨리는 순간들이 있었다.
이젠 다 부서지다못해 으깨져 큰 의미가 없는 관계의 아무 곳에 서서, 그 잔해들을 괜히 한번씩 건드려보곤 했다.
나는 왠지 어제처럼, 그제처럼, 이별 후에 있었던 많은 날들처럼, 흘러내리는 그것들을 한 손씩 한 웅큼씩 쥐어보곤 할 것 같다.
#3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새로 생긴 것이나 없어진 것이 참으로 많다. 우선 여자친구가 없어진 것은 당일로부터 깨달았으니 간과할 수 없다.
그 외의 것들, 예를 들면 더 이상 휴대폰이 하루에 몇십번씩 소소한 소식을 전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나
SNS의 해시태그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나, 카카오톡 상단 고정으로 해놓을 사람이 없어진 것이라든지.
뭐 그런 사소한 일들 또한 하루 걸러 하루씩 새로운 것들을 깨닫고 있지만 진실로 말하자면 여전히 내가 뭘 잃었고 뭘 얻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제는 10년이 지나버린 드라마에서,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순간을 돌이켜본다고 했다.
그 순간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깨달음은 항상 늦다고도 말했다.
그 나래이션 누가 썼는진 모르겠지만 참 그 양반 잘 됐을거야. 잘 되있었으면 좋겠다.
#4
오랜만에 내가 쓴 일기들을 쭉 훑어 봤다. 내가 썼는데도 내용들이 하나같이 생경하다. 미친놈이네 일기에다 왜 이런걸 쓰냐. 싶다.
전하지도 못할 편지에다가 꾹꾹 눌러 담은 진심들이 왜 그리 가득한지. 모를 일이다.
#5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꽤나 많이 과거를 곱씹었는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게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을 변비가 생겼다는 것이다.
항상 1일 1똥 하던 내가 일주일에 한 두번 정도 있는 둥 없는 둥 한 변의를 기다리고 있단 점이 우습고 또 재밌다.
사실 이 깊고 깊은 똥 못 쌈의 구렁텅이에 항변할 자격이 없는 것만 같다. 쳐 먹은게 없으니 싸는 것도 없는 거잖아. 어제도 굶었잖아..
일주일만에 3kg가 빠졌다. 돼지 뚠뚠이라서 내가 아끼는 옷들이 슬슬 버거워졌는데, 덕분에 한 시름 덜었다.
처음엔 살이 빠지는 줄도 몰랐는데, 어느 순간 몸무게가 줄어 있길래 이 참에 다이어트를 해야 겠다 생각했다.
한달이 지나자 일주일만에 뺐던 살의 곱절은 뺄 수 있었다. 역시 최고의 다이어트는 맘고생이야.
살은 똥 싸듯이 줄줄 빠지는데 정작 똥을 못 싸고 있으니 이것 참 난감하다고 해야할지 어쩔 수 없다고 해야할지..
#6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그 아이에게 전하고 싶다.
내가 네게, 네가 내게 연락하지 않고 서로 닿을 일이 없더라도 우리의 마음과 신의가 닳아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여전히 나는 이 곳에서 그저 그렇게 반짝거리고 있다고.
그러나 나의 마음은 이미 너에게 아무런 필요도 없을 것이 되어버렸음을 나부터가 잘 알고 있다.
보통의 연애가 그렇듯이,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이미 찍혀버린 마침표를 괜히 한번씩 꾹 눌러보고, 지우개로 문질러보곤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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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고 역시 피지알이야 하고 들어왔다가, 내용을 보고 아 맞다 피지알이야 하고 느끼네요.
잘 봤습니다. 지나간 일기를 보듯 또 지금을 돌이켜 볼 때가 있겠죠. 왜 이런 글을 썼을까 싶기도 할 수 있구요. 그래도 그 순간의 진심이 변하는건 아니니까요.
아무쪼록 맘고생을 끝내시고 쾌변 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