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이 말기에 운이 다하여, 인재를 쓰고 버림이 거꾸로 되고 공과 죄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니, 웅정필(熊廷弼)과 원숭환(袁崇煥) 같은 장수들을 죽여 스스로 장성을 허물어 버렸다.
어찌 후세의 비웃음을 받지 않겠는가?" (1)
옛날 진시황제(秦始皇帝)는 북에서 내려오는 이민족을 막기 위해서 만리장성을 쌓았다. 하지만 그 장성을 넘어와 중국을 장악한 원나라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남쪽의 적이다. 황하 이남으로 회하(淮河), 양자강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판도에 걸쳐 셀 수도 없는 숫자의 반란군이 원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몰려들고 있었다.
북의 장성은 돌과 흙으로 쌓아 올려졌다. 하지만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한 성벽이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은 돌과 흙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 원나라에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장성은 바로 ‘사람’ 이었다. 대원제국 우승상 탈탈, 그가 바로 원나라를 수호하는 최후의 방벽이자 칭기즈칸의 폭풍으로부터 이어진 몽골 세계제국을 이어나가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수호자였다.
막대한 책무를 짊어지게 된 탈탈은 여기에 어울리는 큰 권한을 받아냈다. 제국의 모든 친왕 및 각 행성의 군대 관할권이 그에 손에 들어왔고 이들 모두의 생사여탈권 역시 전시승상인 그에게 주어졌다. 중서성과 추밀원 등 각 정부 조직 역시 모두 탈탈의 지시 아래에 움직이게 되었다. 사실상 임시적으로 제국의 지배자가 된 셈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이런 큰 권한을 받기 전에도 탈탈은 전쟁을 위한 준비를 잊지 않고 있었다. 서주 전투 이후 어이없이 조정에 돌아온 이후 그는 허울 좋은 상에 취해 즐기기보단 향후 있을 출병에 대비하며 분주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가 신경을 쓴 것은 바로 둔전(屯田) 이었다. 장사성 등의 봉기로 강남의 식량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자, 그는 측근인 오고손양정 등과 의논하여 관련 사업을 실시했다. 대사농(大司農) 영사가 되어 도성 주변에 대규모 둔전을 실시한 탈탈의 활약 덕분에 적지 않은 양식 확보가 가능하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런 탈탈의 둔전으로 확보할 수 있는 쌀은 매년 20만 석에 달했다. (2) 원나라 시대의 1석이 75960g이므로 모두 1만 5천톤이 넘는 양이었다. 지난 2015년 대한민국 1인당 하루 쌀 소비량이 178.2g이었으니, 1년에 65만g를 먹는다 치면 2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1년 동안 먹일 수 있는 쌀이 생산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옛날 사람들은 현대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쌀 소비량이 많았다. 하지만 현대인의 꼬박 두 배를 먹었다고 계산해도 10만이 넘는 사람들을 1년간 먹일 수 있고, 세 배를 넘게 먹었다고 감안해도 7만 명을 먹일 수 있다. 강남의 양식이 끊긴 원 조정으로는 실로 천군만마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이 양식을 전부 군량비로 쓰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당장의 굶주림을 해결했다는 것은 이후의 작전을 펼치는 데 있어서도 적잖은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시간이 쫓겨 서두를 필요를 덜었던 셈이니 말이다.
당장의 시간을 번 탈탈은 철저하게, 그러나 완벽하게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막대한 권한을 총동원해 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전역에서 병력를 소집했다. 각지의 관군들은 물론이고, 여타 친왕들이 가지고 있는 병력들과 원나라에 협력적인 현지 주지들과의 연계도 꿰했다.
10만…. 20만…. 30만…. 전중국에서 모인 병력의 숫자는 이미 넘칠 정도로 충분했지만, 각로 군마를 총괄하는 탈탈은 이 정도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이 싸움은 장사성을 토벌하는 싸움이지만, 결국 중요한 건 장사성 따위가 아니다. 장사성을 물리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더 중요한 건 천하에 아직 원나라의 국운이 쇠하지 않았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국의 불충자들이 이야기만 듣고도 오금이 저리고 다리가 떨릴 정도의 위엄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제국 내에서 벌써 수십만의 병력이 소집되었지만, 탈탈은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끝이 없는 병력의 물길들 속에서 제국의 번왕(蕃王)들이 내걸은 깃발들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서역(西域), 서번(西蕃) 즉 티베트와 중앙아시아에서도 제국의 기치를 내건 용사들이 모이고 있었다. 세상의 서쪽 끝에서도 병마가 모이고 있었으니 동쪽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출병 요청은 한반도의 고려에도 있었다. 탈탈은 고려인 채하중(蔡河中)을 시켜 이런 지시를 전달하게 했다.
“나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남쪽으로 원정을 떠난다. 고려의 왕은 마땅히 용맹한 병사를 파견해 이를 도우라.” (“吾受命南征, 王宜遣勇銳, 以助之) (3)
이 과정에는 조금 이야깃거리가 있다. 채하중은 꽤나 권력욕이 강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대도에 머물며 고려의 재상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채하중은 탈탈이 병력을 구하는 것을 보고 이를 점수를 딸 기회로 여겨, 그가 요청하기도 전에 먼저 나서 토벌을 돕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탁(柳濯)이나 염제신(廉悌臣) 같은 고려인이 용맹하고 지략도 있으니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침을 튀기며 부추겼다. (4)
대규모 병력을 소집하고 있는 탈탈의 입장에선 자기가 먼저 아쉬운 소리를 하며 부탁해서라도 요청하고 싶을 지원군이었는데, 먼저 나서 “우리가 돕겠다.” 고 해주니 마다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결국 채하중의 권력욕 때문에 어이없이 고생스러운 파병을 준비해야 했던 고려였다.
일단 파병이 결정된 이상, 고려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원나라를 도와야만 했다. 과거 엘 테무르가 충혜왕을 폐위 시킨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탈탈 정도의 실력자라면 고려 왕 따위는 얼마든지 마음대로 폐하고 세울 수 있었다. 고려의 공민왕은 당시 고려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전력으로 지원군을 구성했다.
소집된 면면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는데, 참여한 제장들은 채하중이 이름을 꺼낸 유탁, 염제신을 비롯하여 권겸(權謙), 원호(元顥), 나영걸(羅英傑), 인당(印璫), 김용(金鏞), 이권(李權), 강윤충(康允忠), 정세운(鄭世雲), 황상(黃裳), 최영(崔瑩), 최운기(崔雲起), 이방실(李芳實), 안우(安佑) 등으로 어지간히 이름 있는 장상(將相)들이 모조리 소집되었으며, 일반 병졸들 역시 최대한 정예병으로 2,000여 명이 소집되었다.
당시 고려는 왜구에 의해 전국토가 초토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정예군 2천을 소집했으니 결코 지원군의 숫자가 적었던 것은 아니다. 그 증거로 지원군이 도성을 빠져나가자 일순간에 수도 개경의 방위가 허술해져 위기감을 느낀 공민왕이 서해도에서 추가 징집을 실시했을 정도다.
한 사람의 억지로 자국도 아닌 다른 나라를 위해 싸우러 가는 장졸들의 군심이 좋았을 리 없다. 최악의 사기와 더불어 휘하 병사들이 싸움에서 필요한 말을 조달하기 위해 민간인을 상대로 사기를 치거나 아예 약탈을 하는 상황까지 발생해서 부대 내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최악에 가까웠다. 그런 상황에서 마침내 국경 지대에 이르러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을 보자, 심사가 뒤틀린 강윤충 등은 이런 말을 꺼낼 정도였다.
"우리가 친척과 이별하고 조상의 무덤을 떠나 죽음의 땅으로 가는데 도대체 언제 돌아올 수 있단 말이오? 차라리 수도로 되돌아가 애초에 이 일을 계획한 자를 잡아 죽여야 하오." (5)
조금만 잘못 되었으면 30년 앞서 위화도 회군이 벌어질 뻔한 상황이었다. 이때는 염제신이 부하들을 다독여 일이 크게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부대 내의 불온한 느낌을 감지한 염제신은 차라리 만사를 기정사실로 만들기 위해 지름길을 타고 최대한 빨리 집결지로 이동하는 작전을 사용했다. 머뭇거리다간 반란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출발할 때 2천 명이었던 고려군의 숫자는 연경(燕京) 현지의 고려인이 더해지자 총 2만 3천 명의 대군으로 늘어났다. 원나라 말기에 중국에 있던 고려 사람의 숫자가 굉장히 많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우여곡절 끝에 서방과 동방, 제국 전역에서 소집된 군단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자, 그 위세와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사서에서 이를 일컫기를,
"서역과 서번 모두가 군대를 보내서 도와줬다. 군사들의 깃발은 천리를 이어지고, 북을 치는 소리는 들판을 뒤흔들었으니, 지금까지 출정의 위용이 이토록 웅장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西域、西番皆發兵來助。旌旗累千里,金鼓震野,出師之盛,未有過之者。) (6)
라고 하니, 그 표현을 글로만 봐도 수십만 대군이 외치는 함성 소리가 느껴지는 듯하다.
이때 소집된 병력이 대체 정확히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해 11월, 고려군의 장수 중 먼저 귀국한 인안(印安)의 보고를 살펴보면,
“태사 탈탈이 군사 800만을 동원해 고우성을 쳤다.” (7)
라는 말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정말 800만이나 되었을 리는 없다. 다만 원나라에서 반군을 위압하기 위해 자신들의 군사 숫자가 800만이라고 과장한 게 아니라 고려 사람인 인안이 공민왕에게 올린 보고라는 점이 중요하다. 인안이 굳이 없는 병력을 부풀려 공민왕을 겁줄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800만은 어림없다고 해도 분명 수십만이 넘는 대군이 모였고, 자신이 살면서 봤던 가장 압도적인 인파의 행렬을 본 인안이 “이 정도 숫자라면 분명 수백만이 틀림없다.” 라고 확신해서 그런 보고를 올린 게 아닌가 싶다. 그 수많은 군단 중에서 일부에 불과한 고려군의 숫자만 2만 3천여명이었다. 총 병력의 숫자는 분명 어마어마한 숫자였을 것이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손에 꼽을만한 숫자의 군단이 모두 집결하자 마침내 탈탈은 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깃발은 천리에 걸쳐 이어졌고, 북소리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흡사 세상의 모든 악귀를 제압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천군을 보는듯했다.
남하하는 대군의 행렬이 제녕(濟寧)을 지날 무렵, 탈탈은 바쁜 걸음을 잠깐 멈추고 곡부(曲阜), 즉 공자의 묘에 부하를 보내 제를 올리게 했다. 또한 추현(鄒縣)을 지날 무렵에는 직접 맹자의 묘에 제를 올렸다. 존중을 뜻하는 이런 조치로 군사가 지나는 지역의 민심을 돌보는 한편, 명분을 중요시 하는 천하 유학자들의 심금을 올렸다. 그저 장사성이라는 도적 하나를 처치하기 위한 행동이 아닌 천하의 민심을 돌보는 작업에 나섰던 셈이었다. 실로 명장이라 할만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탈탈에게 있어 장사성 따위는 대수로울 게 되지 못했다. 중요한 건 반군을 제압하고 놀라고 들뜬 민심을 다독여 동요를 막아 세상을 안정시키는 일이었다. 장사성은 그런 웅대한 계획의 첫 번째 관문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초전, 그리고 그 이후에 치러진 몇 번의 전투에서 원나라 군대는 장사성을 수차례 패배시켰고, 고우성으로 적을 몰아넣은 다음 그 성의 외벽마저 곧 깨트려 버렸다. 탈탈과 그 수십만 군대 앞에 장사성의 성냥개비 같은 부대는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이제 그의 몰락은 피할 길이 없어 보였다.
최후의 고우성 전투에서 선봉에 선 부대는 다름 아닌 고려군이었다. 기왕 지사 남의 싸움에 끌려온 것, 큰 전투에서 공훈이라도 세워 이름을 빛내기 위해 열심히 싸운 고려군이 성의 함락을 목전에 둔 순간이었다.
한데 이 순간, 갑작스러운 철수 명령이 내려왔다.
“이제 날도 저물었으니, 내일 적을 쳐부수도록 하자!”
원나라 장수 지원노장(知院老長)의 철수 지시에 고려군은 어쩔 수 없이 승리를 눈앞에 두고 되돌아와야만 했다. 실상을 말하자면 어차피 승리는 눈앞에 다가온 시점이니, 일개 고려군 따위가 선봉으로 공을 세우는 것을 견제하는 원나라 장수들의 술책이었다. 무수한 군단이 있으니 그 안에서도 잇속을 채우려는 약삭빠른 속셈들이 서로 오고 갔던 것이다. 여기에 말려든 고려군은 무수한 희생을 내고도 ‘성을 함락시킨 선봉부대’ 라는 영광을 얻는 것 조차 불가능했다.
성의 함락 일보 직전에 한숨을 돌린 장사성은 밤을 틈타 서둘러 무너진 성벽을 보수했고, 다음날 고려군이 재차 공격을 퍼부었음에도 불구하고 함락되지 않았다. 죽지 않아도 될 무수한 목숨들이 아무런 의미 없이 고우성 앞에서 쓰러져 갔다.
그렇다고 해도, 전체적인 전황으로 보면 승리는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일선 현장의 농간으로 며칠 시간이 지체되고 있을 뿐이지 큰 틀에서 보자면 탈탈의 계획은 빈틈이 없었다. 장사성의 남은 운명은 그저 개미처럼 눌려 죽느냐 모래성처럼 부서져서 죽느냐의 차이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고우 함락이 목전에 있었던 무렵, 갑작스레 조정에서 왔다는 사람이 도착했다.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왔다고 했다. 그 의미가 어떤 의미였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모든 장수들은 기겁하며 놀랐다.
파면. 총사령관 탈탈의 퇴임과 지휘관 교체. 즉, 숙청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 본래 카아마(哈麻)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어머니가 선황인 영종의 유모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궁중에 들락거렸던 사람이었다. 조익의 이십이사차기에서 원나라의 유모에 대해 이르기를,
“유모가 존귀한 것은 원위(元魏)보다도 지나침이 없다.” (8)
원위, 즉 과거 남북조 시대의 북위는 일단 황태자가 정해지면 그 생모를 죽여 외척의 횡포를 방지했다. 어미가 없으니 어미나 다름없는 유모들이 자연히 권력을 손에 쥐는 구조가 되었다. 원나라는 생모를 죽이는 정도의 폭력적인 관습은 없었지만, 유모를 귀하게 대접한 것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모뿐만이 아니라 그 남편이나 가족들까지 우대받았다.
그런 연유로 궁궐 출입이 잦았던 데다, 평소에 말 재간도 있던 카아마였기에 그는 순제와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순제는 카아마와 주사위 놀이하는 것을 즐겼다. 하루는 주사위 놀이를 하던 중 차를 마시던 순제가 재채기를 참지 못하고 카아마의 옷에 차를 흩뿌리자, 카아마가 웃으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거, 아무리 황제라고 이러시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天子固當如是耶) (9)
그 말을 들은 순제는 갑자기 터진 폭소를 주체하지 못해 한참을 배를 잡고 웃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순제와 카아마는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 친한 사이를 이용해 황제를 바른길로 인도하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카아마는 충언을 하는 대신 아부를 해서 자신의 권력을 챙기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카아마는 서천에서 요망한 티베트 승려를 한 명 구해 순제에게 바쳤다. 이 요승은 운기술(運氣術)이라는 요상한 술수를 쓰는 한편 연설아법(演揲兒法)이라는 기술을 순제 앞에서 선보였다. 연설아는 음차한 말이고, 한자로는 대희락(大喜樂)이라고 한다. 큰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그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입에 담기도 어려운 더러운 술책들이다. 말하자면 방중술로, 서천 승려가 눈앞에서 선보인 재주에 눈이 돌아간 순제는 이 승려를 조정의 사도에 임명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 역시 앞다퉈 양갓집 처녀들 중 미모가 반반한 사람을 찾아다 순제에게 바쳤다.
공양(供養)
그 따위 수작들은 모두 공양이라고 불렸다. 말 그대로 처녀 공양이다. 순제는 공양 받은 어린 처녀들을 상대로 매일매일 요승에게 배운 대희락 비법을 시험해 보느라 날이 가는 줄 몰랐다. 가지각색 수많은 미녀를 한 자리에 불러다 즐기던 순제는 급기야 16천마(天魔)라는 무용까지 만들었다.
미모가 출중한 궁녀들로 꾸려진 16천마는 모두 똑같은 옷차림을 하고 춤을 췄다. 머리카락을 여러 가닥으로 묶어서 늘어뜨리고 상아로 만든 아름다운 부처 관을 쓰고, 몸에는 알록달록한 영락(纓絡)을 걸치고, 붉은 금실로 짠 짦은 치마를 입었다. 그리고 위에는 역시 금실로 된 웃옷(雲肩)을 입고, 소매가 붙은 천사 같은 옷을 입고 춤을 췄다. 그렇게 꾸민 16천마가 각집가파(各執加巴)라는 통에 신호를 보내면, 통에 있던 사람이 얼굴은 보이지 않고 음악을 연주했다.
또 16천마 외에 다른 11명의 궁녀가 있었다. 이들은 머리띠를 매고 착 달라붙는 적삼을 입고는, 각종 악기로 음악을 연주했다. (10)
이 궁녀들은 순제의 ‘비밀의 방’ 에 거주하며 순제 한 사람만을 위해 춤을 추고 노래를 연주했다. 허락받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그 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런 비밀의 방에 들어갈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에 한 명이 파랑(巴朗)이라는 순제의 먼 친척이었다. 파랑은 순제 앞에서 옆에 있는 여자를 잡아다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외설 행위를 하는가 하면, ‘벌거벗는 곳’ 까지 함께 했다. 그 방은 제지우가이(皆即兀該)라고 불렸는데, 이른바 서로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相與褻狎)는 뜻이다.
순제는 그 ‘거리낌이 없는 방’ 에서 춤과 노래를 듣다가 내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쾌락에 탐닉했다. 옆에 신하가 있어도 상관없었다. 아니, 되려 그 신하마저 같이 합세했다. 아무리 궁중 깊숙한 곳에서 꼭꼭 숨어 일을 치른다 해도 잡스런 소문이 밖에 나돌지 않을 리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조차 역겨워 했다.
다만 카아마는 탈탈과 은원이 있었다. 그와 탈탈은 복잡한 관계였다. 조정의 권한을 한 손에 쥐고 있는 탈탈이 카아마 같은 간신을 내버려 둔 이유도 그런 관계 때문이었다.
과거 탈탈이 전임 우승상 베르카부카에게 탄핵 받아 먼 곳을 전전하고 있었을 때, 순제에게 여러 차례 주청해 탈탈을 다시 불러들이자고 권한 사람이 카아마였다. 베르케부카가 카아마를 죽이려 들었기에 그 반대편을 불러들여 힘을 약화시키고자 했던 의도였다. 카아마는 이윽고 베르베부카 세력의 공격을 이기지 못해 멀리 초원으로 유배되었지만, 탈탈이 돌아오자 다시 조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은혜가 있었던 셈이다.
탈탈은 은원을 중요시하게 생각했다. 은혜를 입으면 잊지 않고 갚고, 원한이 있으면 그 역시 잊지 않고 갚았다. 그 사람의 질이 어찌 되었건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갚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었다.
혹은, 어쩌면 그가 순제라는 황제에게 아예 기대나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각지에서 반란군이 들끓는 상황이었지만 순제는 ‘반란이 일어났다’ 는 소식을 듣는 것마저 짜증스러워 했다. 보고를 하려거든 반군을 모조리 진압해 죽인 뒤에야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정도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도자는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지 보고를 받는 사람이 아니다. 순제의 무책임한 태도를 중신 오고손양정이 지적하며 고칠 것을 권했는데, 그는 탈탈의 오른팔이었던 사람이다. 탈탈 역시 그런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심하고 비뚤어지게 자란 순제 따위는, 그저 ‘비밀의 방’ 에 머물며 편안히 여색이나 탐내는 게 차라리 도움을 주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생각일까?
다만 약아빠진 카아마는 탈탈과 직접적으로 말다툼을 벌여 자극할만치 무모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미묘한 관계가 틀어지게 된 것은 탈탈의 측근과 카아마의 대립 때문이었다.
탈탈은 내정을 돌보면서 측근 정치를 펼쳤다. 자신을 비롯해 공백수, 여중백, 오고손양정, 벡테무르 등과 함께 대부분의 일을 의논하고 처리했다. 이런 체제는 한번 결정하면 일이 일사천리로 될 수는 있지만 몇몇 사람이 모난 짓을 하면 바로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측근들의 성향은 가지각색이었다. 오고손양정은 처신도 훌륭하고 겸손해 뭇사람들의 존중을 받고 특별히 적도 없었지만, 여중백 같은 사람은 교만하고 뽐내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성격에 흠이 있긴 했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 상황 판단을 잘하고 계책을 잘 내었기 때문에 탈탈은 여중백을 모사로서 신임했다. 그런 신임을 받은 여중백이 더욱 거드름을 피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상 여중백이 탈탈 본인이나 다름없으니, 대부분의 조정 관료들은 여중백이 무슨 안건을 내면 다들 옳다구나 하고 동의하기에 바빴다. 다만 카아마는 달랐다. 성깔이라면 밀리지 않는데다, 중서우승이라는 높은 관직에 더해 본인이 탈탈을 구했다고 생각한 카아마는 여중백 따위가 어찌 자신 위에 있을 수 있느냐며 바락바락 대들기 일쑤였다. 계속 시비가 벌어져 앙심이 생긴 여중백은 탈탈에게 달려가 카아마의 있는 죄, 없는 죄를 전부 이야기했고, 손을 써야겠다고 여긴 탈탈은 카아마를 좌천시켜 선정원사(宣政院使)에 임명했다.
이윽고 탈탈이 대군을 통솔해 원정을 떠나는 상황이 되자 불안해진 여중백은 카아마를 처치해야 후환이 없다고 조언했다. 앙심을 품은 카아마가 승상이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충분히 이유가 있는 말이었지만, 탈탈은 오랫동안 생각하더니 고개를 젓고 일단 이 문제를 유보하자고 말했다. 은원을 중요시하는 성격 탓에 죽이는 일까지는 망설였던 것이다.
대신 탈탈은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수도에 동생인 에센 테무르가 머무를 테니, 여중백이 이를 보좌하며 상황을 보고 행동하라고 지시를 내리곤 원정을 떠났다. 탈탈이 떠난 이후 여중백은 이번엔 에센 테무르를 찾아가 카아마에 대한 문제를 논의했다. 헌데 미적거리기는 에센 테무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과거에 카아마가 손을 써 자신이 공훈을 세울 기회를 마련해준 적이 있었기에 그런 사람을 척결하는 것은 꺼려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여중백의 카아마 척살 계획은 유아무야 되었지만, 그 소문 자체는 돌고 돌아 당사자인 카아마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안 그래도 앙심을 품었던 카아마는 그 말을 듣고 선수를 쳐야겠다는 생각을 굳이게 되었다.
제국 최고의 권력자인 탈탈을 제거할 수 있는 세력은 딱 하나밖에 없다. 바로 황실이었다. 카아마는 그중에서도 순제보다 황후인 기황후를 먼저 찾아갔다. 이유가 있었다.
얼마 전 카아마는 “기황후의 아들 아유시리다라가 장성했으니, 명실공히 황태자임을 증명하는 옥책과 옥보를 수여해야 하지 않는가.” 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탈탈은 “기황후는 2황후고 바얀 후투그 황후가 1황후로 살아 있는데, 만약 황후가 아들을 임신하면 일이 복잡해지지 않겠는가?” 라며 일단 일을 미루자고 했다.
이것은 이해관계보다는 원칙주의에 입각한 이야기였다. 바얀 후투그 황후가 아들이 있기라도 했다면야 모를까, 낳은 아들이 있지도 않는데 무슨 동아줄을 잡겠다고 장성한 아들이 있는 기황후를 멀리하고 1황후 쪽에 붙는 손해를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기황후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는 어린 시절 탈탈의 집에서 보육 되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으니 탈탈 입장에서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그런 문제를 모두 초월해서 일단 원칙에 따르자는 것이 탈탈의 생각이었다. 순제는 아직 젊고 당장 전국이 전란이 들끓고 있으니, 큰 난리를 일단 진압하고 나서 천천히 문제를 해결해도 늦지 않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아마는 이 논의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앞뒤를 잘라 기황후에게 이야기했다. 고려 출신의 기황후는 맨몸으로 천릿길 타향에 와 천신만고 끝에 황제의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의 존재로 인해 지금의 자리를 유지하는 여인이었다. ‘탈탈이 아들의 황태자 책봉을 저지하려고 한다.’ 는 말은 그녀에게 있어 세상 전부가 무너질 수 있는 중대한 일이었으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카아마가 순제 대신 기황후를 먼저 찾아간 것은 탁월한 계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황후를 필사적으로 만든 카아마는 이후 감찰어사 원사인부카(袁賽因不花)를 부추겨 탈탈 탄핵의 장계를 하루에 3번이나 올리게 했다. 탈탈에게는 불행하게도, 이런 일을 방지하라고 남겨 놓았던 동생 에센 테무르는 이 무렵 갑자기 몸이 아파 조정에 나오지도 못하고 있었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조정에서는 탈탈에 대한 탄핵안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황제와 사적으로 절친한 카아마가 옆에서 일을 부추기는 한편, 기황후와 그 영향을 받은 태자 아유시리다라까지 모두 한통속으로 탈탈을 죽여 없애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자 순제 역시 그 일을 허락했다. 마침내 탈탈의 탄핵이 성사되고 만 것이다.
그런 속셈으로 가득 찬 조서가 장사성 토벌군의 군영에 도착했다. 모든 제장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고 있는 가운데, 현장에서 탈탈을 수행하던 측근 참모 공백수는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탈탈에게 말했다.
“승상, 이 조서를 받으면 안됩니다!”
당황하지도 않고 덤덤하게 있는 탈탈을 향해 공백수는 필사적으로 청했다.
"예로부터 장수가 전쟁에 나가 있을 때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말아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승상께서는 대군을 이끌고 출동하시면서 비밀 지령을 받으신 바 있습니다. 그러니 그 비밀 지령에 따라 적을 먼저 토벌해야 합니다. 절대 조서를 받으시면 안 됩니다. 조서를 받으시면, 모든 만사가 다 끝나버립니다!"
이만한 권한으로 이만한 대군을 통솔하고 있는 탈탈이니 출정 전에 순제와 단독으로 만나 따로 지령을 받았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다. 설사 그런 지령이 없었다고 해도, 여기서는 ‘내가 비밀 지령을 받았다’ 고 우기고 조정의 조서를 ‘간신배들이 군주의 눈을 미혹시키고 사기를 쳐 나라를 해치고 있다’ 고 주장하며 물리치고 대군을 이끌고 수도를 공격해 처단하는 것이 몸을 지키는 상책이었다.
실패하면 역적이지만, 조서를 마냥 받아도 죽는 것은 마찬가지다. 더구나 탈탈의 손에는 수십만 제국군이 있다. 마음먹고 탈탈이 반란을 일으킨다면, 분명 제국을 두동강 내는 것은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면, 여기서는 무조건 반기를 들어야 했다.
탈탈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놀라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고,
그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황제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모든 측근들이 당황하는 동시에 격분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지만 그는 덤덤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마치 일이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사람 같았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천자가 나에게 조서를 내렸다. 따르지 않으면 항거하는 것이다. 그것이 임금과 신하 간의 도리이겠는가." (天子詔我而我不從,是與天子抗也,君臣之義何在)
슬퍼하며 눈물까지 흘리는 부하들을 뒤로하고 탈탈은 조서를 받들었다. 조정의 사자는 묵묵히 탈탈의 죄목을 나열했다.
'함부로 군사를 놀린 죄.
재물을 낭비한 죄.
출정한 지 3개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도적을 방관하고 있으며 토벌할 생각이 전혀 없는 죄.
이런 죄질이 모두 악랄함으로, 탈탈은 모든 관직을 삭탈하여 회안로에 구금한다. 그 동생 에센 테무르는 녕하로에 구금한다. 부대의 통솔권은 평장 타이부카(太不花)와 카아마의 동생 설설(雪雪) 등에게 맡긴다.'
죄목을 모두 경청한 탈탈은 순제가 있는 곳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 꿇어앉고 말했다.
"신은 몹시도 어리석고 우매함에도 불구하고 천자의 과분한 은혜를 받아 중요한 국정을 위임받았습니다. 그저 밤낮으로 전전긍긍하며 이기지 못할까 걱정하였습니다. 이러한 무거운 짐에서 풀어주셨으니, 폐하의 은총에 감읍하나이다." (臣至愚,荷天子寵靈,委以軍國重事,蚤夜戰兢,懼弗能勝。一旦釋此重負,上恩所及者深矣)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순제를 원망하지 않았다.
조서를 받은 탈탈은 그 자리에서 즉시 병마를 나눠 여러 장수들에게 관할 시키고, 자신의 군사 지휘권 역시 타이부카와 설설 등에게 위임했다.
여기저기서 승상, 승상 하며 부르며 말리려 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객성부사(客省副使) 합랄답(哈剌荅)은 벌떡 일어나 분기탱천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승상이 이렇게 가시면, 우리들은 어차피 남의 손에 모두 죽고 말 것이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오늘 승상 앞에서 죽겠소이다!” (丞相此行,我輩必死他人之手,今日寧死丞相前)
말을 마친 합랄달은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 자신의 목을 쳐서 자결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탈탈은 이윽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당초 조정의 명령은 탈탈을 회안로에 유배 보내라는 지시였다. 그러나 회안로에 도착하기도 전에 또 다른 조서가 도착했다. 죄인을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에 있는 어지나기(额济纳旗)로 옮기라는 내용이었다.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했던 탈탈은 죄인의 몸이 된 채 쓸쓸히 북쪽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어지나기에서의 생활도 오래가지 않았다. 조정을 장악한 신료들은 탈탈의 죄가 너무나도 사악하고 무겁다면서 더 큰 벌을 주라고 요구했고, 탈탈 가문의 모든 재산을 뺏어 거지로 만든 후 집안의 주요 인물들을 제국의 온갖 벽지로 흩어 보내 구금 시켰다. 탈탈 또한 어지나기에서 대리(大理)의 텅충(騰衝)으로 옮겨졌다.
어지나기에서 텅충으로 향하다
어지나기에서 텅충까지의 거리는 현대의 교통망으로도 3200km가 넘는 거리다. 한반도의 세로 길이가 950km이니 한반도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를 세 번이나 횡단한 만큼의 거리를 끌려간 셈이다. 어디까지나 현대의 교통망으로 그렇다는 말이니 실제로 탈탈이 이동한 거리는 그 두 배에 가까울 것이다.
고된 여정을 마치고 텅충에 도착하자 현지의 지부였던 고혜(高惠)가 탈탈을 맞이했다. 탈탈을 반갑게 맞이한 고혜는 넌지시 제안을 했다.
“승상을 죽이려는 암살자들이 없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유배지에서 1리 정도 떨어진 곳에 방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생활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암살자들이 나타나도 당장의 위협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용모가 추하지 않은 딸이 하나 있는데, 먼 길을 홀로 오셔서 적적하실 텐데 데려가서 귀여워해 주십시오.”
비록 지금은 몰락했지만 한때 위엄이 대단했던 탈탈을 존경하는 마음이었을 수도 있고, 혹 일이 묘하게 흘러가 그가 조정에 복권이라도 되면 크게 은혜를 베풀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탈탈은 일언지하에 그 말을 거절했다.
“나는 죄인이다. 어찌 감히 그런 것을 생각하랴?” (吾罪人也,安敢念及此)
탈탈의 단호한 태도에 아첨을 해보려던 고해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지금껏 자신이 보아왔던 사람 중에 이토록 떳떳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몇 번 더 제안을 해보던 고혜였지만 그때마다 탈탈이 극구 사양하자 그는 결국 고개를 떨구고 그냥 물러나고 말았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 조정에서 또다시 조서가 왔다. 이번에는 근처의 아경걸(阿輕乞)이라는 곳으로 옮기다는 이야기였다. 탈탈이 조정의 명령에 따라 이동하려고 길에 나서자, 갑자기 수십 기의 철갑군이 나타나 탈탈을 감쌌다.
“너희들은 누구냐?”
그때 철갑군 사이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다름 아닌 고혜였다.
“놀라지 마소서. 이들은 제가 보낸 병사들입니다.”
탈탈에게 아부하려고 했던 고혜는 지난날 탈탈이 일신의 안녕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딸을 취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 인품에 진심으로 감동했다.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어떻게든 탈탈을 돕기 위해 휘하의 철갑군을 보내 그를 호위하게 했던 것이다. 이번만큼은 탈탈도 고혜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다. 탈탈을 중심으로 수십의 철갑군이 철통같이 경호하며 이동하니 죄인의 행차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위엄이 넘쳤다.
그리고 그게 탈탈의 생에 마지막 행진이었다. 그 해 겨울, 쌀쌀한 바람과 함께 또 조정의 조서가 탈탈을 찾아왔다.
다만 여느 때와 달리 조서와 함께 동봉되어 온 것이 있었다. 다름 아닌 사약이었다.
마음의 결심을 이미 내렸던 탈탈은 기꺼이 그 사약을 들이 마셨다. 이윽고 대원제국 우승상이었던 사내, 탈탈은 그대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1355년 12월. 그의 나이 고작 42세로, 아직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도 많았던 한 인물의 죽음이었다. (11)
고우성 앞에서 탈탈이 조정의 조서에 무릎을 꿇고 이를 받잡았을 때, 순제는 궁중의 호수에 띄울 화려한 용 모양의 선박을 건조하는데 열심이었다. 다름 아닌 순제 본인이 선박의 모양을 직접 구상했다. 배의 길이는 36미터이고 폭은 6미터에 달하며, 뱃머리에는 그물로 만들어진 계단과 좁은 회랑, 전각이 있었고 후미에는 용의 몸통과 누각이 있었다. 뱃전은 오색찬란한 색깔로 칠하고 장식되었으며, 맨 앞에는 손톱 모양의 갈퀴까지 있었다. 황금 장식을 한 24명의 인부가 노를 저었고, 배가 한번 움직이면 뱃머리에 붙은 용의 눈과 입, 갈퀴와 꼬리가 모두 움직이는 구조였다. 궁전의 사람들은 그 화려한 모습을 보며 웃고 떠들면서 극락 같은 세상을 즐기는데 여념이 없었다. (12)
탈탈을 거침없이 해임할 수 있었던 건 어차피 승패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굳이 탈탈을 남겨둘 필요가 없다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카아마의 동생 설설이 일군을 이끈 것도 다 잡은 승리를 자기들 손으로 거두어 전공을 올리고 싶다는 욕망을 보여주는 인사조치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황은 그렇게 안일하고 여유롭지 못했다.
수십만에 달하는 대군은 총사령관의 전쟁 중 해임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심각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 대신 부임한 장군들은 이런 경천동지의 대군을 지휘하기엔 그릇이 맞지 않는 인물들뿐이었다. 부대의 혼란이 제때 수습하지 못하고 되레 불안감만 커져만 가고 있었던 그 순간, 장사성은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안에 틀어박혀 죽은 듯 지내던 장사성은 갑자기 성문을 열고 뛰쳐나와 역습을 가했다. 그동안 공세만 취했던 원나라 군은 생각지도 못한 반격을 당하자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휩쓸렸고, 이를 수습해야 했던 장수들 역시 우왕좌왕하며 손발이 맞지 않았다. 결국 그토록 많았던 대군은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이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적의 숨통을 조여놓고 목숨을 끊을 날만 기다리던 원나라 군대는 거센 반격을 막아내는 것만도 급급했으며, 패주한 대군 중 일부는 홍건적이나 장사성의 휘하에 들어가 오히려 적의 세력을 불려주는 역할을 했다. 적의 노도와 같은 거센 반격을 방어하느라 고생했던 건 고려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고려군에는 30대의 젊은 무장 최영이 있었다.
최영은 강소성 전역을 무대로 한 이후의 전투에서 엄청난 숫자의 적군을 맞아 상대하며 분전했다. 회안성(淮安城) 전투에서는 무려 8천 척이 넘는 함선에 탄 적군이 개미 떼처럼 강을 거슬러 오며 거센 공격을 퍼붓자 필사적으로 성을 방어하기도 했다. 전투가 어찌나 아슬아슬했던지, 최영 본인도 수차례 적의 창에 찔려 피투성이가 될 정도였다. 이런 분전 끝에 어떻게든 적의 강렬한 기세를 조금 누그러뜨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본질적으로 이 싸움은 그들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싸움이었다.
셀 수도 없는 숫자의 고려군이 머나먼 이국의 땅에서 그 어떤 의미도 없이 개죽음을 당하고 쓰러졌다. 그들의 전투에 단 하나의 의미가 있다면, 지옥 같은 사지에서 간신히 살아돌아온 이들이 말해준 생생한 '제국의 현실' 이야기가 고려 조정에 널리 퍼졌을 것이라는 정도다. 일대의 개혁을 통해 지난 100여 년간 고려를 암울하게 지배해왔던 몽골의 그림자를 떨쳐 버리려는 공민왕에 있어, 이는 의미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전투가 끝났다. 원나라 군은 대패했고, 장사성은 대승을 거두었다. 무너져가던 제국은 자신이 낼 수 있었던 모든 여력을 쥐어짜내고도 완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는 원말의 무수한 농민봉기 중 가히 최대의 승리였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계기는 말할 것도 없이 탈탈의 해임에 있었다.
원사 탈탈 열전에서는 탈탈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탈탈은 의젓하고 늠름하여, 수천수백여 명 사이에 있어서도 능히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당당한 사람이었다. 그 기량은 크고 지식은 심원하여 인품의 깊이는 한이 없었다. 사직을 지키는 큰 공훈을 세워도 결코 자랑하지 않았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어도 뽐내지 않았고,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여색과 유흥을 멀리했고, 훌륭한 사람을 흠모하고 선비는 예로서 대하였으니, 그 모두는 그의 천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임금을 섬기매 한 번도 신하의 절개를 잊지 않았으니, 옛날의 절도 있던 대신이라도, 어찌 탈탈 보다 나을 것인가."
탈탈이 당대 권세가이자 사실상 독재자나 다름없는 위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단 한 번도 임금을 섬기는 예의를 잊지 않았다’ 거나 ‘높은 자리에 올라도 결코 뽐내지 않았다’ 는 평은 정말로 이례적인 표현이다. 엄청난 권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그의 선명함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는 뜻이니 말이다.
다만 같은 글에서 탈탈의 단점을 평하길,
"단지 소인배들에게 혹하고, 사사로운 원수를 갚는데 급급하였던 것에 대해서만은, 여러 군자들이 비판했던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탈탈 본인의 선명함에 대해선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지만 그 측근들은 그렇지 않았다. 측근들을 너무 신임하고, 또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지나치게 개인의 은원에 얾 매였던 점이 탈탈의 단점이었다. 결국 그런 측근에 대한 신임, 은원에 대한 얾매임이 탈탈 본인을 파멸시키고 말았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원을 대신하게 되는 명나라는 먼 훗날 요동의 떠오르는 대적 청나라와 전쟁을 펼쳤다.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런 명나라에도 웅정필이나 원숭환 같은 명장들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외적을 막아내는 장성이었던 이런 명장들은 적의 손이 아닌 내부의 분란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였고, 결국 명나라는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후세 사람들은 그런 말기의 명나라에 대해 “스스로 장성을 무너뜨렸다.” 고 평했다.
원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장성은, 그들의 손에 의해 무너져 내렸다. 이에 대한 후회는 굳이 먼 훗날로 갈 것도 없이, 탈탈이 변경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당한지 10년쯤 지난 시점에 이미 절정에 달해 있었다. 명나라의 북벌 군이 노도와 같이 몰려오던 1366년, 조정 대신들은 지난날 탈탈을 경솔하게 죽였던 것을 반성하자며 이런 주청을 올렸다.
"간사한 자들이 대신을 모함해서 해치니, 적을 앞에 두고 장수를 바꾼 꼴이었습니다. 우리의 군사가 비루하게 된 것이 바로 그때부터이며, 자금과 양식이 고갈되기 시작했던 것도 그때부터이며, 도적이 난립하고 백성이 도탄에 빠진 것도 그때부터였습니다. 만일, 탈탈이 죽지 않았다면, 천하가 어찌하여 오늘 같은 이 지경이 되었겠습니까? 부디 탈탈에게 왕작을 내리시고, 시호를 정하여 공신의 칭호를 내리소서!"
만일, 탈탈이 죽지 않았다면, 어찌하여 천하가 이 지경이 되었겠는가. 그 말에 조정에서는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동의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무너진 장성을 다시 쌓아 올리는 것 역시 막연한 일이다. 탈탈의 열전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이 난다.
‘그러나 국가에 변란이 넘쳐나, 미처 그런 조치를 행하기도 전에, 먼저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然以國家多故,未及報而國亡) (13)
(1) 박지원, 열하일기
(2) 원사 187 오고손양정 열전
(3) 고려사 세가 공민왕 3년
(4) 고려사 채하중 열전
(5) 고려사 염제신 열전
(6) 원사 138 탈탈 열전
(7) 고려사 세가 공민왕 3년
(8) 조익, 이십이사차기
(9) 원사 205 카아마 열전
(10) 원사 순제본기 권 43
(11) 원사 138 탈탈 열전
(12) 원사 순제본기 권 43
(13) 원사 138 탈탈 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