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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차게 준비하고 실행된 독일군의 하계 공세는 일견 대단해 보였고, 돈 강의 서부 대부분을 석권하는데 성공하긴 했습니다만, 사실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목표를 한 지역과 보로네시 서부는 접수했으되, 적 병력을 섬멸하여 방어선에 구멍을 뻥 뚫어놓는다는 전략적 - 다분히 작전술적이긴 합니다만 스케일이 스케일이기도 하니 전략적이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 같군요 - 목표가 실패로 돌아갔고, 여기에 꼭지가 돈 보헤미아의 상병은 페도르 폰 보크를 해임해 버립니다. 그래도 대충 목표가 정리되었다 싶었던 히틀러는 남부 집단군을 A집단군과 B집단군으로 나누었습니다.
어쩌면 스타크래프트 같은 전략 시뮬레이션을 즐기시는 분들이라면, 지난 지도를 자세히 놓고 보면 의아한 점이 한둘이 아니셨을 법도 합니다. 고래로부터 병력의 집중 운용은 대전략을 이끌어 감에 있어서 필수적인 스킬이죠. 물론 한 방에 대병력을 들이받고 망하는 곤양 전투나 낙곡대전, 비수대전 등등 특이 케이스가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만, 기본적으로 병력을 둘로 나누는 것은 금기 사항입니다. 오죽하면 손자병법에서도 적보다 병력이 두 배는 되어야 분리해서 양동작전을 벌일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손자병법 모공편을 참조하세요). 그런 점에서 보면 남부 집단군을 둘로 나누어서 각각 스탈린그라드와 캅카스로 진격하기로 한 히틀러의 판단은 (어느 한 쪽으로 몰아서 공세를 펴도 이길 가능성이 있을지 없을조차 미지수라고 할지언정) 완벽한 오판이라고 봐야겠죠. 적을 완전히 섬멸해서 방어선에 구멍이 뚫린 상황이라 상대적인 공간에서 우위를 점하는 뭐 그런 상황이라면 몰라도,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이 포위 섬멸은 이미 보로네즈에서 소련군이 병력을 물린 직후에 물거품이 되었거든요. 뭐 하긴, 애초에 공세를 한다는 것 자체가 오판이었지만요.
게다가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제4기갑군 - 1942년 1월 1일자로 각 집단군 예하의 기갑집단(Panzergruppe)이 기갑군(Panzerarmee)으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 의 동선인데, 저거, 보로네즈에서 로스토프 후방의 볼고돈스크(Volgodonsk)까지 이동하는 동선이거든요. 그 동선의 거리가 얼만지 아십니까? 무려 600 km가 넘습니다. 말이 600 km지 저거 민스크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700 km)에 육박합니다. 그 긴 거리를, 기갑군이 움직였죠. 기갑군이요. 보병 말고. 조금만 움직여도 기름을 콸콸 먹어대는 바로 그 기갑군이고, 바로 그 기름이 모자라서 전쟁을 계속하네 마네 목표를 어디로 잡네 마네 막 그러는 판인데 기갑군이 이런 식으로 아까운 기름을 낭비하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 동선을 누가 지시했겠습니까? 뻔하죠. 콧수염 난 보헤미아의 상병이죠. 하여간 히틀러는 이런 곳에서 묘하게 상황을 오판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그렇다고 공격을 막아야 할 소련군의 상태가 좋았냐 하면 그것도 또 아닙니다. 비록 전년도의 민스크나 키예프 등지에서 걸려든 엄청난 대재앙에 비할 바 없이 적은 인원 - 약 5만 명 남짓 - 만 포위망에 걸려들고 병력을 온존하는 데 성공한 소련군이었기는 합니다만, 하필이면 철도망이 여기저기서 박살난 터라 제때 병력의 충원을 기대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는 게 일단 문제였죠. 게다가 더 큰 문제가 소련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오늘 하도록 하죠. 오늘은 지도가 별로 없을 겁니다.
지난 글 말미에 제가 로스토프를 언급했죠. 정확히는 로스토프나도누(Ростов-на-Дону, 영어로는 Rostov-on-Don)입니다. 돈 강의 로스토프죠. 이 로스토프보다 훨씬 오래 된 로스토프가 야로슬라블 주에 있거든요. 인구는 야로슬라블의 로스토프가 3만 남짓인 데 비해 로스토프나도누는 무려 백만에 달하고, 러시아에서 열 번째로 큰 도시이며, 2018 월드컵 경기도 열릴 예정이지만요.
말씀드렸다시피 이 로스토프라는 지역은 캅카스를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교두보였습니다. 이 캅카스 지역이 생각보다 중요한 게, 지금 있는 나라들이 워낙 가난한 터라 잘 상상이 가지 않으시겠습니다마는... 곡물도 있고, 자원도 있고, 특히 석유가 풍부하여 소련 전체 석유 공급량의 몇십 프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름이 펑펑 나오는 곳이거든요. 하여간 전쟁 경제라는 측면에서는 제법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던 히틀러가 이 곳을 보면서 군침을 질질 흘리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7월 15일의 로스토프입니다. 앞선 글에서 보여드린 바 있죠. 제6군과 제4기갑군이 소련군의 배후를 차단하고, 소련군의 남부 전선군을 독일군 제17군과 제1기갑군이 로스토프 방면으로 몰아넣는 모습입니다. 돈 강의 지류인 도네츠 강(Donets River)을 따라 대치하던 7월 7일에 제1기갑군이 기습적으로 '회전문'을 돌리기 시작, 로스토프 북쪽을 돌파하여 시계방향으로 크게 우회하면서 만들어진 진형이 대략 이렇습니다. 쉽게 말해서 기습 돌파 후 갈라치기였죠. 그래서 소련군 제9군과 제24군이 지도상으로는 독일군 영역 내에 있는 겁니다. 반격은 역시 실패로 돌아갔고 말이죠.
A집단군이 로스토프에서 공방전을 벌이는 동안, A집단군의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 B집단군도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바로 동쪽으로의 진격이었죠. 이전까지는 양군이 돈 강의 지류인 치르 강(Chir River)에서 대치하고 있었는데, 7월 20일에 제6군이 동쪽으로 진격을 개시한 것입니다. 엄청난 피를 흘려 가며 진격하는 것이기는 했습니다만 소련군 제62군과 제64군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이를 막기 위해서 소련군 제4전차군과 제1전차군이 황급히 달려와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돈 강 너머로 밀려나는 것까지는 결국 막을 수 없었죠. 이건 8월의 일이라 약간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죠. 아래는 이 때의 지도입니다.
한편 로스토프에서 버티는 소련군은 1941년에 그들이 버텼던 것만큼의 능력을 보여줄 수는 없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보여줄래야 도저히 보여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하는 게 좀더 정확하겠네요. 이미 지속적인 전투로 인해 가뜩이나 기진맥진해 있는데다가 스탈린은 주력이 모스크바인 줄 알고 병력의 다수를 북쪽으로 빼돌린 판이었으니 이래저래 버티는 게 기적이었겠죠. 그렇게 로스토프가 허무하게 독일군의 손아귀에 떨어집니다.
필사적인 방어는 재현되지 않았고, 소련군은 공황에 빠져 로스토프를 버렸습니다. 그럴 만도 했죠. 흠, 직접적인 비교는 무리겠지만, 가상으로 한국에서 전쟁이 벌어졌다고 상정하면, 엄청난 피를 흘려 가며 서울을 간신히 지켜 놓았더니 멀찍이 부산이 북한의 수중에 떨어져 버렸다는 느낌일까요? 장병들이 느낀 패배감과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더구나 로스토프는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유일하게 소련군이 성공적으로 탈환해 낸 도시였기 때문에, 전략적인 면모를 차치하고서라도, 심리적으로 소련군 및 인민들이 가지는 일종의 상징성이라는 것이 어마어마한 도시였습니다. 그런 로스토프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어이없게 함락당한 겁니다.
당연히 이 소식은 소련 전체를 강타했습니다. 그래도 바르바로사 작전 종결 이후 이 때까지의 소련군의 퇴각은 질서라도 있었는데, 로스토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제는 아예 장비를 내동댕이치고 줄행랑을 쳤습니다. 붉은 군대 전체에 사기 저하가 빠른 속도로 퍼졌고, 소련 전체가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들어 신경망이 마비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국 스탈린은 다음 카드를 꺼내들어야만 했습니다.
명령 227호.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마라.
문제는, 그렇게 소련군이 필사적으로 저항한다고 해서 독일군이 진격을 멈춰줄 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