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굵은 기술서를 번역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번역을 업으로 하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러니까 와인 아틀라스라거나 위스키 대백과 같은 책들 말이다. 그는 언젠가 요리에 대한 굵은 책을 번역했고, 나는 언젠가 위스키에 대한 두꺼운 책을 번역했다. 그런데 이런 책을 번역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시대인가.
이십 년 전이라면 약간은 더 대단한 의미부여를 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루트가 한정되어 있고, 한국의 전체적인 외국어 구사도도 떨어지며, 한국의 기술이 세계에 비해 많이 느린 시대였다면 말이다. 내가 이 두꺼운 위스키 책을 번역했어. 이 책은 업계의 고전이 될 거야. 술에 관심이 있는 대중들이나 관련 업자들이라면 모두 이 책을 사보게 될 거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의'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겠지(그리고 나는 부자가 될거야).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최신의 고급 정보를 읽을 수 있는 시대에 서적 형태의 기술서는 초중전차 같은 물건이 되었다. 두껍고 멋지며 남자의 로망이 담겨 있지만 느려터졌다. 활자화된 고급 기술 정보를 담고 있는 매체로서의 책은 이제 별 의미가 없다. 외국어? 많은 훌륭한 바텐더들이 많은 공학자들이나 많은 사회학자들처럼 원서를 읽는다. 물론 대체로 바텐더들은 공학자나 사회학자보다 외국어에 덜 익숙하지만, 자기 현장의 책이라는 건 외국어로 읽는 게 아니잖는가. 현장의 감으로 읽는 거지. 그들은 직접 혹은 주변에 외국어 잘 하는 동료들의 도움으로 원서를 읽는다. 그리고 한국의 바 업계 기술 수준은 잘 나가는 외국의 수준에 엄청나게 밀리지는 않는다. 한국의 '새로운 바람'을 만들기 위해 굳이 번역된 외국 기술서를 읽을 이유가 없다. 그냥 하던 대로 해도 잘 될 것이다.
물론 '고작' 번역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번역은 대단한 일이 아니니까. 이런 시대에, 내용을 '조금 더 쉽게 읽을 수 있게끔' 도와 주는 정도면 할 일을 다 한 것이다. 왠만큼 외국어에 익숙하다 해도, 어쨌거나 한글로 된 걸 읽는게 외국어로 된 걸 읽는 것보다는 편하니까. 그래도 가끔 아쉬운 것은 할 수 없다. 번역이 대단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기분도 좀 더 좋아질 거고, 지갑 사정도 좀 더 좋아질 텐데. 외국어 구사자의 수가 폭증하며, 번역의 단가는 해마다 급격하게 내려가고 번역의 질도 그에 비례해 내려가고 있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문학 같은 완전한 언어-전문 분야는 별 상관 없겠지만 내가 그걸 할 수준은 아니고. 그냥 내 관심분야나 내 업계 일이나 좀 하면서 돈도 좀 만지고 싶고 보람도 좀 만지고 싶고 그런 정도인데, 점점 더 요원해진다.
그런데 뭐 그래봐야 번역이니. 애초에 그렇게 대단한 의미를 찾을 필요가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좋은 전문 기술서를 잘 번역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냥 싸고 빠른 번역이 최고다. 좀 부정확해도 상관 없다. 라프로익을 라프로에이그라고 읽는다고 해서 세상에 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많은 미국놈들이 그렇게 읽고 있으니, 증명된 문제다. 이너 헤브리디스 제도의 위치라거나, 증류기의 명칭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보름쯤 되었나. 한달쯤 되었나. 모르는 사람이 가게에 와서 대뜸 고맙다는 말을 했다. 뭐야. 누구야. 나는 저 사람이 고마워 할 만한 일을 한 기억이 없다. 그리고 그는 가방을 뒤적거리며, 책을 한 권 꺼내 선물했다. 사진의 책이다. <열정적 위로, 우아한 탐닉> 오. 제목이 멋있다. 그는 이 책을 쓰면서, 내가 번역한 위스키 대백과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애초에 한국에 '정리된 형태의 술에 대한 자료'가 너무 적어서 외서 쌓아두고 작업하느라 피곤했는데, 싱글 몰트 부분은 이 책 덕에 시간 낭비 없이 잘 진행할 수 있었다고. 고맙다고 했다.
그는 몇 년 전 신해철과 술을 마시다가, 언젠가 예술가와 술에 대한 책을 꼭 쓰겠다고 약속했다고 했다. 그리고 신해철은 죽었고, 그는 책을 다 쓰지 못해 부채감에 시달리고. 그러다 결국 책을 완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뭔가 이렇게 쓰면 책 광고같은데, 아무튼 그는 '이 책으로 나는 돈 하나도 못 벌어요. 인디음악 진흥에 관련 사업에 인세 전부 기부하기로 했거든요'라고 말했다. 나도 이득이 없고 그도 이득이 없으니 이런 책이 있다고 알리는 정도는 광고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쉽게도 책은 아직 한 페이지도 읽어보지 못했다. 책을 받은, 보름 전인지 한달 전인지부터 일이 매우 바빴다. 얼마나 바빴냐 하면, 나는 대체로 내게 일어난 좋은 일에 대해서 길게 자랑하는 편인데 그 자랑도 한 달을 미룰 정도로 바빴다. 당신에게도 책을 쓴 사람에게도 해야 할 일이 많은 것처럼 내게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하지만 아마 좋은 책일 것이다. 음악과 술은 언제나 재밌는 소재니까. 이제 천천히 읽어 볼 생각이다.
고마움이라. 내가 더 고마웠다. 내 작업이, 누군가의 책 쓰기에 도움이 되었다니. 책과 초중전차 페티시가 있는 내게 이런 보람이란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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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텐더로 일하기 전에, 대학원을 다니며 논문을 게재한 적이 있었다. 논문이 통과되고 나서 '논문을 쓸 때는 딱 두 번 즐겁지. 처음에 논문 구상할 때 5분. 그리고 통과된 직후 5분. 나머지는 다 고통이야.'라는 대학원생 농담이 무슨 말인지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한참 나중에 알았다. 논문과 관련하여 가장 즐거운 때는, 구상할 때의 5분도 통과된 직후의 5분도 아니라는 걸. 가장 즐거운 5분은, 내 논문이 인용되었다는 걸 알고 난 직후 5분이라는 것을. 학문이건 역사건 술이건 모든 사람의 일은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다. 무수한 것들 위에 만들어낸, 내 무엇 위에 무엇인가가 쌓였을 때의 성취감이란 꽤나 굉장했었다.
아. 나는 내 논문을 인용한 논문들을 읽어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읽어볼 생각은 전혀 없다. 나는 논문을 쓰면서 수많은 논문들을 인용했고, 모두 존나 깠다. 그게 인용의 법도이지 않은가. 아마 내 논문도 인용되면서 존나 까였을 거고, 그 참상을 굳이 찾아보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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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하게 보람찬 일로, 코리아 베스트 바 100 리스트의 말석에 이름을 올렸다. 리스트의 '티읕' 부분을 보고 없어서 에이 떨어졌네 했는데, 손님이 '비읍' 파트에 있는 이름을 보여주었다. 아쉽게도 50리스트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그래도 내가 존경하는 바텐더들이 있는 좋은 바들 사이에 이름을 올린 건 역시 기분 좋고 보람찬 일이다. 더 노력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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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큰토션과 발베니.. 약간 부드러운 톤에 황금같은 밸런스를 지닌 친구들이죠. 비슷한 취향으로 추천드릴 만한 위스키는 글렌킨치, 야마자키, 크라간모어 정도가 당장 떠오르네요. 하지만 글렌킨치는 조금은 너무 부드러운 녀석이라 입에 안 맞으실 수도 있고. 야마자키는 일본 위스키 대란 이후로 가격이 미쳐 날뛰고 있다는 게 문제. 역시 나중에 기회가 되신다면 크라간모어 한잔 드셔보기를 추천합니다. 좋아하실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