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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5/28 22:02
사복은 과부가 남편도 없이 태기를 가져서 낳은 아이로서(처녀와 과부를 제외하면 누구와도 비슷하네요.),
세상에 쓸모있게 말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니, 뱀 한마리와 같구나! 라며 붙여진 별명이 아닐까 합니다. 동시에, 사복은 말을 하지 않았고,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원효를 만나서는 뜻을 다 전했고, 그리고 나아가서 원효의 말이 번삽함을 들어서, 말을 깎은 데에다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직접 화자로서 전한 바가 없습니다. 글에서 원효보다도 고차원적인 깨달음을 현현하는 존재, 즉 불법 또는 진리로 나옵니다. (원효가 불법,진리 그자체에 예를 표할 수 있지만, 불법,진리는 원효에 인사할 수 없죠.) (한 편, 기독교에서는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아야 천국에 갈수 있다고 하고, 노자에서는, 덕이 많은 사람은 어린아기와 같은 상태라고 하듯이, 사복은 충분히 진리에 닿아있을 가치가 있죠.) 하지만, 그를 낳은 어머니는 깨달은 사람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뱀 한마리 같은 존재(현실에는 쓸모가 별로 없는 진리)를 자신이 '낳아서' 죽을 때까지 '기르고' 죽게 되지요. (어쩌면 도를 닦는 평범한 사람들이, 죽을 때 까지 그 도의 의미를 깨치지는 못하고, 추구만을 하다가 죽음을 비유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복은 어머니를 '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암소는 경을 이해하진 못하지만, 경을 싣고 다닌 공덕이 있죠. 우리의 육신같은 존재이지요. 사복의 어머니란 존재는 깨달음을 육체적으로 낳았지만 스스로는 깨달음이 없이 숨을 다했고,, 거기에 대해 원효는 사회적으로 스님으로서 포살(죄를 고백하고 사함)으로 계를 받아 불자가 되고 깨달음으로 가도록 하는걸 사후적으로 도와주는 모습입니다만, 이 이벤트를 통해 가장 핵심적으로 전하려는 메시지인 [죽고 사는 것은 괴롭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 뜻은 [세상에 나지 말라. 왜? 태어난 것은 죽으므로, 죽는 것이 괴롭다. 죽지 말라. 왜? 다시 태어나는 것이 괴로움이다.]는 것을 두번에 걸쳐 강조하는 효과입니다. [죽고사는 것은 괴롭다] 만 보고서, 태어남이 곧 죽음으로 이어지고, 죽으면 또다시 태어나는 그런 모든 윤회전생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바로 알지 못하는 중생(이 역시 여러번 태어난다는 뜻의 일반인이란 평범한 생활속의 불교 단어이죠)을 위하여 읊어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마지막에 세번째로 이 삼국유사의 화자인 일연이 다시 한 번 그 내용을 또 찬에서 풀이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데, [나고 죽는 것이라는 고통은 원래 고통이 아니다]는 것이며, 연화장 세계가 넓디 넓다고 말해줍니다. 연화장 세계는 아마도 묘법연화경(대승불교의 경전이며 남묘효랑게교(나무법화연화경의일본발음)의 주경전이죠)의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그냥 우리 세계 그 자체입니다만, 모든 사람들이 각자가 불성을 발현하여 깨닫는 순간 그 각자의 세계는 깨달음의 세계가 되는 무대임을 알려준달까요. 아예, 사복은 부처님은 사리수 라는 나무 아래에서 열반하셨는데, (불교에서 여러 부처님은 각자 다른나무밑에서 깨달음을 얻고, 각자의 나무 밑에서 열반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보리수에서 깨달음, 사라수 아래 열반 같이) 본인의 어머니/경을 끌었던 암소/지혜의 호랑이는 부처와도 같이 여기에서 다시 연화장세계로 들어간다고 표현해 줍니다. (그 활리산 뒷산 숲이라는 공간은 원효는 지혜의 호랑이가 갈 지혜의 숲이라고 하였지만, 실상은 뒷산 숲, 평범한 일상의 공간 현실하는 공간이 곧 특별한 공간이 되는거죠) 그렇게 해서 이 일화 속에서 혼자서 깨달음, 진리를 현현하고 있는 사복은 어머니의 장사라는 이벤트를 통해서, 잠시 생과 사 간의 간격을 띠풀 사이로 열어서 한 번을 보여주고, 다시 빠져들어가서 우리 일반인에게는 닿지 않는 비현실 이자 불교의 현실 세계 그자체 속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고는 이 진리의 행적, 일화를 원효대사라는 화자와, 또 나아가서 일연이라는 두 스님을 통해서 읊어 전해 주게 됩니다. 지금은 이 모든 이야기를 증명할 수단이라고는 그 묻힌 자리라는 절터만이 남아있고, 신이한 풍설만이 세상에 남아져 있는 상황이지만, (어쩌면, 어떤 과부가 거동 불편한 '사복'을 키우다 홀연히 아파하다 죽었는데, 사복도, 과부도 없으니, 사람들이 괴이히 여기다, 원효대사가 선불교적인 문답으로서 내가 어머니를 계를 주고, 그 사복이 어머니를 모시고 연화장세계로 갔다!고 이야기하여 사람들이 기담으로 알고있었을수도 있겠죠.) 이러한 설화의 진정한 의미라는 것은 죽는 다는 것이 괴롭고, 태어난다는 것도 괴롭고(사복의 모습은 괴롭죠.), 아예 이 죽고 태어남 자체도 괴롭다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이를 깨닫는 순간에는 괴로움이 아니게 된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려는 것임을 일연이 해석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거라고 보여집니다. 삼국유사의 다른 부분들도 그런 선불교의 깨달음이 깃든 내용들이 원래 많죠... 글쓴이 덕분에 재미있게, 삼국유사 한 부분을 보았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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