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정의롭지 않습니다. 어딘가에서는 분명히 그늘이 지고 그 안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죠. 중요한 것은 이를 얼마나 빨리 알아채고, 다친 이들을 위로하며,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가해자들에게 응당한 조치를 취하느냐 입니다. 이 과정에서 언론은 빠질 수 없습니다. 모든 반응의 선행지에는 "알린다"는 행위가 자리합니다.
미국 카톨릭계에서 한 신부가 아동을 성추행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심각한 일인데 그 피해자 수는 자그만치 80명입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은 생각만큼 이슈가 되지 않죠. 보스턴 글로브 지에 새로 온 편집장 마티 배론은 이 사건을 파헤쳐보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보스턴 글로브 지의 에이스인 스포트라이트 팀이 탐사를 맡게 되죠. 이들은 사건을 파헤치면서 알게 됩니다. 이 사건은 단 한명의 일탈이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가 놀라운 것은 후반까지 그 어떤 자극도 첨가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먼저 스포트라이트 팀의 인물들은 크게 두드러지는 특색이 없습니다. 이들은 그저 열심히 일하고 취재하러 다닙니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95% 이상이 일에 관한 것이고 취재 도중 대단한 사건이나 갈등이 빚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심각한 상황에서 진지하게 일 하는 사람들일 뿐인거죠.
영화에는 피해자들이 존재합니다. 아픈 진실의 흔적을 따라가는 영화이니만큼 이 부분은 어떤 극적 효과가 들어갈 수 밖에 없지요. 그러나 플래쉬백으로 피해자들의 참상을 현재형으로 열거하는 장면 따위는 없습니다. 영화는 어디까지나 목격자, 알리는 자의 입장에서 거리를 유지하고 함부로 삶을 전시하지 않습니다.
영화에는 상황을 악화시킨 주범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이들을 섣불리 악한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비열한 이기주의자, 싸이코패스 같은 극단적 유형의 사람들이 아니지요. 일을 하고 돈을 벌다보면 당연히 때가 묻게 마련이고 어떤 이들은 조금 더 무감각해질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판단하고 심판하려 하지 않습니다. 훨씬 더 성숙한 자세로 모두의 책임을 이야기하죠. 분노를 소비하는 대신 사유하고 통감하게 만듭니다.
언론인들을, 언론이 주목한 사건을 바른 언론의 자세로 만든 작품입니다. 별 다른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다 열정적이고 덜 타락한 사람들이 쫓아다니는 이야기지요. 엄청나게 특출나지도, 거대한 왜곡 없이도 영화는 세상의 그림자와 그 곳을 밝히는 사람들을 평어체로 서술합니다. 물음표도 느낌표도 쓰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힘있게 말 할 뿐입니다. 진실을 진실되게. 소재와 방법론 모두를 이렇게 고루 잡아내는 작품에 과연 아카데미라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저는 여러가지로 한국 영화를 생각하게 되더군요. 한국에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면 아마 전형적이고 다 구별되는 캐릭터들로 팀을 꾸려서 좌충우돌 웃음과 눈물이 섞인 정의분노극이 나왔을 겁니다. 비빔밥 아니면 뭘 만들지 못하는 한국영화계의 현실이 참 암담하군요.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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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일을 하고 돈을 벌다보면 당연히 때가 묻게 마련이고"라고 생각하는 순간 자기합리화가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합리화가 아집과 성취가 만나 도덕적 일탈 혹은 법률상 범죄로 연결되기 쉽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물론, 시작과 결과의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습니다만, 진행됨에따라 피해자는 반드시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