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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10/24 23:49:38
Name 아케미
Subject [일반] 야구가 뭐라고, 짝사랑이 뭐라고
※ 개인적인 하소연이 섞인 평어체의 글입니다. 원치 않으시는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5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3차전이 벌어지던 수요일, 나는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혼자 야근하면서 한쪽 모니터에 네이버 중계창을 띄우고, 책상 위에는 카카오톡 창이 켜진 스마트폰을 얹어 놓고 있었다. 경기는 저 양반들이 내일 얼마나 못 치려고 지금 저렇게 몰아치나 싶을 정도로 NC 타자들이 맹타를 휘두르고 있었다. 카톡 알림이 울렸다.

- 야구가 뭐라고
- 인생이 고통인가
- 연애나 하고 싶다

내용을 본 순간, 나는 당장 전화를 걸어 이 메시지를 보낸 사람에게 악을 쓰고 싶다는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러야 했다.
나랑 연애하자고 하면 안 할 거잖아!!!!!


그는 나의 대학교 3학년 1학기를 지배한 사람이었다. 라고 쓰고 보니 별 거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맞아, 별 거 아니었지. 이런저런 일들을 같이 하고, 진지한 이야기와 시덥잖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누며, 많은 시간들을 보냈지만 - 그뿐이었으니까. 항상 목구멍까지 차오른 진심을 억지로 눌러담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을 뿐이니까.
나와 그의 사이에는 항상 일정한, 굳이 말하자면 18.44m 정도의 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결국 그에게 150km 돌직구는커녕 패대기 시구조차도 던져 보지 못하고 도망쳤다.

내가 교환학생을 갔다가 돌아와서 졸업을 하고 백수가 될 동안 그는 군대에 가 있었다. 연락을 하려면 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하지 않았다. 제대해도 얼굴 볼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에게 혼자 매달려 있기에는 지금 내 인생이 너무 암울했다. 시험은 떨어지고, 서류는 통과되지 않는데, 짝사랑이 웬말인가?
무수한 좌절 속에서 나를 구원해 준 것은, 그해 1군 리그에 올라온 어느 신생팀의 야구였다.

고백하건대, 나는 한때 '절대 야구 팬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피지알을 오래 하면서 조금씩 접한 야구 팬덤은 너무 험악(?)해 보였고, 리그에는 사건사고도 많아 보였다. 베이징올림픽 야구를 보긴 했지만 그렇게 집중해서 보지는 않았고, 그냥 와 멋지다 하고 끝이었다. 아마 송지선 아나운서 사건 때 하루 종일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그의 모습도 내 생각에 한 몫 했으리라. 도대체 야구가 뭐라고 사람들을 이렇게 괴롭히는가?

그러나 사람 마음이 그렇게 생각대로 된다면 덕통사고라는 말이 생길 리 없다.
피지알 유머게시판에서 우연히 스퀴즈플레이 끝내기 동영상을 보고 NC 다이노스에 관심이 생긴 나는, 2013년 5월 17일 볼이 빨간 동갑내기 투수의 완투패를 보고, 그들의 야구와 사랑에 빠졌다.
이제 막 '심장이 뛰기 시작'해, 대패 석패 역전패를 골고루 당하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히 나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이제 막 학교를 벗어나 취업의 문 앞에서 좌절을 거듭하는 나에게 위로와 힘을 주었다. 이렇게 헤매고 깨지고 있지만, 이 시간을 거름 삼아 나도 성장할 수 있을 거야. 힘들어도 앞으로 나아가자.

2013년 다이노스는 꼴찌가 아닌 7위를 했고, 나는 2014시즌의 시작과 함께 겨우 취업에 성공했다.

그래서였을까, 그와 야구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은.


졸업증명서를 다시 발급받으러 갔던 캠퍼스에서 제대한 그와 마주쳤을 때, 내 마음은 다시 요동쳤다. 한심하게도. 이제 대학생이 아닌데, 새로운 인연을 찾아 떠나야 하는데! 하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멍청한 악마가 속삭였다. 지금부터 다시 천천히 기회를 노리면 되지 않을까? 가끔 만나 술이나 한 잔 하면서. 이제 술 사줄 돈도 있는데.

그러나 정작 그렇게 만난 어느 술자리에서, 그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차였다는 건지 고백도 못 했다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실연을 당했다는 하소연을 듣고, 그 좋아한다는 사람이 나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청순가련 타입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또 한 번 진심을 눌러담고 말았다. 멍청한 악마가 외칩니다. 또 속냐!

설상가상으로 내가 지방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나와 그 사이에는 가끔 하는 카톡만 남게 되었다. 뭐, 그와의 야구 이야기는 꽤 재미있었다. 두산과 NC 사이에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있었고, 오래된 야구 팬인 그에게 뉴비인 내가 물어볼 것도 많았으니까. NC 팬 중에서 이번 플레이오프 매치업을 반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고, 나 역시 히어로즈가 올라오기를 고대했지만, 막상 두산과 붙게 되자 그와의 카톡이 살짝 기대되었다. 시즌 때보다 더 재미있게 이야기하면서 야구를 볼 수 있지 않을까?

말할 것도 없이, 착각이었다.

1차전에서는 니퍼트한테 완전히 봉쇄당해서 내가 신경질적이 되었고, 2차전에서는 양의지가 부상을 당해서 그가 울컥했다. 3차전에서는 물론 내가 신났지만, 그가 점점 침울해지자 말 걸기가 뭐해서 가만히 있다가, 맨 위에 쓴 문제의 메시지를 보고 급격히 심란해졌던 것이었다.

내가 그와 연애하는 사이였다면, 서로 자기 팀이 졌어도 애인의 팀이 이겼으니까 적당히 투정만 부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럼 이긴 쪽이 진 쪽을 달래 주고... 아, 생각만 해도 정말 나한테는 영영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그림이다. 어차피 그러지 못할 바에는, 야구라도 이겨야지.

그러나 16점을 냈을 때 들었던 불길한 예감은 딱 들어맞아서, 4차전에서도 니퍼트는 쌩쌩하고 NC 타자들은 꽁꽁 묶였다. 역시 야근 중에 몰래 보고 있던 나는 이래 가지고 일이 되겠냐 싶어서 그냥 사무실을 박차고 나서, 걸어서 30분 걸리는 집으로 향했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며 스코어를 확인하려고 휴대폰 화면을 켜니, 그새 점수는 더 벌어져 있었고 '니퍼트님 감사합니다'라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 순간,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어두운 밤길 한복판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 좋겠다'라고도, '5차전은 우리가 이길 거야'라고도, '약올리지 마'라고도 대답하지 못하는 내가,
'아직도 널 좋아해, 나랑 연애하자'라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말하지 못하는 내가,
그가 있는 서울에서 300km나 떨어진 여기서 이러고 있는 내가, 너무너무너무 싫어서.

그깟 야구가 뭐라고. 짝사랑이 뭐라고.


내가 울든 말든 시간은 흐르고 야구는 계속되어, 오늘 플레이오프가 끝났다.
5차전은 화도 나고 허탈하기도 했지만, 마지막에 나성범이 등판해서 아웃카운트를 잡은 덕분에 그나마 조금 웃었다. 이미 4차전에서 한 번 깨져서 그런지 멘탈이 생각보다 멀쩡하다?

끝이 너무 아쉽기는 하지만, 이번 시즌을 돌아보니 올해도 NC 다이노스 덕분에 많이 기쁘고 즐거웠다.
지역 연고도 전혀 없고 엔씨소프트 게임도 안 해본 나를 팬으로 끌어들인 이 팀의 매력 -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며 성장하는 모습이, 온갖 기록 속에 올해도 멋지게 빛났다. 선수들과 코칭스태프, 프런트 등 많은 분들께 한 명의 팬으로서 감사하고 싶다.

어차피 연애는 계속 못 할 건데, 야구라도 이겨야지. 내년에는 꼭 한국시리즈 갑시다. Go Dinos!


두산 베어스의 2015년 한국시리즈 진출을 축하드립니다. 속 쓰려서 응원은 도저히 못하겠습니다만, 그냥... 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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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남편
15/10/24 23:51
수정 아이콘
이런분이 응원하는 팀을 이기다니... 저희팀이 반드시 복수해드리겠습니다.
아케미
15/10/24 23:54
수정 아이콘
크크크. 감사합니다. 삼성 팬이시군요. 저랑 친한 입사 동기가 삼성 팬인데, '도박 의심자들 다 빠져도 우리가 이긴다'고 자신만만해 하더군요. 왕조 팀만이 가질 수 있는 그 자신감! 부럽기도 하고 보기 좋더라구요.
헤엄치는레콘
15/10/25 00:10
수정 아이콘
흡입력 있는 필력을 가지셨네요. 저희팀이 반드시 복수해드리겠습니다.(2)
BessaR3a
15/10/25 00:14
수정 아이콘
삼성을 응원합니다
15/10/25 00:27
수정 아이콘
앞뒤 재지 말고 일단 돌진해봐요. 응원하는 팀의 모토가 "전력질주"잖아요.
15/10/25 00:40
수정 아이콘
써놓고 보니, 말 참 쉽게 하네요 그렇죠?
그런데, 이리 저리 재다가는 확 늙어버릴 것 같아서 이렇게 말한거예요. 고민만 하다가 젊음을 소비하는 게 너무 허무하기도 하고...
TSL포에버
15/10/25 00:33
수정 아이콘
내년엔 부디 우승합시다 흑흑..
어디쯤에
15/10/25 01:04
수정 아이콘
내년엔 정규시즌도 우승합시다 흑흑
키스도사
15/10/25 01:12
수정 아이콘
인생의 타석에 선다면, 루킹삼진만은 당하지 말아라.(人生のバッターボックスに立ったら、見送りの三振だけはするなよ。)
ㅡ 고바야시 시게루.

저도 정말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너무 친해서 친구로만 보다가 어느날 여자로 보여서 정말 놀라고 당황스럽더군요. 그 친구에게 고백한다면 최선은 사귀는 것이고 최악은 10년지기 친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위의 글을 보고 용기를 냈죠. "시간을 흘러보내서 루킹 삼진을 당할바엔 홈런이든 헛스윙 삼진이든 가보자."라고요. 그리고 친구와 마주한 채로 타석에 들어서서, 눈을 질끈 감고 스윙을 했습니다.

물론 말로는 쉽지 고백에는 "상대방을 잃을지 모른다"는 최악의 가정을 상정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는 않겠죠. 그래도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언젠가 그 사람을 상대로 멋진 스윙을 날려 보시길바랍니다! 내년에는 NC에도, 아케미님에게도 좋은 일이 있길 바랄께요. 우승은 롯데가...헤헤


아, 그리고 제가 힘차게 돌린 스윙의 결과는, 좌중간을 깨끗히 가르는 안타였습니다. :)
동물병원4층강당
15/10/25 16:17
수정 아이콘
뻘 리플이지만.... 스트라이크를 못 보고 루킹삼진을 당하는 것과 볼을 못보고 헛스윙 삼진 당하는 것 중 어느쪽을 선택하는 게 낫겠습니까..? 크크..
붉은벽돌
15/10/25 01:28
수정 아이콘
감정이입이 많이 되는 글이었습니다.
저도 "미라클 두산" 앞에 무너진 히어로즈 팬이라서, 저도 볼 빨간 옆구리 투수랑 동갑이라서, 저도 두산팬을 놓쳐봐서 그런가봅니다.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2016년에도 야구는 계속 될테니 화이팅하시길!

ps. 내년에는 저희한테 10승만 가져가세요... 13승은 너무하는거 아닙니까ㅠㅠ
초보롱미
15/10/25 02:18
수정 아이콘
그깟 공놀이가 머라고 참.

- 지나가던 엘지팬 -
15/10/25 02:21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봤습니다.
NC와 두산은 참 애증의 관계죠.
김경문 감독님이 두산 팬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지만, 저는 그의 야구 스타일을 좋아했습니다.
우승. 그놈에 우승 한번만 했다면 두산과 함께 장기집권도 가능했다고 보고,
그만의 선수 키워내는 능력도 빛을 발하면서 오래오래 굴곡없이 재밌는 야구를 보여줬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짧은 한 끝을 끝내 넘지 못했고, 그와 선수들은 초조해졌으며, 선수단과 감독의 믿음도 조금씩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죠.
감독님이 떠난건 금지어 사건 외에도 이런 복합적인 일들이 만든, 어쩌면 다가올 수 밖에 없는 엔딩이었다고 생각하기에
아직도 타팀 감독인 그분을 보고 있자면 맘이 짠한 부분이 있습니다.
거기에 뎁스 상 절대 보호선수에 묶을 수 없었던 딸기를 데려간 것도 감독 시절에 싹수를 보아왔던 탓이란 사실과, 또 결국 터지는 모습과
유니폼에 비슷한 D자와, FA로 그분에게 안겼던 종박을 보며 그렇게 짠함은 짜증과 뒤섞여 가면서, 그야말로 애증의 팀이 되어버렸죠.
(손션은 빼겠습니다. 2013년 코시의 불행은 그가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직도 용서가 안되고 있네요.)
힘내세요. 야구의 시즌은 끝났지만 다시 새로운 시즌이 돌아오고, 아픔을 안겼던 그것들을 또 보게 만드는게 야구의 매력이죠.
맘데로 안되는게 사람 마음인지라.. 짝사랑은 끝을 맺은 이번 시즌과 함께 날려버리세요. 라고 조언을 드려도 큰 도움은 안되겠습니다만,
잠시 다른 방에 가둬두시고, 주변의 다른 남성들에게도 기회를 주세요. 사랑받으며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젊음입니다.
15/10/25 04:03
수정 아이콘
잘 읽고 갑니다. 글이 재밌네요.
15/10/25 07:29
수정 아이콘
경남 사는 아재 입장에서는
공감 가는 내용이 많군요

화이팅입니다
야구도
사랑도...
ridewitme
15/10/25 12:28
수정 아이콘
헤... 글 잘 쓰세요. 엔씨화이팅!
루크레티아
15/10/25 13:09
수정 아이콘
야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볼배합입니다.
변화구와 직구를 조화롭게 해보시길 바랍니다.
15/10/25 15:29
수정 아이콘
가슴이 아려오는 글입니다.
그 놈 참 나쁜 놈이네요. 어찌 그리 눈치가 없나?

아니, 아니...
혹시 그 쪽도 답답 푹푹 한숨쉬고 있는 거 아닐까요? 질러버려요. "야! 나랑 사귀자"
아니라서 끝내버려도 하나 손해 볼 거 없지 않나요? 속 썩이는 관계 유지해봐야 내 정신건강만 절름발이되지...
서늘한바다
15/10/25 16:24
수정 아이콘
아...,
그래서 전 짝사랑이든 연애든 꼭 같은팀 응원하는 사람만...
-안군-
15/10/25 16:43
수정 아이콘
필력은 참... 한결같으시네요. 옛날에, 아케미님 나이를 알고 경악(?) 했던 기억이.. 흐흐...
야구를 이기려면 안타를 잘 쳐내는... 타율이 좋고, 투수를 무지막지하게 괴롭히는 타자가 많을수록 좋지만,
팬들이 사랑하는 타자는, 비록 타율은 조금 낮을지라도, 치는 족족 담장을 넘기는 슬러거죠.

야구 배트 끝이 둥그렇게 튀어나와 있는건, 거기까지 배트를 길게 잡고 치라는 뜻일겁니다.
배트를 최대한 길게 잡고 풀 스윙을 휘둘러 보세요. 맞으면 장외홈런이고, 안 맞아도 스트라이크 카운트 하나입니다.
하우두유두
15/10/26 01:30
수정 아이콘
하 오늘 헛스윙삼진하고 온 저는 웁니다 ㅠ
15/11/02 03:59
수정 아이콘
'제길.. 이렇게 된 이상 160km 스트리이트야,'

야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초등학생이 아니 유치워생이 만화보다 야구를 좋아 할 수 있을까? 그 시절 채널 선택권이 아버지에게 있는 이유로 난 야구가 싫었다. 동물의 왕국보다 조금더 야구가 싫었다.

'넌 어떤 남자가 좋아?
'160키로짜리 직구를 던질수 있는 남자'

(아마 아케미님 이외에 다른 사람은 이 댓글을 보지 않을듯 하네요.. 님의 글을 보니 오랜만에 뭔가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느데... 안써지네요. 나중에 와서... 다시 쓸께요 ㅠㅠㅠㅠ 지금은 너무 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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