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글로써 좋아하는 두 분이 PGR의 눈시님과 오유 역게의 푸쉬킨 님이 있고,
글은 잘 쓰지 않으시지만 양질의 리플로 역사 지식을 전파하는 네이버 역개루의 홈원님과 PGR의 나이트해머님이 있습니다.
눈시님의 글이나 나이트해머님의 리플이야 PGR에서 다 볼 수 있지만,
푸쉬킨 님의 글은 여기에서 하나도 볼 수 없기에 개인적으로 가장 좋게 본 글 중 하나를 퍼와봅니다.
제 글을 올리고 싶지만 요즘 도무지 글을 쓸 여유가 안 나네요.
곧 지방 근무를 2달동안 가게 되어 최소 2달은 글을 쓸 일이 없을 거 같습니다.
아쉽지만 제가 쓴 글보다 훨씬 더 유익하고 좋은 글이니 재미있게 보시길 바랍니다.
출처 :
http://todayhumor.com/?humorbest_602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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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시절 국사교과서를 보며 항상 의문을 품었던 부분이 조선 후기에 신분제의 해체로 당시 양반 호구수가 50%에 이른다는 부분이었습니다.
대구지역 호적을 근거로 들었던 교과서에서는, 이와 함게 호적상 노비 호구가 점차 소멸해 가는 점을 들어 양반층의 비대화와 노비의 양인화를 통해
조선 후기 신분제가 해체되는 과정에 이른다는 설명이 함께 하는 내용이죠.
하지만 특정 사회 내에서 지배계급이 무려 50~60%에 이른다는 통계는 다수의 사람이 모두 지배층이 될 수 없다는
상식적인 이해차원에서도 그러하거니와 한 지역에서 모두가 양반임을 지배층임을 주장하는 그러한 상황이 성립할 수 있다는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얼핏 양반층의 비대화와 신분제의 해체로 단순화 시켜 이해할 수 도 있겠지만
좀더 파고들어 생각해 보면 좀 복잡한 조선시대 신분제의 양상을 가늠하게 합니다.
우선 이러한 조선 후기 "신분해체론" 논리의 기원은 일본인 학자 '시카타 히로시'가 호적에 기재된 직역을 분류 취합하여
조선후기 신분제를 연구한 것에서 유래합니다.
그는 조선 후기 조선의 신분사회를 양반-평민- 노비라는 사회계층으로 분류하고
18세기 이후 조선의 양반 계층 비대화 현상을 조선사회의 후진성 내지 정체성에서 그 원인을 찾았죠.
이후 연구자들 역시 그의 연구에서 크게 벗어 나지않아.
호적상 양반호구의 증가를 양반계급의 증가로 보아 18세기 이후 양반층 비대화와 더불어 노비의 감소현상에 주목하며
조선후기 신분제 자체가 허구화 되며 조선사회가 해체되어가는 현상으로 재해석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정한 틀로 조선의 신분제를 바라보기에는 조선사회의 신분제는 그 특이점이 많습니다.
우선 우리가 인식하는 지배계급으로써의 양반이란 존재와 조선후기의 호적에 나타난 양반의 존재는 양자간 개념에서 서로 차이점을 지닌다는 것이죠
기본적으로 양반이라는 지배계급은 단순하게 족보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성립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에 우리가 아는 자세한 족보가 나타난 것은 조선 후기에 일어난 일로 특정 계급의 정체성은 족보만으로 증명되는 성질이 아닙니다.
양반이란 그 이름에서 알듯 과거제도를 통해 입직한 문반, 무반직을 지칭했던 말이며
이들 계급은 고려말 부터 시행되었던 과전법과 조선성립 후 시행된
각종의 수조권을 바탕으로 점차 토지를 늘려가며 성장했던 지주 계급을 지칭합니다.
즉 양반은 본원적으로 향촌의 지주계급이자 지식인이었던 집단으로
그들은 향촌의 경제적 여건을 기반을 점차 중앙관직으로 나아가며 국가권력을 형성하였던 조선의 특수한 지배계급을 말합니다.
더불어 이러한 지위를 유지하고자 오랜 기간에 걸쳐 그러한 특권을 유지하고 강화하며 500년을 성장했던 계급이죠.
처음 조선 초기 양반 계급은 관직에 3대 이상 나아가지 않으며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이후 그 범위가 친인척으로 확대었음에서 나타나는데 이들이 조선사회에서 지배계급으로
지위를 누릴 수 있던 것은 단순하게 족보와 호적같은 추상적으로 명시된 신분이 아닌
관직과 경제적 기반인 지주라는 실질권력이 상호조화를 이루며 성장한 세력이 때문입니다.
현직으로 관직에 근무하며 정계에 영향을 끼친 경반들과 향촌의 지주로 군림하며
향임직을 통해 지방수령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향반들 까지 모두 경제적 여건과 정치권력이란
양자를 통해 영향력을 실질적으로 행사했던 계급으로 이런 계급적 성격상
이들 양반계급이 호구의 50%에 이른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호적에 등재된 양반호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이른바 "모칭유학 (冒稱幼學)"의 문제입니다.
유학(幼學)이란 과거를 보기 위해 당분간 군역을 면제받는 자를 말하는 것으로
처음 유학을 이유로 군역을 면제받는 경우는 일시적 면제에 불과 했으나 점차 죽을때 까지 유학임을 호적에 등재하며 면제받는 경우가 흔했졌고.
이 때문에 국역을 피하는 수단으로 유학의 호적 기재가 점차 늘어가게 되었습니다.
과거시험을 공부하는 이러한 호구가 즉 우리가 교과서에서 통계로 보았던 양반호의 정체인 것이죠.
호적을 통해 살펴 보면 17세기 유학을 호적에 등제한 자의 수는 10% 내외였던 반면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이들의 비율이 50%에 달하게 되는데.
이는 조선 후기 군역의 징수 방식 변화라는 세제의 변경과 그 궤를 같이 합니다.
애초 지방주민들이 유학이라는 직역명을 얻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였습니다.
유학을 모칭하는 자가 늘어나는 것은 곧 국역대상자가 감소함을 뜻하기 때문인데
지방수령 또한 국가에서 배당된 수치 만큼의 국역 대상자를 확보해야만 했기에
단지 과거를 이유로 호적에 이를 등재하는건 결코 쉬운게 아니였죠.
때문에 당시 지역주민이 국역을 피해 유학을 모칭하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막대한 댓가를 지불했어야만 가능했습니다.
예를 들어 국역에 상응하는 비용을 관청에 한번에 제공하거나 국역을 져야하는 본인 대신
사노비등을 국역자로 대신 세우는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했던것이죠
하지만 양란 이후 재정이 악화되며 조세확보 수단으로 이러한 유학이 활용되며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조선 후기 당시 지방관은 일정 수치의 국역자만 확보하면 되었기에
이러한 유학 등의 면제 액수를 열어두고 이를 통해 지방운용의 여지를 넉넉히 확보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의 유학으로 등재된 호적은 당연히 실제 양반호가 아닙니다.
양반의 신분과 국역을 피하기 위해 등재한 "유학"의 명분으로써 양반호는 상이한 것이로
이때 이미 호적상에서 어느정도 괴리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칭유학"의 문제는 18세기 중엽 군역정액이 중앙정부의 총액이 아닌 지역단위로 확정이 된 이후 심화되게 됩니다.
당시 지방관은 재결획득(자연재해를 입은 논밭으로 감세대상 토지)과 함께 군역징수의 어려움을 호소하는데 정렬을 쏟게 되는데
이는 곧 지역 주민의 조세와 직결 되는 것으로 지역에 할당된 조세를 줄이고자하는 지방관의 노력이 성과를 얻으면
지역주민은 지방관이 지역에 할당된 조세를 줄여주는 선정을 베푼 것으로 여겼습니다
때문에 당시 지방 수령의 호소는 대부분 "반호와 노비호가 많아 군역을 부과할 호가 적다"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즉 호적에 등재되는 "모칭유학"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 날수록 지역에 할당되는 중앙정부에 대한 조세부담은 줄어들게 되고
지방재정은 한결 여유롭게 되며 지방관은 선정을 베푸는 수령이 되는 구조가 된 것이죠.
물론 중앙정부에서는 이러한 현상은 곧 군역의 감소와 중앙정부 재정악화를 의미함으로
실록상에서 보면 당시 이 문제에 대해 중앙 정부에서 대책논의가 활발히 논의되는 것으로 나타나며
1870년 이후 "유학"의 통계수치를 정액으로 고정하는 조치를 통해 이들이 늘어나는 것을 억제하고자 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시 이미 취약해진 재정구조와 사회여건상 이러한 모칭유학을 사용하는 자는 계속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생각해 보면 모칭유학을 통해 조선 후기 호적에 양반으로 등재된 양반호의 수와 그 의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배계급으로써의 양반호와는 전혀 다른 성격임을 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불어 호적상에 등재되는 모칭유학자의 수가 늘어나며 흥미로운 현상이 새롭게 나타나게 됩니다.
유학으로 등재된 양반호의 경우 장정 말고 그 아내 역시 사대부의 아내를 의미하는 "씨"로 기재되감이 그것인데.
조선시대 호적을 찾아보면 18세기 까지 장정 말고 여자들이 "씨"로 등재되는 경우는 드문경우로
초기 모칭유학을 하여 양반호로 기재가 되더라도 부부 모두가 양반호를 참칭하는 것은 억제된 듯 보이나
19세기에 이르게 되면 아내를 “씨”등재하는 수치가 50%를 넘기며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이는 19세기에 이르게 되면 실제 양반계급이 증가한 것은 아니지만 오랜기간 호적의 등재를
이유로 모칭유학을 넘어 양반을 지향하는 양민의 수가 늘어나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경국대전에서 이미 양반호의 기록방식을 정형하고 있음에서 찾아 볼수 있는데
호적에서 양반호의 기재의 경우 부부에게는 남편의 "직"과 아내의 "씨"를 등재하고 솔하 자식과 함께 부리는 노비를 등재하는 당시 양식이 그것으로.
때문에 양반흉내를 내는 양인호의 증가는 서류상의 노비를 등재하면서 까지 이러란 양식을 형식적으로 따르게 하였으며
조선 후기 19세기 쯤에 이르면 호적에서 양반호를 흉내내는 형태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애초 극소수의 지배계급만이 기록하던 호구양식은 19세기 중엽이 되면 거의 대부분의 양인들이 기록하는 일반적인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죠.
당시 중앙정부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두고
호적상에 이러한 직역의 기재를 통해 호구의 이탈없이 백성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한 듯 싶습니다
생각해 보면 교과서에서 보았던 양반호의 50%라는 것과 신분제의 붕괴라는 설명은 실제상황과 조금 다른 괴리를 지니게됩니다.
이는 또한 보다 깊게 생각해 보면 조선 신분제가 지닌 특수성을 이해하여야만 가능한 것이기도 합니다.
조선의 신분제는 양천제를 형식적으로 제도화 하기는 했으나 양인과 천인의 구분이 모호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신분구조는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 천인이 도주하여 양인이 되기도 하였고 양인이 생활고를 이유로 천인을 자처하기도 하였죠
이런 현실에서 조선은 이들을 국역의 부과를 통해 호구를 통제하고자 하였습니다.
조선은 후기에 이르며 세제가 난잡해 지고 정치의 혼란 속에 호구의 이탈도 가속화 되며
양인이 되고 천인이 되는 구분이 더욱 유동적이며 모호와 되어갔습니다.
더불어 신분의 정점에 있는 지배계급인 조선시대 양반계급의 성격 역시 태생 자체가 특정한 인신적 성질을 지니는 귀족 계급 아닌
이들 역시 양인으로 출발하여 지역의 지주계급을 이루고 조선 성립과 함께 그들의 성리학적 교양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하며 이룩한
사실상 혈통적 귀족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른 실질적인 영향력을 바탕으로 지배계급이 된 조선의 특수한 신분제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조선시대 양반계급의 영향력은 그 성질이 전국적이며 획일적인 것이 아니였으며
양반계급이란 성격은 애초 자신이 지주로 영향을 끼치는 한 지방에서 세력을 가지는 계급이었습니다.
때문에 특정 지역의 양반은 다른 지방에서도 인정받는게 아니었으며 양반계급의 영향력이란 지역적으로 국환된 것이었죠
이를 통해 생각해 보면 조선의 신분제는 결코 장기적으로 고정된 신분제가 아니었으며.
더군다나 조선이라는 국가가 유교적 이상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적 왕권을 이상향으로 하는 유교의 지배 이데올로기 구조라는 특수성은
모든 백성이 균등하게 왕권으로 상징되는 국가에 수렴하는 것을 지향하는 체제의 성격을 형성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조선의 신분제는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해 애초부터 각 신분들간의 상하격차가 분명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상호간 이동이 가능하였다는 점에서 여타 다른 문명의 신분제와 차이점을 지니는 독특한 신분제였습니다.
이를 동시대 이웃나라와 비교해 보면 중국의 경우 일찍부터 신분제가 해체되어 각 가문을 중심으로 가문의 특수성만 존재하는 사회였고.
오히려 가문의 일이 곧 공의 영역이 되고 관직을 통해 국가에 나아가는 것은 개인이 입신양명하는 사의 영역이 되었던 개방적 신분제 사회였던 반면
에도시대 일본의 경우은 무사계급과 하층계급의 격차가 분명하고 지역공동체 단위에서 신분제의 구분이 엄격해 신분간 이동이 불가능한
철저한 봉건 사회였죠.
조선의 신분제는 이들 양자의 특징이 보이는 신분제의 중간에 위치한 신분제 사회라 여겨집니다.
형식적으로 엄격한 신분제 구조를 지향하되 그 내부적으로 경계가 명확하지 않고
또한 이동이 가능했던 신분제 사회가 조선시대 신분제의 특징인 것이죠.
조선 후기 양반호의 증가를 두고 단순하게 신분제의 붕괴와 해체로 평가하는 것은
일본식 혹은 서구식의 엄격한 신분제의 잣대를 특수한 조선의 신분제에 적용해서 발생한 오류가 아닌가 합니다.
조선의 신분제란 애초 모호하고 유동적인 신분제 사회였고 조선은 국가운영 차원에서 이를 인위적으로 구분하며
국역과 조세의 부과를 통해 통제하고 "유지"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조선 후기 양반호의 증가는 이러한 국역의 부과방식과 경제여건의 변화에 맞추어
그러한 유동적인 신분제가 변화에 맞춰 그 형식을 바꾸었음을 의미합니다.
조선후기를 보면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자세한 족보들과 대성, 본관을 참징한 족보가 증가함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누구나 성과 본관을 가지고 있는 한국사회가 어찌 형성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인데
이러한 변화 역시 조선 후기의 조선 신분제가 지닌 특수성을 살펴본 이후에 비로소 명확한 이해가 가능하지 않을까합니다
생각해 보면 조선시대 한,중,일 삼국이 보여준 신분제의 모습은 지금 현대사회에도 내려와 그 일면을 보여 주는 듯합니다.
일찍히 신분제가 해체되고 가문중심으로 재편되었던 중국의 경우 지금도 대가족 중심의 가족문화를 중요시하는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엄격한 신분제 구도 속에 계급에 복종하는 양식을 이어온 일본의 경우 세습제 국회의원직, 관료들의 존재와
철저한 관료주의 기업문화 같은 영향을 지금도 보여줍니다.
한편 한국의 경우 정치하는 높으신 분들이란 인식 또는 돈, 권력이 있는 계층을 경외하는 계급구분에 익숙하면서도
대학입시나 고시공부 등을 지금도 여전히 신분상승의 기회로 여겨지며 어려운 가정에서 성공해 사회지도층 인사가 되는 과정과 같은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익숙한 사회이기도 하죠.
또한 마치 양반이 향촌 사회에서 영향력을 끼치듯 지금도 한국사회에서 성공이란 개념은 개인의 성취 차원이 아닌
자신을 아는 주변인들 고향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금의환향의 개념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의 신분제가 단지 먼 옛날 일어난 모습이라 여기기에는 지금도 비슷한 점이 너무 많은게 사실이죠.
조선 말 양인들이 겉으로 양반인척 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들여 양반호로 호적에 등재하고
가짜 족보를 만들고 심지어 호적상에만 등재되는 가짜 노비를 세우며
주변에 보여주고자 했던 모습은 어찌 상상할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외제차를 몰고 다니면 그 사람을 다르게 본다거나 족보를 보듯 학벌을 따지고
소득에 비해 터무니 없이 비싼 명품을 사용하며
외부로 보여지는 것에 치중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지금도 반복되는 한국사회의 풍경을 통해
조선시대 양인들이 꿈꾸던 양반지향 성향을 가늠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한국사회에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고 한국 사회에 부유층이 실제 다수를 차지 하는게 아니듯
조선 후기 양반호로 등재되어 있다 한들 조선의 실제 양반계급이 급격히 증가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교과서와 책에 나온 조선후기 양반 50%의 전설과 소위 신분제 붕괴는 이렇게 파악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