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년 5월 황태자 손등이 요절합니다.
이에 앞선 232년에는 손권의 차남 손려도 20살의 나이에 요절해버렸죠. 228년에 손권이 황제에 등극하자 손려는 건창후로 봉해집니다. 이때 자신의 거처 앞에 투압란(妬鴨欄, 오리싸움하는 집이라는데 아무래도 투계장 같은 곳인 듯 합니다.)을 정교하게 만들었다가 육손이 이를 듣고 그에게 말하죠.
육손 : 경전을 두루 살펴야 할 분이 어찌 이런 놀이를 하는 것입니까.
한마디로 군주의 아들로서 나라를 살필 학문을 닦아야 하는지 왜 놀이터를 먼저 만드느냐는 것이죠. 육손의 말을 들은 손려는 이 놀이터를 당장 부수고 철거해버립니다.
230년 승상 고옹을 비롯한 많은 신려들이 작위를 승진시켜 왕으로 봉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상서복야로 있던 존(存)이라는 자가 상소를 올려 손려를 진군대장군으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손권은 손려에게 부절을 하사하고 부를 열어 반주를 통치하게 합니다. 이때 손려는 반준의 딸과 결혼 한 듯 합니다. 손려는 세상을 떠났는데 그에게 아들이 없어서 봉읍이 회수되었다고 합니다.
장남인 손등은 209년에 태어납니다. 한창 촉오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인 221년 조비는 손권을 오왕에 봉했고 그 아들인 손등은 동중랑장 겸 만호후에 봉합니다. 하지만 손등은 작위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13살의 손등이 작위를 무슨 생각을 하고 직위를 받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조비는 3개 방면에 걸쳐 공격하면서 손등을 위 조정에 보내라고 한 것을 봐서는 손권이 손등을 인질로 주지 않기 위해 이러한 방법을 썼던 모양입니다. 대신에 손권은 손등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게 되죠. 손등의 모친이 비천한 신분이라고 한 것을 보아 손등의 모친은 손권의 시녀 혹은 첩 출신 인 듯 하고 어떠한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손등은 손권의 총비인 서씨에게 양육되었고 손권의 정비인 보씨에게도 어머니로서의 예를 지키게 되죠.
손권이 손등을 태자로 세우려고 하자 손등은 태자위를 사양하면서 말합니다.
손등 : 근본이 확립되고서 도의가 생깁니다. 태자를 세우시려면 마땅히 먼저 왕후를 세워야합니다.
즉, 태자를 세우기 위해서는 왕후를 세우고 그 아들을 태자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죠. 이를 알아챈 손권은 그에게 묻습니다.
손권 : 네 어머니는 어디에 계시는가?
손권은 항상 보씨를 왕후나 황후로 세우길 원했고 손등 역시 보씨가 하사하는 것이 있을때는 사양하지 않고 정중히 받는 등 어머니로서의 예를 다합니다. 손권은 손등이 자신의 어머니가 보씨라고 말하기를 원했죠. 하지만...
손등 : 제 어머니는 오군에 계십니다.
당시 오군에 있던 손권의 부인은 질투로 인해 폐출되었던 서씨였습니다. 보씨가 아닌 자신을 키워주었던 서씨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것이죠. 손등의 말을 들은 손권은 말문이 막혀버립니다. 서씨를 왕후로 삼을수도 없었고 손등을 폐할수도 없었죠. 이런 태도를 취했어도 보씨와 손등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고, 손등은 서씨가 간혹 옷을 만들어 보내주면 그때마다 목욕을 하고 옷을 단정하게 갖춰입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막무가내로 손권은 손등을 태자로 삼습니다. 손등을 태자로 삼은 손권은 학문이 뛰어난 사람들을 손등의 스승으로 삼았고, 재능과 학식이 뛰어난 사람들을 손등의 사우로 삼습니다. 손등의 사우로 들어간 사람은 제갈각, 고담, 진표, 장휴였습니다. 이들은 당시 오의 차세대 중요 인사들로 꼽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잘 알려진 제갈각을 제외하면 고담은 승상 고옹의 손자, 진표는 진무의 아들, 장휴는 장소의 차남입니다. 이들은 손등과 함께 말타기와 활쏘기를 함께 배웠고 도리나 육예에 관해 토론하면서 문무를 같이 닦습니다. 손권은 손등에게 한서를 배우라고 하자, 당시 한서 강론에 능했던 장소는 장휴에게 한서를 가르친 후 그것을 손등에게 전하게 합니다.
장휴는 사물을 잘 분별하고 글의 뜻을 잘 짚어냈고, 사적으로 연회에 참석할때는 연회가 무르익으면 음악을 지었고 이 음악에 손등까지 즐거워했을 정도였습니다. 거기에 장휴의 지식이 해박하고 통달해서 손등이 주변에 두고 같은 수레에 탈 정도였죠.
고담은 고옹의 손자로서 약관의 나이에 손등을 보좌합니다. 고담은 처음 태자중서자로서 관직에 나섰을때 진언을 바치니 손권이 식사를 물리고 칭찬했고, 이에 관련된 서상이라는 사람은 질책받습니다. 고담의 성격이 사적인 원한에 움직이지 않고 항상 겸손해서 그에게 많은 사람이 따랐고, 손권 역시 고담을 크게 중용하면서 많은 상을 내립니다. 그는 매번 관부의 재정을 살필때마다 주판을 사용하지 않고 간단하게 셈을 하면서 의심과 착오를 모두 밝혀내어서 부하 관리들이 항상 그를 두려워하며 복종하죠.
고담은 봉거도위를 거쳐 선조상서가 됩니다. 그런데 처음 선조상서 직을 맡은 사람은 설종이었습니다. 설종은 고담이 자신보다 고담이 선조상서 직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이 직위를 사양합니다. 이때가 240년인데 아무리 봐도 한두세대 아래 사람임에도 오에서 많은 치적이 있던 설종이 아무리 높게봐도 아들뻘의 고담에게 직위를 양보할 정도면 재능이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진표는 진무의 서자입니다. 손권의 호위대장으로서 2차 합비공방전 당시 싸우다가 전사하죠. 진표는 사우로 시귄 제갈각, 장휴, 고담 뿐만 아니라 상서로 있던 기염과도 친했는데 기염이 죄를 지을때 다들 기염을 깎아내릴때 진표는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진표에 대한 일화는 다음에 외전으로 이야기 하도록 하죠. 하지만 진표의 기록이 있는 아버지 진무전에는 아버지인 진무에 대한 기록보다는 진표의 기록이 더 많습니다. 진표의 능력이나 성품이 얼마나 대단했던 사람이죠. 진표는 237년 34살의 나이로 요절합니다. 진표는 항상 가재를 털어서 빈객과 병사들을 대접해서 집에 아무런 재물이 없어서 진표가 죽자 진표의 처자들은 길거리로 내몰렸고, 이를 안 손등은 진표의 가족들을 위해 저택을 지어 그곳에서 살게 하면서 그 가족들을 돌봐줍니다.
이 진표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외전으로 이야기 해보도록 하죠.
이 손등의 사우들은 이후 태자중서자로 삼았고 손권이 황제가 되자 손등은 황태자가 되고 제갈각을 좌보, 장휴를 우필, 고담을 보정, 진표를 익정도위로 삼았으며 당시에 명망이 높던 사경, 범신, 조현, 양도 등을 손등의 빈객으로 삼아 손등을 보좌하게 합니다.
229년 손권이 위의 남동전선을 공략하기 위해 무창에서 건업으로 치소를 옮기자 무창은 육손과 손등이 지키게 됩니다. 손등이 스무살의 젊은 나이였지만 육손의 보좌를 받으면서 주요지역인 무창을 지킬정도로 그의 능력을 인정받습니다.
손등은 이때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주의합니다. 고위인사가 사냥을 나갈때 항상 많은 호위병과 몰이꾼을 대동하고, 사냥을 하다가 대부분 백성들의 논밭에 피해를 끼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손등은 사냥을 나갔을때 필요에 따라 지름길을 사용해야 할 일이 있을때도 항상 백성들의 논밭을 피해 멀리 돌아갔고, 휴식을 취할때는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백성들의 집이나 논밭이 없는 지역을 골라 휴식을 취합니다.
어느날 손등이 밖으로 나갔다가 탄궁으로 쏜 탄환이 손등을 스쳐지나갑니다. 당연히 그에 곁에 있던 수행원들은 크게 놀라 탄환을 쏜 자를 잡으려 했죠.
탄궁은 사냥용으로 쓰지만 휴대가 용이하고 탄을 구하기 쉽고 투사체가 은밀하게 나아가다보니 암살용으로 적격인 무기였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손등에 대한 암살시도로 봐도 무방했습니다.
손등은 수행원과 호위병들에게 탄궁을 쏜 자를 수색해 잡도록 명합니다. 이때 탄궁을 가지고 탄환을 허리에 매고있던 사람이 발견되고 주변사람들은 이 사람이 탄궁을 쏜 자라고 주장합니다. 당연히 손등의 부하들은 이 사람을 잡아다 심문합니다. 황태자 암살시도범이니 곱게 심문하겠습니까...기록에는 없지만 고문에 혹형을 가해 배후를 찾아내려고 했겠죠. 실제로도 손등의 부하들은 그에게 매질을 가해 배후를 캐내자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손등은 그를 매질하거나 고문하는 것을 금지하고 자신을 스쳤던 탄환을 찾아내 용의자가 가지고 있던 탄환과 탄궁을 비교해 맞지 않자 그를 무죄방면해줍니다. 손등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그를 잡아다 매질할 수도 있지만 증거가 그가 아니라고 나오자 그냥 방면해준 것이죠.
손등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금으로 된 그릇에 물을 부어놓았는데 손등의 수하 하나가 이 금그릇을 훔칩니다. 손등은 범인을 잡자 죄를 주어 가두거나 죽이지 않고 측근들의 입단속을 시켜 혹여 이사람이 차후에 손권이나 다른 사람에게 벌을 받지 않도록 하면서 그사람을 불러들여 질책한 다음 모든 직위에서 파면한 뒤 집으로 보냅니다.
232년 동생 손려가 20살에 요절하자 손권은 신하들에게 식사를 줄이게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손등은 무창에서 건업으로 달려갑니다.
손등 : 손려가 질병으로 죽은것은 어쩔수 없는 그의 운명입니다. 지금 북쪽의 영토는 아직 통일되지 않았고 사해는 구제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폐하께 명을 내렸는데 폐하께서는 백성들처럼 자식이 죽은 것을 슬퍼하시면서 대신들의 음식을 줄이셨습니다. 이는 예절이 아니라 요구일 뿐입니다.
한마디로 아들이 죽은건 운명이고 슬픈건 이해하겠는데 할일이 많은 신하들의 식사를 줄이는 것은 예절이 아니니 명을 거두라는 것입니다. 손권은 손등의 말을 받아들여 명을 거두죠. 열흘 이 지나자 손등을 무창으로 귀환하라고 하지만 손등은 부모의 안부를 항상 살피지 못했기 때문에 도리를 다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무창의 육손은 자신이 없더라도 그곳을 잘 다스릴 거라고 말하죠. 결국 손등은 건업에 머무릅니다.
234년 손권은 육손과 제갈근에게 남군을, 손소와 장승에게는 광릉과 회남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합비신성을 공격하기 위해 출격합니다. 손권은 국내의 모든 업무를 손등에게 관장하도록 명령하죠. 그해에는 냉해를 입어 곡식에 큰 피해를 입었고 여릉에서 이환과 나려가 반란을 일으켰고 거기에 산월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국내가 불안해집니다.
손등은 내정을 다스리면서 도적들을 진압하기 위해 장수들을 각지에 파견하고 법령을 재정비해 도적들에 대한 처벌조항과 함께 각 지역의 부패한 관리와 토호들을 붙잡아 처벌하게 해 민심을 수습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오의 후계자로 촉망받던 손등은 241년 33세에 요절합니다. 손등은 죽기 전 아버지인 손권에게 상소를 올리죠.
신은 현명하지 못하고 중병에 걸렸으며 스스로 반성해 보면 품행이 비루한데, 갑자기 죽음에 이를까 두렵기만 합니다. 신은 제 자신을 아끼지 않으며, 부모를 떠나 흙 속에 매장되어 다시는 영원히 궁궐을 받들어 우러러 보지 못하고, 해와 달과 함께 폐하와 왕후께 인사할 수 없으며, 살아서는 국가에 이익된 것이 없고 죽어서는 폐하께 깊은 슬픔만을 남기게 될 것을 생각하니, 이 때문에 비애를 느낄 뿐입니다. 신이 듣기로는, 죽음과 삶은 운명이 있으며, 장수와 요절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주진(周晉)이나 안회(顏回)는 뛰어난 지혜가 있던 인재였지만 오히려 요절했습니다. 하물며 신은 어리석고 비루한데도 나이는 그들의 수명을 넘었고, 살아서는 국가의 후가가 되었으며 죽어서는 존영의 지위를 누리게 될 것이니, 신에게 있어서는 이미 많은 것을 얻은 것인데 또한 어찌 슬퍼하고 한탄하겠습니까!
지금 대사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며, 체포할 도적들은 아직 토벌되지 않아 모든 나라의 사람들은 우러러 사모하여 운명을 폐하에게 걸고 있습니다. 위험에 처한 자는 안전을 갈망하고, 혼란에 처한 자는 태평스럽게 다스려 지기를 희망합니다. 원하건대 폐하께서는 신의 몸을 잊어버리고 일반 백성들이 갖고 있는 정감을 끊고 황제(黃)와 노자(老)의 방술(術)을 익혀 진심으로 정신을 보양하며 음식에 영양을 더하고 신성하고 영명한 사고를 널리 펼침으로써 무궁한 공업을 확립하십시오. 그러면 천하의 백성들은 다행스럽게도 의지할 곳이 있게 되고, 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황자(皇子) 손화(和)는 어질고 효성스럽고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덕행은 청명하고 풍부하므로 마땅히 일찍 세워 안배하여 백성들의 희망을 붙들어매야 합니다.
제갈각(諸葛恪)의 재략은 넓고 통달하였으며, 기량은 시정(時)을 보필하는 직책에 임명할 만합니다. 장휴(張休)ㆍ고담(顧譚)ㆍ사경(謝景)은 모두 기민하고 식견이 있으므로, 궁궐로 들어오면 측근의 심복으로 임명하는 것이 마땅하고, 지방으로 나가면 수족으로 삼을 만합니다. 범신(范慎)과 화융(華融)은 일반 사람들보다 무용이 뛰어나고 웅장하고 절개가 있으며 국사(國士)의 풍모가 있습니다. 양도(羊茞)는 변설이 민첩하여 독자적으로 응대할 재능이 있습니다. 조현(刁玄)은 성정이 우수하고 넓으며, 지향하는 것은 도통(道)의 진의를 실천합니다. 배흠(裴欽)은 식견이 넓고 기억력이 있으며, 문채는 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장수(蔣脩)와 우번(虞翻)의 뜻과 절개는 분명합니다. 무릇 이런 여러 신하들은, 어떤 자는 조정의 신하로 임명해야 하고 어떤 이는 장수로 임명해야 하는데, 이들은 모두 시사(時事)에 밝고 법령을 분명하게 익혔으며, 신용을 지키고 도의를 견지하고 있으며, 빼앗을 수 없는 뜻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폐하께서 해와 달처럼 광채가 빛나고 신의 관리로 선발하여 안배시켜 저로 하여금 이들과 함께 정사를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저는 이들의 정회를 상세히 알게 되었기에 감히 폐하께 아룁니다. 신이 깊이 생각해 보았는데, 현재 밖에는 일이 많고 전쟁은 끊이지 않고 있으므로 응당 육군(六軍)을 면려하여 나아가 취할 것을 도모해야만 합니다. 군대는 사람들로 무리를 만들고, 이 무리들은 재화를 오물로 여깁니다. 신이 듣기로는, 군(郡)이나 현(縣)에는 황폐한 곳이 많아 백성들의 생활은 곤궁하고 간사함과 환란이 싹트며, 이 때문에 법령은 복잡하게 늘어나고 형법은 더욱 가혹해진다고 합니다. 신은 정사를 잘하려면 백성들의 뜻에 순종해야만 하고, 법령은 시대의 추이와 함께 변화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진실로 장상(將相) 대신들과 그 시대에 알맞은 것을 자세하게 선택하고, 사람들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받아들이며, 형벌을 느슨하게 하고 부세를 가볍게 하며, 노역을 적당히 조절함으로써 백성들의 희망에 순응해야 합니다. 육손(陸遜)은 당시의 정치에 있어서는 충성스럽고 근면하며, 몸을 바쳐 나라를 걱정하고 마음을 다하여 공적인 일을 했으며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지 않는 절개가 있습니다. 제갈근(諸葛瑾)ㆍ보즐(步騭)ㆍ주연(朱然)ㆍ전종(全琮)ㆍ주거(朱據)ㆍ여대(呂岱)ㆍ오찬(吾粲)ㆍ감택(闞澤)ㆍ엄준(嚴畯)ㆍ장승(張承)ㆍ손이(孫怡)는 나라를 위해 충성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체제에 통달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현재 알맞은 방법을 바쳐 진술하도록 하여 가혹하고 복잡한 정책을 제거하고 병사와 말을 아끼고 길러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5년 이후, 10년 이내에 먼 곳에 있는 자가 귀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자가 힘을 다하여 병기에 선혈을 묻히지 않고도 대사를 확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새가 죽으려고 하면 울음소리가 슬프고, 사람이 죽으려 하면 말이 선량하다.’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때문에 자낭(子囊)이 임종하기 전에 시정에 대해 경계하는 말을 남겼으며, 군자(君子)는 그가 충성스러운 인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하물며 신 손등이 어찌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폐하께서는 저의 의견에 유의하여 듣고 취하십시오. 신은 비록 죽더라도 살아 있을 때와 같습니다.
줄이면 자신이 죽고 난 뒤의 빈 태자자리에는 손화를 추천하고 유능한 사람들을 추천했으며, 육손을 비롯한 제갈근, 보즐 등이 충성스럽고 훌륭한 신하이니 중용하라고 조언한 것이죠.
이 상소는 손등이 죽은 후에 손권에게 올려집니다. 자신이 죽은 이후까지 생각한 손등의 효심에 손권은 항상 손등에 대해 말할때마다 눈물을 흘립니다.
손등에 의해 추천을 받았고 손등의 빈객으로 있었던 사경은 당시 예장태수를 맡고 있었습니다. 사경은 손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크게 슬퍼하면서 관직을 버리고 자신을 스스로 탄핵하는 표를 올립니다. 하지만 손권은 사경의 파면 요청을 거부하면서 그를 달래죠.
손권 : 사경 경은 태자를 수행해 정사를 다스렸으니 책임이 있는 다른 관리들과는 다르오.
그리고 따로 사자를 파견해 그를 복직시키고 예장군으로 돌려보냅니다.
진수는 손등을 아름다운 덕행을 이루기에 충분했다고 평가하고, 손등에 대해 아는 분들이 항상 말하기를 손등이 손권의 뒤를 이었다면 손오의 운명이 상당히 달라졌을 거라고 평가합니다. 저 역시도 손등이 살아남았다면 손오 뿐만 아니라 삼국 시대 전체의 판도가 상당히 달라졌을 거라고 봅니다.
손등의 시호는 선태자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손등의 첫 부인은 주유의 딸이었습니다. 손등의 아들인 손번과 손희 역시 아버지처럼 요절했고, 다른 아들 손영이 오후의 작위를 이어받죠. 하지만 손영 역시 나중에 역모죄에 걸려들어 처형당하면서 손등의 가계는 끊어지게 됩니다.
오의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손등이 죽자 손등의 유언대로 손화가 태자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손권은 말 그대로 점차 미쳐가고 있었습니다.
뱀발1. 삼국지 11에서의 손등의 특기는 인정입니다. 이 특기를 가진 사람은 오국태, 사마유,왕창,조충,공자인데 이 특기를 가진 장수가 있으면 충성도를 올리는데 필요한 금이 절약되죠. 다른 사람에 비해 손등이 가진 인정이란 특기는 그에게 걸맞는 특기라고 봅니다.
뱀발2. 참........다음편 써야하는데 이번만큼 쓸맛이 안나네요...
뱀발3. 한참 글쓰고 있을때 진삼이랑 전국무쌍 이미지 관련 글이 올라와 있네요. 그런데 사실 전략시뮬 삼국지 시리즈 일러도 딱히 나은게 없어요. 거기에 나온 복식이나 갑옷도 명대 갑옷이 많고 연의에 나온 청룡도나 화극 같은 무기 역시 송대 이후 출현한 무기거든요. 실제로 당시 생활상을 잘아는 저희 중국사 담당 교수님도 연의나 삼국지 시뮬게임에 나오는 무기 보면 배를 잡고 웃으십니다. 뭐 근데 어쩌겠습니까. 제갈 승상의 부인님인 황부인에 대해서는 추녀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현재의 여인상에 보면 미인이라는 이야기도 있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골무쌍도 참 어처구니가 없어요 하하하...
뱀발4. 아 근데 허난설헌 글 언제 올려주실건가요 눈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