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는 신미양요를 조선 원정(Korean Expedition)이나 주말 전쟁으로 부릅니다. 전투가 주말에 있어서 그렇다 하죠. 혹은 그냥 신미양요를 그대로 쓰기도 하구요.
뭔가 큰 전쟁이 아니어서 관심은 당연히 적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자료는 미국 쪽이 풍부합니다. 우리 입장에서야 "열심히 싸워 막아냈다능" 이상을 얘기할 수 없어서 그럴 겁니다. =_=a 미국이 우방이니까 다루기 힘든 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나마 신미양요에 대해 자세히 적은 건 국방연구소에서 만든 거 정도입니다. 이게 89년에 만든 거죠 = =;; 지금도 신미양요 최고의 권위자는 한국인이 아닙니다.
미국인 토머스 듀버네이 교수죠. 84년에 한국에 와서 계속 살고 있고, 한국사를 계속 연구하고 있습니다.
http://www.shinmiyangyo.org
홈페이지를 만들어 미국에 신미양요를 알리고 있죠. 아 영문입니다. 어재연 수자기를 반환받는데도 정말 큰 역할을 해주었구요.
종군기자 비토가 찍은 사진으로 당시의 상황을 볼 수 있고 (물론 미군 위주지만)
애처가 틸튼 대위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나 기타 미군들이 남긴 기록, 당시 신문기사 등이 남아있죠.
뭔가 아이러니하네요. 그럼 시작해보죠.
-------------------------------------------------------------------
미국의 압박이 계속되면서 조선도 서해안의 방위력을 증강시킵니다. 69년부터 71년까지 포수 3천여명을 선발해 서남해안에 배치하죠. 특히 이양선 출몰이 빈번한 충청도에는 천여명을 배치합니다.
미 함대가 접근하면서 조정에서도 강화도에 병력을 증원합니다.
- 훈련도감 보군 2초, 별파진 300명(포병이라 생각합시다), 화약 1천근, 수노궁 10장, 구전(화살) 300지
- 금위영, 어영청 보군 1초, 별파진 10명, 이하동문
- 총융청 아병 1초, 불랑기 30문, 구환 2000개, 대포 3좌, 화약 1천근
이 중 각 영 1개초를 지휘할 진무영 중군을 임명하니...
바로 어재연입니다.
뭐 아무리 병력을 증원한들 화력 차이는 컸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불안요소가 보일 겁니다. 뭐 이게 조선의 방식이었죠. 아무튼 그와 함께 강화 건너편에도 병력을 증원합니다.
자, 그럼 양쪽의 신경전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6월 1일, 포격을 당한 미군은 사죄가 없을 시 보복하겠다고 경고합니다. 분명 말을 해 놨고 조선에서 반대가 없었는데 포격을 했다는 것이죠. "평화적인 탐사"를 하는 미군을 공격했다구요. 아무리 작은 배라도 그 나라의 영토로 간주했고 성조기를 단 배를 공격했으니 성조기를 모독했다는 거였습니다.
4일(음력 4월 17일), 대원군은 직접 서신을 보냅니다.
- 올봄에 북경 예부에서 자문을 보내어 귀국 사신의 편지를 전해왔기에 우리 조정에서는 이미 의논하고 회답 자문을 보낸 동시에 귀 대인에게 전해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또 생각건대 귀국은 예의를 숭상하는 풍속이 본래 이름난 나라로 다른 나라들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러니 경솔한 행동은 하지 않을 터인데) 어찌하여 멀리 바다를 건너서 남의 나라에 깊이 들어왔습니까? 설사 서로 죽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누군들 의심하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요새지에 갑자기 외선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모든 나라의 일반적 규범으로써 입장을 바꿔봐도 모드 그럴 것입니다.
- 지난번의 일은 (호의로 대하고자 했는데 사단이 일어났으니) 매두 개탄할 노릇입니다. 우리 측에도 사단이 일어나지 않게 하라고 타일렀습니다. 하지만 귀선이 요새지 입구까지 깊이 들어온 이상 변경의 신하들은 방어가 임무인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 혹시 북경 예부에서 보낸 답문을 미처 전하지 못해 우리나라 사정을 몰라서 일어난 거 아닙니까? 답문을 보내니 한 번 보면 다 알게 될 것입니다.
- 우리나라가 외국과 교통하지 않는 것은 500년 동안 지켜온 법으로 천하가 다 아는 바이며, 청 황제도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를 논하든 애초에 협상할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높은 관리를 기다립니까?
- 동양이나 서양이나 각기 자기의 정치를 잘하고 자기네 병사들을 안정시켜 화목하게 살아가며 서로 침략하는 일이 없도록 하니, 이것이 바로 천지의 마음입니다. 그걸 어겨 하늘을 노하게 한다면 상서롭지 못할 것입니다. 귀 대인도 이 이치를 잘 알 것입니다.
- 풍파만리에 고생했을테니 변변치 못한 물품으로 먹을 것을 주는 것은 주인의 예절이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한마디로 저번 일은 유감인데 그건 니네 잘못이라는 것이고, 협상은 생각하지 말란 거였죠. 로는 이렇게 답합니다.
- 당신들이 보내온 서신의 내용을 보면 귀 조정이 우리나라가 군주가 파견한 관리와 만나서 해결하려는 문제에 대하여 협상할 생각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측에서 매우 안타깝습니다.
- 까닭 없이 공격한 잘못을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비호하면서 정당방위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원래 포를 쏜 건 귀국 군사의 망동이라 생각했고 귀 조정에서 책임을 벗고 싶다면 높은 관리가 와서 협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기한을 늦추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허나 협상할 의지 없이 기한이 다 된다면 전적으로 우리식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기일이 매우 촉박합니다.
- 보내준 물건들에 은혜와 사랑을 충분히 알 수 있으며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돌려보냅니다.
6월 9일, 로와 로저스는 상륙을 결심합니다. 기한이 만료되는 10일에 맞춰서 말이죠.
기본 방침은 "무력은 사죄와 보상을 받아내기 위해서만 사용한다"는 것, 그리고 "작전은 강화도에 국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진행과정을 보면 이 방침은 잘 지켜집니다. 공격은 군사시설에만 했고 대민피해는 없었죠. 작전도 조선을 압박할 정도만 했으며 그런데도 반응이 없으니까 쿨하게 떠납니다. 뭐 그들 입장에선 정정당당하게 싸웠다 봐야죠.
병인양요 때와는 상황이 좀 다르긴 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지금도 어디서 죽어갈지 모르는 선교사와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탄압을 최대한 빨리 막으려고 온 반면 미군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핑계고 그냥 수교하러 온 것인만큼 여유가 있었죠.
아무튼 "보복"이 명분인만큼 중요목표는 광성보였습니다. 이전에 자기들을 공격했던 곳이었죠. 어차피 강화도만 차지해도 수운을 마비시킬 수 있었고, 이미 그 효과는 나오고 있었습니다.
-------------------------------------------------------------------------
6월 10일 정오, 상륙이 개시됩니다. 포함 모노카시와 팔로스호가 참가했고, 소형 전함 4척과 소형 단정 20척이 투입됩니다. 병력은 해군 546명과 해병 150명, 총 650명이었죠. 투입된 대포는 곡사포 4문이었습니다. 상륙작전의 지휘는 블레이크 중령이 맡았고, 상륙하는 해병대의 지휘는 킴벌리(운영진!) 중령이 맡습니다. 여기에 조선과의 협상 가능성을 감안해 작전을 펴면서도 최대한 조선측과 접촉을 시도하고 특사를 파견할 기미가 보일 경우 즉시 작전을 중지하게 했죠.
첫 목표는 초지진이었습니다. 딱 봐도 남쪽부터 들어가려면 첫 관문이 될 곳이죠.
+) 여기 참전한 틸튼 대위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가 여럿 있는데, 염장이 싫어 번역하지 않겠습니다. -_- 귀찮아서가 아니라요. 조선을 딱히 적대하진 않습니다.
초지진은 인조 때 설치된 진으로 당시 첨사 이렴이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규정상 병력은 100명이지만 실제 얼마나 됐을지는 -_-a 이렴은 초지진의 화포 12문으로 맞섰지만, 미군의 함포에 상대가 되지 않았죠. 미군은 2시간에 걸쳐 초지진 주변을 초토화시킵니다. 이렴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미리 후퇴해서 피해는 없었구요.
오후 2시, 킴벌리 중령이 이끄는 상륙작전이 시작됩니다. 조선군의 반격이 없었음에도 상륙은 2시간이나 걸렸습니다. 갯벌 때문이었죠. 특히 대포를 옮기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겨우 초지진에 상륙한 미군은 필요없는 건물들을 불태우고 무기들을 바다에 버리거나 못 쓰게 만듭니다.
그렇다고 이렴이 그냥 도망간 건 아니었습니다. 화력에서 상대가 안 되니 야습을 노렸죠. 하지만 미군은 야습에 충분히 대비했고, 별 소득 없이 후퇴해야 했습니다.
다음 목표는 덕진진, 여기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다음 날 아침부터 함포로 미리 덕진진을 두들겨 조선군은 후퇴했으며, 미군은 가는 길에 갯벌이 있어서 고생했고, 조선군은 어수선한 미군을 기습하려다 반격을 당해 후퇴합니다.
마지막 목표는 광성보였습니다. 미군을 포격한 바로 그 곳이었죠. 원래 병력은 역시 규정상 100여명 정도였지만, 이 무렵에는 이미 많은 병력이 주둔해 있었습니다.
어재연은 6월 2일부로 광성보에 도착합니다. 서울에서 파견된 5개 초(1초당 약 125명) 중 4개 초가 그의 직할이었죠. 원래 수비대까지 생각하면 최소 5백명은 있었습니다. (최대 1천여명까지 추측합니다) 또한 143문의 화포가 있었죠.
그는 결사항전을 다짐했고, 병사들의 다짐을 받습니다.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부채에 적으니 일심선이죠. 미 해사 박물관에 있습니다. 그의 동생 어재순도 여기 있었습니다. 어재연은 그가 군인이 아니니 떠나라고 했지만 거부하죠. 같이 죽겠다면서요.
미군은 광성보를 그저 성채(citadel)이라 불렀습니다. 이번에도 별다른 저항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죠. 거대한 깃발이 그들의 눈에 들어옵니다. 대장을 뜻하는 수자기였습니다.
광성보로 가는 길은 짧았지만 험했습니다. 대포를 로프로 묶어 끌고가야 했죠. 그런 가운데서 조선군 정찰병이 공격해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작전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죠. 모노카시는 광성보에 포격을 가했고, 끌고 온 대포도 포격을 개시합니다. 이 때 조선군이 먼 거리에서나마 사격을 했지만 곧 잠잠해집니다. 미군은 아무 피해없이 그들을 저격했죠. 그 과정에서 첫 번째 전사자 데니스 핸러핸 일병이 나옵니다.
오전 11시, 미군은 공격준비를 마칩니다. 이 때 광성보에서는 나팔과 북소리가 들렸고, 조선군의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미군은 총과 창이 맞부딪히는 소리보다 더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군가를 부른 건지 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미군은 삼면에서 조선군을 포위했고, 돌격을 개시합니다. 그 선두에는 맥키 중위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유서 깊은 군인 가문으로 그의 아버지 역시 멕시코 전쟁 때 전사했습니다. 그도 집안 전통이라고 적을 정도였죠.
그에게는 미모의 약혼녀가 있었지만, 조선에 오기 전에 이별 통보를 받습니다. 그 분노로 상대가 누구든 덤빌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합니다. 군인의 의무였을까요, 아니면 분노가 섞인 거였을까요, 그는 누구보다 먼저 조선군에게 향합니다.
격렬한 총격은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조선군은 총을 제대로 쏘기 전에 미군의 사격에 쓰러졌고, 다음 총알을 장전하기 전에 미군의 돌격이 들이닥칩니다. 전투는 바로 백병전이 됩니다.
맥키 중위는 가장 먼저 성 위로 오릅니다. 조선군도 곧바로 그를 덮쳤죠. 총알 한 발이 그의 사타구니에 명중했고, 이어 그의 옆구리에 창이 박힙니다. 다른 병사들은 그를 구하러 갔지만 그들 역시 조선군에게 중상을 입었죠.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미군은 계속 성벽을 올라왔고, 조선군은 더 이상 막지 못 합니다. 이 과정에서 해군 수병 세트 앨런이 두 번째로 전사합니다.
전투는 단 20분만에 끝납니다. 남북전쟁을 겪었던 미군에게 조선군은 상대가 되지 못 했습니다. 어재연은 직접 칼을 빼들고 나섰지만 그 역시 쓰러집니다. 그를 쏜 제임스 도티는 이 공으로 명예 훈장을 받습니다.
+) 그 외에 두 명이 더 나옵니다. 아직 미군이 잘 나가기 전이라 그런지 명예 훈장이 잘 나온 모양이네요.
총에 맞은 병사 두명, 중상을 입어 결국 목숨을 잃은 맥키까지 미군의 전사자는 단 세 명에 불과했습니다. 중상자도 나왔지만 10여명 정도였죠. 반면 조선군은 미군에 일방적으로 밀립니다. 애초에 화력부터 훈련도 차이가 너무 컸고, 조선군은 4개 영의 병력을 하나로 묶은 거라 조직적으로 싸우기 어려웠습니다. 이게 조선 군제의 문제지만, 조정으로서는 그런 약점보단 함부로 대병력을 묶었다가 반란 일으키는 걸 더 두려워했죠. 그래서 그 때 그 때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병력을 묶어서 쓴 거구요. 이러니 상대가 안 될 수밖에요.
하지만 미군은 여기서 큰 충격을 받습니다.
미군이 딱히 그들을 학살하려 한 건 아니었습니다. 저항하지 않으면 포로로 잡으려고 했죠. 하지만 조선군은 거부합니다. 총으로, 창으로 싸우다 안 되면 돌이나 흙을 던지면서까지 맞섰죠. 포로로 잡으려 하자 자결하거나 바다로 뛰어듭니다.
미군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미군은 243구의 조선군 시체를 파악합니다. 여기에 바다로 뛰어든 이들을 100여명으로 잡았죠. 포로는 20여명이었습니다. 그나마도 자결할 힘이 없는 이들 뿐이었죠. 정말 공격측이 다 죽이려고 하거나 방어측이 다 죽으려고 하지 않는 이상 나올 수 없는 수치입니다.
어재연 수자기
"조선군은 근대적인 총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한 전근대적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하여 그토록 장렬하게 싸우다 죽은 국민을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 슐레이 소령
이것이 "어재연의 분전"으로 간단하게 나오는 광성보 전투의 전말입니다. 미군은 이런 상황에 큰 충격과 감동을 느낍니다. 군인으로서요.
하지만 이후의 상황을 보면 마냥 감동할 일만은 아닙니다.
------------------------------------------------------------------
미군은 광성보를 파괴한 후 12일 귀환합니다. 애초에 강화도를 오래 점령하려는 계획이 아니었으니까요. 조선군이 먼저 공격했다는 게 그들의 명분이었고, 먼저 공격한 조선군을 무찌른 후 귀환하는 식이었죠. 조선측의 항의가 접수됐고, 미군은 다음 날 마지막 협상을 시도합니다. 포로들을 치료가 완료되는대로 석방하겠다는 거였죠. 하지만 조선측의 반응은 역시 예상 밖이었습니다.
부평 부사 이기조는 포로는 미군이 알아서 하라고 합니다. 자기 임무를 완수하지 못 하고 포로가 됐으니 비겁한 이들이고 돌아와봤자 환영받지 못 할 거라면서요. 포로들도 송환을 오히려 걱정했던 모양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대한 부상병과 전사자들의 시신이라도 챙기는 미군으로서는 정말 이해 못 할 상황이었죠. 결국 미군은 다음날 포로 9명을 무조건 석방합니다. 나머지는 치료가 더 필요했기에 데리고 있었구요. 조선측에서 관리가 파견됐지만 미군이 기대했던 고급 관리는 아니었습니다. 이걸로 미군은 협상을 완전히 포기합니다.
당시 미군이나 지금 미군이나 이해하긴 힘들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입장에선 어떨까요? 조선의 반응이 뻥카일 순 있습니다. 미군은 포로를 이용해 협상하려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서양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거였습니다. 설령 협상의 빌미를 주게 되더라도 포로들을 저렇게 대우하면 안 되는 거죠. 포로가 되느니 죽어라, 이건 일본군과 다를 게 뭡니까.
+) 반대로 얘기하면 일본군은 현대식 군대면서도 전근대식으로 놀았다는 거겠죠 -_-;
정말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다 전사한 분들은 위대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상황에 따라 다르죠. 죽음으로 상황을 바꿀 수 있다면, 그 죽음이 승리를 위해 철저히 계획된 것이고 스스로 결정한 것이라면 칭송해야 마땅하겠지만 이미 모든 게 기울었던 상황이라면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죽지 못했다 해도 죽도록 싸우다 포로가 된 거라면 나라에서는 그만큼의 대우를 해 줘야 되는 거 아닐까요? 설령 밑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만큼은 철저히 챙겨줘야죠. 아예 나라가 망할 위기라면 모를까 이 때 조선은 그렇게 몰리지 않았습니다.
전근대이고 침략을 당한 상황, 애초에 자신들도 죽음을 각오한 상황, 그들이 설사 죽음을 택했더라도 나라에서는 살아남은 이들을 생각해줘야죠. 뭐 그들이 후에 벌을 받았거나 그런 건 없습니다. 오히려 곡식을 내려주고 상처를 치료하게 해 줬죠. 이런 면에서 뻥카로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뻥카라도 화가 나는 부분이죠.
사실 진짜 짜증나는 건 지금도 전쟁 나면 포로가 되지 말고 죽어라는 식으로 정훈교육 하는 거지만요. 군대에서 정훈 때 포로가 되면 이렇게 저렇게 해라는 교육 받은 분 있나요?
에효 -.- 공연히 화 나네요.
이후 미군은 7월 2일까지 계속 머뭅니다. 하지만 조선의 반응은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하는 말도 똑같았죠. 미국측은 포격받은 것에 대한 보복을 한 것 뿐이고 계속 협상을 원한다고 했으며 조선측은 아예 고종에게 전달할 필요 없다고 하면서 포격은 정당방위였으며 표류한 미국 선박에 대해서는 알아서 구제해 줄 것이니 따로 조약이 필요없다고 맞섰죠. 20일부로 조선의 답도 끊깁니다.
7월 2일, 로는 철수를 결심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내용의 서신을 보내면서요.
- 우리가 온 것은 조약 체결을 위한 것이지 결코 무력시위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 조선이 공식 서한의 전달을 거부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 이번 일로 열강이 공동으로 조선에 출병할 경우 그 책임은 전적으로 조선에 있다.
- 앞으로도 외국 선박의 조난이 있을 경우 구원을 계속해주길 바란다.
... 협박과 부탁이 섞였군요.
이렇게 신미양요는 끝납니다. 광성보에서의 혈전을 빼면 조선도 참 쿨하게 대응했고 미국도 참 쿨하게 떠났네요. 쿨피스인 줄.
좀 길어졌으니 자세한 건 다음 편으로 돌리겠습니다. 간단히 예고만 하자면...
미국 내의 반응은 병인양요 때의 프랑스와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실패한 원정이라고 욕 먹었죠. 군사적으로야 손쉽게 이겼지만 정치적으로는 아무런 목적도 달성하지 못 합니다.
반면 조선은 정말 제대로 손 하나 써보지 못 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정치적으론 이겼네요. (...) 대원군은 이 역시 쇄국에 잘 이용합니다.
하지만 젊은 군주 고종은 생각이 조금 달랐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4년 후, 참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양선이 강화도로 향합니다.
우리에게 운요호로 널리 알려진 배죠. 본게임이 시작된 겁니다.
다음 편에서는 양요에 대한 총평과 운요호 사건을 다뤄보겠습니다. 강화도 조약까지 나가기...는 좀 무리인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