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뇨. 복어입니다.
끝 ^_^)
... 시작해보죠.
환단고기가 진서면 일본서기도 진서다, 뭐 이런 말을 가끔 들을 수 있습니다. 참 빤따스틱한 내용이고 특히 임나일본부설 때문에 이런 말까지 나오는 거죠.
하지만 이건 위서의 개념을 모르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진서/위서 논란은 어디까지나 사료 외적인 것을 기준으로 하거든요. 그 안의 왜곡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간단히 현재까지 나온 성과들을 집대성해서 정말 최고의 역사책을 하나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걸 천년전에 만든 거라고 하면 위서입니다. 반면 정말 내용이 전부 허구라서 사료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하더라도 옛날에 만들어진 게 맞다면 그건 진서인 거죠.
뭐 위서라고 아예 가치가 없는 건 아닙니다. 왜 그런 게 나왔느냐 정도의 가치는 있으니까요. 혹은 위서라도 꽤나 오래전에 만든거면 어느 정도의 가치는 있습니다. 관중이 쓴 거라 하는 관자가 대표적이죠. 특히 한국의 경우 고조선이 나오는 몇 안 되는 사료라서 중요합니다. -_-a
환단고기도 가치는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 민족주의 계열, 특히 대종교 계열에서 왜 이런 위서들이 나오게 됐나 연구하기에 좋죠 (...) 뭐 이 정도?
문제는 역시 내적인 부분이겠죠.
일단 이주갑인상으로 대표되는 역사 끌어올리기가 있습니다. 2갑자, 그러니까 120년을 끌어올렸다는 거죠. 300년 중반에 나와야 되는 근초고왕이 200년대 중반에 나옵니다. -_-;
그 희생자가 바로 히미코. 중국과 한국의 기록엔 있으면서 일본서기엔 없습니다. (...)
그 자리를 대신해 만들어진 게 바로 진구 황후, 삼한을 정벌했다는 그 분입니다. 이 때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신라를 신의 계시로 알아냅니다. 그리고 압권인 부분이...
"이 때 마침 황후의 산달이었는데 황후가
돌을 들어 허리에 차고 빌며 “일이 끝나고 돌아오는 날 이 땅에서 낳게 해주소서”라고 빌었다. 그 돌은 지금 伊覩縣의 길가에 있다."
........;;;;;;;;;;;;;;;
그렇게 바람의 신이 순풍을 불어주니 힘들이지 않고 신라로 갔고 쓰나민지 그냥 해일인지가 신라 한가운데까지 일어나서 고구려 신라 백제 다 항복했다 (...) 마 그런 내용입니다.
오죽했으면 후대에 나온 사서에는 삼한 다 정벌했다는 건 과장이고 신라만 먹었다로 바꿨다 합니다. -_-;
아 얘기가 좀 돌아갔군요. 다시 이주갑인상 얘기하자면... 이게 좀 대표적인 말이긴 한데 이건 정말 양반입니다. 정확히 120년씩 끌어올렸으면 맞추기 쉬우니까요. 문제는 다른 건 대체 어떻게 맞춰야될지 애매하다는 겁니다. 엔하에 좋은 표현이 있군요.
"연대가 정말 마음대로 '구겨져' 들어가 있고, 이주갑인상된 기록은 그나마 그 중에는 일관적으로 '접혀' 들어간 연도이다."
내부적으로도 이런 문제가 있는데 이런 게 다 외국, 특히 한국과 연결되니 외교적으로도 큰 문제가 일어나는 거죠.
문제는 이겁니다. 내용이 그렇게 빤따스틱하니 우리는 그냥 무시해도 좋을까 하는 거죠. 그게 또 그렇지가 않아요.
"新羅는 明王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 때 新羅에서 佐知村의 飼馬奴 苦都
[註 003]다른 이름은 谷智이다에게 “苦都는 천한 奴이고 明王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 후 苦都가 明王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明王이 “왕의 머리를 奴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苦都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奴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다른 책에는 “明王이 胡床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明王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苦都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다른 책에는 “新羅가 明王의 頭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百濟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新羅王이 明王의 뼈를 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都堂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餘昌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筑紫國造가 나아가 활을 당겨 新羅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헤아려 쏘아 떨어뜨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鞍橋)를 뚫었고, 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오듯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餘昌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餘昌이 (筑紫)國造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고 높여 “鞍橋君”이라 이름하였다鞍橋는 우리 말로 矩羅膩(くろじ)라 한다. 이 때 新羅 장수들이 百濟가 지쳤음을 모두 알고 드디어 멸망시켜 남겨두지 않으려 했다. 한 장수가 “안된다. 日本 天皇이 任那의 일 때문에 여러 번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다시 百濟官家를 멸망시키기를 꾀한다면 반드시 후환을 부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 길죠? 이것도 한 절반 정도반 펀 겁니다. 한글 변환은 귀찮아서 orz;; 이게 무엇인고 하니...
"32년 가을 7월에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
네, 백제 성왕이 죽는 부분입니다. 위가 일본서기, 아래가 삼국사기죠. 분량 차이가 참 넘사벽입니다. 특히 노비가 죽였다는 건 일본서기에만 나오고, 대화 내용도 있죠. 특히 긴메이 덴노 같은 경우는 자기에 대한 기록은 없고 성왕에 대한 기록만 자아아안뜩 있어서 농담삼아 둘이 동일인물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_=; 다시 말하면 일본이 백제를 지배했다는 것만 제거한다면 성왕의 일대기를 복원할 수도 있는 것이죠. 근초고왕부터 백제왕들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것들입니다.
이런 식입니다. 일본서기에 디테일한 내용이 참 많은 것이죠. 고구려의 경우 이런 게 있습니다.
"고구려의 "곡향강상왕은 중부인의 아들을 태자로 삼았는데, 이를 지지하는 세력을 추군이라고 하였다. 또한 소부인에게도 왕자가 있었는데 이를 후원하는 집단을 세군이라 하였다. 그런데 곡향강상왕이 병들어 눕자, 추군과 세군은 각각 그 부인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면서 궁문에서 싸웠다. 그 결과 세군으로 죽은 자가 2천이었으며, 곡향강상왕도 이때 돌아가셨다"
+) 이건 걍 엔하 펌 - -a
안원왕 때의 왕위계승문제를 다룬 건데 이 역시 우리측 기록엔 없습니다. 그래도 고구려가 쇠락하는 정황에 맞기에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죠.
백제, 고구려 멸망 후 일본으로 넘어갔을 때 이들이 남긴 기록이나 증언, 사서들이 있었을 것이고 실제 일본서기에 백제삼서(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등에서는 찾기 힘든 것들이 일본서기에 나오는 거죠. 그것도 아주 자세히요. 우리쪽에서는 안 나오는 이들이 일본서기에는 등장하기도 하구요.
이런 거 하나하나가 고대사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인데 하나하나가 다 임나일본부식으로 색칠돼 있습니다. orz 저 위에 성왕 기록만 봐도 이대로 백제 칠까 하다가 일본 무서워서 못 한다는 게 나오잖아요.
정말 먹음직스런 떡밥이 많습니다. 하지만... 전부 다 독이 들어있죠.
백제 얘기 많이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가야입니다. 다른 어느 사료보다 가야에 대한 기록이 자세해요. 그런데 다 일본이 지배한 임나 이런 식이죠. 가야 연구가 지지부진할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임나일본부설 가지고 싸우는데 일본서기 제대로 연구할 순 없는 노릇이잖아요. 뭐 하나 발굴했다가 일본 쪽에 유리한 게 나오면 또 어쩌구요. 그나마 이 논쟁에서 한국 쪽이 이기면서 숨통이 좀 트였죠.
덕분에 지금 가야 연구는 혼돈의 카오스 상태입니다. 일단 이병도 때부터 시작된 가야연맹설이 가야제국(諸國)설로 대체돼 가고 있죠. 고고학적인 발굴도 사료 연구도 계속되고 있구요. 뭐 하나 나올 때마다 서로 싸우고 있을 겁니다. 제가 가야사는 잘 모르니 이 부분은 여기까지 쓰겠습니다만.
이런 연구에서 일본서기는 빠질 수가 없습니다. 진짜 말 그대로 복어입니다.
일본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이리저리 구겨져 들어간 걸 찾아내려면 한중 사학계와의 연계가 필수입니다. 적과의 동침도 아니고 =_=; 지금은 그나마 풀린 편이니 서로 싸우고 같이 연구하고 하면서 발전해 가겠죠.
따지고보면 중국 쪽과도 비슷한 문제가 있을 겁니다. 아니 이웃나라는 다 이런 식이겠죠. 자기 쪽에 유리하게 쓰여 있으니까요. 문제는 일본서기가 너무 퐝당하다는 거 -_-a
그리고 우리 사서들에도 마찬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같은 것들 말이죠. 삼국사기도 충분히 끌어올려졌고 구겨져 들어간 부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외국과 연관된 게 없어서 문제가 안 될 뿐이죠. 오히려 이걸 연구하면 식민사학이라느니 하는 욕을 듣는 게 문제구요. -_-; 뭐 근본적인 원인이야 일본서기 같은 건 안 건드렸으면서 조선 건 건드렸던 일본에 있겠지만요.
이런 이유로 일본서기를 어떻게 보느냐는 건 역사를 얼마나 아느냐의 척도 중 하나로 삼아도 괜찮을 겁니다. 정말 아예 필요없는 거였으면 왜 힘들게 번역하고 인용하겠어요.
그럼 이만 글을 맺겠습니다. 그런데 복어 맛있나요? 한 번도 안 먹어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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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기로 했던 글들은...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