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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12/10 07:57:03
Name 계층방정
Link #1 https://blog.naver.com/lwk1988/223687965279
Subject [일반] [서평]《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 - 의식과 무의식 모두 나다

밀리의서재 북마스터로 활동하면서 처음으로 북마스터 선정 후보작을 단독으로 다루는 글입니다. 북마스터 활동을 하기 전부터 같이 나누고 싶은 책이 많았고, 북마스터 선정 후보들은 새로 나온 책들이다 보니 그간 다룰 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북마스터 후보도 많이 읽었고 그 중에 흥미로운 책들도 점차 쌓이고 있습니다. 2024년 한국에서 가장 지혜로운 책 10권도 아직 1권밖에 못 읽었는데 세상에는 좋은 책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인코그니토incognito'인데, 자기 신분을 숨기고 우리의 행동 대부분을 관장하는 무의식을 잘 표현해 줍니다. 원서는 2011년 3월 출판되어 아마존 등에서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습니다. 한국에도 원제를 그대로 딴 '인코그니토'로 2011년 6월 번역되었으나 절판되었다가 올 11월에 새로운 번역판으로 나왔습니다. 책을 읽다 살짝 갸우뚱한 점이 좀 있었는데 이제는 좀 오래된 책이라는 것도 한 이유겠군요. 공교롭게도 2011년은 그 전까지 충격적인 실험 결과를 꾸준히 발표하고 있던 심리학계와 신경과학계에 “그 실혐, 실제로 재현이 되는 거야?”라는 폭탄을 던진 재현성 위기가 본격적으로 불거진 해입니다.

글쓴이 데이비드 이글먼은 미국의 신경과학자입니다. 스탠퍼드대학교 신경과학과 외래교수로 재임하면서 《사이언스》·《네이처》 등에 여러 논문을 발표하는 한편, 2009년 《썸》을 출간하고 2015년에는 6부작 TV 다큐멘터리 〈데이비드 이글먼의 더 브레인〉 을 진행하는 등 과학 저술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위의 다큐멘터리는 이글먼에게 “신경과학계의 칼 세이건”이라는 호평을 선사했습니다. 글쓴이는 뇌 가소성·시간 지각·공감각·신경 법학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이 책도 이 주제들을 모두 중요하게 다룹니다. 글쓴이의 최신작은 2020년에 나온 《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원제는 Livewired)로, 한국어판은 2022년에 이 책과 같은 출판사인 알에이치코리아에서 나왔고 번역자도 같은 김승욱입니다.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1장 내 머릿속에 누가 있는데, 내가 아니야

2장 감각의 증언: 경험이란 정말로 어떤 것인가?

3장 무의식이 하는 일

4장 우리에게 가능한 생각들

5장 뇌는 라이벌로 이루어진 팀

6장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틀린 질문인 이유

7장 왕좌 이후의 삶

감사의 말 | 주 | 찾아보기

1장부터 6장까지는 의식하지 못하는 뇌의 활동들을 하나하나 소개해나가면서, 마지막 7장에서 그 모든 것을 모아 우리의 의식은 우리의 중심이 아니라 매우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충격을 독자에게 던집니다. 감각, 생각, 행동 이 모든 것을 의식하며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거의 모든 것을 무의식이 처리합니다.

이 충격을 던지기 위해 책이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7장의 또 다른 중요한 메시지가 오히려 묻히는 느낌이 있습니다. 육체, 무의식, 의식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규정하지 못하며, 우리는 그 셋의 총체라는 것이지요. 7장의 전반이 의식을 우리의 중심에서 몰아낸다면, 후반은 육체, 의식, 무의식의 상호작용에 다시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7장 전반의 충격은 1장에서 6장을 거치면서 차근차근 조립되기 때문에, 7장 전반의 충격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 후반의 메시지는 힘이 덜 실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은 지동설, 진화론, 무의식 셋을 같은 거대한 변혁으로 취급합니다. 지동설은 지구를 왕좌에서 끌어내렸고, 진화론은 인류를 폐위했고, 신경과학은 의식을 폐위했습니다. 이렇게 중심에서 밀려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중심에서 밀려난 후에야 인류는 우주의 광대함, 생명의 광대함, 그리고 인간의 광대함에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감동적인 설명인데, 틀렸습니다. 천동설에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곧 천상의 빛에서 가장 먼 암흑과 죄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과학자를 자처하지만, 오히려 과학자들의 머릿속에 인류는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있다는 편견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진화론을 거부한 사람들이 인류를 만물의 영장에서 하찮은 짐승으로 끌어내렸다고 하지만, 반대로 인간을 가장 진화된 우월한 짐승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보면 결국은 진화론이 성경의 천지창조와 일치하지 않아서 거부한 것이지 인류의 자기중심주의와 맞지 않아서 거부한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이런 논의가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식으로든 인간은 자기중심주의에 빠지기 쉽고, 새로운 지식은 그 자기중심주의를 뒤흔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과학자는, 바로 그 때문에 인류가 자기중심주의에 빠졌다고 선포하는 예언자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 새로움에 도취된 나머지 헛소리를 하기도 하지만요.

저는 이 책의 주제를 하나로 꿰고 있는 이 "폐위"라는 장치의 속 뜻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런 장치는 책의 내용이 흩어지지 않고 하나로 엮일 수 있게 하는 좋은 도구인 것 같습니다.

다시 무의식의 세계로 돌아오면, 우리의 감각 기관이 처리한 정보가 그대로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행동한다고 믿는 의식대로 우리가 행동하는 것도 아닙니다. 많은 부분을 무의식이 처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착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걸 그냥 무의식이라고 하지만, 그 속에는 다앙한 것들이 숨어 있습니다.

책은 우리가 깊이 생각할 만한 질문도 던집니다. 5장은 묻습니다. 술 먹고 나오는 모습이 우리의 본성일까 아닐까? 대체 우리에게 참된 하나의 모습이 있기는 한 걸까?

또 6장은 묻습니다. 정신이 아픈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옳은가? 나아가서, 과연 죄를 짓는 사람 중에 정신이 아프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이렇게 글쓴이의 주 연구 주제인 신경 법학으로 독자를 이끕니다.

이 책은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지각과 생각과 행동에 걸쳐 설명해 줍니다. 그러면서 폐위라는 키워드로 점차 자의식을 우리의 중심에서 제자리로 돌려 보내고요. 무의식에 시선을 집중하게 하는 책이지만, 의식이 쓸모 없는 것이라고 섣부르게 단정하지 말고 의식의 제자리는 어디일까 생각해 가면서 읽으면 이 책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책의 결론은 아니지만, 저에게는 가장 의미 있는 구절로 마칩니다.

‘나’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나의 경계선은 어디인가? 유일한 해법은 뇌를 ‘나다움’의 가장 조밀한 집적체로 생각하는 것이다. 뇌는 산꼭대기일 뿐, 산 전체가 아니다. 우리가 ‘뇌’와 행동에 대해 말하는 것은 훨씬 더 광범위한 사회생물학 시스템의 영향이 포함된 어떤 것을 간략히 표현하는 방법이다.* 뇌는 정신이 있는 곳이라기보다 정신의 허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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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rapsionic
24/12/10 09:17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책 추천받아 읽어보려하던 차에 보게 되었습니다. 한번 책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서평입니다.
계층방정
24/12/10 23:49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칭찬을 받으니 힘이 나네요.
24/12/10 11:10
수정 아이콘
(수정됨) 요즘 뇌과학에 대한 책들을 읽어가고 있습니다.

생물은 유전자를 복제하는 기계인데,
뇌라는 건 생물이 '운동'을 하는 쪽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기관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식물에게는 뇌가 없고, 동물인 멍게는 움직이며 지내다가 성체가 되면 자기 뇌를 먹어치우고 식물처럼 붙박혀지내고)
그리고 인간이 '나'라고 생각하는 자아, 의식이란 건 그 뇌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부산물이라고 하는 거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몸을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은 골격근 정도로, 몸의 극히 일부분입니다.
불수의근, 내장, 세포 등 몸의 대부분은 태중에서 나라는 의식이 생기기도 전부터 나의 의식과는 관계없이 쉼없이 자율적으로 작동합니다. 내가 제어할 수도 없지요.
뇌도 다른 신체부위와 마찬가지로 내가 의식이 있든없든, 잘 때도 기절했을 때도 식물인간이 될 때도 쉼없이 자율적으로 작동합니다.
뇌는 지금도 쉼없이 내가 제어하지 못하는 생각들을 만들어내고 나는 그것을 내 의지로 멈출 수도 없습니다.
그런 걸 생각해보자면 정말 '나'라는 것이 내 몸의 주인이 맞긴 한 걸까? 라는 생각이 들죠.

'내가 이 버튼을 누르겠다'고 생각하기 10초 전에 이미 뇌는 그걸 누르겠다고 판단했다는 실험이 있습니다.
우리 몸과 뇌가 이미 플랜을 세워 행동한 것이고 '나'라는 자아는 후에 그 결정된 내용을 받은 것일 뿐이라는 거죠.

그런 걸 보자면,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자아와는 아무 상관없이) 뇌와 몸은 그저 유전자를 퍼뜨리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고
모든 판단도 그런 기계적인 과정에서 뇌와 몸이 하고 있는 것이며
'자아'는 그렇게 뇌가 프로세싱한 결과값을 나중에야 받는 건데
거꾸로 '내가 뇌를 작동해 생각을 하고 몸을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일 뿐 아닌가 하는 상상이 들어요.

(게다가 우리가 시각, 청각 등으로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정보들은 외부의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뇌가 적극적으로 보정, 왜곡, 창조를 해서 전해주는 정보,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환상'이라고 하고.)

그렇다면,
외부 침입자가 체내에 침투하면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몸이 알아서 백혈구 등을 동원해 처리하는 것처럼,
인류가 서로 좋아하고 미워하고 협동하고 경쟁하고 문명을 만들고 하는 것도 그렇게
'나'와 상관 없이 인류의 몸들이 자율적으로 유전자를 퍼뜨리는 작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일까,
'나'는 몸이라는 기계에 영문도 모르고 올라탄 불청객인 걸까,
'나'는 뇌의 필요에 의해 생성된 기능들, 소프트웨어 모듈들 중 하나일 뿐일까,
'나'는 몸과 뇌가 만든 매트릭스 안에서 뇌가 알아서 하고 있는 판단을 내가 한 판단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것일까,
'나'는 나와 상관없이 진행되는 1인칭시점의 영화를 보고 있을 뿐인데 내가 컨트롤러를 쥐고 캐릭터를 조종하고 있는 거라고 착각하는 것일까...

그것이 완전한 사실이라 밝혀진다고 해도 우리는 '그렇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지' 하며 그냥 똑같이 살게 될까요.


(유발 하라리 같은 경우는 고통이야말로 우리가 처리해야 할 유일한 대상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건 다 허구라도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어쩔 수가 없다....)
계층방정
24/12/10 23:51
수정 아이콘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도 나오는 얘기인데,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나나 내가 의식하는 나나 결국은 하나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의식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무의식만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유연함을 인간에게 부여합니다.
24/12/10 12:20
수정 아이콘
동전의 양면이긴 하지만, 저는 [의식]에 대한 연구나 논의가 재미있더라고요. 특히 다니엘 데닛의 주장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의식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뇌에서 병렬적으로 이루어지는 정보처리활동 중 그 시점에서 목소리가 가장 큰 것일 뿐이다.] 그의 주장을 깊숙히 생각해보면, 영혼이나 자아, 삶의 목표, 미래 계획, 행복추구 등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득해지고, 결국 인간은 탄소/산소/질소의 결합물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소개해주신 책을 읽으며 의식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어 봐야겠네요.
계층방정
24/12/10 23:52
수정 아이콘
이 책도 뇌 안에서의 민주주의를 강조하는데 대니얼 데닛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좋은 주장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Neuromancer
24/12/10 12:57
수정 아이콘
흥미로운 글이네요
계층방정
24/12/10 23:52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은때까치
24/12/10 14:54
수정 아이콘
다 좋은데.... 2011년 발매라면 너무 옛날 연구들만 담은 책이 아닐까요? 심지어 그 고대의 알파고도 16년 나왔는데....
본문을 보지 못해 섵부른 예상일 수도 있지만, 현대 신경과학이 알고 있는 것과는 좀 거리가 있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은 드네요. (순전히 발매 시점 때문에라도)
계층방정
24/12/10 23:55
수정 아이콘
본문에도 남겨 놨는데 2011년이 마침 신경과학과 심리학을 강타한 재현성 위기의 해이기도 합니다. 책에서 초반에 소개하는 무의식의 편향을 측정한다는 실험이 실제로는 아무 의미 없는 거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문에도 남겨 놨는데 2011년이 마침 신경과학과 심리학을 강타한 재현성 위기의 해이기도 합니다. 책에서 초반에 소개하는 무의식의 편향을 측정한다는 실험이 실제로는 아무 의미 없는 거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https://cdn.pgr21.com/freedom/102115 졸고지만, 이 서평의 7장에 나오는 IAT입니다). 그래서 저도 글쓴이의 최신작 또는 무의식에 대한 최근 경향을 따로 읽어봐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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