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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08 07:46
저는 데이비드 린 감독의 3부작들 중에서도 콰이강의 다리를 매우 좋아합니다. 싸이코는 별로라고 하셨는데 히치콕 감독의 Vertigo, rear window는 어떻게 생각하시질 모르겠네요. 올슨 웰레스가 나오는 the third man, 헨리 폰다가 나오는 분노의 포도와 12인의 성난 사람들도 좋았고요. 위에 선셋대로도 강추고요. 그렇지만 저 당시 일본 영화들이 대단한 것도 사실인데 쿠로사와 감독 작품들은 거의 버릴게 없죠. 그외로 1962년작 할복을 추천해 봅니다.
19/06/08 09:10
저도 히치콕의 싸이코보다 이창, 현기증을 더 좋아해요... 콰이강의 다리 하면 그 휘파람 부는듯한 행진곡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데 간만에 보고 싶어지네요
19/06/08 11:50
저도 싸이코로 히치콕을 알게 되었는데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이창, 현기증입니다. 특히 현기증의 오프닝과 종탑 계단신은 아주아주 인상적이죠.
19/06/08 08:14
https://youtu.be/KtlYtF1DXZo
'시민 케인'이 위대한 영화로 꼽히게 된 계기를 살펴보면, 앙드레 바쟁이라는 프랑스 영화 평론가의 격찬이 시작입니다. 이 사람이 시민 케인을 치켜 세운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핵심이 된 건 '딥 포커스'를 잘 활용해서 '미장센'을 극대화 시켰다는 점 때문이었어요. 여기서 딥 포커스란 카메라의 심도를 깊게 해서 스크린의 심층이라고 할 수 있는 배경과 표층이라고 할 수 있는 전경을 균일하게 맞춰 찍어내는 촬영 노하우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한 샷에 담긴 다양한 피사체에 모두 초점을 맞춰주는 효과가 있어요. 자연히 복합적이고 입체적으로 화면을 구성할 때 유리하고요. 이렇게 화면의 구성과 구도의 묘 혹은 그것을 극대화 하는 것을 미장센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딥 포커스와 미장센은 상당히 친화적인 관계를 갖죠. 화면을 아주 미술적으로 섬세하게 구성해놓았는데 정작 그걸 찍을 카메라가 초점을 제한적으로만 잡아주면 화면에 배치된 피사체들이 죽어버리니까요. 그럼 왜 이런 미장센을 바쟁은 중시했냐하면.. 그건 소비에트-할리우드 식 영화 편집에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는 컷이 꽤 역동적이고 스피디한 감이 있죠. 또 스토리를 오독할 여지가 없이 깔끔하고요. 한 씬에 담길 내용을 무수히 쪼개고 쪼개서 한 샷에 하나의 단일한 의미만 담긴 채 연속적으로 컷이 반복되면서 샷이 휘리릭 넘어가죠. 이건 원래 소비에트 프로파간다 영화에서 발달한 기법입니다. '몽타주'라고도 하는데, 서로 다른 내용을 전달하는 미분화 된 샷들을 무수히 붙이고 붙여서 전체적으로는 아주 웅혼하고 에너지 넘치며 신속한 영화가 되는 거죠. 보다 보면 '혁명 정신'에 관객이 찬동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할리웃 영화도 화면을 쪼개는 편집을 통해 한 샷에 단일한 의미만 담아서 분명하게 서사를 전달함으로써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다른 생각을 할 여지 없이 영화의 내용에 몰입하고 감동을 받게 만들죠. 슬픈 장면을 보면 슬픔 이외에 다른 감정을 느낄 수가 없게 하고, 기쁜 장면을 보면 기쁨 이외에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즉 영화의 문학적인 서사와 화면에서 시각적으로 전달 되는 바가 긴장과 균열과 위화감 없이 딱 달라붙어 있는 것이죠. 이러다보면 영화에서 촬영이란 사실상 스토리를 가감없이 객관적으로 투명하게 전달하는 역할 밖에 못하게 됩니다. 그건 바꿔 말하면 감상자 입장에선 창작자가 전달하고 싶은 '교훈'을 받아먹는 이상 할 수 없는 셈이고요. 바쟁의 관점에서 이런 건 영화가 아니라 TV 문학관이고 바보상자였어요. 물론 이때는 아직 TV가 보급되기 전이었습니다만 여튼 프로파간다고 조작술이란 거죠. 마치 요즘 예능들이나 뉴스들 보고 '편집 장난질'이라고 하듯이 바쟁 입장에서도 주류 영화들이 장난질을 치면서 조작을 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건 관객의 지성을 존중하지 않고 개돼지로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관점이었죠. 아마 바쟁 입장에선 상업 영화들이 김어준이나 마이클 무어 식 다큐멘터리 아닌 다큐멘터리로 보였을 겁니다. 그에 반해 '시민 케인'의 딥 포커스를 통해 구현된 미장센은 바쟁의 관점에서 훨씬 관객을 존중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일단 보다 깊고 넓은 화면에 다양한 피사체를 담아내죠. 그리고 이것을 컷으로 분절해서 스토리에서 중심이 될 것만 강조하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롱 테이크를 통해 한 화면에서 쭉 보여줬습니다. 그렇게 해서 보다 덜 가공되고 덜 MSG 쳐진, 자연산스러운 영화를 보여줬다고 판단한 거죠. 각각의 피사체가 균등하게 샷에서 제시되기 때문에, 관객들은 한 샷에서 하나의 대상만이 부각되는 전형적인 상업 영화와는 달리 샷을 보면서 무엇이 중헌지에 대해 자신만의 해석을 할 수 있었죠. 이건 관객이 꼴리는대로 영화를 보고 우기기만 해도 된다는 유아적 주관주의와는 다릅니다. 그보다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작품을 재해석하고 보다 타당한 해석을 내리면서 작품의 진가를 발견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고 보는 게 맞지요. 한 마디로 이때부터는 카메라는 감독이나 영화사의 시선이 아니라, 관객의 시선을 대변하게 됩니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비로소 하나가 되는 것이죠. 사회학자들이 현대 사회 이야기하면서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프로슈머 어쩌고 하는 것처럼, 이때 이미 감상자가 창작자이고 창작자가 감상자라는 함의가 도출된 것이죠. 또 한 가지 측면이라면, 이런 딥 포커스를 통해 샷의 숫자가 극단적으로 줄어들 수 있는 전기가 열리게 됩니다. 말하자면 할리웃 식 편집으로는 100개의 샷으로 전달할 것을 이젠 한 30개의 샷만으로도 전달할 수 있게 된 거죠. 이건 당시에 여러가지 의미를 띠었는데, 일차적으로는 제작 예산이죠. 당시엔 필름값이 만만찮았거든요. 보다 근본적으로는 작가주의입니다. 이전의 할리웃에선 감독은 사실 시다바리고 제작자와 수뇌부의 판단이 작품을 좌우했거든요. 그 첨병 역할을 하는 게 편집자였고요. 촬영 현장을 지휘해서 영화를 찍는 건 감독이지만, 그걸 수십 수백 개로 해체해서 연결하는 건 편집자고, 편집자는 큰 손들의 고용인일 뿐이죠. 그렇게 해서 나온 영화는 감독의 의도 이런 건 있을 수가 없고요. 인터뷰를 데스크가 짜깁기 잘하면 인터뷰어나 인터뷰이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인터뷰 기사가 나올 수 있는 것처럼요. 근데 저렇게 딥 포커스를 이용해서 한 샷 한 샷 분절할 수 없는 완결성을 띠어버리면 그런 식의 해체질과 짜깁기질은 의미를 잃습니다. 길게 풀어서 쓴 설명문은 장난질을 칠 수 있지만, 고도로 함축된 시를 가지고 장난질 치기는 어렵죠. 말하자면 작품에 대한 감독의 '통제력'이 올라간 것이고, 이건 영화가 단순한 영화사의 상품이 아니라 감독이란 단일한 예술가의 창작 의도가 관철된 예술품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었죠. 비로소 감독은 영화사가 준 대본을 그대로 읊는 앵커가 아니라 스스로 전달하고자 하는 미적 감상을 응축하고 생성할 수 있는 '시인'이 된 것입니다. 위에서 시키는대로 스타카토 식으루다가 영화를 조각조각 내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감상을 자신만의 화면에서 자신만의 구도를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달하게 된 거죠. 이때부터 (화면을 경제적이자 미술적으로 구성하는) 감독만의 스타일=작품의 형식이 됩니다. 정리하자면.. 딥 포커스는 자체로는 단순한 카메라 촬영 기법에 불과하지만, 잘만 써먹으면 영화를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창작자와 감상자 사이의 게임이자 스무고개로서의 예술이란 지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다는 게 바쟁의 아이디어였습니다. 문학이나 미술이나 음악하는 전통 예술쟁이들이 영화를 천박한 상품이라고 무시할 수 없게 아닥 시켜버리고픈 갈망이 있었던 거죠. 그리고 그 가능성을 제시한 게 '시민 케인'이었고요. 물론 이건 순수한 바쟁의 생각이라기보다는 바쟁이 가진 이런저런 견해를 좀 더 후대의 맥락과 접붙인 것이기는 합니다만, 이 역시도 '재해석'이고 미장센이겠지요. 이쯤에서 알 수 있는 건.. 고전 영화를 사람들이 높게 평가하는 건 그 영화들을 보면 재밌다 쩐다 이런 것과는 좀 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해당 영화가 대표하는 영화관觀에 대한 리스펙에 가까울 때가 많아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시민 케인에 크리틱들이 꺼뻑 죽는 건 누구나 시민 케인 안 보면 후회한다는 그런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민 케인 및 그로부터 파생된 담론으로부터 나온 일련의 관점들을 수용하고 긍정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영화 그 자체라기보다는 영화와 관련된 '맥락'을 바라보고 되새기는 거죠. 따라서 그 '맥락'을 모르는 사람들은 현대의 시각에서는 유치해 보이는 서사나 촬영이나 연기 같은 것들 외에는 읽을 수가 없는 거고요. * 맨 위의 링크는 영화 교과서 같은 곳에 워낙 단골로 설명되는 것인지라 구태여 더 말을 덧붙이긴 그런데, 여튼 저걸 봐도 컷을 최소화 한 채 4명의 인물의 감정과 비중을 한 샷에서 전달하고 있죠. 일일이 컷을 잘라서 관객에게 떠먹여주지 않고 스스로 능동적인 해석자이자 또 다른 '창작자'가 되게끔 합니다. 이를 보고 이런 거야말로 관객의 지성을 존중하는 거란 주장이 있었던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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