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드디어 'PGR21에 첫 글을 써야지!'라는 결심이 섰습니다. 만약 글을 쓴다면 '이런 주제로 써야지' 싶은 것도 정해져 있었고, 어느 정도 개요와 흐름을 정리해 두었기에 큰 무리 없이 글을 써 내려 갔습니다. 주제는 '대학생의 진로 고민'쯤 되겠군요.
중간중간 세부적인 구성을 어떻게 할지, 어떤 표현을 써야 할지 고민하며 신나게 써 내려가다가 문득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게 느껴졌습니다.
아뿔싸, 분명 한참 글을 써 내려 갔는데도 불과하고 아직 서론조차 끝내지 못한 겁니다! 글자 수를 확인해보니 3000자가 훌쩍 넘은 시점. 아직 쓰고 싶은 말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가볍게 시작한 글이 만 자가 훌쩍 넘어가는 대하드라마가 될 거 같아 황급히 다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쓰려고 했던 표현은 과감히 줄이고, 몇몇 내용은 아예 통으로 삭제해가며 겨우겨우 분량을 줄여나갔습니다. 다행히 이 시도는 결실을 맺어서 대략 글을 반 좀 넘게 진행했을 때 글자 수가 1500자가량으로 줄었습니다.
줄은 분량에 흡족해하며 썼던 글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았더니 아뿔싸, 이번엔 문장력이 개판이 됐습니다! 원래부터 그다지 미려한 문장이라고 하긴 힘들지만, 분량을 줄이려 통으로 자르고 무조건 짧게 쓰다보니 모든 문장이 딱딱하고 단조로워 별로 읽고 싶은 글이 아니게 되더군요.
결국 꽤 강한 현타를 느끼며 다 지워버리고 그대로 노트북을 닫았습니다. 사실 써 놓은 게 아까워서 txt 따놨습니다만. 흐흐.
사실 '글을 쓸 때 독자를 고려해야 한다'는 주제는 딱히 당위적인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이지요. 아무렴 별 재미도 없는 내용을 길게 길게 늘여 읽는 사람을 열불 뻗치게 만든다든가, 제대로 된 논리 구조 없이 온갖 생각이 뒤섞여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뱉어낸다고 하더라도, 규칙만 위반하지 않는다면 딱히 문제될게 없습니다.
단지 사람들이 읽지 않을 뿐이에요.
글을 쓰는 목적은 제각각 다르겠지만, 아마 대다수의 글은 남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쓸 겁니다. 특히 PGR처럼 글쓰기 규정이 빡빡한 곳에서는 더더욱이요. 그렇게 힘들여 쓴 글이 사람을 끌지 못하고 냉소를 받는다면 정말 슬플 거에요.
우리가 만약 교수고, 대학원생에게 과제를 내준다면, 굳이 독자를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분량만 많고 내용도 중구난방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배설해내어 던져준다고 하더라도, 뒤에서 어떤 욕을 할지언정 대학원생은 그걸 읽어올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남에게 우리 글을 읽게 하려면 남에게 무언가를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제 자체의 흥미로움일 수도 있고, 사람을 홀릴 만한 신들린 듯한 글발이 될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글을 읽는데 지루함을 주지는 말아야 하죠.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선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과 읽는 사람이 편한 글 사이에서 타협해야 합니다. 아무리 쓰고 싶은 내용이라도 글의 흐름을 위해서는 줄일 줄도 알아야 하고, 머릿속에 꼬여있는 생각을 보기 좋게 풀어서 나열해야 하기도 하고, 중간중간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개드립을 집어넣는 수고 또한 아끼지 않아야겠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독자를 의식하면서 쓴 글이 내가 진정으로 쓰고 싶은 글이 맞느냐? 라는 지점에 다다르면 또 골치가 아파집니다. 글을 쓰는 이유 자체가 내가 쓰고 싶어선데, 결과물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다? 이 모순은 무엇인지..
독자의 욕구를 적절히 수용해 나가면서도 자신의 색채를 잃지 않는 게 바로 내공이 아닐까 싶어요.
전 PGR을 크킹2 연재기로 접했고, 수많은 역사, 삼국지 관련 글이나 국제 정치 등의 주제로 쓴 맛깔나는 글을 보려고 PGR을 찾다가 결국 눌러앉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단순히 저러한 글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수용자가 아니라 스스로 생산해내는 생산자가 되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 결국은 진부한 내용에 진부한 결론이 되어 버렸습니다! 요새 느끼는 건 결국 내가 하는 고민은 한참 전부터 수많은 누군가가 고민해 오던 주제고, 더 나아가 의미 있는 결론까지 내놓은 상태라는 겁니다. 우린 이러한 것들을 고전, 교육을 통해 배우지만 사실 그렇게 의미를 두진 않죠. 그걸 무시하고 치열하게 고민하다 내는 결론이 정작 홀대했던 그 것이란 게 참 코미디처럼 느껴져요.
그래도 요새는 그러한 과정을 직접 겪고 생각해 본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남이 이미 생각한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해 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지.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