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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4/09 00:46:03
Name 신불해
Subject [일반] 삼국사기를 통해 알아보는 고구려 말기 기록들에 대한 난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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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보다가 어쩌다 본 글







위 짤의 글에서 이야기하듯 살수대첩 이야기 등은 주로 삼국사기를 통해 우리나라에 알려진 이야기나, 중국 쪽에서 자신들 기록을 바탕으로 적은 바이두 백과 등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완전히 똑같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로 종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떡밥이 되는, '수나라 100만 대군 동원이 사실이냐' 라는 이야기에서 기본적인 논거가 되는것이 '중국 쪽 기록에도 똑같이 나온다.' 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록의 출처, 좀 직접적으로 말해서 '국뽕 빠는 이야기 아니냐' 는 부분에서는 '저쪽에서도 똑같이 나온다.' 는 게 기본이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부정 혹은 이설을 이야기 하는 경우는 있지만 이 경우는 사료 자체에 대해 비판 분석 같은 범위에서 따지는거라 좀 다른 식의 이야기고, 아무튼 사료 자체는 분명히 그렇게 써 있습니다. 지금 이 떡밥을 가지고 이야기 하려는건 아니기 때문에 삼천포 빠지기 전에 그만하고...





아무튼 해당 시기 여러 이야기들은 중국 쪽에서의 언급이나 한국 쪽에서의 언급이나 별다를 게 없습니다. 똑같다고 봐도 됩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요?










乙支文德, 未詳其世系. 資沈鷙有智數, 兼解屬文. 
을지문덕의 세계는 상세하지 않다. 자질이 침착하고 용맹스러우며 지모가 있었고, 글 짓는 것도 깨달았다[이해하였다]





解. 隋(開皇)[大業]中, 煬帝下詔征高句麗. (《隋書》)
수나라 대업중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於是, 左翊衛大將軍宇文述, 出扶餘道, 右翊衛大將軍于仲文, 出樂浪道, 與九軍至鴨淥水. (《隋書․于仲文傳, 宇文述傳》)
이해에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로 나와서 9군과 함께 압록수에 이르렀다. 




文德受王命, 詣其營詐降, 實欲觀其虛實. 
을지문덕은 왕의 명령을 받아서, 그 진영으로 가서 거짓으로 항복하였는데, 실제로는 그 허실을 관찰하려 한 것이다. 





述與仲文, 先奉密旨, 若遇王及文德(來)[者], (則執)[必擒]之. [文德來,] 仲文等, 將(留)[執]之. 尙書右丞劉士龍, 爲慰撫使, 固止之, 遂聽文德歸, 深悔之, 遣人紿文德曰: 「更欲有(議)[言], 可復來.」 文德不顧, 遂濟鴨淥而歸.(《隋書. 于仲文傳》)
우문술과 우중문은 먼저 황제의 밀지를 받들어, 만약 왕이나 을지문덕을 만나면 반드시 사로잡으려 하였다. 우중문 등은 장차 그곳에 머물렀다. 상서우승 유사룡을 위무사로 삼고, 굳이 말리는 바람에 결국 문덕이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 뒤에 이를 깊이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 문덕을 속여서 말하기를 「다시 말할 것이 있다면, 다시 오도록 하라.」문덕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압록강을 건너왔다. 




述與仲文, 旣失文德, 內不自安.(《隋書. 宇文述傳》)
우문술과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놓친 뒤에 마음 속으로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述以粮盡欲還, 仲文(謂)[議]以精銳追文德, 可以有功, 述止之. 仲文怒曰: 「將軍仗十萬兵, 不能破小賊, 何顔以見帝.」(《隋書. 于仲文傳》)

우문술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가려 하는데, 우중문은 정예부대로 문덕을 추격하면 공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술이 이를 말렸다. 우중문이 화를 내어 말했다. 「장군이 10만의 병력을 가지고 와서 조그마한 적을 격파하지 못하고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뵙겠는가?」




述等不得已而從之, 度鴨淥水追之. 文德見隋軍士有饑, 欲疲之, 每戰輒(北)[走], 述等一日之中, 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群議, 遂進東, 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隋書. 宇文述傳》)
술 등은 마지못하여 그 말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서 문덕을 추격하였다. 문덕은 수군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 그들을 피로하게 하기 위하여 싸울 때마다 매번 패배한 척하며 도주하였다. 이렇게 하여 술은 하룻 동안에 일곱 번을 싸워 모두 승리하였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승리에 뱃심이 생기기도 하고, 또한 중의에 몰리기도 하여, 마침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너 평양성 30리 밖에서 산을 등지고 진을 쳤다. 




   文德遺仲文詩曰: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 仲文答書諭之. (《隋書. 于仲文傳》)
문덕이 중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보냈다. 
신묘한 책략은 천문에 닿았고, 오묘한 계산은 땅에 이르렀네. 
전투에 이겨서 전공이 높으니, 만족함을 안다면 중지하길 바라노라. 
중문이 답서를 보내 효유하였다. 





德又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 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難以猝拔, 遂因其詐而還, 爲方陣而行.(《隋書. 宇文述傳》)

문덕이 또한 사자를 보내 항복을 가장하고 술에게 요청하였다. 「만일 군사를 철수한다면, 틀림없이 왕을 모시고 행재소로 가서 조견하겠다.」 술은 군사들이 피곤하고 기운이 쇠진하여 더 이상 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평양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갑자기 함락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여, 거짓 항복이라도 받은 상태에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방어진을 만들며 행군하였다. 




文德出軍, 四面鈔擊之, 述等且戰且行, [秋七月]至薩水, 軍半濟, 文德進軍, 擊其後軍, 殺右屯衛將軍辛世雄. 《隋書. 煬帝紀》
문덕의 군사가 나아가 그들을 사면으로 공격하니, 술 등이 한편으로 싸우며 한편으로는 쫓겨 갔다. 가을 7월에 살수에 이르러 군사가 반을 건너자, 문덕의 군사가 나아가 그들의 후군을 공격하여 우둔위장군 신세웅을 죽였다.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九軍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淥水, 行四百五十里. 初, 度遼九[凡]軍三十萬五千人,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隋書. 宇文述傳》)
이렇게 되자 모든 적군이 한꺼번에 허물어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9군 장졸이 달려서 패주하였는데, 하루낮 밤 사이에 압록수에 이르니 그들은 4백 50리를 간 셈이다. 처음 요수를 건너 올 때 그들은 모두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에 돌아갔을 때는 다만 2천7백 명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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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삼국사기에서 '을지문덕' 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해당 기록 중에서 중국 사료에 나오지 않고 삼국사기에서만 볼 수 있는 독자적인 글귀는 굵게 해둔,




乙支文德, 未詳其世系. 資沈鷙有智數, 兼解屬文. 
을지문덕의 세계는 상세하지 않다. 자질이 침착하고 용맹스러우며 지모가 있었고, 글 짓는 것도 깨달았다[이해하였다]






文德受王命, 詣其營詐降, 實欲觀其虛實. 
을지문덕은 왕의 명령을 받아서, 그 진영으로 가서 거짓으로 항복하였는데, 실제로는 그 허실을 관찰하려 한 것이다.





이것 밖에 없습니다. 그럼 나머지 기록들은? 뒤에 괄호 쳐진것에서 알 수 있지만 수서(隋書 : 당나라에서 만든 수나라 역사서)에 있는 우중문(于仲文), 우문술(宇文述) 전에 나오는 내용을 전부 복사 붙여넣기 한 겁니다. 
 




그러면 남아있는 삼국사기만의 독자적인 글귀를 한번 봅시다. 첫번째 부분의 내용은 결국 이렇습니다.




"을지문덕이 집안이 어떘는지 출신이 어떘는지는 잘 모른다."


"용감하고 머리도 좋았다더라."


"글도 지을줄 알았다."





을지문덕의 내력이 어땠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는 것이고, 머리 좋고 용감했다더라 하는건 그냥 평론이고, 글 지을 줄 알았다는 건 아마 교과서에도 나오는 '귀신같은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깨달았고...' 하는 내용으로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를 우중문에게 준 걸 보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두번째 부분도 그렇습니다. "을지문덕이 그때 항복한것 처럼 한건 사실 몰래 적진 염탐하려고 한거임."




둘 다 '행동에 대한 기록' 이 아닙니다. 그냥 기록을 보고 평론한것 뿐입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삼국지 정사를 보고 매니아들이 "이 내용은 이렇고"하고 해설하는것과 진배 없습니다.







즉 단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보통 아는 고구려 - 수나라 전쟁, 고구려 - 당나라 전쟁에 대한 이야기의 98%는 그냥 중국 사서 내용 그대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삼국사기만의 독자적인 의미있는 기록은 아예 없습니다. 굳이 2%를 빼놓은건 중간중간 김부식이 "이건 아닌것 같다." 고 해서 전부 복사 붙여넣기 하는 대신 몇부분을 빼놓거나, 혹은 평론을 통해 부정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고구려 대군이 당태종의 군대에 대패한 '주필산 전투' 부분을 다루면서 "확실히 당군이 승리를 하긴 했는데, 내가 다른 기록을 보니까 일방적 학살까진 아니고 꽤 고전하긴 했던것 같은데 구당서, 신당서나 자치통감 같은 정사 기록에는 없는데 이 부분은 체면 때문에 좀 일부러 언급 안한거 아님?" 하면서 "신성, 건안성, 주필산의 전투에서 우리 병사들과 당나라 병사들이 많이 죽었다." 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그 김부식이 봤다는 다른 기록도 수당가화(隋唐佳話)라고 당나라 사람이 쓴 수당 무렵의 일화책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어쨌거나 이런 부분 제외하면 다른 사료에서는 찾을 수 없는 삼국사기만의 독자적인 기록은 없습니다.




때문에 삼국사기를 보다보면 어느시점에서 기록의 주인공, 서술의 주체가 고구려가 아니라 당태종이 되고, 당태종의 일대기에서 이야기가 전개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 있는 사료를 붙여넣기 했으니까요. 다른 사료는 애초에 없었고.





고구려 수나라 전쟁, 고구려 당나라 전쟁 무렵만 이런게 아니라 실상 대략 장수왕 이후 무렵부터는 고구려 사람이 남긴 독자적인 기록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온달 이야기 정도가 게중에서 예외 입니다. 그 외엔 연개소문 이건 뭐건 다들 기본은 중국 사료 기반인 내용들.





"....미국 학자 Jamieson은 '삼국사기'가 중국 자료를 편입시켜 놓은 것이 많기 때문에 한국과 중국 관계를 연구하는 데 있어 실망스러운 점이 적지 않지만, 당태종과 당고종 기간만은 '삼국사기' 가 공헌한 바가 크다고 하였다. 특히 그는 나당전쟁에 관해 분석하면서 당시 한반도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에 관해 중국측 기록은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 이상훈, 나당전쟁연구 中 pp.18







한국이나 중국을 떠나서 영어권 학자의 평으로도 자료 편입이 너무 많아서 딱히 새로운 게 없어서 실망스럽다는 평이 나오고, 대신 신라 - 당나라와의 전쟁인 나당전쟁 무렵부터는 중국 측과는 정반대인 기록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삼국사기만의 독자적인 가치가 있다는 평입니다. 이쪽 관련에서는 김부식이 참조할 독자적인 국내 기록이 있었다는 소리고. 전체적인 내용으로는 '그래서 국내학계는 나당전쟁 관련해서는 중국 자료보다 삼국사기 위주로 분석했다' ~ '그러다가 00년도 무렵부터 중국학자 배근흥(拜根興)과 국내학자 서영교 등의 연구로 새로운 중국자료도 발굴되고 좀 더 국제적인 관점에서 분석했다' (가령 저 멀리 중국 서쪽 끝에서 펼쳐진 당나라 - 토번 전쟁의 양상이 동쪽 끝에서 펼쳐진 당나라 - 신라 전쟁에 끼친 영향이라던가) 라는 내용이지만.










어째서 그랬을까? 김부식이라고 다른 방도가 있었던게 아닙니다.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략과 장보고(張保皐)의 의롭고 용맹함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던들 흔적이 없어져 듣지 못하였을 것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김유신 부분을 다루면서, (신라가 별다른 변고 없이 무탈하게 이어졌고 그 후손들도 각지에 번창했을) 김유신은 글 아는 사대부들은 물론이거니와 풀 베는 꼬맹이나 가축 치는 목동도 다 아는데 을지문덕이나 장보고는 애초에 중국 사서에 남아 있지 않았으면 유명세는 고사하고 오늘날 그런 사람 존재했다는 흔적도 없었을것 이라고 평했습니다. 즉 현대는 고사하고, 지금으로부터 무려 900년전인 고려시대 시점에서도 을지문덕에 대한 남아있는 기록은 국내에 아예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해하고 보면, 없는 기록 가지고 최대한 '지략 있었다' '글도 잘 썼다' '용맹했다' 등등 추임새를 넣으면서 추켜세워주려고 김부식이 소위 말하는 "피나는 똥꼬쇼" 하는 게 오히려 눈에 땀이 찰 지경입니다. 다른 기록은 쥐뿔도 없는데 있는 내용만으로 최대한 좋은 언급을 더 붙여주려고 애를 쓰다보니...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당대 연구의 거의 절대다수는 중국 사료이며, 그 외에 대안(이라기보다는 보완)을 해줄 수 있다고 하는것도 고구려 망하고 당나라에 끌려간 뒤, 그냥저냥 적당히 대우 받다가 죽은 뒤에 비문 세워진 고구려 고위층 비문 같은게 나오는 것이라던가,




그게 아니면 일본서기가 있습니다. 일본서기에 대해서 대중적인 인식은 '뭔 일본 황후가 배 타고 와서 고구려 백제 신라 때려잡았다는 일본 국뽕 날조 기록 아님?' '가치가 없는 막장 소설책' 이런 정도라 무슨 출처가 일본서기다, 이러면 영 좋지 않는 눈길을 받을 수 있지만




실제 국내 고대사 연구에서 일본서기는 비중이 큰 사서 입니다. 왜? 일본서기가 걸러들어야 할 기록이라고 치면, 국내에는 거르고 말고를 떠나 그냥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절대적인 편찬 연도도 삼국사기보다 몇백년은 좀 더 앞서서, 고구려 멸망기라고 하면다면 그 무렵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의 따끈따끈한 기록이기도 하구요.





가령 연개소문 사망 시에 연개소문이 유언으로 "너희 형제는 물과 고기(漁水)처럼 화합하여 작위를 둘러싸고 다투지 마라. 만약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이웃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라는 이야기는 꽤 유명하고 실제로도 연개소문 아들들이 나중에 분란을 일으키며 결국 나라 말아먹은 결론에 대한 복선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 유언은 일본서기에 나옵니다. 만약 삼국사기만을 본다고 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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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이 죽었다. 그리고 끝입니다. 때문에 일본서기를 아예 배제한다고 하면 국내 고대사는 정말 엄청나게 얆아지고 맙니다. 그래서 검증하면서 일본서기 기록을 쓰는 것이고(사실 사료에 대한 비판분석이야 뭘 떠나서 어떤 사료든 당연하지만 일본서기가 좀 더 노골적으로 정치적 목적이 강한만큼 좀 더 주의해서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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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stalavista
19/04/09 00:53
수정 아이콘
아예 기록문화가 없었거나 기록말살형을 당한 게 아니면, 망하면서 사서를 다 불태워 먹은 걸까요.
솔로14년차
19/04/09 01:41
수정 아이콘
광개토대왕비를 생각하면, 기록문화가 없지는 않았죠.
홍승식
19/04/09 01:09
수정 아이콘
분명 한자도 고구려가 먼저 받아들였을텐데 왜 고구려 기록은 없었던 걸까요.
신라야 그렇다쳐도 발해는 그 기록들을 좀 보관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다가 발해가 망하면서 만주에 남아있던 기록들이 그냥 사라지고??
ageofempires
19/04/09 01:25
수정 아이콘
(수정됨) 고구려 소수림왕 때(371~384년) 지어진 유기 100권과 영양왕 때(600년)에 지어진 신집이라는 역사서가 있는데 고구려가 망하면서 다 없어진 듯합니다.

========
다시 찾아보니 신집은 김부식이 참고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남아있었던 것 같습니다.
걸그룹노래선호자
19/04/09 01:12
수정 아이콘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패배하고 물러날 때 안시성주의 왕에 대한 충성심을 칭찬하면서 비단 100필을 하사했다고 하는데 솔직히 좀 난감하고 판타지스러운 기록의 대표적인 모습이죠. 그냥 고당전쟁 자체가 고구려측 기록이 많이 없어졌는지 너무 당나라측 관점에서 서술되는게 많아보이더군요. 예를 들면 이세민이 뭐를 하면서까지 병사들을 독려했다 뭐 이런 내용들까지..
ageofempires
19/04/09 01:16
수정 아이콘
(수정됨) 글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사실 한국의 고대사 자료는 없는거나 마찬가지라 너무 휑하죠. 타국 역사서의 얼마 안되는 부분이 전부가 될 지경이니 원... 삼국시대에 지어졌던 역사서들이 오래오래 보존되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진수의 삼국지 관련 기록이 워낙 상세하고 방대해서 당시 중국의 상세한 역사와 주변국의 역사도 알 수 있어서 그 주변국인 고구려 등의 역사도 어렴풋이 나오는데 그 어렴풋이 나오는 역사가 거의 전부인 역사죠. 소설 삼국지연의로 인해 185~280년대의 중국 역사에 관해서는 빠삭한 사람들이 많지만 동시기의 고구려-백제-신라 역사에 관해서는 다들 아는게 없을겁니다. 중국의 역사는 이리 상세한데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역사는 거의 선사시대급이어서 정말 아쉽네요.

그건 그렇고 이 이후로는 조금 다른 소리도 해보겠습니다. 제가 흥미있어하는건 삼국사기의 고구려사 중에 태조왕의 기록인데 제일 황당하더군요.

고구려 창시자(주몽)도 아닌데 왕 이름에 태조가 붙은 것도 수상하고(국조왕이라고도 한다는 구절도 있음) 삼국사기 기록으로는 93년 재위, 후한서 기록으로는 68년 재위했고 추정 나이는 현대인 중에 최고 장수한 남자도 거의 불가능한 118세죠.

또한 47년생인데 동생이자 태조왕의 다음 왕인 차대왕은 71년생이고 그 다음 왕인 태조왕과 차대왕의 동생인 신대왕은 89년생이죠.

1947년생 큰형, 1971년생 작은형, 1989년생 막내 이런 가족관계가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후한서와 삼국지에서는 차대왕과 신대왕을 태조왕의 아들이라고 봤고 이렇게 따지면 합리적이나 이 역사서들을 알고 있던 김부식이 이 설을 채택안하고 형제설을 채택했으니 이건 또 의문이구요.

고구려사 중에 태조왕 부분이 전 제일 흥미롭고 미스테리하고 진실이 뭔지 알고 싶네요.
cadenza79
19/04/09 13:55
수정 아이콘
말씀하신 고구려 태조왕 부분만 아니고...
대무신왕은 엄마가 죽은(BC 21년) 한참 다음에(AD 4년) 태어난다든가...
백제 고이왕은 아버지(개루왕)가 166년에 사망했는데 본인은 286년에 사망 / 그렇다고 아빠가 빨리 죽었냐 하면 그것도 아닌게 (출생년도는 기록상 안나오지만) 재위연도만 39년 -_-
비슷한 케이스로, 비류왕은 아버지(구수왕, 21년간 재위)가 234년에 사망했는데 본인은 344년에 사망
284년에 죽은 신라 미추왕의 맏사위 내물왕이 356년에 즉위 / 더 황당하게도 둘째사위 실성왕이 402년에 즉위

애당초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기년 자체를 안 믿거나, 중간에 생략된 세대가 있다고 보거나가 아니면 설명이 안 되지요.
19/04/09 01:23
수정 아이콘
글 재밌게 봤습니다 사족으로
저 중학생 때 ‘우리 역사의 100가지 비밀’이란 제목으로
스크랩되서 떠돌던 찌라시보고 참 열심히 전도했었는데요 크크
그걸 일일히 반박했던 어떤 이글루에 있던 글 읽고 참 쪽팔리고
부끄러워했던 기억이나네요 왜 이생각이 났냐면
저 100가지 비밀 근거가 일제가 사서 10만권?을 불태웠다!
현 사학계는 친일파임 이런 식이었거든요
정말 없기는 없군요 고대사를 다룬 사서들이..
ageofempires
19/04/09 01:38
수정 아이콘
(수정됨) 일제가 사서 10만권을 불태운건 걍 말도 안되는 헛서리고... 사실 고려시대만 해도 삼국시대의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백제의 서기(역사서를 지은건 맞는데 역사서의 제목이 서기인지는 알 수 없음),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는 이미 고려시대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고구려의 신집은 김부식이 참고한 것 같아서 그때까지는 남아있었던 것 같지만 역시나 그 이후에는 사라졌고 신라의 역사서인 국사만 고려초에 현존했는데 이마저도 몽골 침략과 원간섭기 그 즈음에 없어진 것 같네요.

고려시대의 역사서인 고려왕조실록조차 불타서 전해지지 않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고려왕조실록만 남아 있었어도 훨씬 자료가 풍성했을텐데요.
문문문무
19/04/09 08:28
수정 아이콘
보통 국가가 멸망하면 해당 국가의 역사기록들을 모조리 불태우는게 관습인가요?

아니면 한반도 지역이 평균보다 역사기록 말살시도가 잦은편이었던 건가요?
계층방정
19/04/09 10:45
수정 아이콘
고려실록은 조선왕조에서 고려사 쓰는 데 필요해서 춘추관에 가져다놓았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됐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다섯 부 보관하고 있던 조선왕조실록도 한 부만 빼놓고 다 소실됐기 때문에 고려실록이 소실된 걸 기록말살 시도로 보기는 어렵죠.
그러나 실록을 바탕으로 정사를 편찬하고 나면 실록에 대한 관심이 좀 떨어지기는 합니다. 실록이 1차 자료라면 정사는 2차 자료가 되는데, 요즘도 1차 자료보다는 2차 자료를 더 많이 보는데 책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자원이 부족한 옛날에는 더했죠. 지금은 1차 자료를 보존하려는 노력을 많이 기울이지만 옛날에는 1차 자료는 그저 좋은 2차 자료를 만들어내기 위한 재료로밖에는 잘 안 쓰여서...
19/04/09 10:46
수정 아이콘
고려실록은 한양에서 보관중이었는데 그만 임진왜란때 다 소실되었지요... 전 왕조의 실록이라 나름 열심히 보관은했지만 조선왕조실록처럼 백업본을 다양하게 만들진 않았죠
홈런볼
19/04/09 02:10
수정 아이콘
어느날 폐가의 한쪽 구석에서 신집이나 서기가 발견되는 기적이 일어나길 기대해봅니다.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기록이 전해져내려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애석한 일이라 봅니다.
약소국의 비애라 할 수도 있겠죠.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고구려가 항복하고 평양성의 책들을 태우는데만 일주일이 걸렸다는데 전 그 사실이 가장 가슴 아프더라고요.
모리건 앤슬랜드
19/04/09 02:46
수정 아이콘
유방이 함양에 입성했을때 소하가 온갖 기록들을 실어다 날랐다고 하는데, 항우가 먼제 함양에 입성해 늘 해왔던대로 불지르고 했으면 대규모 기록 유실이 있었겠지요. 신라야 나라가 망하면서도 수도는 그나마 온존히 보전된 상태에서 나라를 들어다 바친 케이스에 가깝고, 다른 나라는 쑥대밭이 되면서 갈아엎어졌으니 기록물이 남아있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신라 영토라기도 애매했던 고구려 수도 평양은 말할것도 없고 그나마 신라가 온전하게 먹었던 백제 역사도 일본사기에 의존하는부분이 많으니까요.
오호츠크해
19/04/09 02:47
수정 아이콘
이런 이유로 고구려, 백제, 신라로 찍은 사극이나 소설보면 좀 우스워요. 그냥 판타지 소설 쓰는 거랑 무슨 차이일지...
강미나
19/04/09 06:57
수정 아이콘
그래서 신라 쪽이나 7세기 통일전쟁 같은 건 그나마 좀 나은데 고구려 백제 사극들 보면 원작이 소설책(비유 아니고 진짜로)이죠.
복슬이남친동동이
19/04/09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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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그 시기, 특히 고구려가 등장하는 사극이나 소설은 대체로 쓰여지는 목적부터가 판타지 소설의 그것하고 거의 일치합니다. 그냥 대리만족과 뽕맛이죠. 고증 같은 건 훨씬 기록이 풍부한 조선시대 것들도 실록 두 줄을 모티브로 나머지는 전부 창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시대 것이야 뭐.
19/04/09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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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들하고 비교해봐도 고대사 기록이 많이 없는건가요?
내일은해가뜬다
19/04/09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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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dn.pgr21.com/?b=10&n=349300

중국은 말할것도 없고 일본과 비교해도.....
파핀폐인
19/04/09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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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밌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렌지꽃
19/04/0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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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11세기전까지 역사서 자체가없다죠
핵돌이
19/04/09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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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단재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를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는 우리나라 고대 사서가 전부 실전된 것은 김부식이 자신만이 유일하게 역사를 많이 아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기심에 모든 역사서를 왕실 창고에 감춰두고 아무도 열람하지 못하게 막아서라고 하더군요. 단재의 이 주장은 사실일까요?
wish buRn
19/04/09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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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일듯요
신불해
19/04/09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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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의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 공적과는 별개로

역사학자로서는 지금에 와선 옛 연구성과 및 연구동향을 이야기 할때 '신채호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 라고 한번 짚어주고 넘어갈때 외에는 거의 고려 안된다고 보면 됩니다.




상식적으로 10년 전이나 20년 전에 나온 의견 및 학설들도 그 사이에 최신 연구 성과들로 보완 및 비판 되면서 계속 담론이 쌓이고 하는데 한세기에서 반세기전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역사학에는 점진이라는게 없다는 것과 진배없죠.



비슷하게 로마사 연구의 옛 거물인 기번이나 로마사 로 노벨상도 받은 몸젠도 지금에 와선 아무도 그 주장을 고려조차 안하는 판이니...
강미나
19/04/09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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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는 그냥 독립운동가로서만 기억하시는게....
크레토스
19/04/09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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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측 기록으로도 이 정도인데 고구려 측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었으면 뭐.. 고대 사서란게 자기들 승리는 과장,띄워주고 패배는 축소,비중 줄이는게 관행인데 그 결과가 이거란게 대단한거죠. 괜히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고구려 때 얘기 한게 아니고 경극에 연개소문과 당태종 얘기가 나오는게 아님. 중국에서도 그때까지 회자됬다는 거죠.
달과별
19/04/09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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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어떻게 그 많은 역대급 기록들이 살아 남을 수 있었나요?
크레토스
19/04/09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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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겁나게 크고 기록이 방대하니까 엄청나게 소실 됬어도 여전히 많은 거.. 중국도 이름만 전하는 사서나 책들 무지하게 많습니다. 가령 삼국지 시기도 포함된 후한 역사서인 후한서 같은 경우엔.. 8명이 따로 써서 8개가 있었는데 현재는 범엽의 후한서 말고 없어요.
달과별
19/04/09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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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커서 생기는 이점이라면 여러개의 사본을 찍어서 여러 군데에 보관해서 나오는 이점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중국도 나라 전체가 엎어진 적이 한두번이 아닌데 24사서가 현존한다는게 엄청 신기하네요. 중국 내 사서 보존에 대한 비화들이 검색해 봐도 잘 나오지 않는데 어느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보존을 했을지 궁금하군요.
19/04/0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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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보다는 특정 가문이 가문의 보물로서 보관했다고 보는 게 오히려 맞지 않을까요. 중국이 우리보다 왕조의 역사는 짧고, 그 대신에 5호 16국 시대부터 수당송까지 이어졌다는 명가는 꽤 많았으니. 물론 그 가문들 대부분도 몽골 시기에 뒤집어졌겠지만 그때쯤 되면 오래된 역사서는 그만한 보물 취급 받았을테고.
달과별
19/04/09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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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가문 이야기 있으면 찾아서 보고 싶네요. 이럴땐 중국인들이 부럽습니다. 자국 내 역사 이야기만으로도 정말 끝이 없겠네요.
강미나
19/04/09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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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불해님 글이었나요? 위진남북조를 거쳐 수나라에 당나라까지 이르면 장안에 왕보다 정통성 있는 집안이 넘쳐났는데
주전충이 다 황하에 집어 던졌다고....
19/04/09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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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많이 써서 그중에 일부가 살아남은거죠.
배송지가 정사 삼국지에 주석을 달때 인용한 사서가 150개가 넘는데 그중 대부분이 소실되었습니다.
BERSERK_KHAN
19/04/09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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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그 많은 사서가 소실된 것도 놀라운데 중요한 사서들은 살아남았고, 그 양도 엄청나다는 것도 놀라워요. 역시 땅은 크고 사람은 많고 봐야....
ImpactTheWorld
19/04/09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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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네요. 제가 어렸을때부터 참 국사를 싫어했는데 남의나라에서 쓴 소설을 가지고 외우고 의미부여하고 시험보고 그랬다고 생각하니 이제야 싫은 이유를 알겠네요 .. 는 무슨 암기력이 딸리는거지
19/04/09 14:11
수정 아이콘
제 국사실력도 이 설을 채택하겠습니다 굳굳
wish buRn
19/04/09 09:10
수정 아이콘
고구려기록이 가장 적겠네요. 비교적 평화롭게 사라진 신라.. 일본이란 후손(?)을 남긴 백제...
19/04/09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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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영국만 해도 기록이 부족해서 아더왕 전설같은거 생겨나고 그러지 않았나요 중국이 대단한거지.....
19/04/09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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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북한쪽에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을거 같기는 한데.. 살아생전에 볼 날이 올지..
크레토스
19/04/09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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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한국 전쟁 이후 평양에 멀쩡한 건물이 3채 밖에 안 남았다고 할 정도로 폭격을 심하게 맞았죠. 다른 주요 도시들도 마찬가지고.. 어디 고분에서 나오는 거 아니면 별거 없을겁니다.
아파테이아
19/04/09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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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삼국사기 편찬 시기인 고려말에 이미 백제, 고구려 사서는 없었습니다. 통일되도 유의미한 기록물을 찾기는 어려울것 같습니다.
청자켓
19/04/0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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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진짜 뭐같아도 갖다 쓸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하더라고요. 기록이 아예 전무하니 우리식으로 해석해서 쓰는거라고
19/04/09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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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가 삼국시대 책인줄 알았는데 무려 12세기에 쓴 책이더라구요. 삼국시대 끝나고 500년이 지나서 쓴 책인데 내용이 정확할 리가..
No.99 AaronJudge
23/01/21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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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싹 날아갔군요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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