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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09 01:09
분명 한자도 고구려가 먼저 받아들였을텐데 왜 고구려 기록은 없었던 걸까요.
신라야 그렇다쳐도 발해는 그 기록들을 좀 보관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다가 발해가 망하면서 만주에 남아있던 기록들이 그냥 사라지고??
19/04/09 01:25
고구려 소수림왕 때(371~384년) 지어진 유기 100권과 영양왕 때(600년)에 지어진 신집이라는 역사서가 있는데 고구려가 망하면서 다 없어진 듯합니다.
======== 다시 찾아보니 신집은 김부식이 참고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남아있었던 것 같습니다.
19/04/09 01:12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패배하고 물러날 때 안시성주의 왕에 대한 충성심을 칭찬하면서 비단 100필을 하사했다고 하는데 솔직히 좀 난감하고 판타지스러운 기록의 대표적인 모습이죠. 그냥 고당전쟁 자체가 고구려측 기록이 많이 없어졌는지 너무 당나라측 관점에서 서술되는게 많아보이더군요. 예를 들면 이세민이 뭐를 하면서까지 병사들을 독려했다 뭐 이런 내용들까지..
19/04/09 01:16
글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사실 한국의 고대사 자료는 없는거나 마찬가지라 너무 휑하죠. 타국 역사서의 얼마 안되는 부분이 전부가 될 지경이니 원... 삼국시대에 지어졌던 역사서들이 오래오래 보존되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진수의 삼국지 관련 기록이 워낙 상세하고 방대해서 당시 중국의 상세한 역사와 주변국의 역사도 알 수 있어서 그 주변국인 고구려 등의 역사도 어렴풋이 나오는데 그 어렴풋이 나오는 역사가 거의 전부인 역사죠. 소설 삼국지연의로 인해 185~280년대의 중국 역사에 관해서는 빠삭한 사람들이 많지만 동시기의 고구려-백제-신라 역사에 관해서는 다들 아는게 없을겁니다. 중국의 역사는 이리 상세한데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역사는 거의 선사시대급이어서 정말 아쉽네요. 그건 그렇고 이 이후로는 조금 다른 소리도 해보겠습니다. 제가 흥미있어하는건 삼국사기의 고구려사 중에 태조왕의 기록인데 제일 황당하더군요. 고구려 창시자(주몽)도 아닌데 왕 이름에 태조가 붙은 것도 수상하고(국조왕이라고도 한다는 구절도 있음) 삼국사기 기록으로는 93년 재위, 후한서 기록으로는 68년 재위했고 추정 나이는 현대인 중에 최고 장수한 남자도 거의 불가능한 118세죠. 또한 47년생인데 동생이자 태조왕의 다음 왕인 차대왕은 71년생이고 그 다음 왕인 태조왕과 차대왕의 동생인 신대왕은 89년생이죠. 1947년생 큰형, 1971년생 작은형, 1989년생 막내 이런 가족관계가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후한서와 삼국지에서는 차대왕과 신대왕을 태조왕의 아들이라고 봤고 이렇게 따지면 합리적이나 이 역사서들을 알고 있던 김부식이 이 설을 채택안하고 형제설을 채택했으니 이건 또 의문이구요. 고구려사 중에 태조왕 부분이 전 제일 흥미롭고 미스테리하고 진실이 뭔지 알고 싶네요.
19/04/09 13:55
말씀하신 고구려 태조왕 부분만 아니고...
대무신왕은 엄마가 죽은(BC 21년) 한참 다음에(AD 4년) 태어난다든가... 백제 고이왕은 아버지(개루왕)가 166년에 사망했는데 본인은 286년에 사망 / 그렇다고 아빠가 빨리 죽었냐 하면 그것도 아닌게 (출생년도는 기록상 안나오지만) 재위연도만 39년 -_- 비슷한 케이스로, 비류왕은 아버지(구수왕, 21년간 재위)가 234년에 사망했는데 본인은 344년에 사망 284년에 죽은 신라 미추왕의 맏사위 내물왕이 356년에 즉위 / 더 황당하게도 둘째사위 실성왕이 402년에 즉위 애당초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기년 자체를 안 믿거나, 중간에 생략된 세대가 있다고 보거나가 아니면 설명이 안 되지요.
19/04/09 01:23
글 재밌게 봤습니다 사족으로
저 중학생 때 ‘우리 역사의 100가지 비밀’이란 제목으로 스크랩되서 떠돌던 찌라시보고 참 열심히 전도했었는데요 크크 그걸 일일히 반박했던 어떤 이글루에 있던 글 읽고 참 쪽팔리고 부끄러워했던 기억이나네요 왜 이생각이 났냐면 저 100가지 비밀 근거가 일제가 사서 10만권?을 불태웠다! 현 사학계는 친일파임 이런 식이었거든요 정말 없기는 없군요 고대사를 다룬 사서들이..
19/04/09 01:38
일제가 사서 10만권을 불태운건 걍 말도 안되는 헛서리고... 사실 고려시대만 해도 삼국시대의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백제의 서기(역사서를 지은건 맞는데 역사서의 제목이 서기인지는 알 수 없음),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는 이미 고려시대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고구려의 신집은 김부식이 참고한 것 같아서 그때까지는 남아있었던 것 같지만 역시나 그 이후에는 사라졌고 신라의 역사서인 국사만 고려초에 현존했는데 이마저도 몽골 침략과 원간섭기 그 즈음에 없어진 것 같네요. 고려시대의 역사서인 고려왕조실록조차 불타서 전해지지 않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고려왕조실록만 남아 있었어도 훨씬 자료가 풍성했을텐데요.
19/04/09 08:28
보통 국가가 멸망하면 해당 국가의 역사기록들을 모조리 불태우는게 관습인가요?
아니면 한반도 지역이 평균보다 역사기록 말살시도가 잦은편이었던 건가요?
19/04/09 10:45
고려실록은 조선왕조에서 고려사 쓰는 데 필요해서 춘추관에 가져다놓았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됐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다섯 부 보관하고 있던 조선왕조실록도 한 부만 빼놓고 다 소실됐기 때문에 고려실록이 소실된 걸 기록말살 시도로 보기는 어렵죠.
그러나 실록을 바탕으로 정사를 편찬하고 나면 실록에 대한 관심이 좀 떨어지기는 합니다. 실록이 1차 자료라면 정사는 2차 자료가 되는데, 요즘도 1차 자료보다는 2차 자료를 더 많이 보는데 책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자원이 부족한 옛날에는 더했죠. 지금은 1차 자료를 보존하려는 노력을 많이 기울이지만 옛날에는 1차 자료는 그저 좋은 2차 자료를 만들어내기 위한 재료로밖에는 잘 안 쓰여서...
19/04/09 10:46
고려실록은 한양에서 보관중이었는데 그만 임진왜란때 다 소실되었지요... 전 왕조의 실록이라 나름 열심히 보관은했지만 조선왕조실록처럼 백업본을 다양하게 만들진 않았죠
19/04/09 02:10
어느날 폐가의 한쪽 구석에서 신집이나 서기가 발견되는 기적이 일어나길 기대해봅니다.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기록이 전해져내려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애석한 일이라 봅니다. 약소국의 비애라 할 수도 있겠죠.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고구려가 항복하고 평양성의 책들을 태우는데만 일주일이 걸렸다는데 전 그 사실이 가장 가슴 아프더라고요.
19/04/09 02:46
유방이 함양에 입성했을때 소하가 온갖 기록들을 실어다 날랐다고 하는데, 항우가 먼제 함양에 입성해 늘 해왔던대로 불지르고 했으면 대규모 기록 유실이 있었겠지요. 신라야 나라가 망하면서도 수도는 그나마 온존히 보전된 상태에서 나라를 들어다 바친 케이스에 가깝고, 다른 나라는 쑥대밭이 되면서 갈아엎어졌으니 기록물이 남아있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신라 영토라기도 애매했던 고구려 수도 평양은 말할것도 없고 그나마 신라가 온전하게 먹었던 백제 역사도 일본사기에 의존하는부분이 많으니까요.
19/04/09 11:28
원래 그 시기, 특히 고구려가 등장하는 사극이나 소설은 대체로 쓰여지는 목적부터가 판타지 소설의 그것하고 거의 일치합니다. 그냥 대리만족과 뽕맛이죠. 고증 같은 건 훨씬 기록이 풍부한 조선시대 것들도 실록 두 줄을 모티브로 나머지는 전부 창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시대 것이야 뭐.
19/04/09 08:09
얼마전 단재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를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는 우리나라 고대 사서가 전부 실전된 것은 김부식이 자신만이 유일하게 역사를 많이 아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기심에 모든 역사서를 왕실 창고에 감춰두고 아무도 열람하지 못하게 막아서라고 하더군요. 단재의 이 주장은 사실일까요?
19/04/09 09:24
신채호의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 공적과는 별개로
역사학자로서는 지금에 와선 옛 연구성과 및 연구동향을 이야기 할때 '신채호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 라고 한번 짚어주고 넘어갈때 외에는 거의 고려 안된다고 보면 됩니다. 상식적으로 10년 전이나 20년 전에 나온 의견 및 학설들도 그 사이에 최신 연구 성과들로 보완 및 비판 되면서 계속 담론이 쌓이고 하는데 한세기에서 반세기전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역사학에는 점진이라는게 없다는 것과 진배없죠. 비슷하게 로마사 연구의 옛 거물인 기번이나 로마사 로 노벨상도 받은 몸젠도 지금에 와선 아무도 그 주장을 고려조차 안하는 판이니...
19/04/09 08:10
중국측 기록으로도 이 정도인데 고구려 측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었으면 뭐.. 고대 사서란게 자기들 승리는 과장,띄워주고 패배는 축소,비중 줄이는게 관행인데 그 결과가 이거란게 대단한거죠. 괜히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고구려 때 얘기 한게 아니고 경극에 연개소문과 당태종 얘기가 나오는게 아님. 중국에서도 그때까지 회자됬다는 거죠.
19/04/09 08:25
나라가 겁나게 크고 기록이 방대하니까 엄청나게 소실 됬어도 여전히 많은 거.. 중국도 이름만 전하는 사서나 책들 무지하게 많습니다. 가령 삼국지 시기도 포함된 후한 역사서인 후한서 같은 경우엔.. 8명이 따로 써서 8개가 있었는데 현재는 범엽의 후한서 말고 없어요.
19/04/09 08:41
나라가 커서 생기는 이점이라면 여러개의 사본을 찍어서 여러 군데에 보관해서 나오는 이점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중국도 나라 전체가 엎어진 적이 한두번이 아닌데 24사서가 현존한다는게 엄청 신기하네요. 중국 내 사서 보존에 대한 비화들이 검색해 봐도 잘 나오지 않는데 어느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보존을 했을지 궁금하군요.
19/04/09 10:57
나라보다는 특정 가문이 가문의 보물로서 보관했다고 보는 게 오히려 맞지 않을까요. 중국이 우리보다 왕조의 역사는 짧고, 그 대신에 5호 16국 시대부터 수당송까지 이어졌다는 명가는 꽤 많았으니. 물론 그 가문들 대부분도 몽골 시기에 뒤집어졌겠지만 그때쯤 되면 오래된 역사서는 그만한 보물 취급 받았을테고.
19/04/09 22:23
신불해님 글이었나요? 위진남북조를 거쳐 수나라에 당나라까지 이르면 장안에 왕보다 정통성 있는 집안이 넘쳐났는데
주전충이 다 황하에 집어 던졌다고....
19/04/09 10:50
엄청나게 많이 써서 그중에 일부가 살아남은거죠.
배송지가 정사 삼국지에 주석을 달때 인용한 사서가 150개가 넘는데 그중 대부분이 소실되었습니다.
19/04/09 10:54
중국은 그 많은 사서가 소실된 것도 놀라운데 중요한 사서들은 살아남았고, 그 양도 엄청나다는 것도 놀라워요. 역시 땅은 크고 사람은 많고 봐야....
19/04/09 09:01
재밌네요. 제가 어렸을때부터 참 국사를 싫어했는데 남의나라에서 쓴 소설을 가지고 외우고 의미부여하고 시험보고 그랬다고 생각하니 이제야 싫은 이유를 알겠네요 .. 는 무슨 암기력이 딸리는거지
19/04/09 10:56
북한은 한국 전쟁 이후 평양에 멀쩡한 건물이 3채 밖에 안 남았다고 할 정도로 폭격을 심하게 맞았죠. 다른 주요 도시들도 마찬가지고.. 어디 고분에서 나오는 거 아니면 별거 없을겁니다.
19/04/09 13:06
원 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삼국사기 편찬 시기인 고려말에 이미 백제, 고구려 사서는 없었습니다. 통일되도 유의미한 기록물을 찾기는 어려울것 같습니다.
19/04/09 23:00
삼국사기가 삼국시대 책인줄 알았는데 무려 12세기에 쓴 책이더라구요. 삼국시대 끝나고 500년이 지나서 쓴 책인데 내용이 정확할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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