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독일이 패전 한 직후 실시된 총선에서 노동당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전쟁 영웅 처칠을 상대로 승리하고 정권을 차지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에는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노래 중 하나이자, 노동당의 당가 [예루살렘]이 울려퍼졌고,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듯했습니다. 이 승리의 주역은 클레멘트 애틀리였습니다.
승리로 이끌고 전후 영국을 재건한 총리입니다. 그는 사회주의자이지만 반공주의자였고 또 미국과의 동맹을 중시하면서도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였고, 애국자였지만 동시에 식민지 독립에 찬성한 인물이죠. 우리는 보통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으로 윈스턴 처칠을 기억하는데, 클레멘트 애틀리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 하지 않는 게 아쉽습니다. 요즘 전후 영국 관련 읽고 있는데, 영국의 가장 위대한 정치인 중 한 명이 있다면 바로 이 사람이 아닐까 하네요. 실제로 영국의 역사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의 투표에서 20세기 가장 위대한 영국 총리로 뽑히기도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애틀리와는 정반대의 정치성향인 매거릿 대처조차 애틀리를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한 명으로 꼽았을 정도. 클레멘트 애틀리는 일찍히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하였습니다. 그는 비록 중산층 출신이었지만 1900년대 초 런던의 슬럼가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빈곤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고, 자선사업만으로는 결코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는 노동자의 대변인으로 활약하였고, 정치활동에 몸담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애국자였습니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31세의 나이임에도(당시에 자원입대하기에는 고령으로 간주된 나이) 자원입대하여 심지어 그 유명한 갈리폴리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소령계급으로 전역하고, 귀국 후에는 슬럼가에서 요즘으로 치면 구청장(?)에 당선되어 공직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 후 노동당에서 승승장구하고 급기야 1935년 노동당의 당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직책을 1955년까지, 무려 20년 동안 맡게 되죠.
외교적인 스탠스로는 처음에 다른 여타 사회주의자/이상주의자와 마찬가지로 국제법과 국제연맹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영국이 불필요하게 재무장하는 것에 반대하였습니다. 반제국주의 및 반전주의 사상의 일환이었죠. 그러나 나치독일의 위험성이 점점 드러나자 그는 윈스턴 처칠과 함께 가장 열렬한 반독주의자가 되었고, 또 체임벌린 내각을 통렬히 비판한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발발후 처칠이 총리가 되었을 때 애틀리는 여야가 모두 참여하는 거국내각의 부총리가 되어 국내적으로 필요한 조직과 행정 그리고 보급을 도맡아 전시 영국 경제를 진두지휘하였으며 영국의 실질적인 살림꾼으로 활약했죠.
영국인들이 이를 기억한 것일까요?
결국 전쟁 직후 1945년에 치러진 총선에서 노동당은 전례 없는 승리를 거뭐지고 애틀리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영국 노동당 역사상 지금까지 깨진 적이 없는 기록적인 비율로 승리한 선거였고, 당시 영국인들이 얼마나 사회안정과 경제재건을 바랐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애틀리는 총리가 된 후 영국에 역사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자유방임”에 의존하던 자본주의 끝판왕이던 나라에 국민의료보험을 도입하고, 기간사업을 국유화하였으며 국민연금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국민의료보험과 국민연금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대단히 파격적인 일로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대 영국 우파들이 경기를 일으킬만한 정책들이었으나 노동당은 선거에서 큰 차이로 승리하였고 애틀리는 처칠 못지 않은 전쟁영웅이었기 때문에 보수파는 그에게 대놓고 반기를 들 수 없었고 무엇보다 국민은 사회적 변화를 강렬히 열망했습니다. 그리고 애틀리가 건설한 컨센서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 복지국가에 대한 컨센서스는 노동당이 정권에서 물러났을 때에도 유지되었습니다.
대외적인 측면에서도 그는 대단히 진취적이었습니다. 대영제국과 식민지에 집착하던 처칠과 달리 그는 식민지를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보았고 인도의 독립을 신속하게 협의하였으며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그리고 그는 확고한 사회주의자였음에도 러시아의 공산당을 혐오하였고,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 미국과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NATO가 창설되는 데 기여했습니다. 덤으로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영국군을 망설임 없이 파병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1920-30년대 공산주의자들과 다투던 사회주의자들이 공산당을 더욱 싫어했다고 하죠. (마찬가지로 독일의 SPD도 공산주의자들을 싫어했고, 스탈린주의자들은 우파 제국주의자들보다 사민주의자들을 더 경멸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맹목적 친미주의자(?)였던 것은 아닙니다. 아니, 애초에 당대 영국의 정치인들은 본인들이 미국과 대등한 강대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애틀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미국이 맥마흔 법안을 통과시켜 핵무기에 대한 독점권을 유지하고자 하자 그는 영국도 독자적으로 핵무장해야 한다고 보았고, 미국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를 확보하는 데 성공합니다. 사실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 자체가 원래 영국이 시작한 프로젝트의 연장선이었고, 따라서 영국은 핵개발은 미-영 공동의 자산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갑자기 뒤통수(?)를 치자 이에 영국의 정계는 분개했죠. 여하튼 애틀리 정권은 영국산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결국 애틀리가 정권에서 물러나고 1년 후 영국은 미국 소련에 이어 3번째 핵무장 국가가 되었습니다.
클레멘트 애틀리는 개인적 카리스마가 뛰어나진 않았지만, 묵묵히 일하는 실무형 행정가였고, 사생활도 빅토리아 시대의 젠틀맨의 표상처럼 겸손하고 금욕적이었으며, 철저한 반파시스트로 영국의 주류 정계가 스페인 공화파를 무시하면서 은근히 프랑코를 지지했을 때 거의 홀로 스페인 공화파를 지지하였고, 또 사회주의적 이상향을 꿈꾸면서도 동시에 소련이 대표하는 공산주의에 철저히 반대했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인물답지 않게 동성애 처벌법에 대해서도 반대했던 상당히 진취적인 인물이었죠.
클레멘트 애틀리는 아주 흥미로운 사람인데, 의외로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안 알려진 거 같아서 아쉽네요.
이 사람에 대한 더 많은 책들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