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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04 03:24
이때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도망쳐서 재일교포 된 사람들 정말 많더라고요.
조병옥 최대의 실책이자 제주도의 슬픈 역사입니다. 유재흥씨는 새삼 다시 보게 되네요.
19/04/04 04:06
유재흥 욕도 이글루스에서 보고 유재흥 재평가도 이글루스에서 처음 봤더랬지요. 덕택에 양쪽 다에 휘둘려 봤습니다. 흐흐흐.
모든 프레임이 그렇습니다만 특히 '친일파'라는 프레임은 너무한 면이 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그냥 '친일파'라고 해버리면 "그 사람 친일파니까 그런 짓도 했겠지"라고 너무 의심없이 단정짓는 모습이 많아요. 저 사람들 구제해주자가 아니라 사안은 사안대로 접근해야 한다는 건데 그게 너무 안된단 말이죠. 여기 가장 큰 책임은 언론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교육도 만만치 않죠. 차라리 사명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어찌보면 괜찮아요. 그런데 책임있는 자리에 있으면서 평상시 관심도 없다가 꼭 무슨 날만 되면 한마디씩 하는 양반들이 제일 문젭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어요. 별개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덕택에 정리가 잘되었습니다.
19/04/04 04:23
태어나보니 아버지가 조선출신 일본군 고위 장교였으니 비슷한 시기 조선에서 나고 자랐던 청년들의 고뇌 이런 부분이랑은 당연히 거리가 있었을테고 본인도 선택할수 있는 길이 많지 않았겠지요. 비슷한 예로 일본군 대좌까지 했던 김석원 장군의 아들도 태평양 전선에서 전사해 야스쿠니 신사에까지 합사되었다죠. 당연히 부자가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었구요. 직 간접적으로 주변인이 피해를 본 입장에서야 다를수 있겠습니다만 후대인의 입장으로 멀찍이 바라보는 입장에선 무조건 나쁜놈들 친일파들이라고 매도해버리는것도 쉽지 않은부분이네요.
19/04/04 04:28
글 읽어보니 상식적이고 당연한 조치를 행한 것 같은데 금수만도 못 한 것들 때문에 빛이 나는 군요. 근현대사는 관련 책이나 글 읽을때마다 너무 슬픕니다.
19/04/04 06:57
이젠 오래되서 기억도 잘 안나는데 노무현 정권 당시에 유재흥이 뭔가 기존 장성들과 정치적 발언을 했고(전작권이었으려나....) 그걸 기점으로 유재흥 비난 글이 인터넷에 좍 퍼졌던 게 분명 의도가 있는 글이었죠. 나이 많은 사람들 입맛 맞춰주는 유튜브 방송이나 다를 바 없는 글이었어요.
19/04/04 07:47
좋은 글 감사합니다 지금은 많이 희석되었지만 4.3사건은 제주도민분들이 외지인을 믿지 못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죠 정말 슬픈 사건이고 지금이라도 재조명되어 다행입니다
19/04/04 08:38
유재흥 장군 깍아내리기(?)는 본문 자료에도 있듯이 '전작권 환수' 논리를 만들기 위해서 의도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장에 나라 구한 수준이었던 '영천전투'같은 건 빼고 패전이었던 '현리전투'를 들먹이며 '이 놈 때문에 전작권을 미국이 가져갔다. 그리고 이 놈은 무능하며 나쁜 친일파다' 논리를 만드는 거죠. 잘한 일 중 하나로 평가받는 43사건에서의 행동도 왜곡해가면서요.
19/04/04 11:03
여자, 바람, 돌이 많아 삼다도.
가뜩이나 태풍에 휩쓸린 뱃사람이 많아 여초였는데, 4.3.때문에 남자들이 하도 죽어서 진짜 여자들만 남았다는 말이 있죠. 물론 지금은 남초로 전환되어 옛말이 됐지만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19/04/04 11:12
북촌리 갔다 4.3 추모관 보고 먹먹했는데 이 글 보고 또 참 답답한 감상이 드네요. 진영 나눠서 누군 이편 누군 저편 하며 날조하고 금칠하고... 글 너무 잘읽었습니다.
19/04/04 12:22
위 글에도 나온, 4.3 학살 당시 초토화 작전으로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냈던 송요찬 장군은 1960년 4.19 혁명때는 이승만의 계엄령 선포에도 불구하고 "군은 절대로 시민에게 발포하지 마라!"고 명령하여 대형 학살을 막고 이승만과 시민대표 면담을 주선하여 혁명이 최소한의 희생으로 끝날 수 있게 유도하였죠. 때로는 역사를 평가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19/04/04 14:11
유재흥이야 영천 전투 같은 이길 수 있는 전투에서는 이기고 못 이길 전투에서는 지고, 한 평범한 장군이죠. 개전 초 문산-의정부 전투에서의 패배도 그야말로 역부족이었고, 현리 전투조차 알몬드의 삽질이 합쳐지며 벌어진 것이라(물론 그렇다 쳐도 대응이 안된 점 자체는 잘못 맞습니다만) 저런 평범한 장군을 넘어서는 장군이 별로 없었던 것이 당시 한국군의 현실이고. 저도 한때는 유재흥 엄청나게 졸장이라고 욕했었는데 알게되면 알게될 수록 과하게 까인 사람이라는 답이 나오더군요.
정치가 역사를 범하며 결론을 뒤집어버린, 있어서는 안될 안 좋은 사례중의 하나겠죠.
19/04/04 19:25
글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육지사람들에겐 4.3이란 이런거구나 싶네요. 제주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유재흥을 은인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좀 까칠해보이지만..... 정말 당황했습니다. 제주 4.3의 진실에는 사실과 관점이 존재합니다. 오죽하면 정명조차 못한 채 부유하겠습니까.... 지금 시점에서 유재흥을 평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많다보니...까칠했습니다만, 그래도 관심에 대해선 감사할 따름입니다.
19/04/04 22:04
길게 쓸 형편이 못되어서 간략하게만 말씀드리는점 양해바랍니다.
국군과 미군은 제주를 실전훈련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전쟁때 전과를 거둘수있었죠.대부분의 장교들이 그 경험으로 출세합니다. 미군도 아시아정책이 초토화 ㅡ베트남에서 써먹게되는계기죠. 그러니까 유재흥이 1948년에 부임했다면 똑같았을겁니다. 그런데 1949년 부임 목표는 단하나. 재선거 성공시키는거였죠. 그작전이 성공한것일뿐. 말그대로 흑묘백묘 ㅡ이게 저의 관점이고 제주사람들의 생각일겁니다
19/04/04 23:29
유재흥 부임 하기 반년 전도 아니고 불과 두달 전만 해도 함병선의 지휘 아래 300~400명을 한꺼번에 죽이고 부임 직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가,
미군 비밀 문서든, 훗날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보고에서건, (다른사람도 아닌 4.3사건에 대해 주기적으로 기사로 다루는 제주도민들 당사자들의 지역지인)제민일보의 훗날 당사자 인터뷰 등에서건 "유재흥이 오기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섬멸전이 지속되었지만 유재흥이 오고 난 직후부터 바뀌었다." 고 일관되게 언급하고 있는데 부임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모든게 초토화되고 학살되는 상황에서 정상적으로 일을 되돌린 사람에 대해 "이전에 왔으면 그 사람도 똑같았을것" 이라는건 좀 그런듯 합니다. 똑같을 것이라는건 유재흥도 수천명 학살했을 것이라는 말이나 진배 없는데, 실제로는 수천명 살린 결과를 낸 사람이 (하지도 않는) 수천명 죽인것과 똑같은 취급 받으면서 욕먹는건 좀 부당하지 않나 싶네요. 유재흥을 은인으로 생각하거나 유재흥의 은혜에 감읍하라는 주제가 아니고, '최소한 엄한 사람 하지 않을 일 가지고 부당하게 욕은 하지 말자.' 는게 글에서 다루는 내용이기도 하니까요. 확실한건 유재흥이 오기 바로 직전까지도 학살글이 벌어졌고, 유재흥이 떠난 직후에도 1,600명 처벌 및 사살 같은 일이 있었구요. http://www.jnuri.net/news/articleView.html?idxno=25503 군 지휘관 중에 유재흥 장군(중장 예편‧국방장관 역임)도 진솔하게 증언조사에 응했다. 그는 송요찬-함병선 연대장이 초토화란 강경 진압작전을 벌였음에도 제주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1949년 3월 당시 대령의 신분으로 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군 장교들을 대상으로 증언조사를 하면서 느낀 것은 정상적인 진압작전을 했거나 학살극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비교적 진솔하게 증언한 반면 유혈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들, 그 집행자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는 점이다.... 4.3 사건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조사도 보도도 많이 했을 제주도 지역 언론지에서도 유재흥에 대해서는 '진솔하게 관련 이야기를 해주며 협조했다' 거나, '정상적인 작전을 하고 학살극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진솔하게 협조해주었고, 반면 유혈극의 한복판에 있었던 집행자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라는 식으로 유재흥에 대해서는 4.3사건의 비판과 거리를 두는 의견들이 있습니다.
19/04/05 07:12
음.유재흥이 제주를 살리기위해 애썼고 그래서 차별성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ㅡ저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확신할수는 없지만 단 한가지는 만일 1948년에 부임했다면 함병선 송요찬과 같았거나 안그랬다면 일찍해임되었을겁니다. 그게 4.3의 비극이니까요. 다만 유재흥대신 다른 군인이 선무활동에 나섰을때 같은 결과를 낳았을거란 제 의견이 너무 단순하다면 제 한계입니다. 어찌되었든 제가하고자한말의 핵심은 ㅡ지금 진실을 밝혀 비극의 원인과 책임자를 역사앞에 드러내는게 우선이 아닐까 그 다음 살리신분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거죠. 예컨대 그 무시무시한 육지경찰중에도 문형순같은 고귀한분도 계셨고 서북청년단에도 교회다니는사람들 구해준 기독교인도 있고 군인들 가운데도 초토화작전을 전범이라고 맹렬하게 거부한 김익렬연대장이나 총을 바닥에 쏴서 수백명중 한명쯤 생존자가 생기게 한분들도 있죠 하지만 유재흥 사령관의 목적자체가 토벌이 아니라 선무용 임명이었으니 선무를 잘한것이 훌륭하긴하지만 은인이라기엔 그 역시 자신의 선의와 역사의식과 인권의식을 가진건 아니었고. 선무기간 중에도 대량학살과 공포는 존재했으니까요. 다만 말씀하시고자하는 취지 ㅡ4.3의 비극을 초래한 두 연대장에 비해 다르다는점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재흥도 제주에서 선무가 아니라 토벌을 지휘할수있었으면 한국전쟁때 그 꼴은 안당했을수도 있겠죠.연습된 지휘자니까요.ㅡ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긴하지만 수많은 군인 경찰들이 여전히 4.3의 유혈위에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으며 마약중독자였던 정보장교는 어느지역에 홈페이지에도 등장했다 제주도민의 항의로 사라지게된것도 불과 몇년전부터입니다. 장황했지만 유대인학살보다 비극속에 도움을 준 이들을 더 감동스러워하는게 사실입니다. 전국이 외면한채 고립된섬에서벌어진 비극에 대해 따뜻한손길을 내민분들을 소개해주시려던 취지로 여기겠습니다.감사합니다
19/04/05 10:55
제주도민들의 아픈 기억과 회한 그리고 그 런 기억이 잊혀지지 않고 무엇보다 큰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이 가장 주목 받아야, 그들의 아픔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고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십분 공감합니다.
다만 유재흥 같은 경우는 아픈 기억의 당사자인 제주도민을 제쳐두고 이 사람을 먼저 치켜세운다ㅡㅡ 이런 부분을 떠나서 워낙 유언비어와 각종 날조의 희생향이었던 부분이 있어서 '최소한 하지도 않은 일 가지고 엄한 사람 욕하는건 막아야 하지 않나. 그 날의 진정한 진상에 다가가는데 도움이 되지도 않고.' 라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런점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9/04/05 02:11
저 역시 당사자로서의 이런 입장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6.25를 겪은 분들이나 그분들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은 분들이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흐르고 많은 변화가 있더라도 북한과 좌익에 대한 적대감에서 벗어날 수 없듯, 제주의 비극은 깊고, 그로 인해 제주도민들이 가지는 국군에 대한 뿌리깊은 적대감은 당연한거죠. 사실만 가지고 설득할 수 없는 부분은 엄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사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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