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시험 준비다 뭐다 하면서 약간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3년 넘게 같이 자취했던 친한 대학 선배와 같이 술을 마셨습니다. 방황하고 있을게 아니라 자기 회사나와서 일 좀 배워볼 생각 없냐고 물어보더라구요. 얼마 전에 가까운 사람들 모아서 독립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피폐해진 생활에 지치기도 했고 뭐라도 몸을 움직여야 정체된 이 흐름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는 사람과 같이 일하면 재미있을것 같기도 했구요. 고민하지 않고 다음 날부터 출근하기로 했습니다.
직원이 약 스무명 남짓되는 작은 법률관계 회사였습니다. 다소 늦은 나이에 취직했기 때문에 직원분들이 다들 저보다 어리시더라구요. 기왕 시작한거 바닥부터 차근차근 일을 배우고 싶어서 완전 신입 막내 직원의 마인드로 깍듯하게 인사를 드렸습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후배 강동원(가명)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가 꽂은 낙하산 같은 느낌이라 다른 분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다들 따뜻하게 맞아 주시더라구요. 그날 점심을 같이 먹었는데 여직원들이 많아서 그런지 분위기가 정말 화기애애 했습니다. 같이 일하자고 손을 끌어준 형이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사무실에 돌아와서 무슨 일부터 해야하냐고 물어보니까 어차피 2주 정도는 멍 때려야 할거라고 천천히 분위기 파악부터 하라고 했습니다. 방을 나가더니 여직원 한분을 데려와서 이야기 했습니다.
"보영씨가 얘 케어좀 해줘. 모르는 거 있으면 이것저것 좀 알려주고."
그 여직원분이 내쪽을 쓱 쳐다보고 배시시 웃으며 알았다고 했습니다. 내 사수(?)되는 분이시구나 생각이 들어서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아, 이쪽은 보영씨. 필요한거 있으면 다 챙겨줄거야. 보영씨, 내 동생 괴롭히지 말고 잘 챙겨줘야 돼. 크크"
대표 형이 그러니까 보영씨는 '피~'하고 장난스럽게 웃더군요.
밥먹을 때 정신없이 질문 세례를 받는 바람에 경황이 없어서 그분 모습이 전혀 머리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158쯤 되는 키에 토끼 같은 눈을 가진 자그마한 아가씨였습니다. 안으면 품에 쏙 들어올 것 같더라구요. 저는 귀여운 사람 좋아하거든요. 교복만 입혀 놓으면 영락없는 여고생의 모습이라 당연히 사무실 막내겠구나 생각했는데, 형이 전에 있던 회사부터 오래 같이 일해온 직원이라고 했습니다. 짬으로는 왕고급이니까 잘 모시라고 저에게도 귀뜸을 해주었습니다.
일을 배우면서 사무실 분위기에 슬슬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업무 특성상 남자 직원들은 외근하러 나가는 경우가 많고 변호사들은 출근을 오후에 하거나 아예 며칠 동안 출근 안하는 경우도 있어서 사무실 분위기가 정말 프리하더라구요. 인터넷으로 옷 주문해서 입어보고 서로 예쁘다고 칭찬해주고 간식거리 사와서 나눠 먹기도 하고 엄청 시끌시끌한 분위기였습니다. 이래도 성과가 나온다고 하니 회사 분위기가 좋을 수 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직원들에 둘러쌓여서 일하는 건 대부분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남자 직원이 저 혼자일 때는 가끔 괴로운 경우도 있었습니다. 여자하고 있으면 괜히 긴장타는 쑥맥이기도 하고 여직원들의 엄청난 인싸력 때문에 대화를 따라 갈 수가 없더라구요. 무슨 스타킹이나 머리 염색한 걸 가지고 한시간씩 수다를 떠는지, 참 보고 있으면 재밌기도 하고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자연스레 대화에서 소외되어 있는 저에게 모니터 너머로 사탕이나 젤리 같은걸 쓱 내밀면서 "동원씨, 이거 드세요." 하고 챙겨주는 보영씨가 너무 고맙고 또 빨리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변을 어슬렁 거리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보영씨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경쾌한 음악을 듣는 것처럼 업무가 즐겁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렇게 조금씩 사무실 분위기에 적응을 할때 쯤 대표 형이 전체 회식을 잡았습니다. 입사 초기에 갑자기 일이 바빠졌다고 날 방치해버려서 일주일에 몇 번 보기도 힘들었는데 이제 좀 한가해졌던지 챙겨주기 시작하더라구요. 첫 회식이라 또 쓸데없이 긴장을 타고 있었는데 친한 형이 옆에 딱 버티고 있어 주니까 진짜 의지가 되더라구요. 저녁으로 맛있는 요리 먹고 2차로 맥주를 한잔 하러 갔습니다. 옆에 대표님이 있으니까 마음도 너무 편하고 술도 한잔 들어가니까 그날따라 혓바닥이 잘 풀리더라구요.
"제가 형들하고 있으면 스티브 잡스 안 부러운데 여자분들 앞에서는 스티븐 호킹 되거든여." 이러니까 까르르 웃더라구요.
"장애인 할당제 채우려고 얘 채용한거라니까."
대표 형이 이렇게 한번 더 토스를 해주길래 지체 장애인처럼 혀꼬인 목소리로 몸을 베베꼬면서 시답잖은 드립을 쳤습니다. 다들 크게 웃으면서 좋아하시더라구요. 오늘 개그 2골 1도움 정도 했으니 데뷔전 치고는 괜찮았다 혼자 뿌듯해하고 있었습니다. 보영씨 반응이 궁금해서 쓱 살폈더니 구석에서 엄청 싸늘한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더라구요. 왜 그러지 하면서 갑자기 뭔가 오싹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모두 웃든말든 마음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는 것 같았습니다. 회식 분위기는 계속 화기애애 했지만 신경이 쓰여서 집중이 잘 안되더라구요.
회식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형에게 오늘 회식 분위기 어땟던거 같냐고 넌지시 물어봤습니다. 분위기 이렇게 좋았던거 진짜 오랜만이라고 어깨를 두드려 주더라구요.
"아까 장애인 드립친거 좀 심했던건가?"
"그정도 가지고 뭘 그래. 다들 재밌어 하던데."
"보영씨가 엄청 무서운 얼굴로 쳐다보더라고..."
형이 잠시 뭔가 걸리는게 있는듯 미간을 찌푸렸습니다.
"아...글고보니까...걔 남동생이 뇌성 마비인가 그거라고 했던거 같은데..."
"진짜?"
"응, 그래서 동생 챙긴다고 대학도 안가고 바로 취직 했었거든, 내가 전에 다니던 회사에. 걔 좀 덜렁대긴 해도 엄청 착한 애야."
이러더라구요. 저는 괴성을 지르며 머릿털을 쥐어 뜯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야 신경쓰지마. 보영이 그런거 마음에 담아두는 타입 아냐."
형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 하더라구요.
그날 이후로 갑자기 보영씨 업무가 몰리는 바람에 따로 이야기 할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었씁니다. 언제쯤 내 주위에 알짱거리며 시시콜콜한 이야기 늘어놓을까 계속 기다렸는데 더이상 이쪽으로 오지 않더라구요. 모르는거 핑계로 보영씨 자리로 가서 뭔가 물어보면 예전과는 다르게 굉장히 사무적인 태도로 해결책만 제시해주고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렸습니다. 괜스레 나쁜쪽으로 망상 키우지 말고 일에만 집중하자고 생각했지만 날 멀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더라구요.
열심히 업무를 처리하던 중에 사무실이 어수선 해서 모니터 위로 고개를 들었습니다. 보영씨하고 눈이 딱 마주쳤는데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더군요.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화장실 가는척 하면서 다른 직원들 둘러보니까 다들 뭔가를 먹고 있더라구요. 돌아오는 길에 놀러온 척 대표님 방에 슬쩍 들어갔더니 키보드 옆에 작은 초콜릿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이거 뭐야?" 하고 물으니 "그거 보영이가 준건데 너 먹을래?" 이러더라구요. 가격이라고 해봐야 얼마 안한다는거 알지만 보영씨의 나에 대한 싸늘한 마음이 담겨 있는것 같아서 너무 슬프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정말 달콤하면서 쌉쌀한 맛이 나는 초콜릿이었습니다.
낯선 환경에서 한번도 해본적 없던 일을 배우느라 저도 나름 굉장한 심적 부담을 가지고 있었던거 같습니다. 나에게 즐거운 휴식을 주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거 같아서 마음이 너무 괴롭더라구요. 며칠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어서 굉장히 피로하고 지친 모습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건강도 인간 관계도 다 망쳐버릴거 같아서 일단 업무가 완전히 익숙해질 때까지 다른 것들은 잠시 생각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잡았습니다. 한동안 아침7시 출근해서 저녁 늦게 퇴근할 때까지 업무에 필요한 법률 기본서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엑셀 같은 프로그램을 손발처럼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느날 대표 형이 오전부터 출근을 해서 보영씨를 바로 자기 방으로 부르더군요. 잠시 지나니까 굉장히 언성을 높이면서 보영씨를 혼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보영씨가 텐션은 좋은데 약간 덜렁대는 타입이라 형이 몇번 주의를 줬거든요. 무슨 업무에 펑크를 냈는지 클라이언트한테 항의 전화가 와서 화가 단단히 났나 보더라구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대표님 방으로 쓱 들어갔습니다. "아, 왜 아침부터 직원들 갈구고 그래요. 그만 해요 형." 하면서 어깨를 주물러 드렸더니 할말은 많지만 내가 참는다 이런 표정으로 의자에 털썩 앉더군요. 나는 보영씨에게 자리로 돌아가셔도 된다고 재빨리 문쪽으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나가는데 눈물이 송글송글 맺혀 있는게 보이더라구요. 형은 아직 화가 덜 풀렸는지 "쟤는 한번씩 혼을 내야 사고 안친다니까." 하고 혼잣말로 투덜댔습니다.
그날 저녁 7시 반 정도까지 책을 읽다가 퇴근하려고 짐을 챙겼습니다. 보통 6시 이후에는 사무실에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아서 불을 끄려고 하는데 구석자리에 보영씨가 야근을 하고 있는게 보이더라구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는데 보영씨가 "네, 동원씨 안녕히 가세요." 하면서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더라구요. 무슨 피톤치드 폭풍이 부는 것처럼 피로가 싹 날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하루 종일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었더니 눈도 따끔따끔하고 어깨도 축 쳐지는데 누가 머리에 리스테린 가글액을 쏟아부은 것처럼 청량하고 정신이 확 깨더라구요. '귀여운 건 역시 좋은거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생에 박보검으로 다시 태어나면 주위 여자들에게 더 많이 웃어주고 더 상냥하게 인사하고 이 삭막한 도시의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해 더 많이 연애를 하리라 다짐했습니다.
전에 실수한걸 사과하고 싶었는데 오늘이 좋은 기회인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녁 안먹었으면 저녁 같이 드시겠어요?" 하고 물어봤습니다. 약간 당황한 듯 웃다가 "그럼 오늘 맛있는거 사주시는건가요?" 이러더라구요. 보영씨의 웃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돈은 먹고 살 정도로만 있으면 족하다는 주의였는데, 처음으로 돈 많이 벌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더 많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사에서 멀지 않은 일식 집으로 갔습니다. 오늘은 보영씩 먹고 싶은거 먹어요 하니까 잠시 고민하더니 참치 초밥을 먹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참치 초밥 하나랑 모듬 초밥을 주문 했습니다. 그날 낮에 있었던 이야기 가볍게 나누다가 최근에 나한테 왜이렇게 쌀쌀맞게 대했냐고 상처받았다고 엄살을 부리며 이야기를 쓱 꺼냈습니다. 묘한 표정으로 빙긋 웃더라구요. 음식이 나왔는데 보영씨가 서빙하시는 분에게 나눠먹을거니까 테이블 중간에 놔달라고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뭔가 연인 같은 느낌이 들어서 행복한 기분에 젖어 있었습니다.
샐러드와 미소시루를 먹으며 위장을 좀 달래고 있는데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참치 초밥을 보니 보영씨가 회 부분만 떼서 먹고 안에 초밥 부분은 그대로 접시 위에 하얗게 남겨논겁니다. 처음에는 회하고 밥하고 따로 먹으려나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참치 초밥 한줄을 그렇게 회 부분만 먹었더라구요. 큰아버지께서 쌀농사 지으셔서 어렸을때부터 밥 남기는걸 굉장히 싫어 했거든요. 이걸 이야기를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계속 참치 부분만 가려서 먹길래 조심스레 말을 꺼냈습니다.
"저기 보영씨. 초밥 만드시는 분 정성도 있는데 이렇게 회만 드시고 밥은 남기시면 어떡해요. 회가 드시고 싶었으면 참치회를 주문하시지..."
약간 단호한 어조로 이야기를 했더니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면서 젓가락을 테이블에 놓더라구요.
여러분 속지 마세요 이건 고도의 기만글입니다. 이 글이 올라온게 자게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글쓴이는 자신의 인싸력과 연하와 사귄다 것을 자랑하고 있으며 이것을 노골적인 언예인 네이밍과 오리 열마리로 가렸을 뿐입니다.
허나 내추럴 본 아싸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이죠. 드높은 인싸의 고대 법률은 아싸 세상에 관여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을텐데요? 이런 짓을 하다니 뻔뻔하군요. 이젠 하다하다 킹치만 까지 끌어다 쓰네요 인싸놈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