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황건적 이야기로 본 혁명 봉기의 4가지 인물 유형.
2) 본인은 똑똑한 줄 알지만 페미니스트들은 그저 장기말.
3) 페미니스트보단 그 뒤에서 페미니즘을 이용하여 이득을 보는 이익 집단을 경계해야 함.
아주 아주 ~ 먼 옛날 중국 후한의 황실의 황제들은 단명하는 경우가 매우 잦았습니다. 황제가 워낙 어린 나이에 죽다 보니, 다음 대에 즉위하는 황자는 정상적으로 즉위해야 할 시기에 비해 매우 빠르게 자리를 이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황제학을 익히며 정치적 감각과 힘을 길러야 할 시간을 갖지 못한 어린 황제는 무능했기 때문에 이를 꼭두각시 삼아 대권을 노리는 왕의 외척과 환관들의 정쟁이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백성들은 부패한 관료세력의 착취와 끝날 줄 모르는 정쟁,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 등으로 몹시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백성들이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며 피폐해져 갈 때, 갑자기 어떤 신흥종교가 나타나 지친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달래주며 그들의 마음을 훔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윽고 수십만의 농민 봉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게 됩니다. 발흥 초기엔 종교적 신앙에 기초하여 사람들을 겉으로나마 위로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들은 병을 치료해주겠다며 백성들의 귀중한 쌀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그런 주제에 정작 해주는 건 부적 태운 물을 먹이는 것 뿐이었죠. 그치만 너무나도 힘든 현실에 지친 백성들은 뭐라도 붙잡고 싶은 현실에 이들의 부조리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점점 시간이 지나며 혁명의 본질은 장각을 비롯한 몇몇 우두머리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 그 이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혁명은 실패하게 되고 농민들이 꿈꾸었던 새 세상이 찾아오긴 커녕, 황건적들을 소탕한 실적을 올린 호족 세력들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뿐이었습니다.
뭔가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제목을 보고 들어오신 여러분들은 일면 상관없어 보이는 먼 옛날 중국의 황건적과 지금의 페미니스트가 무슨 연관성이 있다고 그러는 걸까 싶어 들어왔을 것이고, 시작하자마자 뜬금없이 황건적의 역사를 짧게 써놓은 글을 보고 이걸 왜 설명하는건지, 페미니스트 얘기는 무엇 때문에 제목에 써놓았는가 싶을 것입니다.
처음에 짧게나마 황건적 얘기를 꺼낸 것은 혹시 황건적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을까봐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쓴 것이니 양해 바랍니다.
황건적 이야기를 쓰며 옛 기억을 찬찬히 더듬어보니 삼국지를 마지막으로 읽었을 때가 대략 5년 전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노란색 표지의 10권짜리 삼국지 시리즈를 직접 사주시며 적어도 3번은 완독해보라고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아버지께는 죄송하지만 사실 전 1번 밖에 못 봤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유비·조조·손권 사후 그들의 자손이 즉위할 때부터의 이야기는 사실 잘 생각이 안 납니다. 삼국지 후반부 이야기는 왜인지 드라마 야인시대 김두한 중년 시절의 이야기 같은 느낌이라서..
이렇게 대충 읽었던 삼국지였지만 1권 초중반에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 어떤 인물(이름이 안 떠올라서 죄송합니다)이 한 말이 요즘 들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페미니스트와 일견 상관없어 보이는 황건적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길,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난세에 접어들 때 그것을 타계하고 상황을 뒤집기 위한 혁명이 일어날 때에 4가지 유형의 인간이 있다고 했는데, 그 분류가 대략 다음과 같았습니다.
아직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그것을 먼저 느끼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첫 번째 유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들은 어지러운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돌아갈지, 어떤 광풍이 일 것인지 어렴풋이 느끼는 지식인들입니다. 그들 중에 일부는 이 불길한 바람을 두려워하며 외딴 곳에 은거해버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 어려움속에 뛰어들어 자신도 세상을 바꾸려는 움직임에 동참하려고 합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엔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예측한대로 혁명이 일어나고 맙니다.
그 혁명을 일으키는 자들에는 혁명을 주도하고 이끄는 소수의 사람들과 이들을 지지하고 따르는 다수의 대중들이 있는데요,
여기서 세 가지 유형이 나눠집니다.
혁명을 지지하고 이를 따라 행동하는 대중을 두 번째 유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들은 똑똑한 소수의 엘리트가 지시하는 방향성에 따라 움직이고, 많은 머릿수를 내세워 혁명을 실질적으로 진행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이 혁명에서 이들은 정말, 진심으로 세상이 바뀌길 바라며 전력투구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지식과 정보가 부족하여 앞으로의 상황을 예측할 능력이 부족한 편이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판단력이 부족합니다. 그리하여 혁명이 성공할 때의 얻는 달콤한 열매도 제대로 얻지 못하며, 실패했을 때의 타격도 비교적 많이 받습니다. 안타깝지만 그야말로 장기말에 불과한 역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혁명을 주도하고 이끄는 소수의 엘리트들에게서 남은 두 가지 유형, 세 번째 유형과 네 번째 유형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세 번째 유형의 인물은 대중을 이끌 힘도 갖고 있으며 뛰어난 머리도 갖추고 있습니다. 이 유형의 인물은 두 번째 유형의 대중들과 마찬가지로, 진심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 혁명에 몸을 내던집니다.
뛰어난 능력과 선한 마음을 두루 가진, 어릴 적 만화나 영화에서 볼 법한 멋진 히어로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만화나 영화에서 해피엔딩을 맞는 주인공들과는 정반대로, 이들 또한 대중과 마찬가지로 혁명이 성공했을 때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며 토사구팽당하기까지 합니다.
혁명이 실패하는 경우 가장 먼저 첫 빠따로, 제일 처참하게 역풍을 맞는 것도 이들입니다. 자신은 물론 자손과 가족마저 몰살당하기도 하지요.
네 번째 유형의 인물 또한 세 번째 인물과 마찬가지로 대중을 이끌 힘과 뛰어난 머리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혁명의 목적과 명분에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뛰어난 두뇌와 놀라운 능력, 사람을 홀리는 카리스마를 갖췄지만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고 철저히 자기 자신의 이득만을 생각합니다.
그 혁명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생기는 떡고물과 혁명이 성공했을 때의 달디 단 열매만이 이들의 관심사입니다.
실제로도 혁명이 성공했을 시 혜택의 대부분이 소수의 네 번째 유형들의 인물들에게 돌아갑니다. 권력과 재력은 물론, 혁명에 성공하고 세상의 질서를 바로 세운(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이 리더들을 지지하는 대중들의 마음까지 모두 다 그들의 것입니다. 실패했을 시 타격을 가장 적게 받는 것도 이들입니다. 실패하기 직전에 그 낌새를 느낄 수 있는 똑똑함과 도망갈 능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일이 그르치기 전에 언제든지 몸을 빼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혁명의 최고 수혜자입니다.
저 시대에 살았던 실존했던 인물이 한 말인지, 삼국지 소설의 작가가 가상 인물의 입을 빌어 자신의 생각을 말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상당히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인류 역사상에 일어났던 비슷한 사건들에도 저 공식이 대부분 성립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아니 전세계적으로 이슈인 페미니즘에도 말입니다.
페미니즘의 역사는 18세기, 대략 1700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8세기 유럽에 불었던 계몽주의의 바람은 인간의 이성을 중시했고 이러한 이성을 지닌 인간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여성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는데요, 많은 계몽주의자들이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이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계몽주의자들 중에서도 일부는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이성을 갖고 있으니 남성과 똑같은 권리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 벌어진 여성 참정권 부여 등에 대한 논쟁이 근대적 성 평등 이념을 본격적으로 이끌어냈습니다.
페미니즘이 태동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부터부터 20세기 초반의 페미니즘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얻고, 여성의 자유와 선택을 존중해주길 바랬습니다. 이 때도 나름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어쨌든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해달라는 큰 틀을 벗어나진 않았습니다. 앞서 등장한 여느 사상들과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또한 초기에는 첫 태동 당시의 명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점점 페미니즘에도 여러 가지 분파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후 2세대, 3세대 페미니즘과 이들의 분파들에 대한 설명을 하고 넘어가면 글이 너무 길어지므로 생략하고 이 중 하나인, 래디컬 페미니즘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흔히 일컫는 이퀄리즘이라는 개념은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차별받는 소수자(동성애자 등)의 권리를 신장시키자는 상호교차성 페미니즘과 유사성을 가집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다른 분파의 페미니즘은 조금씩 힘을 잃어갔고, 전세계적으로 래디컬 페미니즘이 페미니즘의 주류가 되면서 이에 대한 반발과 비판적인 여론 역시 강해졌습니다.
래디컬 페미니즘은 2세대 페미니즘에서 발생되었는데 기존 1세대의 페미니즘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 사회적 성 평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성 차별이 지속되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각고의 고민 끝에 이들은 아직까지도 이 사회가 가부장제, 남성중심의 사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이 차별받는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즉 가부장제를 타파해야만 진정한 의미의 성 평등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었습니다.
앞서 말했듯, 페미니즘 또한 여느 사상들과 마찬가지로 처음 세상에 태어났을 당시의 취지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룩하고자 하는 목표가 현실적인 목표에 부딪히며 좌절되고, 그 틈을 이익집단이 파고들어 이를 이용하려 들기 시작하자 이내 변질되고 맙니다.
현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주된 주장은 ‘이 세상에 발생하는 모든(혹은 대부분의) 사회적 문제가 가부장제, 즉 남성 때문이다.’ 로 요약됩니다. 성별 여부와 상관없는 문제뿐만 아니라 명백히 여성이 잘못한 문제의 경우에도 원인은 남자 탓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속편하고 이기적인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잘 되면 내 덕, 안 되면 네 탓.
세상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수 십 편의 논문과 서적을 집필한 저명한 학자들, 역사적으로 길이 이름을 남긴 위대한 철학자들도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그 원인을 100% 완벽하게 꿰뚫어보지는 못했습니다.
근데 이들은 참 명쾌합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 ‘응 가부장제 때문이야, 응 남자 때문이야.’ 세상에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의 원인과 이유가 오직 한 가지 문제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얼마나 세상이 살기 좋고 편하겠습니까.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죠. 세상은 1+1=2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원인이 2+3이라면 5라는 결과가 나오고 2x3이라면 6이라는 결과가 나옵니다. 다양한 원인만큼 다양한 결과가 나옵니다. 또한 답이 같은 5일지라도 그 원인은 1+4일 수도 있기 때문이고 혹은 10÷2 때문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비슷하고 똑같아 보이는 결과도 분석해보면 원인은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멀리 나갈 필요 없이 어린 시절 수학문제만 풀어봤어도 느낄 수 있는 간단한 세상사입니다.
원인이 먼저 발생하면 그 뒤에 결과가 따른다,
비슷하고 같아 보이는 결과도 원인은 다를 수 있다.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아주 단순한 진리입니다.
하지만 그치들의 부족한 대가리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나 봅니다. 결과가 6이든 9든 앞에 오는 원인과 수식은 무조건 가부장제입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천 가지 만 가지 일들 중 어떤 문제는 정말로 가부장제 때문에, 남성에게 부여된 지나친 권력 때문에 발생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얼마나 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든 결과의 원인이 가부장제, 남성 때문이라고 부르짖습니다.
이 변질된 래디컬 페미니즘 혁명을 지지하는 자들 중,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인물 유형 중 두 번째 유형에 해당되는 ‘혁명에 동조하고 따르는 다수의 대중’에 해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가장 먼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어떤 바보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바보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냥 저냥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세상사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욕구에 몸을 맡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어떤 글을 봅니다. 그 동안 조그만 햇볕들 일 없던 바보의 대가리 속에 갑자기 번갯불이 번쩍합니다. 평생 공부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해보지 않았을 어둡고 어두운 그 대가리 속에, 아주 약한 빛이 내리쬐어도 놀랄 판국에 번개가 치다니!
그 사상은 바보의 대가리 속에 너무나도 강하게 각인되어 순식간에 바보의 생각과 행동의 근간을 바꿔버립니다.
그들은 갑자기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느낍니다. 그 동안 자신은 우물 안 개구리였는데 너무나도 놀라운 어떤 생각과 사상이 자신을 우물에서 끌어올려주며 세상 보는 눈을 다시금 일깨워줬다고 여깁니다.
갑자기 주위 사람들이 XXX들로 보이는 마법이 일어났습니다. 내 주위의 인간들이 세상이 얼마나 잘못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자기 일만 하며 살아가는 우둔한 백성들로 보입니다. 아아, 나는 현자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정상인입니다. 어린 시절, 그 사람은 어떤 책을 읽다 우연히 인상 깊은 구절을 보고 깊은 상념에 빠집니다. 뭔가 세상 한 켠에 대한 진리를 깨우친 듯한 느낌이 듭니다. 어린 시절의 그 아이는 모두가 깊이 잠든 밤, 홀로 새벽을 지새우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빠집니다. 자기 자신이 대견스럽습니다. 견문이 넓어진 느낌이 들어 기쁩니다.
때로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몇 날 며칠을 고민하며 밤을 지새우기도 합니다. 그러다 고민을 해결할 훌륭한 방법이 문득 떠오를 땐 내 머리가 그래도 제법 쓸만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내심 스스로 자랑스러워합니다. 독서를 하고 공부를 하고, 사회 경험을 쌓으며 그의 마음 속 칠판은 여러 가지 글과 그림들로 점차 풍요로워집니다. 머릿 속에 번쩍하는 광명이 일 때마다 짜릿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점점 성장하면서 본인의 마음 속 칠판에 썼던 글과 그림이 무조건 옳은 것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린 시절 어느 책 속의 인상 깊었던 구절이 절대적으로 옳고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고, 그렇게 고민하고 씨름했던 문제들과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들 모두가 지나고 보니 아주 사소했던 것임을 자연스레 느낍니다. 어떤 토론에서 고집스레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다 상대방의 견고한 논리에 무너져 패배감을 맛보기도 합니다.
견문을 점점 넓혀나가자 이제는 지우개가 생겼습니다. 귀찮고 인정하기 싫지만 필요에 따라 내 마음 속 칠판의 틀린 부분을 받아들이고, 잘못된 것을 지우고 새롭게 고칠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벼가 익으며 고개를 숙이듯 알면 알수록 겸손해집니다.
살아오면서 겪은 그 동안의 경험들을 통해 내가 무조건 옳은 게 아니라 때로는 틀릴 수도 있다는 마음가짐을 항상 가지게 되고 작은 문제도 신중하게, 천천히 조심스럽게 대합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성인의 정신적 성장 패턴입니다.
하지만 모자란 이들의 마음 속 칠판은 다릅니다. 본인의 텅텅 빈 대가리 속에 처음 쳤던 그 번개의 그을음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내 칠판 속의 이 그을음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생각도 없고, 지우개를 만들 능력 또한 못 됩니다. 자기 스스로 어떤 문제를 진지하게 고찰해본 적도, 다양한 분야의 독서와 공부를 해본 적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사회 경험을 쌓지를 않는데 어떻게 새로운 생각을 하고 지우개를 만들 수 있을까요?
잠깐 더닝 크루거 효과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쉽게 예를 들자면 학창 시절 열심히 공부했을 때와 대충 공부했을 때, 시험지를 받았을 때 느끼는 기분을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열심히 공부한 경우 시험지를 처음 받아들었을 때 어느 정도 아는 문제가 있더라도 푸는 내내 불안하고 조심스럽습니다. 지식을 쌓을수록 오히려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의 전체 부분에서 내가 모르는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비로소 깨닫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를 평가할 때 과소평가하게 됩니다. 스스로에 대한 과소평가는 그를 더욱 더 노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대충 공부해서 껍데기만 겨우 아는 경우에는 시험지를 받았을 때 오히려 공부를 열심히 했을 때보다 더 쉬워 보입니다.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게 되고, 이는 더 나은 단계를 위해 발전할 여지를 없애버립니다.
무식한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모르는지 조차 모릅니다. 뭔가를 모르는 것보다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 더 위험한 법입니다. 자신이 무지하다, 모른다는 것을 깨달아야 비로소 배울 준비가 되는 법인데, 그것조차 모른다면 그 사람은 성장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유명한 예능인 이경규 씨가 한 말이 있죠. 무식하고 잘 모르는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 딱 ‘그 분들’에 부합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사람들', 이 덩치만 큰 정신적 지진아들의 주 무기는 낮은 수준의 방어기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정작 본인들은 자기 자신들의 사용하는 것의 무기가 무엇인지, 그것을 사용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지만 말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방어기제는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습니다.
정신력이 약하고 의지가 약한 사람만이 방어기제를 통해 온갖 핑계를 만들어내며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는 데만 사용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멘탈이 단단한 사람도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며, 막대한 스트레스(전쟁, 자연재해, 가족의 죽음 등)를 받는 상황에 처한다면 올바른 방어기제를 사용해 천천히 심리적 상처에서 회복해야만 합니다.
이 스트레스를 방어기제로 해소하지 못하고 점점 쌓여만 간다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위의 설명에서 ‘방어기제를 사용하되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종내에는 방어기제가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되고, 어떤 일이 생기든 갈등을 해결하려 하기보단 이를 바라보는 관점만을 바꾸는 습관이 들어 정신적 성장을 제대로 못해 사회생활에 적응하기 힘듭니다. 우리한테 반드시 필요하지만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연구에서, 방어 성숙도 수준이 낮은, 즉 하위 단계의 방어기제를 오·남용하는 사람일수록 스트레스 요인이나 심리내적인 갈등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므로 심리증상 심각도 수준이 높았습니다. 반대로 방어 성숙도 수준이 높을수록, 즉 올바른 방어기제를 필요할 때만 사용한 사람일수록 심리증상 심각도 수준이 낮았습니다.
잘 사용하면 스트레스와 외압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방패가 되어주지만, 아무 때나 사용하면 오히려 내 앞의 시야를 가려버리는 가림막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이 방어기제의 특성입니다.
이들이 자주 사용하는 하위 단계의 방어기제 중의 하나인 가장 낮은 단계의 방어기제, 부정부터 차근차근 설명해보겠습니다.
부정이란 외부에서 발생한 일과 사건을 아예 인정하려 들지 않으려 하는 방어기제입니다.
가장 원시적이고 질 낮은 방어기제에 해당하며(원시적이고 질 낮다고 해서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느 상황에 사용하느냐가 문제) 보통 어린 시절에 행동화(스트레스 받는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울거나 떼쓰는 행동 등)와 더불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어기제인데, 성장하고 나서는 이러한 방어기제를 사용하지 않지만 일부 정신적 문제가 있거나 미성숙한 사람에게는 계속 남아있기도 합니다.
이들은 본인들의 신념을 뒷받침해줄, 가부장제의 잔존과 남성의 권위적 태도가 모든 남녀차별의 원인임을 증명해줄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불안해하며 본인이 갖고 있는 신념이 틀리지 않았다는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만들어내고 왜곡해대며 본인들의 가치관이 무너지지 않도록 강화시키려 합니다.
다음은 분리입니다. 본인과 남들에 대한 태도를 오로지 두 가지로만 분류하려는 방어기제입니다.
그치들에게 세상사란 ‘좋은 것’과 ‘나쁜 것’ 오로지 두 가지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좋지만 저 부분은 나쁜 사람, 하나의 대상에 장·단점이 공존하는 것. 이딴 것은 없습니다. 무조건 좋은 것 아니면 무조건 나쁜 것, 모든 것은 이 둘 중 하나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흑백논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세상일은 1+1=2로만 설명할 수 없는 것이건만 그치들의 대가리로는 세상을 똑바로 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영 힘든가 봅니다. 이들은 일어나는 모든 일과 대상들을 두 가지 중 한 가지로 분류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그것만 고집합니다. 이분법적 사고는 우리 뇌의 인지적 부담을 상당히 경감시킬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스트레스를 덜 받게 할 수 있으며 피아 구분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주위의 인물들은 내 편 아니면 무조건 적입니다.
밉지만 끌어안고 가야할 아군, 적이지만 어떤 부분은 인정해줄만한 사람. 이런 건 없습니다.
내 편인가 싶다가도 어느 것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이득 될 게 없다 싶으면 즉각 꼬리를 잘라내 버립니다. 보통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조그만 의리도 정도 뭣도 없습니다. 내쳐진 상대가 ‘나는 너희의 편이다, 제발 다시 받아달라.’ 호소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99개 잘해도 1개 마음에 안 들면 가차 없이 버립니다. 상대가 자기에게 99개 칭찬해줘도 1개 비판하면 그 상대에게 온갖 욕설을 쏟아냅니다. 정작 자기는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는 XX 주제에 자기에겐 관대하고 남에겐 엄격한 유사인류가 이들입니다.
퇴행은 정신상태가 어린아이나 유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어릴 적에는 잘못하고 실수하더라도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쉽게 용서받았기 때문에 심적으로 편했던 그 시기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성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퇴행이 마냥 부정적이고 나쁘기만 한 방어기제로 보이지만 이 또한 올바르게 사용하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됩니다.
어린 시절 인상 깊게 보았던 만화영화나 TV프로그램을 성장한 후 우연히 오랜만에 접했을 때 떠올리게 되는 추억, 오랜만에 친척집에 갔을 때 조카 방에서 본 신기한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면서 어렸을 적 가지고 놀았던 나만의 장난감을 떠올리며 즐거워하는 것, 옛날 어른들이 70년대 교복과 교련복을 보며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들은 퇴행의 올바른 사용에 속합니다.
하지만 그치들의 퇴행은 이런 올바른 방식으로 발현되지 않습니다. 상대와 논쟁을 벌이다 본인이 주장하는 논지의 근거와 지식이 부족해서 패배할 것 같은 느낌이 들면 곧바로 ‘웅엥웅’, ‘쵸키포키’, ‘우웅 그뤠스 으쯔르그~’ 등의 갓난아기도 하지 않을 의미 불명의 의성어와 혀 짧은 소리를 내뱉으며 상대를 약올리고 정신승리한 뒤 도망쳐버립니다.
투사란 자신의 잘못이나 자신이 갖고 있는 사회적으로 위협적인 충동이 상대에게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실제로 본인의 실수로 일어난 것이 팩트일지라도, 이를 받아들일 시 느끼게 될 죄책감과 스트레스가 부담스럽고 두려워 상대방에게 전가하려 하는 방어기제입니다.
바람기 있는 사람이 배우자도 바람기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상대를 끊임없이 의심하거나, 본인이 하고 있는 혐오를 다른 사람이 한다고 뒤집어씌우는 등의 예시가 있겠습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투사하는지 자세히 살펴보면 그 사람의 심리를 어느 정도는 엿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 일에 여자 탓은 절대 없고 무조건 남자 탓이라 부르짖고, 우리는 남혐한 적 없고 오로지 남자들만이 잘못된 여혐을 하고 있다 외치는 그 분들과 일맥상통하지 않습니까?
자신들이 하는 행동은 미러링이라며, 상대에게(그 첫 타겟은 남초 사이트들 중에서도 여성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강했던 일베였습니다.) 네가 하는 행동은 틀린 것이라 알려주기 위해 하는 것이라며 내가 하는 잘못된 행동들도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라며 자기합리화하는 그 분들. 정말로 상대의 잘못을 상대에게 깨닫게 해주려면 그들에게 거울을 비춰주면 되는데, 마주 앉아 같이 똥을 싸고 있는 정신병자가 그 분들이죠.
남성들이 여성의 외모만 보고 여성의 가치를 매긴다며 비난하는 동시에, 본인들은 서양 남자들을 ‘갓양남’이라 칭하며 맹목적으로 숭배합니다. 상대의 외모만을 보며 찬양하는 본인들의 욕망을 남들에게 투영시키며 남자들의 추잡한 성적 욕망이라 칭합니다.
여성의 외모만을 보는 세상이 한탄스럽다며 머리를 짧게 자르고 화장을 하지 않고 다니거나 겨드랑이 털을 기른 뒤 그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란 듯이 보여주는 역겨운 퍼포먼스를 선보입니다. 나는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왜 화장을 해야 하고 머리를 꾸며야 하느냐 따집니다. 그러나 남성 또한 여성과 마찬가지로 이성의 외적인 평가를 신경 쓰며 외모를 가꾸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서비스직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본인들도 남성만의 외모를 보고 평가하고, 잘생기고 멋진 남자를 향해 찌찌파티를 외쳐대지만, 레이싱걸이나 치어리더 등의 직업은 남성의 추악한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며 정작 아무 문제없이 본인의 직업에 만족하며 본인이 선택한 그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여성들을 여성의 권리 신장에는 관심 없고, 남성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흉자’라며 적으로 규정하며 끌어내립니다. 해당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며 우리가 만족해서 하는 일이라고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그치들은 이런 성 상품화가 없어져야만 올바른 남녀평등사회가 구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남자의 성 상품화에 대해선 왜 아무 말도 없을까요?
환상도 나쁜 쪽으로 자주 사용합니다. 사람이 너무 힘드고 지칠 땐 가끔씩 상상 속에서라도 성취를 경험하고 자존심을 회복하며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야 합니다. 그러나 상상이 아무리 즐거워도 이를 지나치게 사용하고 탐닉하면 망상병 환자가 되기 십상입니다.
방구석 하버드 대학생의 거짓 학력 인증에, 임신은 여성의 뇌 기능을 저하시키고 신체에 나쁜 영향만 미친다며 비임신만이 답이라 지껄이는 방구석 임산부 전문의에, 인터넷에선 아주 죄다 전문직입니다. 그렇게 능력이 뛰어나신 분들이면 주말도 없이 바쁘실텐데, 평일 낮에 밖에 꾸득꾸득 기어 나와 시위할 시간이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반동형성은 무의식적인 욕구의 충동을 억압만으로 극복하기 어려울 때 일부러 그것과 정반대되는 욕구를 만들어냄으로써 대항하는 심리 현상입니다.
이 반동형성에 의해 발현된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 뭔가 부자연스럽고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씹적씹’, ‘찐적찐’ 같은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보이는 행동입니다.
실제로는 본인도 만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지만, 겉으론 관심 없어하며 오히려 싫어하는 척하고 누군가 본인과 비슷한 취미를 어필하며 겉으로 드러내면 그 사람을 공격하곤 합니다.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여성들의 권리 신장을 지지한다고 하더니 뒤로는 추잡한 성추행을 하다 발각된 몇몇 남성들과, 본인이 잠재적 가해자며 헤테로니 하면서 남성으로서 자기가 대신 사과하겠다며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여성의 권리 신장을 위하는 척하며 내가 여자들 편을 들어줬으니 그 중에 한 명은 나한테 함 대주지 않을까 생각하며 혓바닥이 부르트도록 XX해주다 목적 달성에 실패하자 결국엔 사 먹고 마는 어떤 작품 속의 버팔로가 떠오르네요.
앞서 설명한 방어기제들에 비해 좀 더 성숙한 방어기제로는 동일시, 승화, 유머, 이타주의, 인내, 수용 등이 있으나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그 분들과는 관계없는 방어기제이니 상위 방어기제의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그래도 긴 글이 더더욱 길어지고 이야기의 맥락에서도 이탈하게 될 것 같아 그렇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페미니즘.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키고 진정한 남녀평등을 이룩하기 위해선 가부장제를 깨부수어야 한다.
여성은 무슨 일을 하든 항상 가부장제와 남성의 권위에 부딪혔기 때문에 성취를 이룩할 수 없었다.
당장 겉으로 보기엔 참 멋진 말입니다.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을 신세계의 새로운 질서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 내면엔 달콤한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실수와 잘못으로 그르쳐서 실패한 일들도 ‘그 동안 나는 항상 열심히 해왔고 올바르게 살아왔는데, 나는 정상인인데 세상이 잘못 돼서, 가부장제와 유리천장, 이유 없이 남성들에게만 과도하게 집중된 권위 때문에 내가 손해를 보는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종내에는 ‘아 그럼 세상만 바로 잡으면 열심히 노력해오고 열심히 살아왔던 나는 당연히 잘 되겠구나’ 라며 생각하게 만듭니다. 내가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세상만 바로 잡으면 자연스레 내가 열심히 해온 만큼 당연히 받아야 했던 것들을 비로소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위대한 사상에 심취한 사람은 본인 스스로를 자기 자신을 세상의 잘못된 점을 올바로 꿰뚫어보는 위대한 통찰력을 가진 똑똑한 사람으로 인식합니다. 이제 선민의식이 생긴 것이죠.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객관적으로 평가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항상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남들을 과소평가합니다.
가부장제를 깨부수어야 한다는 말의 과격함이 그들의 마음 속 무언가에 불을 지핍니다.
세상의 잘못된 점을 올바르게 잡는 것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 나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로 느껴지게 합니다.
분노와 증오는 아주 강력한 힘을 지닌 감정입니다. 분노와 증오에 휩싸인 사람의 행동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할 수 있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런 초인적인 행동력 유발과 더불어, 이 감정에 취한 사람의 눈과 귀를 막아버린다는 것이 단점으로 공존하고 있습니다. 수십,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분노와 증오에 휩싸여 눈과 귀를 가린 채 똑같은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영향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겠습니까?
가부장제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부담되는 제도입니다. 가장은 아무리 힘들고 지치더라도 처자식을 먹여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외부의 온갖 위험과 스트레스에 직면하며 가정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남성이 힘들고 중요한 의무와 책임을 지는 만큼 더 많은 힘과 권리를 가지긴 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는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가 빚어낸 것입니다. 가부장제가 오로지 여자들을 억압하고 괴롭히기 위해서 생겨난 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은 위험을 감수하고, 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더 많이 받아야 하는 게 당연한 이치입니다. 받아야 할 혜택을 똑같이 반반으로 나누려면 나도 상대가 하는 만큼 해야 합니다. 열매는 똑같이 반반 나누자고 하면서 너는 힘든 일하고 나는 쉬운 일 하자고 하는 건 불공평합니다.
남성이 상대적으로 강한 힘을 갖고 여성이 상대적으로 약한 힘을 갖게 된 것은 인류가 진화하면서 가지게 된 특성이지, 남성이 스스로 선택하고 여성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이 생물학적 차이점에서 비롯된 권리의 분배를 어떻게 나누어야 남성과 여성 양쪽 모두가 만족할 것인지를 찾는 것이 해결책이라 생각됩니다.
이 해결책은 사회적 합의점을 천천히 찾아가며 아주 조심스럽게 탐색해야 합니다. 아직까지는 어느 누구도 이것을 해결한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 제도를 마냥 파괴한다고 해서, 혹은 가장으로 대표되는 생물학적 남성을 적으로 규정하고 규탄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란 것입니다.
정말 가부장제의 모든 것이 틀렸고, 이를 부숴야 하는 것이 맞다고 칩시다. 그리고 부수는 데 성공했다고 칩시다.
그 다음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부수기만 하면 됩니까?
그 이후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실 겁니까? 누군가는 이렇게 물어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옛날 사유재산과 계급의 존재가 사람과 사람 간에 갈등을 유발하고 간극을 초래한다며, 모든 사람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아야 하는 사회가 구현되어야 한다며 세상을 뒤집어서 바로 잡자고 했던 사람들이 종내에는 어떻게 변질되었는지, 그 사람들이 이끌던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비교해보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요즘 들어 대외적으로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일부 소수의 엘리트들, 위에서 언급한 4가지 유형의 인물 중 열매에만 관심이 많은 4번째 유형의 엘리트들은 저러한 질문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아마 콧방귀를 뀌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적극적으로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몇몇 정치인들과 정당이 있는데 이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사람들 간에 정치적 분쟁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넥슨 보이콧 시위할 때 시위한다고 모았던 돈을 꿀꺽했던 사람, 호주국자를 위한 변호사를 선임해야 한다며 돈을 모금한다더니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레드필, 본인의 입지가 위태위태해지고 힘들어지면 갑자기 뜬금없이 페미니즘을 지지하며 그들의 지원과 관심을 호소하는 일부 작자들은 그냥 귀여운 사기꾼 정도 수준 밖에 안 됩니다. 이러한 유형들 또한 멍청한 그치들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이용할 머리 정도는 있지만 위에서 말한 소수의 엘리트 유형에 해당한다고 말하긴 좀 애매합니다.
저들보다는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정치인들이 4번 유형의 열매에만 관심이 많은 엘리트에 가깝죠. 이 엘리트들은 이미 사회의 기득권에서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세상을 뒤집겠습니까? 진짜로 세상을 뒤집어 버리면 자기들만 손해인데 무어하러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그들은 래디컬 페미니즘의 지상과제인 가부장제 말살 후에 발생하게 될 새로운 문제에 대한 예측과 이에 대한 대책을 고안할 능력이 있어도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일에 에너지를 쏟아 붓느니, 멍청하고 휘둘리기 쉬운 이 반푼이들을 살살 꼬드기고 달래고 위로해주는 척 하며 가끔씩 사탕 좀 쥐어주면서 너희들과 함께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자고 너희의 힘이 되어주겠다고 하며, 속으로는 이 장기말들을 어떻게 다뤄야 나의 힘과 기반을 더더욱 강화시켜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나를 지지하게 하고 투표하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더더욱 효율적이니까요.
그들의 은밀한 바람몰이와 뒷공작이 지속적으로 발휘된 결과인지, 현대 사회 들어서 발생한 권리 신장과 평등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이 시류의 특성을 이용할 방법이 떠오른 정치인들이 페미니즘을 이용하게 된 것인지 일개 개인에 지나지 않는 저로선 알 방법이 없습니다.
아마 후자에 가깝겠지요. 전자는 너무 음모론적인 이야기니까요.
이러한 현상에 대해 그들의 개입 여부는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장기말들은 윗선들의 입맛에 맞게 자기 역할을 잘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반푼이들은 정치인들이 대선 시에 그럴 듯한 여성 관련 정책 몇 개만 공약해주면 금방 투표해줌으로서 그들의 기득권을 더욱 강화시켜주고 있습니다.
낮은 수준의 지능과 더불어 낮은 수준의 방어기제로 발현되는 그들의 XX 같은 행동들은 뭇 사람들을 답답하게 하고 화나게 하며 그치들이 현 사회의 진짜 적, 없애버려야 할 주적(적이 맞긴 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장기말 수준)으로 보이게끔 합니다. 게임적인 용어로 탱커의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소화해내고 있습니다.
이 장기말들을 상대하는 사람들 또한 점차 분노와 증오에 휩싸여 그들을 공격하면서 점차 눈과 귀가 어두워집니다. 진짜 두목은 뒤에 따로 숨어있는데 계속 충원되는 쫄병들만 열심히 뚜드려패는 형국입니다. 장기말은 언제 어디서든 보충할 수 있습니다. 이들만 두드려패는 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모두가 이 남녀 문제에만 너무 감정적인 소비를 하게 되다보니, 다른 사회적 문제에 신경 쓸 여력이 남아있질 않습니다.
정작 페미니즘으로 진짜 이득을 보는 집단들은 상대적으로 욕을 덜 먹거나 거의 신경 쓰이고 있지도 않습니다.
변호사 선임비 명목으로 돈을 모금한 뒤 잠적해버린 사람, 페미니스트를 증명하는 것이라며 메갈리아 로고가 그려진 것 외에 아무 기능 없는 어플리케이션을 10000원에 판다고 올린 사람 등 페미니즘을 이용해먹으려는 사람들보다 그들의 이용에 휘둘리는 멍청한 페미니스트들이 더 욕먹고 있습니다. 심지어 나도 저렇게 해서 소위 ‘미트코인’으로 돈 좀 쉽게 벌어볼까 하고 반 농담으로 말하는 사람마저 있습니다.
이들의 행동이 당연히 욕먹을 짓은 맞지만, 이들의 멍청함이 그동안 빚어온 수많은 어그로가 페미니즘을 이용하려는 자들과 이로 인해 진정으로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자들이 응당 받아야 할 비판 및 사회적 감시와 견제까지도 흡수하고 있는 것이 더욱 문제입니다.
앞서 말했듯 정말 이 소수의 엘리트들이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가부장제를 없애자는 주장을 받아들여, 가부장제를 해체하고 이후 발생하게 될 문제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고 이를 실행할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일개 장기말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 반대 진영에 선 적들에게는 더더욱 알려줄 이유가 없죠. 알려줄 필요가 없으니 굳이 만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장기말들에겐 그저, 그냥 부숴버리자고 속삭이면 됩니다. 그거면 됩니다. 증오와 분노에 휩싸이게 하여 그 힘과 행동력을 폭발시키기만 하면 됩니다. 장기말들의 눈과 귀는 닫혀있으니 그들의 리더가 원하는 대로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들의 바램을 들어주는 척 하며 방향성만 제시해준다면, 장기말들이 증오와 분노의 힘으로 리더의 손가락질 한 번에 본인들의 인생을 친히 갈아가면서 앞에 당면한 방해물들을 부수고 돌파해주며 리더의 이득을 위해 싸워줄 것입니다.
가부장제를 해체한 후 태동하게 될, 새로운 세상을 이렇게 건설하자는 청사진이 실제로 존재한다 치더라도 그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습니다.
멍청한 그치들 대가리로는 어차피 이해하지도 못할뿐더러,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보자는 생각 자체가 건설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그치들의 경직된 사고를 유연하게 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들을 조종하려는 입장에선 오히려 독이 됩니다.
경직된 사고로 한 가지 생각 밖에 할 줄 모르는 자들일수록 그들의 생각과 의도를 읽기 쉽고 다음 행동을 예측하기 쉽기 때문에 더더욱 컨트롤하기 용이합니다.
이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일부 정치인들은 각종 선거와 대선 등에 출마할 때 그치들이 솔깃해할만한 정책들을 제시합니다. 그 바보들은 이 정책이 세상을 바로 잡는 동시에 그들에게 이익이 될 일석이조의 정책이라 생각합니다.
이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투표하는 것은 그치들에게 자기들이 사회를 바로 잡는 데 기여했다는 만족감을 주게 하며, 이 사람이 당선되고 난 뒤 시행하게 될 정책이 나에게 어떤 이득을 가져다 줄 것인가에 대해 막연히 기대하게 합니다.
저 사람이 내 인생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 정치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를 위해 뭔가 해준다고 하니 일단 투표해봅니다. 이 사회의 상위계층인 정치인들이 자신들이 옳다고 치켜세워주며 여성권리 신장에 힘쓰고 지지해준다고 하니 뭔가 든든한 빽을 얻은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사회의 지도자들이 아군이 되어준다고 하니 자신들의 명분이 좀 더 강화되는 느낌마저 듭니다. 아군은 개좆빠는 소리고 위에서 말했듯 그냥 이용당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정치인들은 그치들의 뒤에 서서 그들이 힘들 때마다 밀어주고 힘을 보태주는 혁명을 이끄는 진짜 리더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치인들은 그들을 그냥 나한테 투표해 준 어떤 한 표, 그래서 내가 당선될 수 있도록 해주고 더 잘 먹고 잘 살도록 해준 장기말 그 이상으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페미니즘 혁명 동지도, 대장도 뭣도 아닙니다. 나한테 투표해 준 그 사람들 덕에 앞으로 더 잘 먹고 잘 살겠지만 나를 뽑아준 그 멍청한 유권자들이 잘못된 사상에 미쳐서 지 인생을 갈아 넣고 조져도 알 바 아닙니다.
그들은 이 정책이 현실적으로 실현될 가능성이 어느 정도 되는가? 이 후보가 당선된 뒤에 내세웠던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은 하는, 믿을 만한 후보인가? 이 사람이 정작 당선된 후에 공약 실천을 이행하는 데 있어 소극적으로 행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따질 것인가? 이런 문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정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될지 지속적으로 지켜보고 만약 방향성이 틀어지면 어떻게 잡을 것인지 생각하는 것은 귀찮고 피곤합니다. 내가 뽑은 사람이니, 우리 편이니 알아서 잘 하겠지. 잘 안 되도 나 말고 우리 편의 다른 누군가 검열하겠지. 그걸로 끝.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란 것이 꼭 해결해야 하고 처리해야 할 것이 아니라 느끼는 걸까요? 그냥 공감만 하는 선에서 끝내도 되는 걸까요? 세상을 바로 잡는 일에 내가 뭔가 기여했다는 만족감이 주는 감정적 고양만 느끼면 충분한 걸까요?
이 소수의 엘리트들도 그걸 잘 알기 때문에 당선 전에는 아주 거창하게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겠다고 외치며 최대한 그들의 표를 끌어 모으려 노력합니다. 어떤 공약들은 너무나도 과격하고 참신하여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아니 저게 실현 가능한, 이뤄질 수 있을 만한 정책인가’ 싶지만 그들에게는 잘만 통합니다.
그들이 반푼이 XX들이긴 하지만 그들의 표도 민주주의 사회에선 ‘똑같은 한 표’니까요.
우리를 뽑으면 여성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겠노라 했지만 막상 그들이 당선되고 난 뒤에 바뀐 건 딱히 없습니다. 정식으로 발의되고 통과되어 실제로 시행 중인 여성 정책들이 몇몇 있긴 하지만 뭔가 획기적인 정책도 딱히 없고, 그것들이 여성들의 권리를 엄청나게 신장시킨 것도 아니며 남녀평등을 이룩한 건 더더욱 아닙니다.
심지어 오히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정책들까지(성매매 여성들의 사회 복귀를 위한 교육비 명목으로 거액의 세금을 투자하려는 정책이 대표적) 제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전 세상과 별로 다를 게 없고 오히려 역행하는 느낌마저 듭니다. 정말로 그들만 더 잘 먹고 더 잘 살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잘 먹고 잘 살던 사람들인데.
난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깨어있노라 외치는 그들이지만, 남들이 보기엔 그냥 깨진 대가리 밖에 안 보인다는 것을 본인들만 모른다는 것이 주위의 멀쩡한 사람들을 화나게 하고 답답하게 합니다. 가끔은 슬픔마저 느끼곤 합니다. 어찌하여 이 XX들은 이다지도 모를까 싶어서.
그치들의 정신적 신장은 너무나도 낮습니다. 몸만 큰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속내를 손바닥 보듯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정상인들의 눈에는 이 정신적 미성숙아들의 속셈과 하는 행동이 너무나도 뻔하게 보입니다.
그들이 남녀 평등을 외치면서 세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느니 성토하며 부르짖는 것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죄다 의무 없는 권리만을 요구하고 있는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사실을 지적하면 그들은 여태껏 본인들만의 의무를 지고 있었지만 사회가 불평등해서 내가 권리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라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잘 된 것은 모두 내 덕, 잘못 된 것은 너와 세상 탓.
그들이 느끼는 이 세상의 모든 해답을 알고 있는 듯한 명쾌한 느낌, 정말로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듯한 시원한 느낌은 진짜 그들이 세상사를 통달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 깨진 대가리 사이로 부는 바람 때문에 그런 것뿐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바꿀 능력과 판단력이 없습니다. 본인들만 그렇게 굳게 믿고 있죠. 세상을 바꾸는 일은 컴퓨터 게임의 세이브 파일을 지우고 다시 시작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이 얼마나 무섭고 냉정한지 경험해보지 못한 몸만 큰 어린이들의 근거 없는 자만심이 너무나도 웃깁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나는 세상의 잘못된 점을 통찰할 이성과 지성이 있으며, 이 잘못됨을 바로 잡기 위한 행동력까지 갖춘, 이 시대를 대표하고 이 시대를 이끄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그냥 페미니즘의 틈새를 비집고 파고든 이익집단들의 장기말에 불과합니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멍청하고 띨띨한 주제에, 남에게 공부하라고 꾸짖는 꼬라지를 보고 있자면 헛웃음이 나옵니다.
자신이 퀸인 줄 알지만 실상은 폰보다 못한 존재들.
자신이 세상의 백신인 줄 알지만 사실은 암덩어리 같은 존재들.
한남인 애비충이 힘들게 벌어온 돈이지만 지금은 내 수중에 있으니 내 돈이고 나는 이 돈을 기꺼이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한다 생각하며 이익집단에게 돈을 퍼줍니다. 자기가 번 돈이 아니라 아까운 줄 모르는건데 이를 대범하다 생각합니다.
먹튀를 몇 번이나 당했지만 학습능력이 없는지 계속 당해줍니다.
위대한 페미 전사들이 사회의 암적인 존재인 가부장제를 수호하려는 자들과 남성들의 권리와 대립하며 온갖 공세를 펼칩니다. 본인들이 생각하기엔 스스로가 세상을 바로 잡는 아주 고상한 투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 행동들은 죄다 낮은 수준의 방어기제에서 비롯된 유치하고 역겨운 어린아이 수준의 투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본인들만 모릅니다.
이 XX 같은 행동들이 이목을 집중시켜준 덕분에 뒤에 숨어 이들을 이용하는 자들은 자연스레 감시와 견제에서 멀어지고, 지금 이 순간에도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이득을 취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럼 대체 세 번째 유형의 리더들, 페미니즘이 아닌 진정 남녀평등을 위해 움직이고 힘쓰는 사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저는 우리나라의 이영희 작가님(필명 오세라비)과 캐나다의 토론토 대학교에서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같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위의 두 사람처럼 현 페미니즘의 잘못된 점을 올바르게 분석하고 이를 비판하며, 사회 분위기를 환기시켜줄 사람이 아직은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진짜 문제점이 무엇인지 깨닫고 이 문제의 경중이 어느 정도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세 번째 유형에서 언급한 세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줄 진정한 리더들이 점점 더 많이 나타나게 되리라 생각됩니다.
그럼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그건 바로 여러분이 아닐까요?
세상살이가 너무 팍팍해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신경 쓸 기력이 없는 것 잘 압니다. 10년은커녕 자고 일어나면 강산이 바뀌는 요즘 같은 현대사회에선 더더욱 말입니다. 정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눈코뜰 새 없이 바쁜 게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나 자신과 가족·친구 같은 소중한 사람들에게 쏟을 시간과 노력도 부족한데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일에 뛰어들어 세상 좋은 일을 한들 남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내 한 몸 던져 열심히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다가 쓰러져도 누구 하나 일으켜줄 사람도 없으니 누구라도 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하나 뿐인 인생, 누구에게나 소중한 건 당연합니다.
힘들고 위험하며, 거창한 일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최소한 이 페미니즘이라는 미친 바람이 나 자신을 덮칠까 무서워 숨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이 사회에 미치는 좋지 않은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걸, 그리 가벼운 문제가 아니란 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실 이렇게 글쓰는 저도 잘 와 닿지 않습니다. 인터넷에선 엄청 난리난 것 같은데 내 주위의 사람들 중엔 페미니스트 같은 사람이 전혀 안 보입니다. 인터넷 특성 상 루머가 만들어지기 쉬우니 사실은 별 거 아닌 일인데 괜히 과민하게 받아들여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모두 존재하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세상살이의 흐름 속에 있어 그 기류를 느끼기 어려울 뿐, 세상은 지금도 시시각각 변하고 있습니다.
강물 속 물고기에게 강물이란 자기 몸의 위·아래, 앞과 뒤를 감싸고 있는 물 뿐입니다. 비늘로 감싸진 몸을 스쳐지나가는 강물들의 흐름을 미세하기 느낄 순 있지만 물고기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 거대한 강물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시야 너머 저 어두운 곳에는 무엇이 도사리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갑자기 강물의 흐름이 어디서 멈출지, 자기가 도착하게 될 곳이 오·폐수로 더럽혀진 하천이 될지, 포식자가 언제 잡아먹으려 덮칠지 알 수 없습니다.
흐르는 강물의 뭍 바깥쪽에 서 있는 인간에겐 강 전체가 아주 잘 보입니다. 어떤 물고기가 있고 그 물고기가 어느 방향으로 헤엄치는지, 강물 속 지형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강물의 흐름이 어디로 가는지 다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강을 제 손바닥 보듯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인간이지만, 정작 인간 또한 자기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 속에선 물고기나 마찬가지입니다. 내 인생이 어디론가 흘러가지만 그 끝의 어디인지 알 수가 없고, 언제 어디서 고난이 튀어나올지도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물고기와 다르게 인간은 지나왔던 강물의 흐름을 되짚어보고 그것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잠깐 동안 수면 위로 튀어 올라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의 흐름이 어디로 갈지 어렴풋이나마 알려줄 수 있습니다.
물고기가 평생을 살아가며 자기 몸을 감싸는 강물 밖에 느끼지 못하고, 한 치 앞만 내다보며 살다가 죽었지만, 실제 강물은 물고기가 느꼈을 강보다 훨씬 넓고, 물고기가 자기의 눈으로 보았던 강보다 실제 강의 길이는 훨씬 깁니다.
내가 느낄 수 없다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내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고 내 피부로 처절하게 체감하지 못했을 뿐, 분명 위에서 언급했던 문제들은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당분간 존재할 것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불쌍한 사람들이 페미니즘의 달콤한 함정에 빠져 실시간으로 인생을 조지고 있는 중이고, 그 사상에 빠진 수많은 멍청이들이 자기 인생뿐만 아니라 다른 무고한 사람들의 인생까지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멍청이들을 이용하는 이익 집단들이 야금야금 세상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요즘 들어 자주 화제가 되는 여성정책들이 있겠습니다. 그 중 가장 핫한 건 성매매 여성들에게 사회복귀를 위한 교육비와 지원금을 주겠다는 정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성매매 여성들이 피해자인 것도 아니고, 모든 성매매 여성들이 옛날 3류 만화에나 나오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몸을 팔던 불쌍한 소녀들도 아닌데 모든 성매매 여성들을 사회적 약자와 동정의 대상으로만 규정하고 그들이 불쌍하다며 국민들이 정직하게 일하고 정직하게 낸 세금을 갖다 바치려 하고 있습니다.
내가 직장생활하며 번 돈, 나의 형제자매가 힘들게 일하며 번 돈, 나의 부모님이 피땀흘려가며 번 돈 모두가 엉뚱한 사람들에게 흘러가고 있죠. 사회적인 피해가 어디 이런 것뿐이겠습니까?
물고기가 자신의 힘으로 강 바깥의 세상으로 나올 수 없듯, 우리도 우리가 사는 세상의 차원에서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똥이 더럽다고, 보기 싫고 만지기 싫다고 똥을 종이로 덮는다고 해서 똥냄새가 사라지지 않으며 그 자리에 있던 똥이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런 문제들을 외면한다고 해서 그 문제가 사라지진 않습니다.
아직까진 뭔가 행동하고 실행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의 경각심만 가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진 저 광풍을 잠재울 본격적인, 결정적인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도 최소한 이 문제를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고 우습게 여기지 않으려는 마음가짐만 있으면, 나중에 본격적으로 새 바람이 불어올 때 여러분의 그 마음가짐과 생각이 그 순풍을 더 널리 퍼지고 나아가게 하리라 생각합니다.
글솜씨가 없어서, 부족해서 죄송합니다. 지루한 글 읽으시느라 힘드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어떤 분들은 지겨운 내용에 스크롤을 쫙 내리시지 않았을까 싶어서 걱정됩니다.
뭔가 새로운 내용을 기대하고 보셨을 분도 저보다 똑똑한 다른 사람이 썼던 글들에서 느꼈던 점이 많아 식상하다고 느꼈으리라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다 쓰고 나서 한 번 더 검토해보니 유치한 부분도 많구요....
그래도 한 번 정도는, 제 방식대로 제가 세상 살면서 느꼈던 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해보고 싶어 이렇게 써보았습니다.
이 넓고 광활한 세상에서, 이 거대한 강물의 흐름에서 저도 한 번 쯤은 뻐끔거리고 싶었습니다.
이 조그만 물고기의 주둥아리에서 외치는 작은 뻐끔거림을, 내 곁의 한 두 마리의 물고기라도 봐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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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자기는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는 X신, 보빨] 등등 글 내에서 벌점 받을 만한 표현들이 눈에 보이네요
맞기 전에 수정하는게 좋을듯 하네요
제가 태클 건다는게 아니라 피지알 규정이 그렇습니다
문맥과 상관 없이 표현만으로도 벌점 들어가는 곳인데 감정섞인 비하발언이라면 뭐........
좀 다른 이야기지만 지금 젊은 남자들은 하루라도 빨리 10대여자와 동맹을 맺어야죠.
사실 지금 2~30대 여자들이 갉아먹고 있는건 젊은 남자들 파이가 아니고(그들의 파이는 이미 다 갉아먹혀있고) 10대여자들 파이죠.
요즘 급식및 10대들 머리 좋으니까 토끼머리에 뿔이 나면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일본꼴 나봐야 정신 차리겠죠
버블세대 때 풍족한 경제상황 속 여유로운 분위기 때문에 급진적인 여권신장이 허용되는 분위기였지만
장기침체 되면서 분위기 완전히 바뀐것도 모르고 뻗대다가 4~50까지 노처녀로 사시는 분들마냥
일본 남자들은 어떻게 됐냐구요?
경제적으로 윤택한 40대가 20대 여성들과 맺어지더군요
그리고 일본의 여권은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후퇴를 거듭해서 비웃음 받는 처지가 됐고
(수정됨) 음 먼저 좋은 글을 퍼주셔서 감사하고여
근데 저글의 내용에는 동의할수없네요
저글의 주장하는 내용은 "이익집단(특히 정치인)이 페미니스트를 이용해서 이득을 챙길려고 한다." 인데
먼저 정치인은 페미니스트를 이용해서 이득을 챙길 수없습니다. 극단적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계층은 주로 20~30대층 여성분들인데 이들은 투표율이 적고
또 우리나라의 모든 정당이 페미니즘을 지지하기때문에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해서 투표율이 높아질 가능성은 적습니다
그리고 정치인이 4번 이득을 쫓는 유형이라고 일반화 시키는데 그 근거가 부족합니다
정치인중에서도 3번 의롭다고 생각해서 혁명을 하는 사람이 충분히 있을수 있는데요
(개인적인 생각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로움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이득을 쫓는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인은 특히 더 그렇다고 생각하고여)
따라서 정치인들도 극단적 페미니즘을 의롭다고 생각해서 페미니즘을 지지할 수도 있죠
왜 정치인들이 극단적 페미니즘을 의롭다고 생각하는지 추측해보자면 지금 정치인들이 대부분 운동권 출신인데 운동권에서는 활발하게 여성운동을 해왔고 또 그들은 극단적 페미니즘의 실체를 잘 모르죠 그래서 정치인들이 극단적 페미니즘을 의롭다고 생각하는것 같습니다
페미니스트의 활동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목적을 가진다 생각합니다.
1) 해방 : 깽판을 뜻합니다. 원하는대로 말하며 타인을 괴롭힐 자유를 얻었죠.
일종의 조폭이나 사이비 종교와 유사합니다.
2) 이권 : 여성에게만 돌아가는 이권을 계속 가져와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 아니 우월에 섬.
실제 과실이 주어지니 일반 여성들도 혹 하게되죠.
황건적이나 홍위병은 '표'를 가지지 못했죠. 토사구팽 당할 일도 없기에 지금 위치는 말씀하신 바와 서로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행패는 최근에 양지로 나온 것 뿐 일이년 된 행동이 아니죠. 이들은 메갈이나 워마드가 생기기 전에도 여초에서 늘상 하던 일이라..
제 선입견일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여자들은 남자보다 뭉치는경향이 지나치리만치 강하죠 니편내편부터 따지는것부터 시작하니까요
그래서 자정능력이 굉장히 약하다고 봅니다 일단 제 생각에 그렇다는거죠
뭔가 의견이 있을때 반대하면 흉X 어쩌고 하면서 몰아붙이는것 같은데
그들이 자정능력이 있다는것만 증명해도 제가 그들을 싫어하는 이유의 대부분은 사라질겁니다
이야 이 사이트를 이용한지 꽤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이정도의 인신공격이 대놓고 들어올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나름 참신한 경험입니다
그리고 여혐종자로 시작부터 못박고 들어가는 모습도 참신하고요
뭐 제가 글을 그닥 잘쓴다고 생각해본적은 일생토록 한번도 없습니다만
이야... 님같은 분께서 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주시는걸 영광으로 생각해드려야하려나요?
다른식의 글이라면 뭐 발끈하거나 기분나쁘기라도 해야하는데 이런식의 대응은 너무나도 신기해서 그냥 참신하다는 생각밖에 들지않네요
새로운 경험에 대해 나름 감사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그와는 별개로 님이 얼마나 기본 에티켓이 부족한 분이신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수있겠습니다
한가지 궁금합니다만... 페미니스트들은 성향이 여성성을 부정하는 건가요? 왜 여성의 아름다움을 남자들을 유혹하거나 혹은 남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수단이나 목적등으로 생각하는지? 그런지는 몰라도 헤어스타일을 단발이나 스포츠 비슷하게 해서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을 잘 안되게 하던데... 여성은 여성성이 가장 아름답게 빛날때 진정한 여성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건 아닌가요? 예쁘거나 아름다움마저도 남성들의 인식에 대한 피해 의식이 너무 짙게 깔려 있는 것 같아서 의아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남,녀 구별이 전혀 안되는 중성의 사회 만들기가 페미니즘의 궁극의 목표인지 그것도 궁금하네요. 왜 여성을 아름답다거나 예쁘다라고 표현하는 것 조차 문제를 삼는지? 그리고 꾸미고 가꾸고 하는 외모의 자아 실현 마저도 극단적으로 부정하는지 페미니즘의 정체가 많이 궁금합니다. 아시는 분 답변 좀 부탁드립니다.
페미니즘 중에 여자다움을 추구하는 친구들도 없진 않죠
애초에 자유로운 개성의 발전을 추구한다고 주장한다면 살인 식인 같은 도저히 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을 빼면 그 어느것도 금지돼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남자의 존재와 의의 자체를 부정하는 친구들 입장에서 털끝만큼이라도 남자 좋은 일은 하기 싫다고 유치한 반발하는 거죠
뭐, 레디컬이 언제는 논리적이어서 레디컬이었습니까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