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요약 : 김태리 당신은 대체...
영화에서 스타는 일종의 보험이다. 손쉽게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스타는 영화 티켓을 구매하고자 하는 팬들의 욕구를 부추긴다. 또한 스타는 최소한의 엔터테인먼트를 보장한다. 화면 속 박보검이나 한효주는 관객의 주의가 흩어지지 않게 한다. 작품의 저렴한 CG에도, 허술한 시나리오에도, 별다른 재능을 보여주지 않는 연출에도 스타의 존재는 최소한 관객이 영화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출입문으로 걸어 나가게 하지 않는다. 일단 관객은 스타의 미소짓는 얼굴을 한번 더 보고 싶어서라도 영화를 끝까지 보게 된다. 이건 <리틀 포레스트>에서 첫 단독 주연을 맡은 김태리에 적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스크린 속 김태리의 만발하는 매력은 보는 일은 마치 귀신에 홀리는 체험과 같다.
<리틀 포레스트>는 임용고시에서 떨어진 뒤 낙담하고 있으며,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소원해진 20대 여성 혜원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혜원이 시골 고향으로 돌아온 뒤 1년을 다룬다. 혜원은 유년기를 함께 보냈던 고향 친구 재하(류준열), 은숙(진기주)과 농사도 짓고 담소도 나누면서 추억을 쌓는다. 한편, 혜원은 20살 무렵 편지 한장만 달랑 남긴 채 자신을 떠났던 엄마(문소리)를 떠올린다. 혜원은 어린 시절 엄마가 가르쳐준 레시피를 하나씩 되새긴다. 고향에서 혜원은 계절별로 온갖 별미를 만든다. 콩국수, 배추부침, 양배추 샌드위치, 꽃잎 얹은 크림 파스타, 등등. 요리는 현재와 과거를, 혜원과 엄마를 정서적으로 연결하는 매개이다. 요리를 통해 혜원은 과거 고향집에서의 추억을 더듬는다. 그녀는 떠난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되살아오는 예전 기억으로 자신에게 남긴 엄마의 사랑을 점차 깨닫는다. 혜원에게 고향에서의 1년은 서울에서의 시달림을 치유하는 시간이며, 엄마에 대한 응어리진 서운함을 해소하는 시간이다.
<아가씨>로 데뷔할 당시 김태리는 언론 설레발의 은덕을 입었다. 이천몇백 대 일의 경쟁을 뚫었다는 신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거장의 칭찬, 장편 데뷔작부터 수위 높은 노출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배우는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이미 충무로의 미래를 짊어질 샛별로 우뚝섰다. 물론 언론의 거품 제조로 만들어진 스타는 한둘이 아니다. 언론의 세례를 받았지만 김태리는 스타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카푸치노들과 다른 차원의 배우임을 연기력으로 증명했다. 실로 인조 인간 같은 연기만 찍어내는 대한민국 20대 여배우 풀에서, 김태리의 등장은 짙은 어둠에 선샤인 한 줄기가 비추는 듯 했다.
김태리는 한 미모한다. 그런데 김태리의 예쁨은 로맨스를 상기시키지 않는 예쁨이다. 충무로 여배우 계보에서 김태리는 어느 전통에 서 있지 않다. 김혜수처럼 관능성으로 멀미나게 하는 류도 아니고, 손예진처럼 지켜주고 싶은 청순 가련형도 아니다. 대개 어떤 여배우 스타를 볼 때, 우리는 로맨스의 환상에 자신을 대입해 본다. 내가 저분의 남자친구였다면.. 하는 상상을 한다. 하지만 김태리를 볼 때 이성적 감정은 일지 않는다. 대신 이상할 정도로 건전함과 경건함이 마음 속에 꽃을 핀다. 김태리는 한번쯤 진한 포옹을 상상하게 되는 그런 스타는 아니다. 야무지게 자리한 이목구비와 지나치게 마른 몸은 그녀를 상상 속 그녀로 바라보게 하지 않는다. 김태리의 샤방샤방함을 보는 기쁨은 마치 주변에 진짜 예쁜 여사친을 떠올릴 때의 흐뭇함과 같은 종류이다. 곁에 있으면 유쾌한, 술자리에 같이 있으면 시간이 빨리가는, 그래서 오래도록 친하게 지내고 싶은. 김태리는 그런 이미지를 지녔다.
<리틀 포레스트>에서 김태리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카메라는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그녀를 화면에서 놓아주지 않는다. 김태리의 사슴 같은 눈망울을 보고 있으면 제정신을 차릴 수 없다. 연출은 배우의 잠재적 개성을 최대한도로 끌어내 화면 속에 가시화한다. 이성으로는 진행의 여기저기서 드러나는 결점을 생각하지만, 배우의 얼굴은 불평이 무의미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그래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김태리 말고 영화에서 본 것이 대체 무엇인지 돌이켜보지만, 쉽게 답을 찾을 수는 없다. <리틀 포레스트>는 스타에 의존하는 영화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김태리는 영화의 여러 아쉬움을 용서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일본 만화 원작에 충실하려는 의도인지, 영화는 시종일관 밝은 톤을 유지한다. 하지만 경쾌한 분위기에 대한 감독의 집착은 혜원의 주요 이야기를 짓누른다. 진지함으로 기울지 않는 가벼움으로 인해 혜원의 고민은 깊이를 결여한다. 특히 엄마에 대한 혜원의 내적 갈등을 다룬 플롯은 김치만 들어간 김치찌게 같은 맛이 난다. 혜원이 귀향한 후, 첫 플래쉬백은 엄마가 집을 떠난 상황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 뒤 혜원의 섭섭함과 우울함의 구체적인 묘사는 생략되어 있다. 결말에 혜원은 내래이션으로 엄마의 편지를 비로소 이해했고 마음을 열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보는 사람은 애당초 혜원이 엄마에게 부정적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혜원의 감정 기복은 충분히 그려지지 않기에 그녀의 가슴 속 맺힌 한이 풀릴 때, 우리는 어떠한 정서의 움직임도 느낄 수 없다. 또한 혜원의 취업 고민도 마찬가지이다. 통장 잔고도 떨어져가고 임용고시에서 떨어진 후 1년을 공부하지 않고 통으로 날린 고시생의 해맑음은 제쳐놓더라도 혜원의 사정이 갈무리되지 않은 채 영화는 끝난다. 친구 재하가 “바쁘게 산다고 문제가 해결되니”라고 말할 때, 혜원의 반응과 내레이션은 무언가 깨닫는 척 한다. 하지만 혜원이 서울로 상경했다가 다시 시골로 내려와 싱글벙글 웃으며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바퀴 돌고 있을 때, 저 행복의 바탕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의구심이 생긴다.
그래서 <리틀 포레스트>의 주는 혜원과 친구들의 먹방과 쿡방이 된다. 스타일링 된 각양각색의 음식은 입맛을 돋우며, 자연 풍경은 지친 눈의 피로를 풀어준다. 하지만 주요 뼈대가 물렁한 영화는 예능 ‘삼시세끼’의 영화 확장판 그 이상은 아니다. 호스트로서 김태리가 요리를 맡고 류준열과 진기주가 게스트로 등장하는 것이다. 쿡방과 먹방, 자잘한 유머가 가미된 몇 가지 해프닝은 영화를 힐링 예능과 다르지 않게 한다.
<리틀 포레스트>에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감독이 청춘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감독은 청춘에 섣불리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젊은 세대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정직하다. 젊음을 초월적 힘으로 포장해 예찬하지 않는다. 또 청춘을 가르친답시고 구시대적 코멘트, 예컨대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쉰내나는 헛소리를 덧붙이지도 않는다. 감독은 단지 나름 고민을 안고 사는 세 남녀에 위로를 건내고 아기자기한 행동을 통해 젊음의 약동하는 활력을 화면에 새겨넣을 뿐이다. 임순례 감독은 이전에도 현실의 무게에 고통받는 인간을 보듬어주는 태도를 보였다. 언제나 상처받은 인간을 향한 감독의 따스한 마음씨는 영화에 온기를 더했다. 예전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자리잡지 못한 밴드 멤버들을 쓰다듬어 주는 태도는 절망적인 분위기에도 영화가 비관주의로 기울지 않게 했다. 그 시선은 <리틀 포레스트>에서도 유효하다. 늘 그렇듯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캐릭터에 대한 감독의 사랑은 인간에 대한 감독의 믿음을 충분히 전달한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아마도 <리틀 포레스트>는 김태리가 없었다면 끔찍했을 영화이다. 사계절 자연 속 김태리는 <리틀 포레스트>의 감상을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을 듣는 것과 비슷하게 한다. 단 교향곡의 1악장만 5번 반복해서 듣는 것 같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