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 출격
항우와 유방의 초한 전쟁은 몇년동안 펼쳐진 전쟁으로 보통 이해 되고 있고, 실제로도 몇년간 이어진 전쟁이긴 합니다. 다만, 실제로 항우와 유방이 직접 전쟁의 향방을 놓고 크게 엎치락 뒤치락 싸운 기간은 사실 그렇게까지 엄청나게 길지는 않습니다.
초한전쟁은 BC 206년 8월부터 BC 202년 12월까지 펼쳐졌습니다. 유방이 처음 군대를 이끌고 '삼진' 을 돌파하던 시기가 BC 206년 8월 입니다. 그렇게 천천히 세력을 모으며 항우게 제나라에 있는 틈을 타 저지를 받지 않고 동진하여 팽성에 이른 뒤, 205년 4월에 그 유명한 '팽성 전투' 가 있었습니다. 이후 물러나던 유방이 5월 경 형양에 자리를 잡은 이후 항우는 그 해가 끝나도록 이런저런 이유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BC 204년이 끝나 막 BC 203년으로 접어들던 10월 경에는* 북방에서 한신이 제나라를 평정하고, 항우가 보낸 장군 '용저' 의 부대를 '유수 전투' 에서 격파하면서 전쟁의 향방 자체를 완전히 바꿔 버리게 됩니다.
* 굉장히 중요한 부분으로, 이 때는 진시황이 고친 규정에 따라 1년이 10월부터 시작했고 기록에도 그런 식으로 정리 되어 있습니다. 즉 BC 205년 9월 다음 달은 BC 205년 10월이 아니라 BC 204년 10월 입니다. 이 부분을 모른다면 초한전쟁 시기의 시간 흐름을 완전히 뒤죽박죽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후는 유방이 확연한 우세를 쥔 채 지리한 대치를 보냈고, 다시 10월이 지나 BC 202년이 된 후에는 유방과 항우 사이에 협정이 있었습니다. 이후 유방이 이를 파기하고 여러 제후왕들과 함께 항우를 협격했으니 이것이 BC 202년 12월에 펼쳐진 '해하 전투' 입니다.
BC 206년 8월부터 BC 202년 12월이면, 정확히 4년 5개월로 53개월이 됩니다. 그런데 언급했다시피 이 때는 10월부터 한 해가 시작했기 때문에, 실제로 전쟁이 펼쳐진 시간은 3년 5개월로 41개월입니다.
한데 처음 전쟁이 펼쳐지고 팽성 전투가 펼쳐지는 6개월 가량은 유방과 항우가 직접적으로 싸우질 않았고, 팽성 전투 이후 8개월 가량은 앞서 살펴본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항우가 직접 나서지 못해 초나라의 선진들이 형양성의 보급을 괴롭히는 정도에 머물렀습니다. 이후 10개월 가량 싸운 이후에는 한신이 제나라를 평정하여 북방 전체를 장악해버렸기 때문에, 전쟁의 큰 승패는 이미 정해져버린 뒤였습니다. 이후는 항우가 말라죽길 기다리는 시간, 주판알을 튀기는 제후들을 설득하는 시간 등 끝내기를 위한 준비 시간 정도 였을 뿐입니다.
즉 항우와 유방이 서로 직접적으로 전선에서 대치를 하며, 두 사람 모두에게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을만한 기회가 주어졌던 시간은 BC 204년 1월 경부터 BC 203년 10월(BC 204년 10월)까지 10개월 가량입니다. 이 10개월이야말로, 초한쟁패기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이었던 시간이었습니다.
(BC 204년) 4월, 항우가 형양에서 한을 포위하니, 한왕이 형양을 중심으로 나눠 그 이서(以西) 지역을 한에 속하게 하자고 화해를 청했다. - 한서 고제기
여름, 4월에 초는 형양에서 한왕을 포위하고 급하게 몰아 부치니, 한왕은 화의를 청했다. - 자치통감
항우를 성가시게 하던 구강의 경포가 BC 205년 12월에 몰락한 후 4개월이 지난 BC 204년 4월 경 항우는 형양성을 물샐틈 없이 완전 포위하여 유방을 말라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었습니다. 기록 상 언급되는 것은 4월부터이긴 하지만, 경포를 물리치고 나서 항우에겐 거리낄 게 더 이상 없었을테니 항우가 실제적으로 포위를 시작한 것은 그보다 이전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초나라가 급하게 공격하여 한나라의 식량 보급로를 끊고 형양성에서 한왕을 포위했다. - 사기 진승상세가
항왕이 한의 용도를 계속 침공하여 식량을 빼앗았고, 식량 부족을 걱정한 한왕이 강화를 요청하여 형양 서쪽을 떼어 한의 땅으로 삼고자 했다. - 사기 항우 본기
한군의 식량이 바닥이 났다. - 사기 고조본기
형양성이 함락 직전 상황에 몰린 실제적인 이유는 바로 '군량' 문제 였습니다. 일전까지 용도를 이용해 적의 습격을 겨우겨우 막아가며 보급을 하고 있던 한나라군이었지만, 항우가 대군을 이끌고 포위를 시작하자 용도 보급도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버렸고 외부에서 식량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완전히 막혀 버리게 됩니다. 열심히 싸워 버티려고 해봐야 먹을 게 없으면 방법이 없으니 말입니다.
이에 유방은 항우에게 협상을 제안 합니다. 지금 양군이 싸우고 있는 형양을 기점으로, 천하를 두 쪽으로 갈라 서쪽은 유방이, 동쪽은 항우가 나눠 가지자는 제안이었습니다. 당시에 압도적이었던 항우의 기세를 생각하면 약간 의외일 수 있으나 항우는 당초 이 제안에 동의하려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어째서 그랬을까?
이 무렵에는 팽월이 초나라군의 후방에서 어슬렁 거리고 있었고, 한신이 북방에서 펼쳐진 '정형 전투' 에서 기적같이 승리한 후 군사를 쉬게 하며 제나라를 치기 위한 틈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 제나라조차도 항우와는 철천지 원수인 사이입니다. 또한 구강왕 경포가 몰락하고 그 지역을 항우가 거두긴 했지만 수습할 시간이 필요했을테고, 정확한 시기는 불명이지만 항우는 경포의 장인이었던 '형산왕 오예' 와도 분쟁이 있었습니다. 온 천하가 적으로 가득 차 있었던 셈입니다.
아마도 항우는 일단은 이 제안에 승낙한 후, 여기저기 걸리적 거리는 세력을 한번 정리하고 정비하려는 생각이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반대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측근이었던 범증(范增)입니다.
범증은 다음과 같은 말로 항우를 설득했습니다.
"한나라는 상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지금 취하지 않으면 나중에 이르러 필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漢易與耳, 今釋弗取, 後必悔之)
지금의 한나라는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니, 기회가 왔을때 확실하게 끝내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에 설득된 항우는 형양 포위를 지속하고 한군을 모조리 섬멸시키려는 형세를 취했습니다. 유방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던 셈입니다. 이 때 등장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진평(陳平) 이라는 사람입니다.
진평은 본래 위나라의 신하로 있던 인물이지만,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참소가 들어오자 위왕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이후 초나라의 항우를 섬겼지만, 항우에게 책임 추궁을 당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이번에는 항우를 버리고 한나라로 달아났습니다. 그는 위무지(魏無知)라는 인물을 통해 유방에게 소개 될 수 있었습니다.
이 때는 한참 유방이 세력을 키우며 팽성으로 동진하던 시기라, 천하에서 어느정도 이름 있다는 명사나 재사들은 모두 유방을 찾아 자신의 쓰임새를 어필하던 시기였습니다. 진평이 유방을 만나던 때도 일곱 명이 한꺼번에 유방을 만나러 들어왔는데, 워낙 사람을 많이 만나던 당시의 유방은 그들을 대충 환영하고 먹을 것을 나눠 준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방 : "끝나면 숙소로 들어가라." (罷, 就舎矣)
그런데 이렇게 돌아가면 유방에게 있어 진평은 셀수도 없이 많은 식객 1로 남을 뿐이라, 진평은 과감하게 유방의 앞에 나서 자기 자신을 PR 했습니다.
진평 : "신은 할 일이 있어서 여기에 왔습니다. 해야 할 말은 오늘을 넘길 수 없습니다." (臣為事來, 所言不可以過今日)
진평이 그렇게 나오자 유방은 '그래, 할 말 있으면 어디 한 번 해보라.' 라는 태도를 취했는데, 대화를 나눠보니 제법 머리가 잘 돌아가고 손발도 잘 맞는 듯한 인상을 받아 기뻐했습니다.
유방 : "그대는 초나라에서는 어떤 벼슬을 했었나?" (子之居楚何官)
진평 : "도위였습니다." (為都尉)
이에 유방은 진평을 바로 도위로 임명하고, 자신과 수레를 같이 탈 수 있는 참승(參乘)을 시키고 여러 군사를 감독할 수 있는 권한까지 내려주었습니다. 즉 진평이 대장들을 감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니, 패현에서부터 유방을 따라온 제장들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장수들은 전부 이렇게 떠들어댔다고 합니다.
"왕께서는 어느 날 초나라에서 도망쳐온 졸병을 하나 얻어, 그 능력이 어떤 지도 모르면서 바로 함께 수레에 탈 수 있게 하고 도리어 고참들을 감독하게 하시는구나!" (大王一日得楚之亡卒, 未知其高下, 而即與同載, 反使監護軍長者)
기이한 것은 유방의 태도 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유방은 이를 듣고, 더욱 진평을 총애'(漢王聞之, 愈益幸平) 했다고 합니다. 기존 제장들이 유방의 새로운 인사에 못마땅해 하자 오히려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다는 겁니다. 그래도 이때는 한군의 기세가 좋았던 시점이고, 워낙 많은 사람들이 유방에게 귀부하거나 항복하던 시기라 그냥저냥 뭍혔지만, 팽성에서 한군이 대패하고 사지를 거쳐온 장수들의 목소리가 더 커진 이후에 다시 한번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발, 관영 등의 무장들이 직접 유방의 앞으로 나아가 진평을 참소했던 겁니다.
"진평이 비록 얼굴로 말하자면 관에 붙인 옥과 같아 잘 생긴 사내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든 것이라고는 없는 인물입니다. 저희들이 듣기로 진평이 집에 있을 때는 형수를 도적질해 관계를 나눴다고 하고, 이후에 위나라를 섬기면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초나라로 도망갔으며, 초나라에 붙어서도 제대로 되지 않자 다시금 한나라로 도망쳤습니다."
"오늘날 대왕께서는 높은 자리를 주고 그에게 군을 감독하게 했는데, 신들이 듣기로 진평은 장수들에게 금을 받아 챙기고 금이 많으면 잘 봐주고 금이 없으면 나쁘게 대한다고 합니다. 진평은 그저 왔다 갔다 하면서 혼란만 일으키는 난신일 뿐입니다. 왕께서는 부디 잘 살펴주십시오!"
장수들의 참소에 의하면 진평은 형수와 간통해먹은 색마이며, 자신의 이득에 따라 여러 나라를 마음대로 오고가는 신의라고는 없는 작자일 뿐이며, 여러 부대를 감독하면서 뇌물을 받아 먹은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강하게 고발이 들어오자 앞서서 진평에게 신임을 보낸 유방도 내심 의심이 들었는지, 진평을 추천한 위무지를 먼저 불러 그를 나무랐습니다. 그러자 위무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말씀 드린 것은 능력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저에게 물으신 것은 행실입니다. 옛날의 미생(尾生)이나 효기(孝己) 같은 인물이 있다고 한들 승부를 가르는데 있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왕께서는 언제 그를 쓰실 겁니까? 초와 한이 서로 맞선 상황에서 신이 기발한 능력을 가진 인재를 추천했습니다. 그 계책이 나라에 이로운지 여부를 따지면 그만이지, 형수를 훔치고 금을 받은 일이 무슨 의심거리란 말입니까?"
이에 유방이 진평을 불러 짐짓 정색하고 "당신이 위나라를 배신하고 초나라를 배신했다는데, 이게 신의가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 고 묻자, 진평은 "난 맨 몸으로 와서 돈을 받지 않으면 쓸 것이 없다. 위나라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자 떠났고, 초나라가 내 말을 듣지 않아줘서 따났다. 대왕은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준다길래 여기에 왔다. 신의 말을 들어서 취할 것이 있으면 쓰시고, 쓰지 않으실 거면 돌아가게 해주시면 족하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유방은 '뇌물을 받는다' 는 혐의로 고발당한 진평에게 되려 상을 내리고, 호군중위(護軍中尉)에 임명해서 모든 장수를 감찰하게 했습니다. 내부 감찰로 뇌물 받았다는 사람이 감찰관에 임명되었으니, 전대미문의 인사조치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고우영 초한지 中
진평의 이런저런 혐의 등에 대해서는 아리송한 점이 있습니다. 가령 사람들의 고발에서는 진평이 형수와 간통을 했다고 하는데, 사기 진승상세가의 첫부분에는 진평이 형수와 사이가 좋지 않자, 진평을 아끼는 형이 되려 자기 아내를 쫒아내버렸다는 언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형수와 사이좋게 간통 했다는 내용과는 소위 말해서 약간 아다리가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를 해명하는 위무지의 말도 아리송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위무지는 진평의 혐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능력이 필요한 세상이라 능력 있는 사람을 추천했는데 인성이 무슨 상관이냐." 며 어물쩡 이를 회피합니다. 훗날 조조가 그 유명한 구현령, 즉 '신분이 낮은건 말할 필요도 없고, 불인불효(不仁不孝)한 인간 쓰레기라도 능력만 있으면 추천하라' 라는 명령을 반포할 때 한번도 아니고 세 번에 걸쳐 '그런 인간의 예시' 로 세 번 다 진평을 들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쓰여진 인물이 진평인데, 진평의 행적은 여러모로 인상적인 면이 많습니다. 소위 머리를 짜내 계책으로 군주를 보필하는 책사(策士)라는 행적으로 보면, 유방의 부하 중에 장량과 진평이 여기에 해당하는 위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신을 별동대로 보내고 경포를 회유하고 팽월을 이용하는 전략을 제시하고, 육국을 부활시키려는 계획을 막고, 제후들에게 땅을 나눠주어 마지막 해하 전투에 끌어들이자고 제시하는 등 여러차례 군사전략에 관련된 부분을 제시한 장량에 비해 진평은 소위 말하는 군략(軍略)을 제시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 대신,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및 좀 더 세밀하고 음흉한 무엇인가, 임기응변의 대응에 대해서는 장량보다도 나은 점이 있었습니다. 인간성에 있어서도 장량이 '탈속(脫俗)의 정신으로 세속(世俗)의 책무를 맡는다' 는 은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면, 진평은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정객이었습니다. 장량이 전략가라면, 진평은 권모술수의 대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방은 훗날 죽게 될 때 자신의 뒤를 맡을 사람들에 대해서 "소하가 맡으면 되고, 소하가 죽으면 조참이 맡으면 된다. 조참이 죽으면 왕릉이 가장 나은 인물인데, 고지식한 사람이라 진평이 이를 보좌하면 된다. 단, 진평은 지혜는 넘치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다. 주발은 중후하나 글이 모자란 사람이지만, 유씨 천하를 안정시킬 사람은 주발이다." 라고 평했습니다. 유방은 진평을 평하며, 지혜롭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혼자서는 무엇인가를 맡을 수 없는 인물로 평가했습니다.
실제로 여씨의 천하가 왔을때 진평은 특유의 기지넘치는 면모로 자신의 보신에는 성공했지만, 자기 혼자서는 감히 나서지 못해 고민에 빠져있다가 육가(陸賈)의 추천으로 주발과 연결 된 후, 비록 어리석고 (생각이)둔하지만 강직하고 실천력 있는 주발과 힘을 합쳐 여씨를 몰아내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부족한 부분이 있는 이런 진평의 면모야 말로 정말로 책사답다고 할 만 합니다. 소위 말하는 역사상의 '군사' 라는 것이 군담물 소설에서 나오는 일종의 판타지에 가까운 존재라고 보면, 진평이야말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판타지 상의 군사에 가장 근접한 인물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여간 항우의 형양 포위가 급박해지고 화의 제안마저 범증 때문에 수포가 될 상황이 되자, 다급해진 유방은 진평에게 계책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진평은 "보아하니 초나라를 어지럽힐 수는 있겠다. 저 항왕의 강직한 신하들이라면 아보(범증), 종리말, 용저, 주은 등 몇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헐뜯는 말을 믿고 틀림없이 서로를 죽이게 될 것이다." 라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이에 유방은 진평에게 무려 황금 4만 근을 내려 주고 이것을 구워먹든 삶아먹든 간에 일체의 사용을 전부 진평 한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진평은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초나라군에 첩자를 파견해서 유언비어를 퍼뜨렸는데, 종리말 등은 공이 적지도 않은데 쫌생이 같은 항우가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등에서 왕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불만이 막대하여 유방과 내통, 최종적으로 왕이 되려고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유언비어에 현혹당한 항우는 내심 의심을 품게 되었는데, 이윽고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범증이 강하게 나서 회의 자체는 거의 결렬될 판이긴 했지만, 어찌되었건 이 문제로 서로 논의하고 있으니 사자가 오고갈 일은 많았었는지 초나라의 사자가 형양성 내에 들린 적이 있습니다. 당초 유방은 소와 양, 돼지를 모두 잡은 최상급 연회 준비인 태뢰(太牢)급으로 음식을 차려놓고 있다가, 초나라 사자의 얼굴을 보곤 아연실색하더니 이렇게 둘러대었던 것입니다.
"원, 난 아부의 사자인줄 알았더니 이제보니 항왕의 사자였군?"
그렇게 말하며 기껏 차려놓았던 음식을 모두 치워버리고(....) 채소 찌끄레기만 몇개 섞인 음식을 턱하니 먹으라고 내주니 어이가 없어진 초나라의 사자는 돌아와서 이 일을 보고했고, 그 말을 들은 항우는 의심병이 더욱 도지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실로 어린아이 수작 같은 짓이지만, 항우에게 먹히는 수준에는 딱 그 정도면 족했던듯 합니다.
'아보는 서둘러 형양을 공격해서 함락시키려 했으나, 항왕은 믿지 않고 그 말을 듣지 않았다.' (亜父欲急攻下滎陽城, 項王不信, 不肯聴) - 사기 진승상세가
결국 기만책에 어이없이 속아 넘어간 항우는 형양을 당장에라도 함락시키자고 주장하는 범증의 말을 듣지 않고 요지부동으로 버티고만 있었습니다. 범증도 바보가 아닌 이상 항우의 심중을 전혀 모를리 없었고, 결국 항우에게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천하대사가 이미 정해졌으니 군왕께서는 스스로 알아서 하시오!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가길 원합니다."
그리고 직위를 버리고 팽성으로 돌아갔지만, 분함을 참지 못해 아직 팽성에 도착하지도 못했는데 등에 종기가 나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항우의 측근 한 사람을 죽이고, 그 군대 사이에 불화의 싹을 피워놓기는 했지만 현실이 신산 특기 있는 제갈량 죽인 삼국지 11도 아니고, 한 사람 죽었다고 당장의 전쟁 향방이 바뀔리는 없습니다. 5월이 되자, 어찌어찌 버티던 형양성은 이제 정말 하루이틀도 버티지 못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때, 장군 기신(紀信)이 제안을 올렸습니다.
"일이 실로 급합니다. 신이 청컨대, 초를 속이겠으니 왕께서는 샛길을 통해 나아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미끼 역할을 청한 기신이 사실상 죽음을 자처했을때, 모사꾼 진평은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악랄한 계책을 내놓았습니다. 진평은 형양성 내의 비전력, 즉 여자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우는 작전을 꾸밉니다.
'진평은 바로 밤중에 여자 2천 명을 형양성 동쪽 문으로 내보냈고 초군은 이들을 공격했다.' (陳平乃夜出女子二千人滎陽城東門, 楚因撃之)
작전이 개시될 때, 진평의 계책에 의해 미리 갑옷을 입고 병사들처럼 꾸민 형양성의 여자들 2,000명은 분간이 어려운 밤중에 동쪽 성문을 열고 나아갔고, 포위를 유지하던 초나라군은 사방에서 공격을 퍼붓었습니다. 애초에 전력도 아닌 여자들인데다, 목적 자체가 싸움도 아닌 총알받이인 만큼 이들은 반항도 못해보고 살육되었을 것입니다.
한군이 동쪽에서 튀어나왔다는 정보에 초군이 시선에 그쪽으로 몰릴채, 기신 역시 유방처럼 변장하고 황옥거(黃屋車)에 타고는 "먹을 것이 다 떨어져서 한왕은 항복한다." 며 동쪽 성문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모든 초나라 군사들은 만세를 부르며 우르르 동쪽으로 나아가, 서쪽 성문의 방비는 일시적으로 약화되게 됩니다.
유방은 주가, 위표, 종공 등에게 형양을 지키라고 명령하고는 본인은 진평과 함께 수십 여기의 기마만 주위에 거느리고 재빨리 서쪽 문으로 나아간 뒤 숨어서 도주했습니다. 그리고 형양 서쪽에 있는 요새인 성고를 향해 내달렸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항우도 유방이 진짜로 항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사기를 친 기신에게 "한왕은 어디에 있느냐." 고 물었고, 기신이 "이미 떠나셨다." 고 대답하자 크게 분노하여 기신을 태워 죽였습니다.
이렇게 전쟁 중 항우가 가장 유리하던 때 두손가락에 들법한 순간이자, 유방 최대의 위기 중 한 때였던 '형양 전투' 는 유방의 도주로 인해 끝나게 됩니다. 독안에 든 유방을 이때 잡지 못하게 되자, 이후 항우에게는 고난의 시간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