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시판
:: 이전 게시판
|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7/10/23 14:11
저 시대는 호족이 득세하고 그 이해관계 맞는 연합체가 공동연합정부를 구성한 상황에서 봉건제와 같은 병사체계야 이상하지도 않습니다 위나 촉은 병력 중앙집권이 더 잘되어있었나요? 촉만 해도 호족 기반이었을텐데요 위도 조씨일가의 친위대(호표기 청주병)가 있지만 어차피 병력이야 비슷한 체계였을텐데요 그래서 마지막 문단의 처음 두문장은 이상합니다 그냥 오의 정상적 공격페이즈에서 군사적 역량이 낮은거였지요 특히 대위전에서는요 그 주유도 강릉에서 조인을 천인으로 만들질않나 합비에서는 장료를 탑티어로 올려놔주고말입니다
17/10/23 18:39
위나 촉은 오보다 병력 중앙집권이 훨씬 잘 되어 있었다...는게 제 글의 요지입니다. 본문에 있다시피 병호들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하는 개념 자체가 달랐습니다.
17/10/23 22:29
위와 촉에서는 병사가 장수의 소유가 아니었나요? 위만 하더라도 고평릉 사변이 가능한게 사마가문의 사병덕이었고 선주가 이엄에게 물려준 강주의 유군이나 마초가 투항할 때 이끌고 온 사병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각 국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순 있어도 개념이 온전히 다른것인지 의문이네요 전시에는 이런 제가 알고 있는 반례가 있어서 정도의 차이로만 인지하고 있었는데 오만 개념이 다르다고 쓰시니 의아해서 쓴 댓글이었습니다 관련 서적이나 문서를 기반해서 쓰신 것일텐데 그 출처도 궁금하구요
17/10/23 23:35
적어도 촉은 중앙집정자가 중앙의 군사를 내주지 않으면 어떤 장군이라도 짤 없습니다. 강유가 북벌하자고 비의한테 애걸복걸을 했는데 비의가 고작 1만밖에 주지 않았었죠. 마초가 투항할때 사병들이야 나중에 존재감이 없어지고요. 이엄이야 아예 탄핵당하고 직위와 작위를 아주 몰수 당하는데 그 이후 이엄같은 권한을 누린 사람이 없습니다. 이엄은 나름대로 탁고대신이라고 그렇게 대우해 준거고...아예 이민족으로만 편성된 부대를 따로 운용하는 등 촉의 군사 운용은 좀 다릅니다.
그리고 고평릉 사변의 경우도 사마가문이 불과 3천명 가지고 조상이 중앙을 나간사이에 재빠르게 기습하고 군부를 장악했기에 가능한거지 사마씨 개인의 사병들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고평릉 사변이 결정적으로 사마가문의 승리로 끝난건 조상이 황제를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수도가 사마가문 손아귀에 들어가자 중앙군을 버리고 저항을 포기한 탓이 큽니다. 원래 작정하고 조상이 사마의랑 붙었으면 이 쿠데타의 승자가 누가 될 지는 알 수 없는거였죠. 환범이 조상이 저항을 포기하자 조진은 개X끼를 낳았다고 괜히 한탄한게 아닙니다.
17/10/23 23:42
댓글 감사합니다 전에도 그렇고 댓글로 많은 지적 충족이 됩니다 그런데 의문은 이엄은 탁고받기 전에도 자신의 사병으로 한중전때 후방 반란을 토벌해 장군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릉전때 유비가 나아가며 사마가등의 지방 세력을 규합하는 식으로 병력을 동원하지 않나요? 그래서 사병을 규합해서 병력을 구성하는 방식이 오의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쓰신대로 촉은 제갈량 체제를 거치며 중앙집권화가 더욱 심화된 것은 알겠습니다
17/10/23 23:55
사마가는 무릉만이로 촉의 방침 자체가 이민족들은 자기가 살게 나두고 그 대신 얼마간의 댓가를 바치라는 식의 유화책을 쓴겁니다. 본디 무릉만이는 유비 시절에도 유비가 스스로 무릉근방인 공안에서 통치할 정도였고요. 이릉전때 유비가 진격할때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 면면을 보면 유비가 형주시절에 임관시킨 속관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또 이릉전때는 유비는 확실히 자기가 틀어잡고 있는 중앙군을 가지고 싸운 것이고 형주의 호응은 좀 부차적인 사한이기도 했고...
그리고 이엄이 유비에게 항복한 이후로 사병을 거느렸다는건 좀 애매합니다. 이엄은 유비를 대신하여 익주 내에서 도적이 준동하거나, 이민족과 결탁한 지방반란이 있을 때 진압하는 역할을 주로 수행하였고, 한중전 당시에는 5천명을 따로 받아서 3만의 반란군을 토벌했는데 230년에 강주독으로서 한중으로 이동할때는 2만의 군사를 움직였거든요. 10년 사이에 이엄이 사병을 4배 이상 불린게 아니라면 촉 중앙에서 받은 병사들이 맞을겁니다.
17/10/24 00:07
네 첫단락에서 말하는 체제가 오의 그것과 질적차이가 있는가가 제 의문의 시작입니다 무릉만이에서의 기록만 제가 알고있지만 이릉전과 같은 대전을 준비할 때 중앙군외에도 그에 준하는 지방세력의 병력동원이 있는게 맞지않나 싶다는것이지요 저 시대의 배경에 호족의 병권을 다 장악하는건 가능한가싶구요 반란 부분은 제가 의미를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단락에서는 정확하게는 사병이라는 표현은 쓰신대로 애매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전 그 병력운용이 쓰신대로 장수, 호족 개인에게 통솔이 위임된 체제로 보입니다 글에 나오는 장수끼리의 군대충돌과 같은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장수, 호족 개인에게 군사 보유가 안되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워서요
17/10/24 00:19
그냥 오나라가 토착 호족들에게 군을 맡겼다면 촉한은 중앙정계의 통제를 받는 장수들에게 군을 맡겼다고 보는데 합당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중앙의 허용이 없으면 병력은 커녕 군사활동도 할 수 없던게 촉한이라는거고 본문에 나온 여몽-감녕 간의 사병 전쟁은 촉한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는 거죠. 위연의 난때도 위연의 군사들이 자기네들이 반란군이라니까 바로 흩어져 버리고요.
17/10/24 00:25
잘 알았습니다 호족기반국가들이라 생각해서 병력운용 또한 큰 차이 없다고 생각했었네요 비의-강유의 얘기나 이엄전 짚어주신 점이나 이번에도 댓글 감사합니다 궁금한 점이 하나남았는데 조위도 확실한 중앙집권적인 병력운용을 했나요? 인재구성은 조조군벌과 청류파 영천호족의 연합인데 병력 또한 그러했는지 병력은 중앙집권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전 조위도 조씨일가 개인병력이 있고 사마가문도 사병이 있으니 중앙집권 수준까지는 아니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17/10/24 00:28
조말론 님// 처음에는 조조 군벌이 군권을 잡고 있는 상대에서 영천파 호족들이 그를 뒷받침하다가 니중에는 군권이고 재정권이고 모두 호족들에게 넘어가 버린거죠. 조예가 사마씨 사마의, 사마부 형제한테 각각 군권, 재정권 그걸 다 넘겨 주면서 조씨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결정타가 바로 고평릉 사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17/10/24 00:03
저도 이 부분은 헷갈려서 이엄전을 찾아봤는데 확실하게 나오네요.
23 년(218)에 도적 마진, 고승등이 처에서 모반하여 수만 명을 모아 자중현으로 진격했다. 그 당시 유비는 한중에 있었고, 이엄은 다시 병사를 징발할 수 없었다. 단지 그 군의 병사 5천 명을 이끌고 토벌하러 가서 마진과 고승등의 머리를 베었을 뿐이다. 8년(230)에 표기장군으로 승진했다. 조진이 세 갈래 길로 나누어 한천으로 진격해 왔으므로, 제갈양은 이엄에게 2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한중에 가도록 명령했다. 이엄이 이끈 병사들은 촉한 중앙군이 맞는거 같습니다.
17/10/24 00:09
네 저도 이엄전을 이전에 본 기억으로 쓴겁니다 저 군의 오천명을 이끌었다는 부분을 전 이엄이 통솔가능한 군사로 해석한 것이구요 조진의 방어는 제갈량이 보낸게 명확하니 중앙군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17/10/24 00:16
굳이 이엄의 사병이었다고 보긴 어렵다고 보는데 이전 기록이
'성도가 평정된 후, 건위태수, 흥업장군으로 임명 되었다.' 라 는 겁니다. 즉, 이엄은 당시 건위태수 신분으로 건위군의 병력을 동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기록이라 봅니다.
17/10/23 14:12
손권의 문제라기 보단, 당시 강남이 그만큼 덜 중국화(?) 되어있었다는것 이지요.
그뒤시대인 남북조시대에 가도 마찬가지라서.. 북조의 왕조는 북방이민족들의 난립으로 난장판이었던데 반해, 남조는 내부 권력투쟁으로 왕조가 바뀝니다. 남북조시절엔 남조의 권력자들이 북벌을 감행했는데, 장안까지 장악한적도 몇번있지만, 본문의 문제로인해서 다시 군대를 회군시키는일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병사들이 북벌후 그 지역에 남는걸 거부해서..)
17/10/23 14:23
제가 이 시절의 사병집단/병력동원 에서 이해가 안가는 부분은 두가지 경우인데
하나는 조조가 5000명의 사병을 모집해서 동탁을 치는데 앞장섰던거 - 할애비되는 사람이 환관을 하면서 어마어마한 재산을 형성했는데 겨우 5천? 나머지 하나는 조조에게 붙어버린 황건적의 잔당들이죠 자신들을 토벌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자신들의 종교를 인정해달라.. 정말 이해 안됩니다. 그러고 보면 조조에게는 진짜 천운이 따랐던듯 싶습니다. 황건적이 제발로 찾아와 휘하의 군대(보급을 해줄 필요조차 없는 군대) 로 편입되어서 원소와 싸울 병력의 한부분이 되어주거든요..
17/10/23 14:29
조조 할아버지가 부자라 해봤자 재산 다 헐어서 주는 정도는 아니었을테니 충분히 많은거 같습니다. 땅을 점령하고 거기서 빨아먹은 자원으로 뽑아낸 것도 아니고 그냥 낙양에서 쫓겨난 다음 바로 집안 재산으로 봅은거였는데요.
17/10/23 14:33
단순 계산으로 5천병사 양성및 먹이는데 인당 천만원이 1년에 소요된다면 5백억이고, 그정도면 충분히 큰돈이지요. 단위만 달랐지 그때라고 크게 체감상 차이나진 않을것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17/10/23 14:45
마지막은 청주병 이야기하시는것 같은데 조조 산하로 편입된 이후로는 약탈 기록을 본 적이 거의 없는데요...?
완성 전투였던가? 그때 약탈 시도했다가 우금에게 쳐발렸던 적은 있지만요.
17/10/23 15:00
개인적이지만, 그다지 관련이 없을꺼라고 봅니다. 만약 청주병이 관련되어 있다면 청주병에만 한정지어서 정사에 기록되었을텐데(안그래도 정사 삼국지를 편찬한 진수는 진의 신하였고, 진은 위에서 선양받은 나라죠. 위를 까면 깠지, 커버쳐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청주병에만 한정지어야지 조조의 악행이 묻히는 결과를 가져오니까요.) 그러한 기록을 본 적이 없어서 말이죠.
그냥 조조가 맛이 가면서 전 병력이 맛이 갔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지휘관이 광기에 물들면 수하 병사들이야 뭐...
17/10/23 15:11
말이 좀 꼬였네요.
사실 의도했던 바는 위에 긍정적인 진수마저도 커버 안 쳐줄 정도로 문제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굳이 커버를 처준다면 청주병에 한해서(게다가 청주병은 어찌되었든 도적인 황건적 출신이라 덮어씌우기도 좋죠.) 학살이 벌어졌다고 서술할수도 있는데, 그런 서술이 없다는 점에서 조조 휘하 전체 병력이 서주학살전에 가담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17/10/23 15:23
진수가 조조까라는 건 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보는게 애당초 진의 정통성이 위에서 내려오는 거고 그 위의 창시자가 조조죠. 삼국 황제 호칭을 봐도 그렇고요. 진수가 대놓고 진나라 입장에서 위를 깍아 내리는건 사마씨집권때 부터라고 보네요. 그러니 삼소제기라고 조방,조모,조환을 뭉뚱그려 놓았겠죠.
17/10/23 14:49
무슨 조조와 황건적이 같은 하늘을 이고는 못사는 철천지 원수도 아니고, 황건적이라고는 해도 핵심 인물 몇명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그저 혼란한 난세의 시기에서 어느 집단에든 위탁해서 작게는 일신의 안녕을 도모하며, 크게는 집단내에서 성공하여서 출세하려는 사람들의 집단일 뿐입니다. 이건 그 어떤 시대, 그 어떤 지역을 가더라도 마찬가지이니 조조가 황건적을 흡수한것도 전혀 문제가 안 되지요. 자신들의 종교를 보장해달라는 것 역시 조조 입장에서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는 것이 조조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을 흡수하여서 자신의 세를 강화시키는 것이니 종교정도야 그려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는거죠.
그리고 황건적이 무슨 먹지도 않고 무기도 필요없는 군대도 아닐텐데 어째서 보급이 필요가 없다는건지... 식량, 무기. 의복, 보충병등 군대에 필요한 보급품은 정말 많습니다. 그 어떤 군대라고는 해도 보급은 필수적이죠.
17/10/23 14:50
역사상 지방호족이 아닌 중앙관리가(직접 혹은 그 재산으로) 5천보다 더 많은 사병을 모은 기록이 몇 케이스나 더 있을지 궁금하네요. 제 생각엔 많아야 열건일거같은데..
17/10/23 16:17
5천 명을 모집한 건 경이로운 숫자입니다. 군대는 결국 돈이거든요. 식량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고 무기가 없으면 싸우지 못합니다. 실제로 조조는 연주에서 내내 보급문제에 시달렸습니다. 그 상황이 어찌나 심각했는지 정욱 같은 자가 자신의 고향을 약탈해 인육을 보급(...)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17/10/23 19:41
중국이 일신교 국가도 아니고 지금도 아닌데
자기 종교 인정해 달라고 하는건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황건적의 봉기는 그 종교 때문이 아니라 정치가 혼란하기 때문이라는건 당시에도 상식적인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받아들일 만한 조건입니다. 그리고 삼국지연의가 워낙 뻥이 심해서 그렇지 순수 사병으로 오천명이면 대단한 겁니다. 유럽 같은 경우 중세 때 용병집단이 대개 오백명 단위 정도였습니다. 일단 토지 생산성이 지금의 1/10 이하 시대에서 오천명의 부하를 먹고 재우고 훈련시키고 (가족은 제외하더라도) 전쟁을 끌고 다니려면 어느정도의 토지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17/10/23 14:33
조조는 협천자라는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손책 급사후 권위도, 기반도 모두 열악한 손권보다 훨씬 통제가 쉬운 상황이었지요.
촉은 제갈량이 직접 호구조사는 물론이고 무기/장비 상태까지 직접 점검할 정도로 워커홀릭 이었고...
17/10/23 14:35
5만도 안되는 군사로 초나라(=형주+이릉) 쑥대밭으로 만들며 미쳐 날뛰던 전국시대 오나라, 그 오나라를 털어먹은 월나라, 항우의 주력병이던 강동 자제들....강동 싸나이들 망신을 손제리가 다시켰지요. 저렇게 강했었는데, 약했습니다
17/10/23 14:41
뭐 손제리로서는 억울한 부분도 있죠. 그래도 손제리는 언더독 입장에서 발린거라 결국 기본 체급 차이 극복못하고 진거지만 기유병청 하북 4주 먹고도 조조한테 발린 원소같이 줘도 못받아먹는 놈도 있는데 이런놈은 요즘에는 재평가까지 해주는 사람도 있는 마당에 자기는 계속해서 제리라고 조롱만 당하니 좀 안습인것도 있긴 하죠.
17/10/23 14:59
군사적 재능 문제는 갈릴 여지가 있다 치더라도 행정가적 측면에서는 그냥 원탑이죠.
제갈량만큼 자진해서 야근하고 일 스스로 보고 과로해서 죽은 사람 어디 흔합니까?(?!)
17/10/23 15:40
제 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셨습니다. 크크크크. 정확하게는 유비+제갈량의 위엄이죠.
명분도 뭣도 없는 남의 땅에 들어가서 호족 대성들을 죄다 제압하고 중앙집권을 이루어낸 갓유비 갓공명님...
17/10/23 15:07
위 촉은 이미 중앙집권제/절대군주제가 된 반면에 손권 혼자 서양 중세시대 봉건제도의 왕이였군요. 근데 힘 있는 부하들이 크게 반란 안 일어난 것도 손권 능력일듯.
17/10/23 15:09
그거 하나는 인정해줄만하죠. 사실 초기 시작 기반도 위태위태하게 시작했는데 병권도 제대로 장악 못한 군주가 장수하면서 휘하 신하들을 통제한다는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문제는 말년이...
17/10/23 15:42
사실 제리는 까야 제맛이기 때문에 까긴 했습니다만, 조조와 유비가 다 해낸 걸 너는 왜 못했느냐고 갈구기에는 손권도 좀 억울한 면이 있죠. 적벽에서도 결국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는 데 성공했고, 조조의 맹공을 몇 차례나 막아냈고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걸물은 걸물입니다. 물론 촉빠인 제게는 그딴 거 없이 푸른 수염의 쥐새끼일 뿐입니다만......
17/10/23 16:11
자기 자식들보다 낫다는 건 아니고, 원소나 유표의 자식들은 개돼지에 불과하니 손권 같은 자식을 낳아야 한다고 했었죠.
그런데 그럴 만도 합니다. 원소의 자식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다 나라 말아먹은 막장 형제들이고, 유표의 자식들은 아예 별볼일 없었으니까요.
17/10/23 15:59
손책은 호족 연합체의 한계점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죠.
일단 개인의 무력과 용병술에 기반하는 카리스마와 당시 가장 강력한 호족의 대표였던 주유와는 이해관계를 넘는 친우였다는 점에서 호족들을 휘어잡을 수 있다는 배경이 있었습니다. 만약 손책이 급사하지 않고 오래 살았더라면 오나라 또한 어느정도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만약 중앙집권화가 잘 되었다면 조위와 남북을 갈라먹는 2대세력이 되었을 거라고 봅니다. 유비의 자리는 없었을 지도 모르죠. 반면 손권은 호족들과의 관계는 둘째 치고 전란의 시대에서 개인적 군사능력이 약했기 때문에 중앙집권화가 오래 걸리기도 했구요. 생각해보면 손권 이후 오나라 군사들이 장강만 넘어가면 오합지졸이 된 게 이해도 갑니다. 호족들 입장에선 자기 돈 써가며 군사를 파견해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굳이 남의 땅 침략하지 않고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이러면 열심히 싸우겠습니까. 그냥 얼레벌레 하다가 질 것 같으면 도망가서 자신의 재산(병사, 보급품 등)을 보존하는 게 훨씬 편안한 선택지였기에 이기는 전투라면 몰라도 팽팽한 전투에선 그닥 동기부여가 안 되었을 것 같습니다.
17/10/23 16:36
그래서 많은 오나라의 호족들이 조조에게 빠른 항복을 하려고 했죠.
조조야 항복 받고 다시 장강 이북 중원으로 돌아갈테고 강남의 남은 호족들은 여태까지 그랬던 것 처럼 쉽고 편하게 여생 살고 싶었을테고요. 그러나 적벽에서 조조는 (...)
17/10/23 16:49
개인적으로 손권이 정권을 이어받을 당시의 상황을 보면 옥타비아누스랑 굉장히 비슷해 보이는데...
옥타비아누스는 결과적으로 스무스하게 원로원과 같은 호족 집단에게 자기들이 권력을 가져다 바치도록 만들었고, 손권은 그러지 못 했네요. 물론 호족 연합체를 잘 굴리면서 자기가 군림한 것은 대단한 정치력이었지만요. 문제는 공고하게 군림한 후의 말년이지만...
17/10/23 20:53
오나라가 호족 연합이라 공격시에는 오합지졸이지만 반대로 수비시에는 패하면 자신들의 땅과 터전을 빼앗기기 때문에 죽자살자 싸운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공격시와 수비시가 다르다는...
17/10/23 20:39
손권이 결국 허송세월 보냈다는 것 그것밖에 안되죠. 조조의 침략을 받기까지 6~7년이라는 긴 시간이 주어졌지만
결국 호족연립체제 자체를 깨지 않았습니다. 이는 스스로의 역량부족이라 봐야죠. 그에 비해 유비는 정말 그 짧은 기간내에 지속적인 중앙집권을 통해 결국 중국대륙의 한축을 차지했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봐야죠.
17/10/23 21:12
삼국시대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시대가 지날수록 더욱 명확하게 나오는것은 정말로 그들의 사초와 자료가 제대로 해석되는 것일까요. 어떠한 문구는 우리가 이렇게 해석하기로 하자라고 미상의 영역을 단정해버리는 걸까요. 어느쪽이든 흥미롭긴 하지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