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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하녀(1960) - 이 순박한 기괴함
시작부터 영화는 창문의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과감한 카메라 워킹으로 관객을 홀린다. 오프닝씬을 보며 잠시 생각했다. ‘이게 1960년에 만들어진 영화가 맞나?’. 이 영화를 보고난 후의 소감을 비교하자면, 작년에 있었던 CGV 재개봉 행사를 통해 데이빗 핀처의 <파이트 클럽>을 뒤늦게 관람했을 때의 충격과 비슷하다. 2016년에도 여전히 유효한 1999년산(?) 데이빗 핀처의 천재성. 1999년에 개봉한 작품을 2016년에 보는데도 그 어떤 촌스러움이나 이질감 없이 <파이트 클럽>의 어마어마한 박력과 쌔끈함에 눌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른바 시대를 초월한 걸작의 아우라. 그리고 이 느낌을 김기영 감독의 1960년작 <하녀>에게서 고스란히 받았다.
영화에서 남자는 평범한 한 가정의 가장이다. 그는 방직공장의 여공들을 가르치는 음악교사다. 그에게는 단아한 아내와 다리를 다쳐 양손에 목발을 짚는 딸, 그리고 어린 아들이 있다. 훤칠한 외모와 피아노 실력으로 방직공장 여공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이 남자. 손바느질을 통해 힘들게 맞벌이를 하는 아내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그는 집안에 하녀를 들이기로 결심하고 여공 경희에게 사람을 구해줄 것을 부탁한다. 평소 그를 흠모하던 경희는 자신과 친한 또 다른 여공에게 하녀를 제안한다. 그렇게 시작된 그녀와의 기묘한 동거. 그러던 어느 비 오는 날 남자는 하녀와 우발적인 육체관계를 맺게 되고 그때부터 집안에는 죽음의 공포가 음산하게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순박함과 기괴함의 이질적 동거
영화 <하녀>의 가장 큰 개성이자 독특한 매력은 영화 전체에 은은하게 깔려있는 '순박한 기괴함'이다. 이 영화의 그로테스크함은, ‘쥐약’과 같은 상징과, 귀를 째는 듯한 독특한 사운드를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 반대로, 딸아이가 짚고 있는 목발이나 아이들의 실뜨기, 독특한 대사 등을 통해 의미심장하게 녹아있기도 하다. 그 중 이러한 영화의 독특함을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바로 공간(집의 구조)이다. 이 작품의 주 무대인 주인공의 집은 복층 구조로 되어있어 1층에는 안방과 부엌 등이 위치해있고 2층에는 남자의 작업공간(피아노방)과 작은 침대방(하녀의 방)이 베란다로 이어진 채 마주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작업방과 침대방 창가의 통유리창의 존재다. 2층의 작업방과 침대방 모두 통유리창(통유리문)으로 되어있어 출입이 자유롭고, 베란다에서 내부의 모든 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이다.
1층과 2층으로 나뉜 복층의 구조는 일종의 단절과 미지(未知)를 의미한다. 하녀가 있는 2층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고 어떤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1층에서 직접 올라가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 그래서 더 은밀하고 두려운 공간이다. 그렇기에 갑작스레 2층에서 들려오는, 난폭한 피아노 연주 소리에 주인공과 관객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2층 그 자체는 감시와 전지(全知)의 공간이기도 하다. 통유리를 통해 2층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누군가가 지켜볼 수 있다는 점에서 찝찝함이 밀도높은 긴장의 공기에 뒤섞여 먼지처럼 부유한다. 결국 이 작품에서 공간의 구조는 그 자체로 단절과 감시, 그리고 미지(未知)와 전지(全知)를 오고가며 이질적인 긴장과 스릴을 자아낸다. 그리고 이러한 이질적 요소들의 배합과 충돌이 엇박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프랑스의 한 영화잡지에서 봉준호의 영화 미학을 ‘삑사리의 예술’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김기영에게는 ‘엇박의 미학’이 있다.
뭐랄까, 이 영화의 리듬은 평범하지 않다. 보통의 스릴러와는 다르다. 예를 들어, 가족들이 라이스카레를 먹으며 화기애애하게 방문객을 맞이하던 장면은 갑작스레 하녀가 부엌에서 쥐를 잡아들어 올리는 기묘한 씬과 충돌하듯 결합되며 완충 없는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이 모습을 본 남자가 "쥐는 약으로 잡아."라고 말하자 하녀가 빈 접시에 밥을 퍼 담고 선반 속의 쥐약을 꺼내 밥 위에 가득 뿌리고 냄새를 맡으며 살짝 입맛을 다시는 장면에선 이 작품의 '순박한 똘기'가 강렬하게 드러나며 관객을 빨아들인다. 또 자신을 흠모하던 경희와 한차례 격렬한 다툼을 벌이고 내쫓은 뒤 다시 작업방에 돌아온 남자가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묘한 기운의 하녀와 마주하는 장면에서의 공기의 변화, 또는 하녀가 복수를 위해 남자의 어린 아들에게 쥐약이 든 물컵이 건네는 장면에서, 하녀가 입에 물었던 물을 뱉어내고 아이들과 몸싸움 혈투(?)를 벌이는 씬 등 갑작스런 분위기의 전환이 짧은 흐름 속에 몇차례나 난폭하게 결합되는 것이 인상적이다. 무엇하나 관객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독특함. 이러한 매력들이 <하녀>를 둘러싸고 있다.
다만 내가 느낀 <하녀>의 가장 큰 독특함은 이러한 그로테스크함보다는 특유의 ‘순박함’에 있다. 우선 이 작품은 관객을 코너로 몰아놓고 그로기 상태로 만들어 흠씬 두들겨 패는 느낌이 없다. 물론 절정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른바 관객을 옥죄고 긴장감을 배가시키기 위한 세밀하고 밀도높은 연출은 존재하지만, 파국의 임팩트를 위해 과도하게 무리하는 전형적인 연출이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감독 특유의 독특한 리듬으로 관객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김기영의 세계’ 속에 가둬버린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가운데 하나인 ‘하녀의 계단 죽음씬’도 공포스럽게 느껴지기보단 기괴하면서도 처연한 느낌이 더 강한데, 이렇듯 한방의 욕심을 버린 차분한 지점들이 인상적이다. 이른바 낯선 긴장감, 엉뚱한 유머, 기괴한 순박함 등이 한데 뒤섞여 작품의 빈 공간을 묘하게 채우며 지배한다.
억눌린 건반의 아우라
연출기법 뿐만 아니라 캐릭터도 그러하다. 이 작품의 하녀는 공포의 도구로 이용되는 단순한 악녀 캐릭터이기보다는 오히려 순애보를 지닌 애처로운 순정녀에 가깝다. 죽음의 순간까지 순애보를 지키며 죽어가는 그녀의 캐릭터는, 복수심으로 인해 특정한 계기로 돌변하여 광폭하게 폭주하는 일반적인 악녀 캐릭터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단순히 끔찍하고 무섭다기 보다는, 보면 볼수록 더해지는 애잔함과 처연함에서 느껴지는, 이른바 '악녀를 맡은 자의 슬픔'. 이러한 독특한 캐릭터의 매력이 배우의 연기와 어우러져 빛을 발한다. 다만 작품 전체에 녹아있는 이러한 순박하고 기괴한 정서에 비하면 영화의 엔딩은 좀 뜬금없다는 느낌이다. 갑작스레 흐름이 튄다고 할까?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남자가 죽은 후, 갑자기 남자 주인공이 나타나 카메라를 직시하며 관객에게 조소하듯 웃으며 말을 건네는 방식은, 좋게 보면 일부러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신선한 소격효과(疏隔效果)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보면 작품의 일관된 공기를 해치는 면이 강하다. 차라리 계단에 널부러져 죽은 하녀를 클로즈업했다가, 죽은 남자를 거쳐 카메라가 창밖으로 빠져나가는 씬 정도에서 마무리됐다면 훨씬 더 매끄럽고 훌륭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정도의 아쉬움만 제외한다면 김기영의 1960년작 <하녀>는 우리 영화사의 걸작이라 평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니, 부족함을 떠나서 작품 전체에 녹아있는, 시대를 초월한 개성과 아우라가 너무나 독특하고 강렬하다. 내가 느낀 <하녀>에 대한 인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억눌린 건반'이다. 고풍스런 옛 피아노의 억눌린 건반 속에 피어나는 묘한 진동과 울림 속 팽팽한 긴장. 그런 기묘한 아우라가 있다. 요즘 말로 치자면, <하녀>는 관객을 고급스럽게 멕이는(?) 작품이다. 씨네21의 이연호 평론가의 말처럼 2017년을 살아가는 현재도, 김기영이라는 유령은 작품을 통해 여전히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