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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은 공세 여력이 거의 없는 것치고는 꽤나 성공적으로 동쪽으로 착착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로스토프가 함락되는데, 로스토프는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군의 공격으로부터 잠시 내줬으나 곧 반격하고 되찾은 바 있어 일종의 상징적인 의미가 컸던 도시였습니다. 그런 도시가 떨어져 버렸으니 소련군의 사기가 급감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일 년 전의 바르바로사 작전 때처럼 조국을 수호하겠다는 투지와 의지는 보이지 않았고 계속되는 패전보에 대한 실망이 커져 가자, 결국 스탈린은 칼을 빼들었습니다. 도망치는 병사는 형벌 부대로 보내어
죽거나 부상을 입어야만 "피로써 보상했다"는 문구와 함께 복권시킨 것입니다.
사실 저번 글이 좀 심하게 짧은 감이 있었죠. 심적인 여유가 없던 탓이었는지(친인척 상을 당했습니다)... 금요일 하루 휴가를 냈더니 이렇게 여유가 넘치는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하여간에 지금까지의 작전 지도를 잘 보면, 또 한 가지 의문점이 들 만한 구석이 생깁니다. 이게 말입니다, 독일군이 돈 강 서부를 거의 석권했다고 제가 이전 글에서 밝힌 바 있었죠. 이 돈 강 서부의 그 튀어나온 굴곡진 곳에서 스탈린그라드에 이르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고작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보로네즈에서 온 거리의 1/4도 되지 않는 130여 km입니다. B집단군이 시가전을 벌이기 시작한 시기를 보통 9월 정도로 보니 130 km 진군해서 항복할 때까지 몇 달 동안 죽어라 싸웠다 치죠. 근데 그러면 도대체 A집단군은 뭘 했냐 이겁니다. 7월 말(로스토프 함락)부터 12월이 다 되어 가는 동안 말이죠. 그 기간을 놀면서 보냈을 리는 당연히 없고...
여기에 대한 설명을, 그냥 캅카스의 옐브루스(Elbrus, 캅카스 산맥의 최고봉) 등정하는 데 썼다, 그냥 이 정도로 끝내버리고 마는 경우가 입문서들 중에는 굉장히 많습니다. 근데 그렇게 놓기에는 A집단군의 기갑군이, 아 물론 소련 기갑군에 비하면 한줌 될까말까한 전력이라고는 합니다만, 굉장히 소중한 전력이었다는 거죠. 그래서 그걸 오늘 추적해 보고자 합니다. 저래뵈도 소련측 자료에 의하면 독일군이 캅카스로 공세를 시작한 초기에 소련군 11만 2천, 독일군 17만에, 전투 기간 동안 총 병력 손실도 소련군 34만에 독일군 26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치였습니다. 절대로 듣보잡 전선에서 듣보잡들끼리 듣보잡 총질하며 싸웠다는 소리로 퉁칠 만한 게 아니라는 거죠.
로스토프가 날아가자마자 독일군은 곧바로 캅카스로의 공세를 취했습니다. 일차적인 목표는 마이코프(Maikop)의 유전이었죠. 로스토프나도누에서 마이코프까지 거리가 300 km가 넘는다는 게 함정이지만... 하여간 독일군은 로스토프를 접수하자마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곧바로 돈 강을 도하하여 남쪽으로의 진군을 개시했습니다. 이를 막아야 할 남부 전선군의 위력은 많이 약화되어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앞선 글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일단 강을 건너고 난 이후 독일군은 즉시 그 특유의 기갑 부대를 이용한 휘젓기를 개시했습니다. 7월 28일자로 남부 전선군은 해체되어 북캅카스 전선군의 지휘를 받았고, 이 때 이들을 지휘했던 양반이 그 유명한... 적백내전기에는 영웅이었지만 독소전에서는 뒷방 늙은이 신세였던, 말 엉덩이만 아는 양반, 바로 세묜 부됸늬. 하긴 뭐, 솔직히 이렇게 사기가 저하되고 갉아먹힐 대로 갉아먹힌 병력으로는 부됸늬가 아니라 말리노프스키가 와도 답이 있었을까 싶기는 합니다만. 아무튼, 지도에서 소련군 37군이 포위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 보이시는지요. 밑의 제47군 아래에 쓰여 있는 것은 "타만 반도에 주둔 중" 정도인데요, 이 타만 반도는 크림 반도 바로 맞은편에 있는 반도입니다. 세바스토폴이 날아간 건 지난번에 이야기한 바 있고, 독일군이 동쪽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해안경비대 역할을 하고 있었던 셈이죠. 저 케르치 해협이 간격이 굉장히 좁습니다. 기껏해야 15 km 정도고 짧으면 5 km였나, 하여간 절대 먼 거리가 아니었으니 거기에 군을 주둔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교두보가 갖는 의미는 굉장히 크죠.
하여간 북캅카스 전선군이 해안(서쪽, 제17기병군단 및 제18군)과 돈 강(제12군 및 제37군)으로 작전구획을 나누어서 독일군에게 저항하고 있던 동안 일부 제37군의 부대가 포위 일보 직전에 처했고, 독일군 제17군과 제1기갑군은 각각 마이코프 인근의 가장 큰 도시인 크라스노다르(Krasnodar)와 역시 캅카스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스타브로폴(Stavropol)로 상당히 빠른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야 웬 듣보잡이야 하시겠습니다만 저 크라스노다르, 지금도 블라디보스토크/야로슬라블/이르쿠츠크/하바로프스크보다 더 큽니다. 가히 로스토프에 이은 캅카스 제2의 도시라 할 만했던 거죠. 스타브로폴은 그 당시에는 밀렸습니다만 지금은 A-A 라인으로 유명한 아르한겔스크나 스몰렌스크보다 더 많은 인구를 보유한 도시가 되었으니 여기도 캅카스의 중요 거점 중 하나라 할 수 있었죠. 무엇보다도 이 두 도시 사이에 바로 마이코프가 있습니다.
그래도 역시 제1기갑군의 진격이 제17군의 진격보다는 빨랐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목표물의 크기에도 차이가 있다 보니 제1기갑군이 스타브로폴을 접수하고 도시 외곽에서 소련군과 전투를 벌일 때 제17군은 크라스노다르 외곽에 깔아둔 소련군의 방어 병력과 맞닥뜨려야 했죠. 1 OCK라고 되어 있는 것은 1 Otedl'nyi Strelkovyi Korpus. 직역하면 제1독립소총병군단인데, 일종의 독립부대 내지는 분견군이었던 모양입니다. 하여간 공세여력이 고갈되어 가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독일군은 빠르게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제1기갑군은 크라스노다르 주에 흐르는 쿠반 강(Kuban) 너머로 소련군을 몰아넣고 바로 도하 및 돌파를 시도합니다. 이번에야말로 말할 것도 없이 마이코프가 목표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마이코프로 가는 최종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아르마비르(Armavir)를 접수해야 할 필요가 있었죠. 지도상의 큰 화살표 바로 밑의 도시가 아르마비르였고, 공격은 꽤나 순조롭게 진행되었던 듯합니다.
아르마비르까지 손에 넣고 마이코프의 유전이 사정거리 내에 들자 독일군은 8월 9일에 브란덴부르크 특수부대(Brandenburger)를 동원하여 후방인 마이코프 유전지대에서 교란 작전을 벌였습니다. 간 크게도 이들은 내무 인민 위원회(NKVD)의 요원으로 분장해서 소련군을 교란시켰는데, 말하자면 KGB 화이트 요원으로 분장한 격이었죠. 하여간 이 덕분에 마이코프 유전이 독일군의 손에 그런대로 수월하게 떨어지기는 합니다만... 이미 소련군은 캅카스로 가는 관문인 로스토프가 독일군의 손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충분히 마이코프 유전을 최대한 박살낸 이후였고, 약 일 년 가량은 마이코프의 유전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목표를 놓쳤다는 점에서 이미 절반 이상은 실패로 돌아간 격이 되었죠.
하여간 돌출부를 버티는 것은 소련군으로서는 어려운 일이었고, 때문에 소련군은 크라스노다르도 내주고 퇴각합니다. 참, 저기 17 KK는 제17기병군단인데, 그 유명한 코사크 기병들이었습니다. 이들도 곧 "근위"라는 칭호를 받게 되죠. 8월 26일인데, 이후로는 제4근위기병군단이 됩니다.
이렇게 약 20일 남짓한 기간 동안 북부 캅카스가 독일군의 손에 떨어졌고, 이렇게 되자 가장 위험해진 것은 바로 크림 반도에서 넘어올 독일군을 막기 위해 반대편 반도에서 주둔 중이었던 소련군 제47군이었습니다. 소련군이 마이코프까지 내주고 잔뜩 뒤로 몰리자 자칫하면 제47군 전체가 포위 섬멸될 위기에 처했던 것입니다. 아니나다를까 그 우려는 곧바로 현실이 되었죠.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지도에는 8월 1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실제로 원 출처에서는 8월이라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제 지도도 대략 8월 12일을 전후한 전황 지도이죠. 근데, 동쪽 하단에 보면 웬 녹색 단어가 산 표기와 함께 쓰여 있습니다. 그 산이 바로 옐브루스(Elbrus)죠. 나치 독일이 산을 등정했네 어쨌네 하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물론, 가뜩이나 병력이 달려서 고달파하는 히틀러에게 있어서 이런 등정 소식은 그저 "쌩쑈"에 불과했고, 실제로 히틀러는 아주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그리고는 지휘관을 군사재판에 회부해 버리겠다며 대단히 화를 냈죠. 하여간 이들은 제1산악보병사단과 제4산악보병사단을 위시한 독일군 제49산악보병군단이었습니다.
같은 시기, 약간 동쪽으로 시점을 이동한 지도입니다. 독일군을 상대하는 소련군은 모두 제46군의 일부였습니다.
다시 크림 반도 쪽으로 돌아와서, 크라스노다르 일대를 석권하자마자 루마니아 기병군단 및 독일군 제17군 예하 제5군단 및 제57기갑군단이 소련군 제47군의 후방을 그야말로 강타했습니다. 도하를 저지하고 시간을 끌 최소한의 병력을 남기고 제47군은 최대한 빠르게 퇴각해야 했죠. 아예 섬멸되어서 남쪽의 방어선에 구멍이 뚫리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지도를 보시면 제47군과 제56군이 독일군의 진격에 맞서는 방어선을 대강 구축하는 가운데, 서쪽에서 웬 배 하나가 빠지고 있는 화살표를 보실 수 있습니다. 9월 5일자로 함대를 통해 병력을 후방의 겔렌지크(Gelendzhik)로 철수하는 것이죠. 그리고 캅카스의 주요 거점이자 항구 도시 중 하나인 노보로시스크(Novorossiysk)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필 지도를 구한 원 사이트에서 해당 날짜 지도가 엑박으로 나오는지라 원본 지도로 대신합니다. 파란 이중 선이 9월 1일의 독일군이고, 파란 단일 선 옆에 점이 찍혀 있는 선이 9월 26일의 독일군입니다. 어쨌든 독일군으로서는 아주 큰 힘까지 들이지는 않고 흑해의 주요 항구인 노보로시스크까지 접수하면서, 대략적으로 북쪽의 캅카스는 석권한 셈입니다.
예 물론, 지도만 놓고 보면 독일군이 나름대로 꽤 많은 영토를 손에 넣었고, 소련군도 피해가 커서 남부 전선군과 북캅카스 전선군이 각각 8월과 9월에 해체되어 자캅카스(러시아 어 Zakavkas를 그대로 읽은 것, 영문 번역은 Transcaucasian) 전선군에 편입되는 등 많은 피를 보았습니다. 그런대로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의 진격을 방불케하는 쾌속진격이라 할 만하긴 했죠. 그러나...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이코프의 유전이었는데 그 마이코프의 유전이 문자 그대로 '개박살'이 나 버리면서, 독일군은 영토'만' 얻었으되 실익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과 다름없게 되어버렸다는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독일군은 동쪽인 그로즈니 유전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네. 아직 캅카스에서의 양군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