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면도
아침마다 해야하는 면도는 매우 귀찮은 행위이다. 어느날 아침 면도를 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자들은 수염이 안나서 면도도 안하는데, 나는 남자라서 면도를 해야하네? 왜 나는 면도를 해야하지? ‘남자’라서? ‘남자’라서 내게 면도할 것을 강요하는 이 사회는 젠더감수성이 부족하고 남혐이 만연한 사회가 아닌가!”


2. 머리카락
시내에서 길을 가다가 단발머리 여성과, 그보다 더 짧은 머리 여성을 보았다. 남자들처럼 짧은 머리를 한 여성들은 여럿 보았지만, 여자들처럼 긴 머리를 한 남성은 한명도 보지 못했다. 문득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왜 남성에게는 짧은 머리가 강요되는거지!? 남성이 긴 생머리를 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구!! 이게 다 남성에게 짧은 머리만을 강요하는 이 남성혐오적인 사회때문이렷다!”


3. 남성 배우
신나게 팝콘을 뜯으며 영화를 보던 와중이다. 또다시 내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왜 미디어에 등장하는 남성 배우들은 다 키 크고 잘생긴거야?  나처럼 키작고 못생긴 남성은 왜 안 나오지? 주 수요자들이 여성이라고 지금 여성의 니즈를 맞춰주는거야 뭐야? 아 불편해! 키큰 미남은 여성의 성적 판타지를 투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4. 광고
속옷 광고가 나온다. 뚫어져라 쳐다보던 내 마음은 다시 ‘불편’하다. 아니 사실 이미 훨씬 전부터 ‘불편’한 상태였고,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을만한 적당한 근거를 찾던 와중이었다.
“속옷 광고에 나온 저 배우는 어찌하여 저토록 근육질이지? 왜 남성 모델을 저렇게 다 벗겨 놓고 근육질을 드러내며 광고하는 거냐고? 이거 완전 남성 성상품화 아냐? 아 불편하다 불편해!”
이게 다 여성이 강요하는 남성의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갑자기 더욱 더 불편해졌다. 그래서 다이어트를 위해 1주일 동안 꾸준히 방문했던 헬스장을 다시는 가지 않을 핑계거리로 써먹었다.


5. 데이트비용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나갔다. 머릿속으로 ‘심심한데 오늘도 한번 불편해져 볼까나.“ 생각을 하고 불편모드로 뇌 설정을 바꾸어보았다.
”왜 내가 데이트 비용을 더 부담하는거지? 비록 내가 직장인이고 여자친구는 학생이긴 하지만, 에라 그건 모르겠다. 이건 순전히 내가 ’남자‘라서 더 부담하는거 아냐? 그러고 보니까 소개팅때도 내가 더 많이 냈어. 생각해보면 나뿐 아니라 거의 모든 남성들이 데이트 비용을 더 부담하고 있군. 데이트 비용에서 남성에게 과도한 금전적 부담을 씌우는 이 문화는 우리 사회의 남성혐오가 뿌리깊다는 증거가 아닌가!“
이대로 가다간 불편한 마음에 데이트가 망할 것 같아서 황급히 뇌설정을 불편모드에서 노멀모드로 재빨리 바꾸었다.


6. 자동차
인터넷 글을 읽다가 흥미로운 글을 보았다. 여성의 80%이상이 남자가 국산 경차를 타고 나오면 ”솔직히 민망하고 차에 타고 싶지 않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 글을 보며 비록 내 차가 경차는 아니지만, 빨리 타고다니는 소형차(엑센트) 갈아치우고 준중형이나 중형으로 체급 올려야지라는 생각을 하던 와중 마음이 또 ’불편‘해졌다.
”남자가 경차타고 다니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 그게 왜 민망한데? 여자는 경차타도 안 민망한데, 남자는 경차타면 민망하다고 하면 이거 완전 성차별적인거 아니냐고!“


7. 눈물
집 거실에서 화장실을 가다가 새끼발가락을 식탁 모서리에 부딪혔다.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극악한 고통이 발가락에서 뇌신경까지 전달되자 나는 비명을 지르며 이곳이 지옥에 다름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어렸을 때 들었던 ’남자는 세 번 운다. 태어날 때.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나라가 망했을 때‘를 생각하며 눈물을 꾹 참았... 을 줄 알았겠지? 사실 마음이 빛의 속도로 불편해졌다.

’왜 남자는 울면 안된다는 거지? 남자들은 감성이 죽어있다는 거야 뭐야. 남자는 마음대로 울 권리도 없어? 이것도 만연한 남혐의 증거임이 분명하다!‘




P.S 유머게시판에 원더우먼 겨털 논쟁을 보고 반 농담으로 써본 글입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불편하진 않습니다 크크)

P.S 2 학창시절이든, 사회생활이든 살다보면 '남자놈이 그런것도 못해?' '남자녀석이 왜 그리 쪼잔해?' '이런건 남자들이 해' 와 같은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여성혐오적인 말이 여성에게 상처가 될 수 있듯이, 사람들이 남성혐오적인 말 또한 남성들에겐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