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에 나오는 지역의 지도. 바이 더 씨 부분까지가 모두 지명입니다.
저는 미네소타 미네통카가 나오기전까지 영국 영화인줄 알았습니다 ㅠ
* 이 감상문은 의식의 흐름대로 쓰여져 다소 반말이 섞여 있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영국 축구 영화는 아니기를.
전혀 기대도 사전 지식도 없이 들어간 영화의 도입부는 사실 지루함 반 답답함 반이었다. 30초마다 쏟아져 나오는 욕설에 나는 영화가 청소년 관람불가는 아니었는지 골똘히 떠올려 보았다.
주인공 리는 정상적 정신 상태를 가진 인물은 아니다. 그는 아파트 반지하 단칸방에 세들어 살면서 배관을 고치고 전구를 갈고 막힌 변기를 뚫어주는 잡부다. 사회적으로 성적 매력은 있다. 여자들은 종종 그에게 추파를 던지고, 그는 유혹을 건네 받아 낡은 가구처럼 조각 내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타인의 욕망에 무감각한 것은 아니다. 하염없이 손을 씻고 나와 팁을 받기까지의 장면은 그보다는 모르는 척 하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사실 펍에서 건너편 남자들을 쳐다볼 때는 게이인 줄 알았다. 리는 낙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스포츠 채널을 보거나 펍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는 것도 그의 낙은 아니다. 동네 건달 감도 못 되는 소심한 알코올중독자거나 조울증 환자인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냥 소시민, 소시민이란 단어도 안 어울리는 항구의 무지렁이. 일단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것은 확실했다. 아니 이런 사람이 주인공이면 이야기는 어쩌자는 거지?
그가 운전하는 첫 시퀀스에선 정말로 멀미가 날 것 같았다. 도로 신호는 건널 만하면 빨간 불이고 좁다란 도로에 차는 줄줄이 늘어서 있다. 시선도 마음도 저 앞에 있는데 차는 느리고, 브레이크를 밟고 엑셀을 밟을 때마다 흔들리고, 흔들리고, 흔들린다. 아름답기는커녕 어지러운 장면들이 이어진다. 흘러나오는 노래도 어딘가 어색하다. 이 영화에서 배경음악은 계속 어색하다. 결국 상황에 맞게 되는 것 같지만 일단은 그렇지 않다. 사거리의 신호등이 그러하듯, 놓쳐도 결국 순서에 맞는 때가 오긴 하지만 어쨌거나 몇 템포 늦거나 빠르거나 내 맘 같지 않다.
영화는 설명도 별로 하지 않는다. 결국 모두 설명해주긴 하는데 이것도 순서가 내 맘 같지 않다. 누가 죽긴 죽었다는데 대화가 한참 지나서야 그게 누구인지 알려준다. 선후가 뒤죽박죽이다. 아니 누가 죽었는지 궁금해 죽겠는데 주치의가 출산 휴가 갔다는 사실이 그렇게나 중요한가 싶다. (크게 통곡하는 사람도 없다.) 굳이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을 일으키려 하지 않고 모두 설명해 준다는 점에서 영화는 친절하지만, 내가 알고 싶을 때 알려주지는 않는다.
리는 타인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리보다 더 슬퍼하는 형의 친구, 친절하게 장례식 절차를 안내해주는 의사, 망자의 소지품을 찾는 간호사, 체육관으로 가보라는 선생, 인내심 강한 하키 코치, 모두 조연의 희미한 목소리가 아닌 제 몫의 또렷한 목소리를 읽어준다. 그래서 같은 세상에서 리는 더 초라해 보인다. 저 사람 여기 두 번 다시 못 오게 해요, 라는 말의 이유를 알 것 같다. 도대체 아는지 모르는지 마음도 생각도 꾹꾹 눌러 담아 작은 몸을 움츠리고 있다가 울컥 화만 내는 리는 분명 친해지고 싶은 사람은 아닌 것이다.
이건 불협화음이 아니다. 이미 어긋나서 듣기 싫고 괴로운 음악이 아니라 그냥 어딘가 어색한 음악이다. 박자가 살짝 빠르거나 느려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리드기타가 좀 부족할지도 모르는, 썩 잘 부르지도 않고 못 부르지도 않고 다 똑같아 보이는데 부족한 그런 음악이다. 제 기능을 하긴 하는데 수도관에 녹이 슬었는지 마개가 잘 맞지 않아 밤새 뚝뚝 들리는 물소리 같다. 그러나 마개를 갈면 고쳐질지, 세면대를 통째로 갈아야 할지, 타일을 뜯어내야 할지, 그렇게라도 하면 고쳐질 수 있는 건지 아무도 알지는 못한다. 그래서 영화는 줄곧 답답하고, 우울하고, 지루하다. 내가 이 영화를 왜 보고 있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재미 없다는 게 아니고, 그래서 뭐 어쩌겠다는 거야 하는, 리의 그 기분.
고작 한 시간 반 거리일 뿐이었는데 방 한 켠에 비켜놓았던 죽은 이들의 유산은 녹록하지 않은 것들뿐이다. 그래도 리는 어른이니까 그가 해야 할 일들을 차근차근 해 나간다. 조카 패트릭은 또래다운 욕망으로 가득 차 천진하고 리를 닮아 한량 기질이 다분하지만, 어리석은 소년은 아니다. 다소 마찰이 있을 수도 있고 쉽지 않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옛날부터 두 남자는 좋은 친구 사이였지 않은가. 그렇지만 리에게는, 한 번 더 기회를 받을 자격이 없다.
(이하 스포일러)
영화 중반부를 지나 리를 이해하게 되면 지루함은 애처로움으로 바뀐다. (그래도 여전히 답답하다.) 그는 동네 한량들과 새벽까지 술을 퍼 마시고 소란을 피우는 주정뱅이였지만, 싫어도 키스를 받아주긴 하는 아내와 달려와 인사를 건네지는 않아도 안아들 수는 있는 딸들을 가지고 있었다. 썩 훌륭하진 않아도 그의 인생에 어울리는 딱 그 정도의 평범함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다 빙판길에 한 번씩 넘어졌을 뿐인데, 그 결과가 너무나도 끔찍했을 뿐이고.
이후 영화는 관객에게 리를 설명해주기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가 리를 이해하는 만큼 리는 다시 기억을 공유한 사람들을 맞닥뜨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낸다. 괴롭고 미안한 이해 가능한 그 마음들이 불쑥 불쑥 내밀어져 오고,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전화를 끊는다.
순서를 건너뛰어 결말로 가자. 이 영화가 좋았던 부분이다. 리는 결국 치유되지 못한다. 총이 죽음 대신 보트에 새 생명을 주고, 마치 조카와 함께 다시 한 번 그 바다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순간 뿐이었다. 그의 헤어진 부인의 임신처럼, 정신병원을 나와 새 가정을 차린 형수처럼, 리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할 것 같은 행복을 위해 노력해 보지만 되지 않는다. 세상 모든 일이 극복 가능하다면 그건 기만이다. 결국 옛 상처에 매여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녀들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그의 곁에는 어린 딸들이 불타고 있다. 버티고 버텨보지만 어느 순간 두들겨 맞고 만다. 상처는 아물어 딱지가 앉겠지만 피부 밑에는 여전히 고통이 흐르고 있다. 냉장고 속의 고기처럼 일상의 어느 한 순간 문득 무너져 내리는 수밖에.
그는 바닷가 마을에 살 수 없다. 많은 영화들이 그렇듯 새로운 가족의 완성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삶이 흘러간다. 거창한 기승전결도 해피엔딩도 없이 각각의 삶이 흘러간다. 상처받고 아물고 같은 자리를 또 뜯기고, 다른 자리를 새로 뜯기고. 사람마다 인형집이 부서진 것과 발가락 다친 것 중에 중요한 것이 다르듯 각각의 삶은 각각 다른 주인공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대화를 하고 싶지가 않다. 내뱉는 것은 거친 언사나 침묵이기 일쑤, 잘 들리지 않는 전화처럼 중요한 순간을 말하고 이해 받기가 쉽지 않다. 죽지 못해 사는 삶이 이어져 간다. 정말이지 하루 하루를 견디어내는 삶만이 이어진다. 그럴 거면 매일 아침 눈은 왜 퍼내는 걸까?
이유는 없다. 어쩌면 정말로 죽지 못해 사는 삶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꾸역꾸역 삶이 이어져 간다. 밤이 오고 해가 뜬다. 배가 부른 여인과, 갓 태어난 아기와, 주체 못하는 청춘과, 새로운 사랑이 리의 주변에서 바닷가 마을을 채우고 있다. 갑작스레 사라진 노인의 아버지처럼 인생은 흘러간다. 예측이란 없는 제멋대로인 삶 속에서 리는 다시 수도관을 조이고, 닦아내고, 틈틈이 행복했던 바다의 기억을 떠올린다. 바다는 여전히 그 곳에 있다. 결코 지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 흘러 땅이 녹는다. 새로운 7월이 다가온다. 결국 형은 냉동고를 벗어나 가족의 묘비에 이름을 새기고, 도망치듯 리는 다시 마을을 떠나겠지만 돌아올지 않을지 모를 그의 여름을 향해 삶은 흘러간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작은 고무공처럼 시간이 흐른다.
영화 감상기는 잘 안 남기는데 저는 각본이 너무 좋았습니다.
추천하라면 글쎄요... 아무런 기대 없이 혼자 보러 가세요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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