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경은 씩씩거리면서 어딘가를 향한다. 아빠의 내연녀 집 주소를 알고 찾아가서 한 따까리 풀어낼 셈이다. 집에 가서 문을 두들겨보니 어린 아이들밖에 없다. 성질을 낼 사람은 없고 남매는 자경 앞에서 싸우다 다친다. 피가 나는 기림의 이마에 밴드를 붙여주면서 자경은 답답해진다. 어른 없는 집에는 자신의 분노를 받아낼 사람이 없다.
자경은 어른과 아이 사이에 걸쳐있다. 그는 "딸"이자 아이로서 아비를 빼앗은 여자에게 항의를 하러 갔다. 그의 분노는 어른스럽지 않다. 빼앗기고 부숴진 것에 대해 막무가내로 발산하는 일차원적 분노다. 그러나 집에 도착해서는 "어른"으로 취급받는다. 거기에는 자기보다 한참 어린 나루와 기림만이 있고 아이들은 자경에게 "엄마 친구에요?" 라고 묻는다. 그는 꼬맹이들보다 한참 어른이다. 자신의 분노가 가장 우선이고 아이들의 의문은 쓸데없는 것 취급할 뿐이다. 자경은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보지만 그게 무의미하다는 걸 안다.
자경과 아이들은 다르지 않다. 자경은 아버지에게 선물했던 라이터를 들고서는 딸이었던, 자신의 아버지였던 부녀관계를 곱씹으며 화를 낸다. 그는 그 과거가 그립고 그래서 화가 났다. 어머니와 자신은 내팽개치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아버지가 밉다. 그러나 그건 이 집에서 방치된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자경의 아버지는 간만에 찾아와서는 나루와 기림에게 건성으로 안부를 묻는다. 기림은 상처가 났다고 이야기하지만 아버지는 별 대꾸 없이 이마를 쓰다듬는다. 나루에게는 돈 몇만원을 쥐어주려 하지만 나루는 받지 않는다. 아이들은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가 떠나자 나루는 가지고 놀던 로보트를 집어 던지고 화를 낸다. 나루의 분노는 자경의 분노와 똑같다. 결국 자경은 아이들을 이해하며 자기자신도 이해하고 만다. 아이들의 분노는 사랑받지 못함이다. 그것은 사랑해줘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화를 내러 왔지만 자경은 아이들을 보살피고 간다. 싸우는 남매를 달래고, 기림의 상처에 밴드를 붙여준다. 아버지가 왔다 간 뒤에는 라면도 끓여준다. 아이로서 찾아온 곳에 어른이 없다. 그래서 아이는 더 어린 아이들에게 어른 노릇을 해야한다. 일기장의 보호자 확인란에 사인을 하면서 자경은 한숨을 쉰다. 자기가 떠나면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계속 외롭게 화를 삼키며 유년시절을 보낼까.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아이들에 대한 연민으로 번진다. 자경은 아이들에게 충고한다. 아무에게나 문 열어주지마, 모르는 사람은 더더욱. 모르는 사람은 이상한 충고를 남기고 집을 떠난다.
자경은 화가 났었다. 자경에게는 흉터가 있다. 그런데 그건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자경은 걸음을 옮기다가 신발 속에 들어있는 로보트 조각을 꺼낸다. 나루가 아빠에게 화를 내면서 부쉈던 장난감 조각이다. 영화는 자경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거기에는 차마 해소하지 못한 분노와 괜히 더 얹고만 연민이 있다. 화는 꺼졌지만 그 무엇과도 화해하지 못했다. 격렬하게 떨리던 감정이 더 슬퍼지고 무거워져서 더 아래로 가라앉았을 뿐이다. 결국 화를 내지 못한 자경은? 나루와 기림은? 변명조차도 얻지 못한채 자경은 터덜터덜 걸어간다. 어른이 없던 세계에서 어른 노릇만 하고 가야하는 아이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콩나물>
어른들은 제삿상 준비에 한창이다. 한창 이 음식 저 음식을 하던 중 콩나물을 빠트렸다는 걸 깨닫고 어른들은 소란스러워진다. 이를 엿듣던 보리는 심부름을 자처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보리는 가방을 챙겨메고 룰루랄라 집을 나선다. 여봐란듯이 콩나물을 사오면 어른들도 자기를 좀 인정해주겠지.
영화의 시야는 보리에 맞춰져있다.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은 거대하고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보리는 씩씩하게 집을 나서지만 콩나물을 사오는 미션은 의외로 어려워진다. 집근처의 슈퍼에서는 콩나물을 팔지 않는다. 보리는 한번도 시장에 가본 적이 없다. 아직 모르는 곳을 아이 혼자서 찾아나가는 길은 만만치 않다. rpg 모험극 같은 느낌도 준다. 콩나물을 파는 트럭을 놓쳤을 때는 아깝기 그지없다.
보리의 세계는 자상한 어른들로만 채워져있지 않다. 영화가 유치한 동화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생채기 나는 현실을 짚고 있기 때문이다. 보리는 중간에 놀이터에 들렀다가 콩나물을 까맣게 잊고 아이들과 어울려 논다. 갈등은 의외로 아이들의 세계에서 일어난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보리를 향해 더 큰 아이가 시비를 걸고 보리는 엉엉 운다. 보리 입장에서는 꽤 억울하고 잔인한 사건이었을 수 있다. 어른들은 보리가 잘 모르는 세계의 악의를 걱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리가 다치는 곳은 아이들, 보리의 세계다. 아이라고 늘 즐겁거나 속편하지만은 않다. 가장 익숙하고 안전한 세계에서 아이들은 깨지고 운다. 눈높이를 낮추면 아이들 나름의 치열한 세계가 있다. 영화는 아이들의 세계와 어른들의 세계를 이분하고 어른들의 세계를 걱정하는 만큼 아이들의 세계를 한가롭게만 보지 않는다. 그것은 어른의 오만일수도 있다.
보리의 모험은 만남으로 채워져있다. 보리는 어른들을 만나고 길을 묻는다. 할머니를 만나 같이 고추를 널기도 하고(손이 맵진 않았을까?) 낯선 할아버지의 집에 들어가기도 한다. 어른들이 주는 약주를 받아먹고 술기운이 올라 미친 듯이 노래하고 춤추며 재롱을 떨기도 한다. 보리의 세계는 나이먹은 이들이 흥과 평화를 찾으려는 곳이다. 그런 것들이 콩나물을 사러 가는 보리의 여정에 이런 저런 살을 붙인다. 어른이 콩나물을 사러 가는 길은 그저 목적만이 있다. 꼬마가 콩나물을 사러 가는 길에는 여러 초대장과 장애물이 넘실거린다. 아이의 눈에서 본 세상은 모르는 이의 걱정과 응원이 가득한 곳이다. 별 볼 일 없는 일상들이 보리의 눈을 통해 신기방기한 세계의 조각이 된다.
김수안 배우의 연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아역들의 연기는 가끔 홈비디오 컨테스트에 담긴 일상을 그대로 엿보는 느낌마저 준다.
<우리들>
처음 볼 때보다는 덜 힘들었다. 그러나 더 힘든 것도 있었다. 선이와 지아의 만남이 오히려 이 후에 겪게 될 이들의 갈등의 시발점으로만 보여서 즐거워야 할 장면에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히려 둘이 갈라지는 지점부터 드디어 올 게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마음을 놓고 볼 수 있었다. 위플래쉬를 2차로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윤가은 감독의 전작들이 <우리들>로 이어지는 조각들을 확인하면서 볼 수 있었다는 게 나름의 수확이었다. 어른들의 싸움에 아이들은 등 터진 새우가 되어 화를 담고 산다. <손님>의 나루와 기림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들>의 지아는 부모님의 이혼에 상처를 입었고 그것 때문에 왕따를 당한다. 아이들의 세계는 아이들 나름의 냉혹함이 존재한다. <콩나물>의 보리는 쭈쭈바를 가지고 시비거는 다른 아이 때문에 난데없이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는데 이는 <우리들>의 선이 겪는 소요와 비슷하다. <우리들>은 관찰자 시점의 전작들에서 나아가 아이들이 직접 겪는세계를 이야기한다.
굉장히 고통스러운 이야기다. 영화는 "선"이라는 아이의 마음이 계속 베이고 짓무르는 과정을 담는다. 관객은 프레임 바깥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지만 선의 입장에서 계속 그 고통을 체험할 수 밖에 없다. 이해는 오히려 무력함을 낳는다. 그리고 후회와 서러움을 이끈다. 나는 왜 이해받지 못했던가, 나는 왜 이해하지 못했던가. <우리들>은 모든 이의 과거와 겹친다. 영화는 철이 없다는 변명으로는 잊혀지지 않을 만큼의 잔인했던 순간들을 퍼올린다. 누구나 다 선, 지아, 보라의 입장 중 하나가 되어 슬퍼하고 제대로 슬퍼하지 못했다.
영화 속에는 화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세계가 존재한다. 선의 담임선생님은 누가 잘했고 못했는지만 가르려고 한다. 선의 엄마도 동생을 때린 동생 친구를 때린 선을 칭찬한다. 어른들은 다치지 않게, 다친 만큼 남도 다치게 하는 것을 가르친다. 선의 아빠는 자신의 아버지, 선의 할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했다. 그래서 늘 술만 먹는다. 그러면서도 아비 된 자의 병환에는 어쩔 줄 모르고 병원 바깥에서 서성이기만 한다. 선의 엄마는 그런 아빠를 구박하지만 아빠는 결국 술잔으로 빠진다. 그렇게 화해하지 못하고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난다. 카메라는 바다를 비춘다. 굽이굽이 연결되던 골목길들의 세상은 그 어떤 길도 닿지 못하는 세상에서 끊어진다. 화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그렇게 쓸쓸한 이별을 고한다.
<우리들>은 어른들의 세계를 아이들의 세계와 대조하지만 이를 반면교사의 거울로 활용하지 않는다. 선은 아빠를 보고 깨닫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의 해답을 주는 것은 선의 동생 윤이다. 선은 윤에게 한 대 맞았으면 너도 한 대 때려라, 너가 맞기만 하니까 그 애랑은 그만 놀아라 라고 꾸짖는다. 선은 마음이 다쳤다. 그는 다치지 않기 위한 관계를 쫓으려 했다. 다치지 않고, 내가 다친 만큼 상대방도 다쳐야 한다고 배웠다. 윤은 선에게 계속 싸우면 언제 노냐고 묻는다. 선은 할 말을 잃는다. <우리들>은 가장 단순한 이를 통해 답을 보여준다. 그 모든 세계는 이어져있다. 그 세계에서는 상대적 어른과 상대적 아이가 있다. 더 어른인 아이는 점점 어른의 논리를 배워간다. 영화는 아이를 고정된 순수의 존재로, 어른을 고정된 타락의 존재로 세워놓고 대조하지 않는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가고, 그러면서 화해와 용서를 잊어간다. <우리들>의 아이들은 마냥 선한 존재가 아니라 때가 묻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는 존재다. 아이는 자기보다 더 아이를 통해 배운다. 잃어버린 것들을 아직 잃지 않은 사람에게서 되찾는다. 영화는 순수의 원점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우리 모두는 윤처럼 마냥 좋았고 나쁜 것은 까먹으면서 그저 함께 즐겁고자 했을 것이다.
영화가 내세우는 화해의 지점은 "다를 것 없는 우리"이다. 선이 지아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용서의 제스쳐가 아니다. 선은 지아가 아프게 한 만큼 지아를 아프게 했다. 그렇게 서로가 이미 끝자락에 떨어졌을 때 선은 다시 지아에게 손을 내민다. 너도 나도 다 아프게 했고 이제는 다시 놀아야 할 때라는 것처럼. 선은 지아가 얼마나 아플지, 지아가 자기 편을 들어줄 친구가 얼마나 필요할지 알고 있으니까. 사실 보라도 형태만 다를 뿐 뒤쳐지고 친구를 잃는 두려움은 같다. 뭉치는 과정에서 밀어내는 것을 먼저 배운 이들이 있을 뿐이다. 영화는 결국 나를 구하고 싶은 마음으로 끝맺는다. 지아를 향한 선의 시선은 타인에 대한 관용이 아니다. 선은 지아에게서 자기 자신을 본다.
왜 우리"들"일까. 너와 내가 만나면 우리가 되는데. 영화는 수많은 우리를 이야기한다. 나와 너, 나와 그, 나와 너와 그들. 나는 "나" 하나가 속해있던 수많은 부분집합을 거쳐가면서 성장한다. 나는 늘 우리들 안에 있다. 선과 지아, 단 둘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윤, 보라, 나머지 반 친구들, 그리고 어른들과 화면 밖 관객들까지 감독은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우리가 되는 너와 나도 있고, 우리가 되지 못하는 너와 나도 있다. 그 수많은 우리들 가운데서 잡을 수 없던 "우리" 역시 우리라면, 모두가 우리가 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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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나인에서 보셨나요? 저는 <우리들>만 봤는데, 참 좋더라고요. "다를 것 없는 우리"라는 말에 적극 공감합니다. '우리들'이라는 제목에서 모든 것을 함축한다고 생각해요. 선, 지아, 보라, 그리고 부모, 선생 모두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했거든요. 무엇보다 앵글이 좋던데요? 아이의 시선에서 세상을 보다보니, 어른들이 등장하는 장면의 대부분은 하반신만 나오더군요. 감독이 의도한지는 알 수 없으나, 그때마다 어른들은 굉장히 무신경하고, 작위적인 말을 하더군요. 이를테면 '좋은 게 좋은거야', '다 괜찮아' 이런 식의 말요. "그럼 언제 놀아?"라는 대사와는 정반대죠. 마음 내키는 대로,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이 언제였던가, 생각하게 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