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6/02/22 00:14:45
Name 그래요
Subject [일반] 그 날 홍대입구역에서(2)
홍대입구역에서 출구 위로 올라가 밖에서 기다렸다.
8시가 되었다.
그래도 그 사람의 연락은 없었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 사람은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

우선 급한 김에 주선해줬던 친구에게 상황을 전했다.
친구도 지인에게 확인해보겠노라고 말했다.

지인은 그 사람은 나와 사귀고 있지만
나에 대해 아직은 호감 단계라고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말없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3월 중순 꽃샘추위가 급작스레 닥쳐서 밖은 무척 추웠다.
덜덜 떨면서 밖에 계속 있을 수 없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무척 추워서
다리를 번갈아 뒤뚱거리며 9번 출구 주변을 배회했다.
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출구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무슨 일 때문일까 생각해봤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렸거나,
아니면 뭔가 마음에 변화가 생겨서
이런 식으로 바람 맞히고 그만 만나려고 했거나.

하지만 계속 회사에 있었을 사람인데
휴대전화를 어떻게 갑자기 잃어버릴 수 있을까 싶었고
수면 위로 올라온 의심과 함께 두 번째 이유를
확신하기 시작했다.
남에게 화를 잘 내지 못하고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사람이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서글퍼졌고
그 사람에게 내가 어떤 잘못한 게 있었을까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아니야. 휴대폰 잃어버렸겠지.
아니면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난 건가?
마음이 무너져 내려서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그 사람을 완전히 믿지 못했던 내 잘못이었다.
내 자존감이 조금만 더 단단했더라면
만나는 사람이 누구든
이 정도의 만남 횟수를 가지고 공감대를 형성한 상대방이
쉽게 나를 버릴거란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람이 나를 돌아다니며 애타게 찾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20분쯤 기다렸나. 서 있기 힘들어서 역내 의자를 찾다가
9번 출구로 나가는 길과는 한 참 반대편 먼 곳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자세를 숙이고 휴대전화만 두드리며 인터넷을 배회했다.
배회하다 정신차려보니 시간은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배가 너무 고파 유명한 타코집에 들러서 타코를 씹어댔다.
계속 온 신경은 휴대전화에만 가 있었다. 연락 오겠지.
하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고
지인도 그 사람과 계속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혹시 휴대폰 잃어버린 거야? 아니면 무슨 일 생긴거야??
나 지금까지 기다리다가 간다ㅠ 카톡 보면 바로 연락줘ㅠ'

10시 10분이 넘은 시각이었고 내일은 출근해야 하니
집으로 돌아갔다.
출근 때문에 잠을 자야 하는데 우느라 잠을 잘 못잤다.
무슨 사고라도 생겼나? 휴대폰 잃어버렸나? 나에 대한 마음이 바뀌었나?
마음이 바뀌었으면 아무리 니가 싫은 소리를 잘 못한다 해도 말로 해줄 수 있잖아.
말로 표현 안 했어도 너의 눈에 내가 너 정말 좋아한다는 게 보였을 거 아니야. 이런 방식은 아니잖아.
잠을 설치고 멍한 머리로 출근했다.

그리고 오전 10시가 넘은 후 여유 시간이 생겼을 때
떨리는 마음으로 후들거리는 손으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특이한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 네, OO회사입니다.
- 네, 안녕하세요. 저 뭐 여쭤볼 게 있어서 전화드렸는데요.
- 네, 말씀하세요.
- 혹시 그 회사에 OOO라는 분 오늘.. 출근.. 하셨나요..?

연구하는 회사라 인원이 많은 건 아니라고 했었다.

- OOO씨요? 네? 그 분 해외 출장 갔을텐데요.

깜짝 놀랐다.

- 아, 아닐텐데요. 그 분 해외 출장 갔다가 2일 전에 한국 돌아왔는데요.
- 네? 아닐텐데... 잠시만요 확인해볼게요.
   ...
   아! 네. 맞네요. 오늘 출근했어요.
- 네? 아, 저 무슨 어디 다치시거나 그러진 않았죠?
- 네, 출근 잘하셨는데요.
- 저 그 분과 지금 전화할 수 있을까요?
- 지금 연구실에 들어가셔서 조금 있다 나오면 연락하시라고 말씀 드릴게요.
  어디로 전화하라고 하면 될까요?
- 제 휴대폰인데요. 010....... 으로 전화해달라고 전해주세요.
- 네 그렇게 할게요.
- 감사합니다

사고인 건 아니니 다행인데.
그럼 왜 전화를 안 한 걸까. 출근 잘했네...
나는 너무 힘들었는데.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전화가 다시 왔다.

- 여보세요.
- 여보세요. OO씨, 회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네?

조금 덤덤한 목소리.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목소리가 덤덤하지.

- 특이한 이름이니까 기억이 잘 나지. 그리고 OO씨 회사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어야지.
  근데 어제 무슨 일이야? 나 무슨 사고라도 난 건가 해서 걱정했잖아. 출근했단 얘기 듣고 안심했었어.
  휴대폰 잃어버렸던 거야?
- 어, 휴대폰 잃어버렸었어. 어제 홍대입구역으로 갔던거야?
- 휴. 사고가 아니니까 다행이다.
  당연히 홍대입구역으로 갔었지. 2시간 넘게 기다리다가 집에 갔었잖아.
- 정말? 그랬었어? 근데 어디 있었던 거야. 나도 갔었는데.
- 그래? 나 그 주변에 계속 있었는데. 하... 나 어제 얼마나 걱정하기도 하고 힘들었는데.
- 아 미안미안. 나도 홍대입구역으로 가긴 갔었는데.

덤덤한 목소리에다 아무렇지 않은 듯하게 말하는 것 같아
서운함이 밀려와서 나도 모르게 쏟아버렸다.
이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절대 이렇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음성이 좀 커지고 톤도 올라갔다.

- 점심 이후로 연락은 안 됐지만, 난 OO씨 꼭 나올거라고 생각하고 당연히 홍대로 갔지.
   근데 휴대전화 잃어버리게 된 거였으면 어떻게든지 나한테 연락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내 직장 어딘지 알잖아. 오늘 출근하자마자 아침에라도 전화해줄 수 있었잖아.
   왜 그렇게 내 생각을 안 해준 거야. 게다가 OO씨가 약속 장소를 잡은 거였잖아.
   난 어제 계속 기다렸었단 말이야. 날씨도 얼마나 추웠는데.
   OO씨 오겠지 오겠지 하고 난 계속 기다렸다고. 혹시 사고가 난 건가 걱정도 많이 했고 말이야.

이건 좀 거짓말이었다. 나를 버렸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가장 컸었다.
그리고 단순히 휴대전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는 무척 안도한 상태였다.

- 미안해 OO씨. 내가 그렇게 못했었네.
- 아냐. OO씨가 휴대폰 잃어서 연락 안 된 거였었으니까 다행이다.
  나 지금 일하러 들어가봐야 되서 들어가볼게. 좀 있다 점심 맛있게 먹구.
- 응, 그래. OO씨도.

오후에 그 사람에게서 어제 점심 시간 때 들렀던 주유소의 화장실에서
휴대전화를 찾았다는 카톡이 왔다.
그리고 오늘 저녁 시간 되냐고 저녁 같이 먹자고 했다.
나는 별 생각없이 저녁 같이 먹자는 약속으로만 생각하고 그러자고 대답했다.
하지만 단순히 저녁 먹는 약속은 아니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제이쓴
16/02/22 00:32
수정 아이콘
다음 얘기가 기대되네요.
그런데 상대를 바람맞히는 행동을 하고도 미안한 기색없이 덤덤할 수 있는 여자분의 성격은 선천적인 걸까요? 아니면 후천적인 걸까요?
스웨트
16/02/22 00:50
수정 아이콘
아.. 잊고 있었던 기억이 글을 보면서 다시금 떠오르네요 그 먹먹하고 어처구니 없던 그 기억..

진짜.. 그리고 이 절단신공은 가슴을 더 아프게 하네요ㅠ
다음글 기대하겠습니다
Colorful
16/02/23 23:22
수정 아이콘
궁금해요!
로랑보두앵
16/02/22 01:11
수정 아이콘
몰입되네요 짜증이나기도하구요 허허
코코볼
16/02/22 01:44
수정 아이콘
하하.. 발암.......... 이네요...
MoveCrowd
16/02/22 02:31
수정 아이콘
역시 쉽게 마무리되지 않는군요!
덤덤한데 마음을 동하게 하는 글이네요. 헣..
기네스북
16/02/22 11:43
수정 아이콘
힘들어요....힘들어요 ㅠㅠ 빨리 올려주세요
16/02/22 13:04
수정 아이콘
으으으으 ㅠㅠㅠㅠ 빨리올려주세요!
서운함이 밀려와서 쏟아버리는거... 진짜 공감되네요.
근성러너
16/02/22 18:35
수정 아이콘
대..단..스고이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63678 [일반] [도쿄 먹부림] 1.Tapas Molecular Bar (데이터다소주의) [16] 豚6926293 16/02/22 6293 9
63677 [일반] 개성공단 잘 알면 북한 노동당으로 가라 by. 새누리당 [105] 최강한화10992 16/02/22 10992 12
63676 [일반] LG G5 vs 삼성 갤럭시S7 [141] 에버그린17664 16/02/22 17664 3
63675 [일반] 출사 :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04 (2. 형주에 바람이 불어오다) [51] 글곰6950 16/02/22 6950 81
63673 [일반] 김윤아/태민/B.A.P의 MV와 정준영/에릭베넷의 티저가 공개되었습니다. [11] 효연덕후세우실4541 16/02/22 4541 0
63672 [일반] [야구] 한상훈, 한화이글스 진실공방? [103] 이홍기11704 16/02/22 11704 0
63670 [일반] [해축] 잉글랜드 FA컵 6R(8강) 대진표 [18] SKY924814 16/02/22 4814 0
63669 [일반] 굳이 동성애에 반대하는 이유가 뭘까 [572] 연환전신각20070 16/02/22 20070 5
63668 [일반] 1 [14] 삭제됨15568 16/02/22 15568 1
63667 [일반] 그 날 홍대입구역에서(2) [9] 그래요3639 16/02/22 3639 1
63666 [일반] 주토피아 보고 왔습니다(무스포) 데이트 강추 [18] 카롱카롱6620 16/02/21 6620 1
63665 [일반] 역대 NBA 정규 시즌 최고 승률 TOP 10 [18] 김치찌개7855 16/02/21 7855 0
63664 [일반] 다정한 그이 [12] 王天君4745 16/02/21 4745 18
63662 [일반] NBA 유니폼 랭킹 TOP 10 [13] 김치찌개6196 16/02/21 6196 1
63661 [일반] 입술의 상처 [10] Colorful4727 16/02/21 4727 8
63660 [일반] 250년의 기다림, 카쿠레키리시탄 [41] 눈시10424 16/02/21 10424 12
63659 [일반] 아이돌 덕질... 스밍? 문투? 총공? [17] 자전거도둑6142 16/02/21 6142 0
63658 [일반] 정동영 "김종인 영입한 문재인, 부끄러운 줄 알라" [91] 에버그린11998 16/02/21 11998 8
63657 [일반] 늙다. [11] 헥스밤4497 16/02/21 4497 17
63656 [일반] 모로사와 치아키 별세소식 [13] 좋아요6667 16/02/21 6667 0
63655 [일반] 퇴근하고 저녁에 혹은 주말에 은행가서 계좌개설하기 [9] style8145 16/02/21 8145 1
63654 [일반] [스포주의] WWE PPV 패스트레인 2016 최종확정 대진표 [17] SHIELD6118 16/02/21 6118 2
63653 [일반] 박문성-스렉코비치 사건의 진정한 심각성: 박지성 경기도 안 보는 해설위원 [138] 사장32041 16/02/21 32041 69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