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10시 45분. 밤이었다
아내가 그냥 들어오지 않고 초인종을 누른 걸 보니 나한테 줄 선물이 있나보다
텔레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여자인것을 보고나서야 어제 아내가 짐을 챙겨 해외로 출장간것이 떠올랐다
나는 급히 문을 열었다. 그녀의 눈은 촉촉했고 뽀얀 얼굴에는 눈물자국과 상처들이 뒤섞여 있었다. 스크래치가 평소보다 많았다
- 미안 휴대폰이 없어서 그냥 왔네
연락 없이 찾아온 그녀는 상처난 입술을 떨며 말했다. 저번 집들이 때 한 번오고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 나 잠만 자고 가도 될까?
- 일단 들어와
난 그녀를 침실로 안내해 이불을 개고 눕게 하였다. 손도 약간 떨고 있었다
-쉬고 있어봐
부엌으로 나와 손을 씻고 따뜻한 물 한 잔을 받았다
그녀를 좋아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수업시간 내내 그녀를 훔쳐보기 일수였고, 제비뽑기에서 그녀와 짝이 되길 바랬던 나의 절실한 기도를 들어준 하나님께 감사했다. 짝이 되고 나서 그녀를 더 적극적으로 쳐다보았다.
-뭘 봐
막상 짝이 되고 나니 대놓고 쳐다보는 꼴이 되어 그녀를 보는게 오히려 더 힘들어졌다. 나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녀를 보고 싶었다.
정말 운좋게도 학교에서 물통을 나누어주었고 책상 끝에 둔 물통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나는 하루종일 볼 수 있었다.
어린나이에 관심을 사려 그녀를 꼬집기 일수 였고 그녀는 자주 울었다. 착한 그녀는 그럼에도 나와 계속 장난을 쳐주었고, 미술시간 난장판인 나의 그림을 덧칠해주는 그 붓질은 아름답고 우아했다
중학생이 되고 그녀는 나한테 고백하였다. 그녀의 고백은 그녀의 친구가 전해주었다. 나는 혹시나마 사귀다 나중에 헤어지면 사이가 틀어질까 무서워 거절했다. 예상대로 그녀는 친구가 장난쳤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러는편이 그녀와 나의 관계에 더 도움이 될거라 느꼈다. 우리는 그 뒤에도 계속 어울렸고 방학만 되면 아침마다 항상 같이 걸었다
고등학생이 되고 그녀는 전학을 갔고 자연스레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물컵과 약통을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아까보단 진정돼 보였다
- 내가 바를게
그녀가 일어나려 했다
- 너 손도 안씻었자나
나는 그녀를 다시 눕혔고 이마에 있는 상처부터 약을 발랐다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는 어른이었고 서로 직장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와 나는 금방 다시 친해졌고 우리는 만날 때마다 같이 술을 마셨다. 우리는 항상 술자리에서 서로 누가 더 인기 많은지 자랑을 하였다. 저번 발렌타이때는 초콜릿을 받았고, 빼빼로 데이는 뭘 받았고... 자랑대회는 언제나 나의 패배였다. 그 뒤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근처 호수가 있는 공원으로 향했다. 호수에는 언제나 달빛과 가로등빛이 은하수를 이루고 있었고 우리는 그 위를 걸었다. 나는 그 우주 위에서 그녀에게 속삭였고 그녀는 애기처럼 웃었다. 항상 헤어질 때마다 그녀의 입술에 입을 살짝 맞추었고 그것은 우리만의 작별인사였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사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중학교 이후로 그 말은 우리 사이에 있어서, 아니면 혹시 나에게만 있어서 마치 볼드모트의 이름처럼 암묵적으로 정해진 금기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술을 마시고 또 다시 그 공원를 찾았다. 그날따라 달빛이 눈아프게 밝았다. 내가 그녀를 안고 있을 때 그녀는 나에게 결혼할 사람이 생겼다고 했다. 누군가 호수에 돌맹이를 던졌는지 은하수 빛들이 모두 흔들렸다.
결혼식에서 그녀는 아름다움을 넘어 여신에 가까웠다. 주례를 끝으로 그녀의 남편은 사랑한다며 그녀 볼에 뽀뽀하였고 뽀뽀를 받으며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은 드레스와 조명과 어울려 화려하게 빛났다. 그날 새벽 나는 홀로 술을 마셨고 그 모습을 떠올리며 미친듯이 울었다.
나도 어느새 결혼을 하게 되었고 연락은 다시 뜸해졌다.
5년이 지나고 우리는 서로 다시 만났다. 그녀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그녀는 그대로 인것처럼 보였지만 몸 곳곳에 흔적이 새로이 생겼다. 그녀의 친한 친구는 그녀의 남편이 폭력을 쓴다는 말을 나에게 넌지시 했었다. 나는 그녀에게 상처에 대해 물어봤고 그녀는 넘어져서 다쳤다고 대답했다. 상처는 점점 늘어갔다. 그녀는 항상 넘어졌다고 답했다. 언제 한 번 우리는 술을 많이 마셨고 나는 그 미친놈과 당장 이혼하라고 화를 냈었다. 그러자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 하늘이는 불쌍해서 어떻하냐고. 그녀가 울먹이며 말했다. 막 3살이 된 하늘이는 맑은 하늘처럼 밝은 여자아이다. 그 아이는 마치 구름에 가려 지상 현실을 모르는냥 항상 웃고 있었다. 나를 만나면 그녀는 항상 그 아이 얘기를 했었다. 나는 그 뒤에도 몇 번 그녀에게 이혼하라고 얘기했지만 그런말을 들을수록 그녀는 더욱 힘들어했다.
그녀는 입술에 항상 상처가 있었다. '이혼' 이라는 단어가 어쩌면 그녀를 그녀를 웃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입술에 난 상처는 덧났고 결국에는 그녀는 더욱 슬퍼졌다. 나는 더이상 그녀를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아 언제부터인가 이혼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어느 새 입술에 난 상처까지 나는 약을 바르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로 반짝이는 눈으로 입을 약간 벌린채 나를 보고 있었다.
- 나에게 반했구나
나는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의 표정엔 미동도 없이 나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다음날 아침 나는 그녀보다 먼저 일어났다. 만약 그녀가 먼저 일어났다면 그녀 성격으로보건데 아마 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고맙다는 쪽지를 남기고 몰래 집에 갔었을 것이다. 그녀는 내옆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어제 밤 나는 소파에서 자려했지만 손을 잡아달라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옆에 누워 손을 잡아주자 그녀는 긴장이 풀린듯 금새 잠들었다.
나는 된장찌게를 준비했다. 손을 씻고 나는 자는 그녀 얼굴에 다시 약을 발라주었다. 입술을 바를 때쯤 그녀가 눈을 떳다. 피곤했던지 나를 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 밥먹자
거실은 조용했다. 밥을 먹으며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어제 밤에 영화 예매해놨어 이따가 같이 보러가자
- 나 집에가서 하늘이 봐야하는데
나는 오늘만 놀자고 그녀를 설득했고 그녀는 결국 알았다고 하였다.
영화 장르는 코미디였다. 다행히 그녀는 영화내내 웃었다. 나는 스크린 불빛에 비친 그녀의 상처들이 조금 거슬렸지만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안보이는지 재밌어 하기만 했다.
영화를 보고 밥을 먹었다. 나는 자랑대회를 여는 대신 그녀를 좋아했던 남자들에 대해 물어보았고 그녀는 어느 새 신나서 '그 미친놈이 어쩌구' 하며 떠들어댔다.
내가 이혼얘기를 한창했을 당시 술을 따라주는 그녀의 손에 난 상처를 보며 '그러게 나 배신하고 결혼하더니' 하고 농담식으로 말을 던졌었다. 내가 다시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그제서야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결혼식의 화려한 공주님은 어디가고 초라한 모습으로 울기만 하는 한 아이의 엄마가 내 앞에 있었다. 우리는 그날 헤어질때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녀는 즐거워보였고 나는 또 다른 남자에 대해 물어보았다. 얼굴에 난 상처는 어느새 조금씩 여물고 있었다.
우리는 밥을 다 먹고 옷을 보러 돌아다녔다. 쇼핑을 그 어떤 고문보다 싫어하는 나지만 그녀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싶었다. 그 누구도 무시 못하도록. 하물며 그 남편까지 길을 가다 돌아보게 그녀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싶었다.
그녀는 탈의실에 들어가며 말했다.
- 훔쳐보면 안돼요
나는 그러다 남색 코트를 하나 보았다. 그것을 그녀에게 입혀보였고 하얀 피부톤의 그녀와 그 옷은 잘 어울렸다. 그녀는 부잣집 딸처럼 보였다
- 최기사 이거 계산해
- 너가 드디어 미쳤구나
말은 그렇게 했어도 나는 자신감에 찬 그녀의 모습에 기분이 좋았고 우리는 하하호호 웃으며 데이트를 즐겼다.
그녀가 사는 동네에 다달았고 이제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달빛은 흐렸지만 가로등 빛은 우리를 빛추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가려했지만 그녀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잠시보다가 그녀의 상처난 입술 위로 입을 살짝 맞추었다
- 아프네
아마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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