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하다. 이조차도 한바탕의 긴장과 소란이 끝나고 난 뒤에 찾아온 평화다. 처음도 아닌데 음식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고 거리의 냄새에 향수병이 도졌다. 그렇게 지친 몸을 이끌고 탈출행 비행기를 타면, 이코노미석에서 몇시간 동안이나 뻣뻣하게 있어야 했다. 좁아 터져서 잠도 안오고, 옆자리의 신사는 비염이 있는지 자꾸 비웃는 콧소리를 낸다. 다 왔다. 집이다. 오른손으로는 도어락을, 왼손으로는 왼발의 단화를 해제한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공간이 나를 반긴다. 남편님이 있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없어서 다행이기도 하다. 지금 내 피로는 보통 남자의 다정함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우니까. 침대야 나를 받아줘, 이불아 나를 감싸주렴. 털썩 하고 몸을 던지는 이 순간만큼은 내 아래 푹신한 녀석에게 정말로 감사한다.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라니, 침대는 과학이 아니라 사랑이다.
안돼. 슈퍼주부로서의 사명감이 타오른다. 내가 지금 여기서 피곤을 만끽하면, 쌓여있는 집안일은 누가 할 것인가? 아직 긴장을 늦춰서는 안된다. 신혼때일수록 흐트러져서는 아니아니된다. 그래도 할 일은 하고 쉬는 여자라는 걸 보여줘야 한다. 살짝 독해져야 최소한의 성실한 사람이 되는 법이다. 그래야 그이에게도 적당한 긴장을 주입할 수 있다. 내 남편은 착하고 너그러워서 자기자신도 잘 이해해버린다. 나중에 하면 되지. 너무 급할 거 없잖아. 그렇게 넉살 좋은 웃음이 내 약지에 기어이 반지를 채워넣고 말았던 것이다. 내가 피곤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걸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살아보니 이게 또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애인일때는 이 남자의 느긋느긋한 성질이 같이 사니까 무신경함으로 다가온다. 그이에게는 내 철두철미함이 바가지로 번역되고 있겠지만. 어쨌든 피곤하다고 서로 미루면 결국 내가 손해보고 마는 상황이 닥치고 말 거다.
어쭈! 그러고보니 이불이 뽀송뽀송하다. 베개피에서도 향기가 난다. 그래도 나 좀 기분 좋으라고 이렇게 침구류를 빨아놓다니. 마음의 수첩에 기록해놔야겠다. 잊지 않을게. 당신 왠일로 이렇게 센스있는 짓을 한 거니. 그래서 침대가 사랑이었구나. 빨래를 안해놨으면 그냥 과학이었을텐데. 베개에 코를 박고 어떤 마음으로 이 정성을 기울였을지를 상상해본다. 세탁기가 돌아가고, 윙윙거리는 통 옆에서 당신은 과연 툴툴거렸을까 의기양양했을까. 1번이어도 상관없어. 중요한 건 맨날 입을 옷도 제때 빨래를 안해서 내가 돌리는 세탁기 옆에서 미안해하던 이 남자가 무려 이불을 빨래했다는 것이다. 살짝 더 좋은 남편이 된 것인가요? 아니지, 아직 몰라. 기대치를 높이진 않겠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기대가 되고 있다. 다른 집안일도 해놓은 건 아닐까.
몸을 일으키고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가 깨끗하다. 아무 것도 안 먹은 걸까. 끽 해야 2박 3일이지만 나 없는 동안 한끼라도 집에서 해먹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밖에서 햄버거만 연거푸 흡입한 게 아니길 바란다. 샐러드도 있고 세상에 그나마 덜 나쁜 음식이 얼마나 많은데. 냉장고를 열어보니 모든 게 그대로다. 그리고 여백이 하나 들어온다. 와!! 이 남자가 무려 된장찌개를 끓여먹었어! 세상에나 세상에나. 내가 끓여줄려고 사놨던 된장찌개 레토르트 봉지가 없다. 쓰레기통을 열어보니 된장찌개 봉지가 있다. 라면을 요리라고 생각하는 당신이 무슨 일이야. 애호박이랑 두부를 사서, 일일히 쪼개고, 끓고 있는 국물에 넣어서, 밥을 차려 먹은 거야. 오구오구 내 남편 장하다. 내 몸 챙겨준 것보다 왜 이렇게 기쁠까. 괜히 고맙네.
삑삑삑. 도어락 소리가 지저귄다. 왔어? 힘들었지~ 그 소리에 나는 괜히 기분이 달아올라서 와락 안겨든다. 크크크 왜 그래 테러범이라도 만난겨? 당황하면서도 새삼 나의 사랑스러움을 느끼는가 보다. 보니까 너 이불도 빨아놓고 밥도 챙겨먹었더라? 아 그거~ 크크크크 뭘 굳이. 그런데 너 눈치 되게 빠르다. 당연하지. 너랑 내가 같이 사는 집인데. 쪼금만 달라져도 내 눈에 다 들어와. 헉 그렇구나 앞으로도 유념할께. 빨리 안마해줘. 그래그래. 과학이 아닌 사랑 위에 둘 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한쪽은 꾹꾹 누르고 한 쪽은 꾹꾹 눌린다. 나 이번에는 진짜 장난아니었어. 픽업하기로 한 차도 안오고, 숙소도 개판이고. 그래그래 힘들었겠다. 부장님도 옆에서 계속 픽픽대고 내내 피곤한거야. 그래그래 피곤했겠네. 비행기도 진짜 거지같고, 집에 도착하기까지 타령이 막 절로 나왔어. 그래그래 타령할 수 밖에 없지. 아 시원해... 그런데 침대에 누워보니까 너가 이불 빨아놓은 게 확 감이 오더라? 보니까 밥도 챙겨먹었고. 뭐 그게 대단하다고~ 별거 아닌데. 그래서 지금은 진짜 별로 안 피곤해. 에이 오바하지마~ 크크크 아냐 지금 네 안마까지 받으니까 나 갑자기 자기도 싫어졌어. 기분이 꽤 괜찮아. 아 뭐야 너 너무 업되는 거 아니니 크크
안마하던 손을 중지시키고, 나는 뒤돌아서 진지하게 바라본다. 나 할 말 있어. 남편이 땡그란 눈으로 묻는다. 뭔데? 나는 남편의 어깨에 손을올리고 제안한다. 우리 지금 심야영화 보러가자. 남편은 웃는다. 뭐? 나는 다시 제안한다. 극장 가자아! 남편은 하릴 없이 너털웃음만 터트린다. 클클... 지금 볼 게 뭐가 있어~ 너 안 피곤해? 나는 더 구체적으로 제안한다. 아 왜 나 지금 기분이 좋아서 그래. 너 좋아하는 코메디 영화 보러가자. 내가 특별히 싸구려 영화여도 같이 보고 웃어줄게. 나의 도발에 남편은 반응한다. 크... 보러가고 싶으면 보러가는 거지 굳이 남의 취향 깔 건 또 뭐냐? 나는 다그친다. 갈꺼지! 남편은 개겨본다. 아 출장다녀오자마자 무슨 영화야~ 나는 듣지 않는다. 오케~ 보러가자~!! 점퍼를 걸치는 내 뒤에서 항의의 소리가 들리지만 나는 묵살한다. 팔짱을 끼고 체포 완료! 난감한 미소를 지어봐도 나한텐 전혀 효력 없을걸.
집 앞의 극장까지 걸어서 10분. 호호 입김을 부는 남편을 보며 나는 해서는 안될 생각을 하고 만다. 그래. 올 봄에 내가 코트 한벌 사서 입혀줄게. 주윤발처럼 쫙 빼입혀줘야지. 키만 좀 크지 엑스트라 1의 몸뚱이를 하고 있지만 내가 사준 코트 입으면 최윤발 소리가 절로 나오지 않을까. 우리 이렇게 계속 행복하자. 내가 사준 코트 입고 당신은 나랑 같이 꽃놀이도 갈거야.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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