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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28 00:26
세종을 넘을 가능성을 가진 유일한 조선 왕...... 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삼년상 그거 그냥 동생들이랑 나눠서 치르지 왜..........
15/12/28 00:27
그래도 한글은 세종이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종이 한글에 몰두하는 동안 문종이 세자로서 왕의 역할을 했다... 고 생각하고 있어요.
15/12/28 00:28
세자시절이라 왕이 된 이후에는 보여준게 많지는 않은걸로...
어찌보면 이전에 세종대왕시대 때 웬만한게 다 정립이 되었으니, 보여줄게 없었을지도 모르죠.
15/12/28 00:33
수양 이 녀석이 조선을 1차로 말아먹고
연산군이 조선을 2차로 말아먹으면서 조선은 사망했습니다. 수양 녀석이 되게 호탕한 척은 하지만 결국 문종 치세에선 몇몇 비행짓 하는 것 빼곤 문종에게 꼼짝도 못했죠. 그나저나 수양이 문종의 무덤을 파헤친 게 사실인가요? 이게 사실이면 정말 패륜아 중 패륜아인데..
15/12/28 00:39
? 반정으로 쫓겨난 왕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패륜짓을 저지를 수 있죠? 이해가 안 되네요. 그 후에 문종의 무덤은 복구가 되었나요?
15/12/28 00:39
합장되어 있는 문종의 비를 파내겠다고 그런 짓을 저질렀습니다.
현덕왕후의 시체를 파내서 바다에 던져버렸죠...... 무덤은 복구했을 겁니다 아마.
15/12/28 00:41
수양의 입장에서 봐도 문종의 비는 잘못이 없지 않나요? 단종도 잘못이 없고..
왕위도 단종에게서 (반강제적이지만) 선양받는 형식을 택했구요. 단종의 정통성을 건드리면 자신도 피해를 입을텐데. 뭐 사육신의 케이스도 있었지만 그건 그냥 사육신만 처벌하면 되는 거였구요.
15/12/28 00:47
현덕왕후의 어머니와 동생이 단종 복위운동을 하다가 걸렸습니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연좌하는 경우가 없기는 했는데...세조야 정통성 문제가 있었으니 일종의 엄포용으로 보인거 아닐까 싶네요.
15/12/28 00:37
살아생전에는 야심이 있어도 문종앞에서는 빌빌 기었는데 문종이 죽자 마각을 제대로 드러냈죠. 수양 정도면 분명 왕재를 타고났다고 볼만 하지만, 능력면에서 월등했던 형보다 나은거라고는 몸쓰는거밖에 없었기 때문에... 내심 열등감이 아마 장난 아니었을겁니다.
15/12/28 00:41
태종은 어떤면에서는 세종만큼 넘사벽 먼치킨인데요. 기틀을 다지는 초석의 군주로 태종만큼 장난아니게 해내는 군주도 세계사적으로 많지 않습니다. 수양은 모든면에서 태종의 다운그레이드판이죠.
15/12/28 00:43
음..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수양이 아주 나라를 개판으로 만들어놓고 죽은 얼마 후 성종이 즉위했는데, 성종 시기가 제일 태평성대라고(세종 때보다 농업 생산량은 더 많았다고 압니다) 하던데 성종 때 수양 시기의 병폐를 완전히 극복해낸 건가요?
15/12/28 00:46
성종이 수양대군이 남긴 훈구파들 누르려고 고생을 엄청나게 했죠...결국 장인인 한명회를 축출하면서 성공은했습니다만 그런데 그걸 누르려고 사림파들을 많이 끌어들이다보니 뭐 후대의 여러가지 화근이 생겼다고 알고있습니다. 본인도 어마어마하게 스트레스를 받았구요
15/12/28 00:48
그런데 결과적으론 사림파를 끌어들인 게 나중에 안 좋게 돌아갔지만
그 때 당시에 사림파를 끌어들인 선택을 나쁘게만 볼 수는 없지 않을까요? 성종이 훈구파들의 그 넓은 땅덩어리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도 궁금하네요. 이를 처리하지 않고서 태평성대가 오기 힘들텐데.
15/12/28 00:51
그 공신록 처리하다가 사화가 터졌죠 아 그리고 그 사림파의 화근은 뭐랄까 그 양반들이 좀 교조적으로 되면서 생긴문제라 저도 그 당시에는 나쁘다고 생각하기 힘들다고 봅니다.
15/12/28 00:49
나라를 개판... 인 건 아닙니다. 당대에는 나라가 그럭저럭 굴러갔어요.
문제는 자기 생각대로 사스템에 손을 봐 버리는 마당에 뒷시대에 큰 문제를 야기했죠. 자동차 튜닝한답시고 이리저리 만지작만지작 해서 오히려 차가 빨리 망가지게 했다 보면 됩니다.
15/12/28 00:59
아래에도 달았지만. 세조 자신은 평균 이상의 군주라서 더욱 문제가 당대에는 가려진 감이 있습니다. 성종이야 여자문제 빼면 유능하고. 하지만 그렇게 굴러가는 사이 내부 시스템은 갈수록 삐꺽이다가 결국 연산군 때의 폭주부터 불나버린 거라 보면 됩니다.
15/12/28 01:09
ohmylove 님// 아니, 그건 전혀 아닙니다. 엔진에 불난 자동차 꼴이 된 조선을 이리저리 수리해나간 조선 후반기의 노력은 무시되어선 안됩니다.
15/12/28 01:17
음.. 얄팍한 제 느낌으로
중종 - 이 녀석, 진짜 나라를 복구하려는 능력이나 노력이 있는 건지 의심스럽다. 인종 - 너무 일찍 죽었다. 명종 - 어머니에게 꾹 눌려서 그 오랜 시간을 허송세월. 선조 - 꽤 괜찮았으나 전쟁. 광해군 - 약간 정신병을 앓았는지 군사적으로 엄청난 실책. 인조 - 엄청 유명한 암군. 인조까지는 확실히..;; 효종부터는 좀 나아진 것 같긴 한데 말이죠.
15/12/28 01:26
ohmylove 님// 일단 인조에 대해서 요즘에는 '이시대부터 제도개혁이 시작된듯?' 이고 이후 경신대기근과 같은 기근시대가 오기 전까진 상당히 번영을 누렸던 게 확인되는지라...(그리고 기근시대가 끝난 숙종~영조 초까지가 2차 번영기)
15/12/28 01:35
나이트해머 님// 그럼 인조가 마냥 암군만은 아니군요?
하도 이괄의 난 + 병자호란 + 소현세자 이미지가 크게 박혀서..;;
15/12/28 01:37
피아니시모 님// 경신대기근 5, 6년 전에 나온 말이 '하층민까지도 사치질이네. 문제 아님까?' 하는 말까지 나왔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이게...
15/12/28 01:40
나이트해머 님// 아.. 그 정도였나요? 경신대기근은 현종 때로 알고 있는데 그럼 병자호란 이후에도 인조 때엔 잘 살았단 건가요?
15/12/28 01:50
ohmylove 님// 일단 인조때부터 문제를 인식하고 고처나가기 시작, 효종 전반기에 대동법같은 큼직큼직한 개혁들이 이루어지고, 전체적인 여민휴식기조와 개혁의 성과로 효종 후반기~현종 초에 번영, 중반부터 몰아닥친 소빙기적 기후재난(대기근 시대라 할만한 연속적 기근)으로 다시 타격, 대기근이 소강상태가 되면서 재차 부흥(숙종~영조초), 전반적인 생산성 저하와 이를 인식한 대응 마련에 골몰(영조 후반~정조), 대응마련 포기하고 말기로 접어듬(세도정치기) 정도로 보면 됩니다. 크게 대략적으로요.
15/12/28 01:54
나이트해머 님// 늦은 시간 귀한 답변 감사합니다!
그럼 인조반정이 아예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었네요. 물어볼 게 두 가지 정도 더 있는데 늦은 밤에 실례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주무시고 난 다음에 답변 해주셔도..;; 1. 이성계의 장군 시절 업적은 얼마나 과장된 걸까요? 2. 광해군 시절 쓴 <선조실록>과 그 이후에 쓴 <선조수정실록> 중 전체적으로 더 신뢰성 있다고 인정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15/12/28 02:05
ohmylove 님//
1. 상당수는 교차검증이 되는 편입니다. 몇몇 전투에서 '이런 구도면 이성계가 메인은 아니지 않나여' 같은 말은 나와도. 전체 중 작은 일부라서요. 즉 없는 걸 부풀린 게 아닙니다. 2. 둘 다 가리지 않고 동등하게 비교합니다.임란은 사초부터 소실된터라 가릴게 못됩니다. 검증 대상이지.
15/12/28 00:54
세조야 태종의 다운그레이드였지 암군이라 보는건 너무 명분에 집착한게 아닌가 합니다. 물론 그 앞에 비교대상이 너무 우월하긴 하지만요. 세조 시기의 문제는 정통성의 문제 때문에 자신을 보위할 권신들을 너무 키워놨고, 그것이 정치를 어지럽게 만들었던것 아닌가 싶네요. 차라리 태종처럼 확실하게 토사구팽을 해버렸으면 나았겠지만 그만큼의 정치력은 아니었다고 할까...그거 말고는 그럭저럭 굴려간거 아닐까 합니다.
15/12/28 00:58
저는 명분보다는
1. 권신들을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키운 것 2. 군사력이 크게 약화된 것(기억은 잘 안 나는데 군사 관련해서 무슨 실책이 있었다고 하네요) 3. 정통성이 떨어져 변란이 계속 일어난 것 등등 때문에 암군으로 봅니다. 수양이 토사구팽을 못한 것은, 그 놈의 '의리' 때문 같습니다. 실제로 수양은 첩도 거의 안 들이고 진정 사랑한 사람은 부인 한 명이었다지요. 공신들도 역적에 준하는 행동만 안 하면 용서해주고요. 그런데 그 '의리'가 자기편한테만 해당된다는 게 문제죠.
15/12/28 01:07
1번이야 그렇고...2번은 어떤건지 잘 모르겠네요. 진관체제 얘기라면야 어차피 계속 이어져온 정책 자체의 한계이지 세조가 뭘 못해서 그렇다 보긴 힘들고...3번은 그렇다고 나라가 뒤집어질 정도로 그게 심각했다고 하기는 어려우니...결국 정통성 문제와 그로 인한 문제만 제외하면 나머지는 곧잘 한거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토사구팽 못한건 의리보다는 힘의 문제로 봅니다. 봐주는게 아니라 봐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달까요. 태종에 비해 사람은 더 못 다루는데 처해진 상황은 더 열악했으니...
15/12/28 01:10
결국 반정(혹은 반란)을 일으켜 즉위한 왕들은 공신들 처리가 가장 큰 문제 같습니다.
이방원 - 가차없이 숙청. 성공. 수양 - 간신들이 무럭무럭 성장. 중종 - 공신들을 너무 많이 뽑음. 또 권신을 키웠다가 숙청하기를 몇 번 반복. 약간 이중인격인 듯. 인조 - 공신들 중에 반란을 일으키는 녀석이 나올 정도로 막장인 왕. ...
15/12/28 01:14
조총도 예상 못하지 않았던 걸로 압니다.
그 일본에서 귀화한 정충신인가 그 분 때문에 비로소 조총에 대응할 수 있었다고 압니다.
15/12/28 01:16
ohmylove 님// 김충선(사야가)입니다.
그리고 예상 못했던 건 아닙니다. 선조가 조총을 보고 권총(!!!)을 설계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죠. 참고로 임진왜란 전의 이야기입니다. 다만 그걸 그렇게 대량으로, 그리고 군사적으로 효율적으로 사용할 줄은 몰랐다는 게 함정.......
15/12/28 01:20
ohmylove 님// 20만이나 쳐들어 올 줄은 몰랐겠죠.(...)
한 2~3만이 왔으면 그래도 대충 막기는 했을 것 같은데.......(...)
15/12/28 01:31
ohmylove 님// 수치상 십만도 가능!
이백년 만의 십만 대군 지금이 적기다! 같은 소리는 하고 있었습니다만, 제승방략 체제(쉽게 말해서 지역 예비군 체제.....) 라서 북쪽에서 여진족 막던 병사들 빼면 공익근무 경력이 병사 생활의 전부인 예비군이 대부분이었죠. 북도의 병사는 기억이 안 나는데, 기껏해야 2~3만 정도였을 겁니다.
15/12/28 01:37
ohmylove 님// 신립이 어느 정도 끌고 갔다가 탄금대에서 말아먹었죠.
하지만 신립이 데려간 병사들은 굉장히 위협적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군에 종군하고 있던 카톨릭 신부(...) 세르반테스(맞나?)의 기록에 따르면 열 두번이나 돌격을 감행했고 인상이 깊게 남을 활약을 펼쳤다고 하니까요. 그렇지만 함경도 군사들 외에 긁어모은 군사들은 그말싫....... 오천명을 모아서 내려간 후 근처에서 오천명을 모았는데 총 병력이 오천명!(...) 같은 식이었으니까요. (내려오는 길에 다 도망가고 없었다 이런 이야기.......)
15/12/28 10:33
2번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것을 아는 대로 설명드리자면..
세조 10년에 병력증강을 목적으로 본래 3정 1호(1정군+2봉족)였던 것을 2정 1보(1정군+1봉족)로 변경합니다. 이는 농법의 발달, 농업생산력의 향상으로 봉족의 감소를 메울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결과였던 모양입니다. 전자는 자연호단위로 편성된 데 반해 후자는 인위적인 행정호?로 편성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어찌됐건 봉족의 감소와 정군의 증가로 군역이 무거워지게 되었고 애초에 군사력 강화를 목적으로 추진한 정책이었지만 농민들이 군역을 회피하게 되면서 도리어 군사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수업시간에 들은 기억이 나네요. 소위 말하는 대립이니 방군수포니 하는 폐단들도 이 때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됐다더군요.
15/12/28 00:44
태종은 요즘말로 하면 시스템 정치를 추구한 사람이고... (그 시스템정치 추구전에 쿠데타에 독재한건 한건 그말싫...) 세조는 독재자죠
15/12/28 00:47
전 그런데 그런 생각도 합니다.
어차피 태종이 즉위 안 하고 정도전이 계속 있었어도 시스템 정치가 구현되지 않았을까.. 하고요. 다만 요동정벌 같이 무모한 짓을 막은 것은 확실히 높이 사줄 만 합니다만 말이죠.
15/12/28 00:50
그렇죠 정도전과 태종의 차이는 시스템정치를 하는데 그걸 니가 하지말고 내가 해야겠다라는거 였다고 봅니다. 왜냐면 '내가 전주이씨고 왕가의 핏줄이니까'라고 생각해요 정도전이 생각했던것보다 왕권이 좀 강하긴 했습니다만...
15/12/28 00:52
뭐 어짜피 태종도 정도전의 정책을 거의 계승했고 세종 때에 들어서면 진짜 정도전이 꿈꾸던 정치가 실현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정도전이 계속 정권을 잡았든 이방원이 잡았든 별 차이는 없었을 것 같네요. 다만 세종대왕이라는 사기급 캐릭이 등장했다는 차이 정도!?
15/12/28 00:36
그러니 문종이 10년만 더 살았어도..........OTL
화포와 화차로 무장한 4만 조선군이 요동의 여진족을 병합해버리는 장면을 상상하니 뭔가 장엄하고도 무섭네요.
15/12/28 01:10
역사 파트 중에서 쓰레기 농도로 세손가락 안에 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만. 어설프게 실록 검색질만 하고 땡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파트라.
15/12/28 01:17
실록에 기타 자료에 논문에 이것저것 합처서 적어도, 학계 통설을 적어도, '아몰랑 실록에 없으니까 그런거 없거든여! 빼애애액!' 하면서 체력전 토론 들어가면 '뭐하는 지거리야' 소라밖엔 안나옵니다.
15/12/28 01:21
음? 그럼 묻어가는 역사 질문 좀..
나무위키에서 보니까 '기자조선'이 허구라고 되어있는데 솔직히 삼국시대부터 쭈욱 우리나라도 기자조선을 인정했고 이황인가 이이인가 우리나라의 대단한 분이 '기자실기'인가 그런 책도 지으면서 기자를 찬양했다고 하는데 그런 '기자조선'이 허구인가요? 제가 생각하기로 기자가 중국인이라서 학계에서 일부러 그 존재를 인정 안 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도 들어서 여쭙니다.
15/12/28 01:26
기자조선이 허구라고 하는건 조심스럽긴한데 환빠가 아닐까,...우리나라 사학계에서 인정안하는거 맞나요..
저 이거 교과서에서 배웠었는데...-_-;; 우리나라 사학계가 민족주의가 좀 강하긴하지만 흠... 위키봤는데 이게 진짜인지 좀 혼란스럽네요.
15/12/28 01:27
그것도 환빠인가요?! 끙..
황당한게 버젓이 중국 역사서에 실려 있고 우리나라도 역사적으로 기자조선을 인정해왔는데 이제 와서 허구라니 좀 믿을 수가 없어서요.
15/12/28 01:34
나이트해머 님//환빠들 때문에 고대사에 관심 끊은지가 너무 오래되서 예전에 배웠던것도 좀 뒤죽박죽이 되었나 봅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15/12/28 01:37
나이트해머 님// 중국 역사서나 우리나라의 많은 학자들의 의견은 그럼 허황된 건가요? 흠.. 다행히 이건 환빠가 아닌가보군요.
15/12/28 01:40
ohmylove 님// '많은 학자들' 이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은 아닙니다. 개항기때 진작에 부정된 게 기자조선이고 이후 계속 검증했지만 뭐...
15/12/28 01:41
나이트해머 님// 현재 중국 학계측 의견은 어떤가요? 이게 우리나라 학계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요.
+ 그리고, 위만이 과연 상투를 틀었다는 단서 하나만으로 조선인으로 단정할 수 있는건지 궁금합니다. 늦은 시간 답변 감사합니다.
15/12/28 01:52
ohmylove 님// 중국은 아예 관심도 보이지 않은 걸로 압니다. 동북공정의 메인도 고구려고. 기자조선 자체가 내부적 프로파간다적 성격이 짙었던지라.
15/12/28 02:08
ohmylove 님// 당시의 역사서는 자국에서 떨어진 지역에 대해 적을수록 신뢰도가 낮아집니다. 직접 가서 확인하기보단 들은 소문을 적는 경우가 많아지니까요. 그리고 그렇다 해서 그것이 위서취급인 것도 아닙니다.
15/12/28 02:11
나이트해머 님// 아, 그런 의미군요!
정말 마지막 질문입니다. 늦은 시간 죄송합니다. 우리나라 고조선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남아있지 않는 게 1. 진시황의 분서갱유 2. 고구려, 백제, 신라가 독자적으로 실록이 있었으나 모두 소실됨 이 두 가지가 큰 요인일까요? 또, 위에 질문.. 위만이 과연 상투를 틀었다는 단서 하나만으로 조선인으로 단정할 수 있는건지 궁금합니다.
15/12/28 02:21
ohmylove 님// 고조선은 결국 중국 기록에 많이 의지하는데 자기 지역 기록에도 바쁜 전국시대에 멀리있는 고조선 기록이 많이 남으면 또 이상하죠. 자체 기록이야 왕검성 함락때 날라갔을 테고.
그리고 고백신 3국은 고조선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인 천손의식을 갖고 있었기에 고조선에 대한 관심이 있긴 했을까도 의문입니다. 자신들의 조상이 하늘에서 내러온 분인데 고조선 끌어올 필요는 없거든요. 이런 무관심도 고조선 기록을 줄어들게 한 요인이고. 그리고 위만의 조선인 여부는 잘 모릅니다. 네. 여기까지 할게요.
15/12/28 01:30
이게 문제가 심각한게 리그베다떄도 그러더니만
나무위키 넘어올떄는 뭐 리그베다 신나게 까고 청사장이랑 청위병 깟는데 사실 나무위키도 그 청사장과 청위병을 제외하면 기존 리그베다 유저들이 온거다보니깐 그냥 그대로더라고요 심지어 나무위키에 나무위키 항목을 보면 자기들도 자기 문제가 뭔지 알아요 못 고칠 뿐이지-..-
15/12/28 01:42
저번에도 비슷한 댓글을 달았지만 엔하위키-리그베다 위키-나무위키는 그 태생부터 잘못됐다고 봅니다. 너무 비대해져서 문제를 고칠래야 고칠수가 없는 상황이죠.
15/12/28 01:13
http://sillok.history.go.kr/intro/intro_info.jsp
조선왕조 실록은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키워드 검색도 됩니다. 그리고 지금 막장이라고 할 만한 건 대부분 후기...... 민비(명성황후)나 대원군 뭐 이런 쪽이라.......
15/12/28 01:25
그럼 나무위키 말고 괜찮은 우리나라 역사 관련 온라인 사이트가 있을까요?
역시 책을 읽어야 하나요..? (온라인이 좋은데 말이죠)
15/12/28 01:34
그리고 책의 경우도 꼭 온라인보다 낫다고 할 수가 없는게
책 선정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주류 학설이 아닌 개인적인 학설도 막 실어넣은 책도 많고 심지어 유사역사학자들이 쓴 책도 베스트셀러가 되는 상황이라. 그나마 온라인은 피드백이 잘 된다고 생각합니다.
15/12/28 01:38
또니 소프라노 님// 제가 지금 고백하는 건데
제가 어릴 때부터 자라면서 보아온 책이 윤승운의 <삼국유사>랑 이덕일의 책들입니다. 쿨럭..ㅠㅠ (윤승운님 대단한 만화가인 건 알지만 솔직히 만화책 이름을 <삼국유사>로 짓고 그 속에 환단고기 내용을 넣으면 안 되는거잖아요 ㅠㅠ)
15/12/28 01:46
또니 소프라노 님// "응? 고조선 관련해서 역사 사료가 별로 없는 줄 알았는데, 삼국유사에는 고조선의 왕들 이야기가 자세히 실려있구나!" ...ㅠㅠ
15/12/28 01:07
거기가 엉망진창인 건 내용보다는 일베급 정치관에(...) 관리자들의 막장 담합(?)이 문제 아니었나요?
그래서 주인장이 나타나서 관리자들을 다 잘라버린 걸로 압니다.
15/12/28 01:14
그전에 내용도 진짜 거시기해졌습니다. 엠팍 조선까 다중이가 들어와서 900짜리 체력전 토론으로 난리도 치고 그외에도...
관리자 문제까지 겹치니 정말 그냥 접게 하더군요.
15/12/28 14:32
묻어가는 리플이지만 나무위키 정말 엉망진창입니다. 비교적 관심 있고 공부해본 분야(사회학, 술, SF등)를 읽다보면 머리가 아파옵니다.
1. 도시전설/검증되지 않은 곁가지 이야기를 정설처럼 설명 2. 자의적 해석 및 반달 체력전 3. 리퍼런스 그게 뭔가요 먹는건가요. 아마 다른 분야도 전공자나 실무자가 보면 웃을 내용이 많이 있겠지요....
15/12/28 00:36
단종이 정통성은 정말 최고였지만 천재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입발린 말 같기도 하니...
다만 문종부터 시작해 단종을 지켜줄 왕실의 어른들이 줄줄히 사망한걸 보면 안타깝긴 하더라요. 문종이 37세에 죽은걸 생각하면...
15/12/28 00:55
저는 솔직히 손제리가 노망 나기 전까지 별로 잘못한 게 없다고 봐서 그렇게 까여야 하나 싶네요. 물론 전투는 정말 못했습니다만..;;
15/12/28 01:01
노망난뒤에 한짓이 인생 전반기의 업적을 모조리 수포로 만들고 나라 전체를 말아먹고도 남을만한 짓이었죠. 다행히 손제리 시절에 망하지는 않았지만;;
15/12/28 00:56
차라리 세조가 폭주운전자였으면 바로 문제가 캐치될텐데 정작 그 자신은 평균 이상의 운전자라서 잘못된 튜닝으로 자동차가 장기적으로 맛이 가게끔 해놓은 게 가려진 케이스죠. 결국 연산군이라는 음주운전자가 난리치고 그 뒤에도 '그냥 이대로 굴러가니까 괜찮지 않나여?' 해버린 중종~명종시기를 거친 후에야 '이거 고처야 한다' 는 게 인식되고....
15/12/28 01:04
수양이 욕 엄청 먹는데,
진짜 제일 욕 먹어야 할 군주는 (인조 등 잘 알려진 왕들을 빼면) 명종입니다. 이 녀석은 어머니에게 대들지도 못하고 그 오랜 재위기간을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면서 조선을 망친 암군입니다.
15/12/28 01:19
유머게시판 그 자료에서 가장 의문이었던건 왜 광해군의 행정스킬이 1씩이나 되는가
궁궐병에 걸려서 나라 재정 거덜날 정도로 궁궐 지어대고 돈 다 떨어지니까 백성들 수탈하라고(!) 관리를 보내고 매관매직 목적의 공명첩 발행하라 닥달하고 중요한 군사재료인 염초를 궁궐 짓는데 탕진하고 신하들이 나라꼴이 개판났다고 몇번이나 상소를 올려도 "아몰랑 궁궐 지을거야!" 징징대던 양반이 1이 아니라 0도 아깝죠.
15/12/28 01:41
세조 비판 중에 권신들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항상 따라나오는데 그게 아니라 자기 앞에선 다들 빌빌 기니 위협으로 느껴지질 않았겠죠.
양정을 처형하고 정인지를 한큐에 날려보내고 신숙주 한명회를 동시에 감방에 처넣던 게 세조였는데.... 썩어도 준치라고 세종 아들이고 문종 동생인데 본인도 능력치 자체는 출중했죠. 그러다보니 당대에 문제점이 드러날만한 게 없었고 성종도 최근 들어 별 이유없이 과소평가 되는데 역시 역대급 수준이고. 그렇게 굳어진 제도가 연산군 중종 명종을 거치면서 망.... -_-
15/12/28 01:42
4군 6진을 세자(문종)가 처리했는데 세종이 공적을 먹었다는 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네요.
4군은 1433년(세종 15년) 최윤덕, 1437년(세종 19년) 이천의 토벌로 이루어졌고 6진은 1434년(세종 16년) 김종서를 보내서 약 10년간 이루어진 것인데 세자가 대리를 맡은 건 1445년(세종 27년)이고 강무나 종묘의 제사를 처리한 것도 1442년(세종 24년) 부터입니다. 그 전에 일어난 북방개척은 오로지 세종의 공이지 문종의 공일 리는 없는데요. 문종을 높게 평가하는 건 좋지만 세종대왕님의 업적을 깎아내리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15/12/28 01:47
북방 정비 완료 이야기입니다.(...) 설치는 세종의 업적이 맞죠.
다만 정비를 제대로 끝내지 못했으면 윤관 업적마냥 날아갈 수도 있는 거라서 그렇게 적었습니다.
15/12/28 01:56
정말로 모르겠는데...문종이 북방 정비 관련해서 뭐 한게 있나요? 북방이 시끄럽다고 김종서를 잠깐 파견한 거 말고는(그것도 금방 돌아왔죠. 내부에 믿을만한 신하가 꼭 필요했으니). 제가 모르는 관련 기록 있으면 좀 부탁드립니다.
오히려 북방 관련해서는 세조가 업적이 많죠. 명나라 요청을 대놓고 무시하면서 강행한 신숙주의 여진족 토벌은 조선 초기 북방개척사에 손꼽을만한 대승이었고, 말년에 남이, 강순을 보내 이만주 일당을 제거한 것도 큰 공적이었죠. 한명회, 신숙주를 계속해서 북방으로 보내서 방비 강화를 지속적으로 확인하기도 했고요.
15/12/28 02:05
부령도호부는 1449년에 설치되었습니다.
또한 1445년에 함길도 도관찰사 이맹진(李孟畛)이 하직하니, 세자(世子)가 인견(引見)하고 임금의 뜻을 전하여 말하기를, “함길도는 우리 국가가 왕업을 일으킨 땅이다. 그 도의 백성들이 조종(祖宗) 때에 있어서는 그 덕택을 입은 것이 지극하였는데, 내가 즉위한 이래로 부역이 번다하고 중하며, 또 근년에 성을 쌓는 역사(役事)가 있어 백성의 노고가 다른 도보다 배나 되니, 내가 심히 불쌍히 여긴다. 경을 뽑아서 감사를 삼았으니 가서 마음을 다하여 여염의 민막(民瘼)를 일일이 갖추 기록하여 아뢰라.” 하였다. 이런 일도 있었고,(사실 이건 이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관련된 성 쌓는 일들이 중요한 건데 너무 사소하고 많아서 이걸 긁어왔습니다.) 1447년엔 세종의 명으로 문종(당시 세자)과 신료들이 함경도(함길도)의 방비와 관련해 논의하고 정책을 결정한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즉위 후에는 평안도의 방어 정책을 함경도(함길도)에도 적용하게 하기도 했고요.
15/12/28 02:51
그렇군요. 하긴 그런 소소해 보이는 후속작업들이 사실 영토 확립에는 필수적으로 필요하죠. 북방영토 개척의 1등 업적은 역시나 세종대왕님이라 생각됩니다만 문종 역시 영토 확립에 기여가 크다고 받아들이겠습니다. 정보 감사합니다!
15/12/28 01:50
세조는 차라리 스탯이 낮았다면 문제점이 빨리 나왔을텐데 -.-;
그러고보면 조선왕조 초창기 왕들은 죄다 스탯이 너무 좋았죠... 그리고 중기부터는 스탯이............
15/12/28 02:02
사실 스탯만의 문제는 아니고 나라가 300년 400년 500년이 되니깐 시스템상의 문제가 생겨도 쉽사리 바꿀 수가 없었죠
더 이상 이쯤되면 왕 한사람의 능력치만으로 모든 걸 할 수도 없었을 거고요..
15/12/28 02:06
개인적으론 조선의 초기 왕들이 만든 그 시스템들은.. '그정도 스탯이 되는 사람이 잡았을 때' 굴러가게 만든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강하다보니 -.-;
스탯이 평범한 사람이 초반에 만들었다면 시스템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있어서..
15/12/28 02:08
뭐 정도전이 애초에 구상한 건 '왕이 멍청해도 나라가 잘 굴러가게끔' 한 것이었긴 했습니다...만
대체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건지.,;;
15/12/28 02:17
스텟문제도 있지만 일단 시스템이 약간 비틀어져있다는걸 알고는 있는것같은데 괜찬겠지 하고있다가 시간이 지난다음에 어 좀 마이 삐뚤어져씀 고쳐야되겠네?
어라 근데 이게 너무 커져서 감당불가 하다 내다음에 누가 싼똥 치우겠지.. 테크죠...
15/12/28 02:07
헉 댓글수 보고 팝콘 팔려고 들어왔는데 끝까지 읽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크크 본문과 댓글 모두
15/12/28 08:57
댓글을 꼼꼼하게 읽지 않으신 게 아닌가 싶은데, 다시 잘 읽어보시면 세조 인신공격이 넘쳐납니... (음?)
p.s 니...닉네임!
15/12/28 03:00
청의 강희제는 이미 그정도 나이에 오배등 내놓라 하는 권신들을 다 쳐내고 왕권을 공고히 했습니다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권력을 뺏기는 과정에서
전혀 능숙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구요 난놈은 이미 어렸을때 부터 싹이 보입니다 뭐 커서도 범군이나 태평천하의 인자한 군주 정도 라면 모를까 대단한 재능은 예상하기 힘들것 같아요
15/12/28 03:45
옆길로 새는 글하나 적자면
정통성에서 조선왕중 넘버원은 숙종입니다 단종이 결정적으로 숙종에 밀리는것은 모계 즉 어머니에서 도저히 숙종과 겜이 안됩니다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는 애초 비빈출신에서 뽑아 정궁으로 삼은 케이스였고 숙종의 생모 명성왕후는 조선조 유일하게 세자빈-왕비-대비 테크트리를 제대로 탄 왕후입니다 정통성은 부계만이 부여하는게 아니라 모계도 부여하는거죠 숙종의 정통성은 정말 부계 모계모두 완벽이라는 점이죠 단종은 모계가 부여하는 무게감에서 넘 밀리죠
15/12/28 05:08
세조가 권신들을 숙청하지 않은 것은 개인의 성격탓도 있지만, 그만큼 계유정난의 정통성과 명분, 지지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태종과 비교해보면 태종은 적어도 계유정난보다는 명분도 있었고 개국의 공-사실 이건 좀 애매하다고 봅니다만-도 있었으며, 정도전의 정책에 반대하거나 껄끄러워하는 보수파들(예컨대 장인인 민제, 태조의 친군)의 지지, 종실의 지지도 있었고 숙청대상도 이복형제였던데다 2차 왕자의 난은 방간이 선빵을 날려서 자신의 책임도 외형적으로는 크지 않았고,사후적으로는 조준을 영의정으로 삼으면서 개혁파의 정책도 반영했죠. 물론 정도전의 원안에 비하면 보수파들의 특권을 유지시켜주는 방향이기는 했지만 어쨌건 이런 방식을 통한 태종의 지지기반은 확고했고, 태종 개인적으로도 정치력이 만렙이었기 때문에 끝내는 외척들 모가지를 날리고 이숙번, 이거이같은 공신들을 내치는데도 주저하지 않을 수 있었죠. 하륜도 이걸 알았기에 개인 축재에는 힘을 썼지만 자기 세력을 확보하는 일은 없었고 결과적으로 세종때는 힘쓰는 권신들이 없는 상황에서 치세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뭐, 정도전의 원안보다는 소수 집단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다는 문제야 있지만 이 정도면 선방했다고 봐야죠. 하지만 계유정난 이후 세조는 그게 불가능했죠. 조정이 양분된 상태에서 피의 숙청은 해버렸고 세종이 키워놨던 집현전 세력은 신숙주, 정인지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세조에게 적대적이었으며 이후에는 집현전마저 폐지해버렸고, 그렇다고 남은 세력들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지지기반을 유지하기엔 세조 자신의 정치력이 태종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죠. 게다가 권람, 한명회등은 새로운 등장인물이긴 했지만 이들을 통해 소외받고 있던 새로운 지지기반이 들어올 것도 아니었습니다-조의제문 사건에서 볼 수 있듯, 신진세력인 사림의 스탠스는 계유정난에 비판적이었죠-. 다른 지지세력인 무장들 데리고 정치할 것도 아니고, 세종이 키워놨던 종실 세력, 그 중에서도 핵심이라 할만한 자기 친동생들을 숙청하고 정통성 있는 조카를 왕위에서 쫓아내서 죽여버렸으니 종실의 권위도 떨어지는데다, 종실이 전부 자기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 이 때 제일 편한-제일 좋은이 아니라- 방법은 소수 친위집단을 형성하는겁니다. 자기 지지자들에게 특권을 주고, 그 중에서도 좌익공신들 위주로 소수 집단이 핵심실권과 이득을 나눠먹고, 인척관계를 통해 끈끈한 관계를 맺는거죠. 그러다보니 권신들이 아무리 축재를 하고 홍윤성이 망나니 짓거리를 하고 다녀도 숙청을 할 수 없는겁니다. 예컨대 저 상황에서 한명회를 숙청하려고 하면 인척관계와 이해관계로 엮인 다른 공신집단까지 쳐내야 했을겁니다. 대체 세력도 없는데 너무 위험하죠. 물론 세조의 행적을 보면 당시에는 숙청할 생각조차 안했던것 같기는 합니다만. 다만 말년에 세조도 지지기반이 좀 탄탄해지고 공신 집단이 너무 커졌다는걸 알게되자 이시애의 난을 거치면서 은근히 압력을 넣지요. 이시애가 신숙주, 한명회와 내통했다는 소문이 돌자 일단 둘부터 옥에 가두고 시작합니다. 심지어 신숙주는 자기 아들이 반란 세력에 살해당했는데도요. 이런식으로 구공신 세력에 압력을 넣고 이시애의 난, 이만주 토벌에서 활약한 남이, 강순, 구성군으로 대표되는 신공신 집단을 기존 정치세력에 섞어넣으려고 시도는 했지만 세조 자신의 수명이 별로 남지 않았던데다 구공신 집단은 이미 너무 막강했고, 그에 비해 신공신 집단은 예종대에 남이의 트롤링으로 소멸...이후 사림이 대두할 때까지 소수 집단이 이권을 독점하는 훈구파들의 시대가 오게되죠.
15/12/28 09:45
역사 좀 공부한 분들이랑 얘기 나눠보면 하나같이 하는 얘기가 세조까기.행적을 보면 사실 더 까여도 할말이 없죠.순리대로 굴러가고 있던 조선이란 나라의 방향성을 뒤집어버린 인물이라서.
15/12/28 09:57
TL6이면 제2차 산업혁명인데 (전화기, 혈액형, 비행기....)
문종이 장수해서 인프라를 구축했어도 후대에서 말아먹었을 가능성이 99.9%로 봅니다....
15/12/28 19:20
그러고 보니 공주의 남자에서도 문종이 죽기전에 수양대군이 왕위를 노릴것이라는것을 알고 내가 죽는다면 단종을 지켜주라고 말하면서 수양대군을 조심하라라는 말을 했었던거 같은데 실제 역사에서도 문종이 수양이 왕위를 노릴것이라는것을 알았을까요?
15/12/30 01:37
유로파 4에서 조선이란.... 그냥 유럽 중심의 역사 게임에서 듣보잡 나라보다는 조금 취급이 나은 나라...
정도에 불과한지라.. 역사적으로 제대로 고증하긴 힘들었겠죠.. 그리고 사실 세종-문종 정도만 중요하고, 그 후대 왕들은 실제 게임에서는 플레이할 일이 거의 없어서 (1444년인가로 시작하는게 일반적이라서, 그 후대 왕들은 가상역사라서 다 바뀌죠.) 큰 의미 없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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