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던 서울 한 켠의 대학은 그래도 고등학교 때 그나마 공부 좀 했다는 어중이 떠중이들이 모인 곳이었다. 개중에는 이런 대학의 위상을 자신의 위상으로 치환시켜 자부심을 가지는 이들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나와 그 친구는 그런 치환 과정을 유치한 짓으로 치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말이 통하는 듯 했다. 덕분에 우리 두 사람은 대학 입학식 직전에 있던 신입생 수련회에서 서로의 칼집을 빌려쓸 수 있을 것만 같다는 느낌을 갖기도 했다. 으레 그러하듯 신입생들은 여러가지 과반 활동과 동아리 활동 따위를 병행하면서 자신의 삶을 대학이라는 공간과 일치시켜나갔다. 그 친구는 본인은 원하지 않았지만, 그 특유의 너스레와 사회성으로 – 실상은 권위에 적극적으로 반발하는 그런 성격의 인물이었지만 – 과반 활동의 간부로 추대되었고 – 그 과정에서 나도 의외로 적극적으로 그 활동을 떠넘겼다는 건 의외로 잊혀진 듯 하다 – 일년을 투덜거리면서도 그는 그의 사회적 의무에 충실한 척을 하려고 했다. 불행하게도 나는 내 자신을 대학 생활에 그렇게 진득하게 녹여낸 타입은 아니었다. 대학 동기들과 과제따위를 하거나 CC의 낭만을 만들기보다는 서울 일대의 가까운 대학으로 진학한 고등학교 친구들과 밴드따위를 한답시고 일주일에 사날은 외박과 음주를 하기가 일쑤였다. 그렇지만 그렇게 과반이라는 활동과 자신을 유리시키면서도 그렇게 외로움을 겪지 않았던 건, 어쩌면 그를 매개로 다른 대학내의 사람들과도 쉽게 자리를 할 수 있다는 안도감에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그래도 끝물이기는 하지만 대학생들에게 자유라고 불리는 방종이 상당히 허락된 시기였고, 그런 분위기에 맞춰 고등학교 시절 내가 수험공부에 할애했던 시간의 반도 안되는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성적과 장학금 따위의 과실을 맛볼 수 있던 시기였다. 그렇지만 사람마다 선 풍경의 차이는 그가 보는 것도 바꾼다고 하던 어떤 만화의 대사처럼, 그는 과외와 아르바이트 따위를 하면서 그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보조하는 데에 힘썼다. 나는 운인지 실력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런 걱정 없이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덕분에 무척이나 추상적인 학과 공부의 곁가지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생활 공간의 차이가 학교 안의 연구실과 학교 밖의 학원 교실로 나뉘던 두 사람이었지만, 우리는 다른 대학 동기들을 접어두고 단 둘이 만나 – 혹은 그나 나의 지인들을 대동하고 - 술을 마시고 빈 하늘을 향해 헛소리를 지껄이는 일이 꽤나 잦았다. 그는 나의 이상적 세계관과 계산능력을 가지고 싶어했고, 나는 그의 세속성 – 가벼운 몸, 좋은 패션 감각, 그리고 사회성 – 을 부러워했다.
그는 언젠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는 공포영화나 잔인한 영화, 혹은 슬픈 영화 같은 감정이 급격히 고조되는 영화를 보지 못한다고. 그는 영화를 꽤나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그런 고조된 감정이 주는 긴장이 무척이나 불편하다고 했다. 불행히도 나는 그의 말을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유주얼 서스펙트’의 마지막 경찰서 장면, 혹은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가 추락하는 장면 같은 극도의 긴장감을 즐기던 롤러코스터 애호가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먼 이국 땅에서 한국의 마트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을 담은 드라마를 보다가 나는 그만 나도 모르게 웹브라우저의 닫음 버튼을 누르고야 말았다. 긴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왜 그가 쓴맛이 싫다고 했는지 이제는 알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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