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종료 5분 전 입니다. 답안지에 마킹 안하신 분들은 서둘러 마킹 해주세요. 시험이 종료되면 마킹 불가능 합니다.'
수현이와의 통화가 있은지 몇 일 뒤 일요일 문돌이는 그간 노력의 결과를 맺기 위해 토익 시험을 치고 있다.
시간은 5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파트7에서 아직 10문제도 넘게 못풀고 끙끙되고 있는 문돌이.
'시험 종료 3분 남았습니다.'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더 이상 문제지를 들고 있어봤자 나아질건 없다. a.b.c.d 넷 중에 하나로 일관성있게 찍어야 한다.
괜히 a,b,c,d 하나 하나 다르게 찍었다간 최악의 경우 남은 문제를 다 날릴수 있기에 넷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 만에 하나 로또라도 터지는 날에는 높은 득점을 할 수 있다. 문돌이는 조용히 눈을 감고 시험 출제자들이 정답 배분을 어떻게 했을지 고민해본다. 사회 통념상 오지선다 문제에선 3,4번이 답일 확률이 높다.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초중고 12년동안 꾸준히 찍어본 문돌이도 그 통념에 수긍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토익같은 사지선다의 경우에선 그 통념을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 것인가? 일단 보기가 4개가 있으니 처음과 끝인 a와 d를 제외한다. 그렇다면 남는건 b와 c. 기분상 b는 왠지 손이 안간다. 그건 시험 출제자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c로 밀어야 하나? 하지만 이게 함정인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d가 눈에 들어온다. c와 d 빨리 선택해야 한다.
'시험 종료 1분 남았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왠지 d다. 그냥 그런 느낌이 느껴진다.'
가까스로 남은 문제들을 d로 마킹하고 마지막으로 수험번호와 이름을 확인한다. 다행히 이상은 없다. 그리고 몇 초 뒤 시험종료.
뭔가 큰일을 해낸거 마냥 문돌이의 이마에 땀이 송글 맺힌다. 서둘러 휴대폰을 돌려받고 교실밖으로 퇴장한다. 학교 운동장으로 나와 스탠드에 앉아 한 숨 돌리며 긴장을 좀 풀고 가기로 한다. 근데 옆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뭔가 싶어서 옆을 보니 가채점을 하는것으로 보인다. 토익시험을 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문돌이는 그런 사람들이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분명 시험이 종료되면 문제지도 제출하는데 저 사람들은 뭘로 가채점을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는 문돌이.
'설마 다 암기해서 채점을 하는건가?'
너무 궁금해서 어떻게 하는건지 물어보고 싶지만 소심한 문돌이는 그냥 티안나게 옆으로 슬금 슬금 가서 멀찌기서 슬쩍 훔쳐본다.
그 사람들의 수험표 뒤에 뭔가가 적혀 있는게 보인다.
'아하, 수험표 뒤에다가 정답을 적는거구나. 근데 그럴 시간이 있나? 저 사람들은 공부 잘하나 보구나'
자신은 시간을 1초라도 아낄려고 문제를 풀면서 바로 마킹을 해도 시간이 모자라 못 푼 문제들을 뭘로 찍을까 고민했는데 저 사람들은 문제를 풀면서 수험표 뒤에 표기까지 했다고 생각하니 문돌이는 자괴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그런 감정도 잠시 아까 d로 찍은 문제들의 결과가 궁금하다. 그 중에서 가장 공부 잘해보이는 사람의 수험표를 일행들이 중간에 놓고 자신의 수험표와 대조 하고 있다. 문돌이도 가까이 가서 보고 싶지만 거리가 있기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문돌이의 성격상 씩씩하게 다가가서 같이 좀 보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너무 궁금하다. 앞에 문제들은 뭘로 선택했는지 어차피 기억도 안나고 마지막 열 문제의 답만 보면 되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문돌이. 오랜만에 용기를 내서 보여달라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문돌이를 향해 소리친다.
"오빠!!"
수현이다. 마지막으로 본게 벌써 몇 년전이지만 멀리서 다가오는 수현이의 얼굴을 보니 금새 기억이 난다.
예전이랑 얼굴이 좀 달라진거 같긴 하다만.
"어 수현아. 여기서 보네. 니도 오늘 토익 쳤나?"
"네. 오빠도 오늘 시험 쳤나봐요. 잘 쳤어요?"
"아니, 그냥 뭐 니는?"
"뭐 저도 그냥 그렇죠"
그때 문돌이의 눈에 수현이의 손에 있는 수험표가 보인다.
"야 니도 수험표 뒤에 답 적나?"
"네. 원래 다 그렇지 않아요? 지금 학원 단체 카톡으로 가답안 보내준데요"
문돌이는 갑자기 할 말이 없어진다. 원래 다 그런거라는데 왜 자신은 그러지 못하는걸까 하며 또 자괴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그보다 마지막 열 문제의 행방이 궁금하다.
"야 그거 제일 마지막 한 열 문제 그거 답 뭐로 나오든데?"
"파트7요?"
"어 그거"
"이상하게 저는 d가 많이 나오던데요"
"진짜???"
문돌이의 얼굴에 웃음꽃이 환하게 핀다. 수현이의 토익 실력은 모르지만 누군가 나와 선택을 했다는데 대하여 묘한 안도감이 든다.
물론 수현이는 풀었고 문돌이는 찍었지만.
"몇개나?"
"잠깐만요"
수현이가 손에 들고 있던 수험표의 뒤를 확인한다.
"4개가 d로 나오네요, 근데 왜요? 오빠 혹시 찍었어요?"
"아니 그게 아니고 나도 다 풀었는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d가 많이 나오는게 나만 그런건가 싶어서"
문돌이는 눈 하나 깜짝 안하고 태연하게 둘러댄다.
"오빠 어디가서 커피나 한잔 할래요? 같이 채점도 해보고"
"그러지 뭐. 저 앞에 스타*스 있으니까 거기로 가자"
오랜만에 여자랑 대화를 나누면서 걸으니 문돌이는 사뭇 설레기까지 한다.
체크카드에 2만원 남짓 밖에 없지만 '설마 커피만 마시겠지. 다른것도 먹겠나?' 싶은 마음에 별로 부담도 없다.
어느새 도착한 스타*스.
"오빠 뭐 마실래요?"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더블샷이랑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수현이가 주문을 하자마자 지갑에서 카드를 꺼낸다.
"야 내가 계산할께"
문돌이가 서둘러 체크카드를 꺼내보지만 이미 수현이의 카드가 단말기를 통과했다. 스타*스에 자주 오는지 멤버쉽 카드도 있는 수현이.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제가 살께요"
"고맙다야. 잘 마실께"
문돌이는 속으로 내가 아직 백수라서 지가 사는건가 생각한다. 조금 쪽팔리지만 그래도 수현이가 만약 '오빠 아직 취업안했으니까 제가 살께요' 했으면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텐데 수현이의 조그만 배려가 고맙다.창가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 문돌이와 수현이.
수현이가 커피를 샀으니 어떻게라도 보답을 하고자 하는 문돌이는 커피는 자기가 가져 오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다 문득 취업한 수현이가 왜 토익을 치는지 궁금하다. 무슨 사정이 있는건 아닐까?
문돌이가 조심 스럽게 물어본다.
"근데 니 다른데 이직할려고?"
"응? 갑자기 왜요?"
"아니 취업했는데 왜 토익을 치는가 싶어서.."
"아~ 이번달에 토익 성적 만료되서 그냥 치는거에요."
"아 그렇구나"
괜한걸 물어봤나 싶은 문돌이는 살짝 뻘줌해진다.
그때 마침 카운터에서 수현이의 이름을 부른다.
아까 마음먹은대로 문돌이는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앉아있어라. 내가 갔다올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