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야 할 글들이 많다.
내일은, 아니 오늘이구나, 아무튼, 세미나 하나와 미팅 하나를 해야 한다. 세미나와 미팅이라고 하니까 거창하다. 사실 아무 것도 아닌 일이다. 세미나라고 해봐야 주변의 바텐더들과 만나 바텐딩에 대한 잡담을 나누는 게 전부고, 미팅이라고 해봐야 내 칵테일 책을 담당하고 있는 편집자에게 '원고 언제까지 줄겁니까 대체'라고 욕을 먹는 게 전부다. 사실 아무 것도 아닌 일이지만 써야 할 글들은 충분히 많다.
오늘은, 아니 어제였구나, 아무튼 쉬는 날이었다. 저녁에 써야 할 글들을 시작해서 새벽 즈음에 마감하고 아침에 자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직원이 앓아 누웠다. 별 수 없이 가게에 출근했다가 새벽에 퇴근하면 도저히 써야 할 글들을 마치지 못할 것 같아 세미나 멤버인 다른 바텐더에게 백업을 요청했다. 그는 '에이, 내가 전에 물건 대신 좀 받아 달랠 때는 안 받아주더니.'라고 이야기했지만 기꺼이 백업을 봐 주었다. 써야 할 글들이 많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집에서 글을 쓰는 일이 잘 안 된다. 이유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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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년쯤 전에, 아니 이년쯤 전인가, 친구가 작업실을 얻었다. 학원 강사를 하던 시절 알게 된 친구였다. 영화 감독을 꿈꾸다가 꿈만으로 더 이상 먹고 살 수 없을 나이 즈음에 영화사에 취직한 친구. 영화판 일 치고는 꽤 괜찮은 연봉을 받기 시작한 그는 집에서 어중간하게 먼 곳에, 대학 시절 함께 꿈을 먹던 친구들과 공동 작업실을 구했다. 방이 세 개쯤 딸린 널찍한 지하 창고. 거기라도 가면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작업을 하러 놀러간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술을 마시러는 자주 놀러갔다. 거기라도 가면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친구에게 연락을 하고, 백업을 부탁한 바텐더를 가게에 남기고, 나왔다. 오토바이로 대충 삼십 분 거리. 밤 공기는 찬란했다. 적당한 속도로 적당히 차선을 바꿔가며 신촌에서 종로를 거쳐 동대문을 지나 광진구로 향하는 동안 핫팬츠에 니삭스를 입고 과속 기준 직전의 속도로 스쿠터를 타는 여자와, 1.5초 간격으로 차선을 변경하며 차선을 변경할 때마다 성실하게 깜빡이를 켜는 안전 운전자라고 하기도 뭐하고 도로의 불한당이라고 하기도 뭐한 남자를 구경했다. 둘 다 신선한 장면이었으나 그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내 갈 길을 갔다. 그들도 그들의 사정과 그들의 할 일이 있을 것이고, 나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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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편의점 샌드위치를 먹고 써야 할 글의 짧은 단락 하나를 썼다. 식곤증이 올라온다. 하지만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다. 잠깐 잘까, 하다가 잠을 깨기 위해 아무렇게나 쓰기 시작한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다. 차라리 잠깐 잘 껄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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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에 이런 작업실을 가질 수 있었더라면 너는 영화 감독이 되고 나는 작가가 되지 않았을까."
"술을 좀 더 마시고, 여자를 좀 더 만나고, 대책이 좀 더 없는,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았겠지."
그는 꽤 현실적이고 똑똑한 친구였다. 그런데 왜 영화 같은 걸 했을까. 하긴, 그러니까 영화 같은 걸 하면서도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을 구할 수 있었겠지. 내년에는, 몇 년 후에는 좀 나아질까. 글쎄. 지금은 몇 년 전 보다 좀 나은가?
그래도 좀 낫지. 너도 나도 더 이상 논술 강사는 아니잖아. 물론 논술강사 시절보다 시급이 낮은 일을 하고 있는 기분이지만.
그는 작업실을 얻었고 나는 가게를 얻었다. 그리고 우리 둘 다 직업이 있다. 원하던 직업과 아주 일치하는 직업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수긍할 만한 직업이다. 나는 그의 작업실에 가끔 놀러가고 그는 내 가게에 가끔 놀러온다. 그리고 우리는 술을 마신다. 그래. 술을 좀 더 마시고,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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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노트북을 살 때도 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때도 '아, 이제는 글을 쓸 수 있겠군.'이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노트북으로는 주로 게임을 했고 자취방에서는 주로 박진영식 게임을 했다. 다행히 친구의 작업실은 게임에도 박진영식 게임에도 그다지 적합한 장소가 아니다. 괜찮군. 대책 없이 써내려간 글이 대책 없이 늘어진다. 낳음당한 글에는 미안하지만 나는 그럭저럭 살아지는 것 같으니 충분히 이득.
차라리 잠깐 잘 걸 그랬나. 그래도 얼추 잠은 깬 느낌이다. 이제는 써야 할 글을 써야지. 해야 할 일을 하다보면 내일은, 혹은 오늘은 좀 더 나아지겠지. 아니라도 별 상관은 없다.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으니까. 버텨야지. 웃후아.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