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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10/15 22:00:37
Name 앙녕
Subject [일반] 교단일기
#1.

어제는 진학 설명회 겸 학부모 상담주간이라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었다.
예전에는 스킬이 부족해 학부모 한분 한분과 상담을 끝내고 가느라
밤 10시를 넘기는 사태가 발생했지만 이젠 나도 어엿한 4년차 교사 에헴.
한꺼번에 몰아해버리자라는 맘을 단단히 먹고 있는데.
진학설명회가 좀 늦어져서 그런지 두 분만 교실로 올라오셨다.
오늘은 좀 일찍 가겠구나 싶었다. 룰루랄라.

한 분은 굵은 눈썹, 푸석해보이는 머리결에 근심을 그득 담은 얼굴이었다.
학생이 원하는 진로보다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강력히 주장하셨다.
내가 해줄수 있는 말이 거의 없었다.
어머니는 인문계 고등학교의 장점을 건이한테 여러번 얘기해주기만을 바라셨다.
어머니의 꿈틀대는 검은 눈썹에서 눈물이 우수수 떨어질것만 같았다.
우현이 어머니가 들어오시자
다급히 검은 가방을 움켜지고 가는 모습이 자꾸 아른거렸다.

그리고 우당탕탕 제가 늦었지요라며 들어오시는 분. 우현이 어머니.
처진 눈썹과 눈매가 유쾌한 인상이었다.
아이고 선생님.하면서 어쩔 수 없지요 뭐.라며 개구진 표정으로 말씀하시는데
상담 내내 나도 웃고 말았다.
하지만 아들에 대해서도 정확히 간파하고 계셨다.
우현이는 똑똑하고 지혜롭고 어디에도 잘 어울리지만
어쩐지 혼자가 어울리는 학생이였다.
그렇다고 위축되지 않고 혼자를 즐기고 세상을 재미있어하는 아이였다.
어머니는 아직 우현이가 쏙 맘에 드는 친구를 못만난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아쉬운 점이긴 하지만 그것도 자기몫인걸요.하며 웃으셨다.
그리고는 아이고 선생님. 하시며 씩씩하게 교실을 떠나셨다.

두 아이는 두 엄마를 많이 닮아있었다.

#2.

어제 늦게까지 일하고 아무 약속이 없는 오늘은
칼퇴하고가서 침대에서 뒹굴뒹굴거리며 스맛폰이나 뒤적거리리라.라고 다짐하고있는데.
2반 선생님께서 자선단체 일일찻집을 떡하니 꺼내놓으신다.
오늘까지란다.
학부모님이 좋은일 하시는건 알겠는데,
학생회장 부모님이 3학년 전반 선생님들과 과학고 진학에 대해 얘기나누는 장면이 어쩐지 나는 불편했다.
전문계 고등학교도 인문계 고등학교도 갈 성적이 안되서
선생님 어떤 학교 가야해요?라고 묻는 한이에게
자립형 공립고등학교, 공립형 자율학교 나도 헷갈리는 학교이름 가득한 팜플렛을 쥐어주고
시간이 없다며 빠른 선택을 종용하고 온터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한자리 거나하게 맡고 계실듯한 한복입은 사모님들 사이에서 나는 이질감 가득한 표정으로 쥐포나 주워먹으면서 뚱하니 앉아있었다.

나는 곧죽어도 어디서 감투는 못 쓸 깜냥이라는 사실을 또 한번 확인했으며, 그래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하루였다.

#3.

인문계 고등학교는 장점이 많다.
하지만 공부가 싫어죽겠다는 건이에게
그 많은 장점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지만 건이를 불렀다.
인문계 얘기만 해도 두드러기 반응을 보이는 건이에게
엄마를 설득할 수 있는 방안을 잘 생각해보자.라고 말하는게
가장 마음가는 방안이었다.

그러면 건이는 집에가서 중간과정 다 생략하고 이렇게 말할게 뻔하다.
엄마 선생님이 나 공고가랬어.라고.
어쩔 수 없지. 뭐.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더 많으니까.

#4.

그리고 잊고 살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중학교 3학년 시절 비평준화여서 더 치열했던 학교 가르기 속에서
나와 다른 학교를 진학했던 친구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하는 뭐 그런 아련돋는 그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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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15 22:31
수정 아이콘
고생하십니다. 공교육 전반이 욕 먹는 것과는 별도로 일선의 많은 교사들이 많이 고민하고 많이 노력하시죠.
15/10/16 09:43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15/10/15 23:09
수정 아이콘
그나저나 일일 찻집은 학부모회 혹은 학생회 기금 마련을 위한 것인가보네요. 저게 안 좋게 보면 '힘 있는 학부모들이 학교를 좌지우지한다' 라고 볼 수도 있지만, 좋게 보면 '그나마 돈 좀 있고 자녀 교육에 시간 투자하는 부모가 있어서 학교에 도움이 된다' 라고 볼 수도 있지요. 아마 저 학부모들은 '일은 우리가 다 하고 결과물은 다른 학생들도 나눠 가지는 거잖아요. 워킹맘들은 학교에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데 나는 그래도 일 좀 하는 거니까, 선생님들이 우리 아이 진학 상담 정도 조금 신경 더 써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닐까요? 그럴 거 아니면 내가 이 일을 왜 하겠나요?' 라고 생각하실 것 같아요.

공립 학교에 아이 보내놓고, 학부모회에 약간 돈만 보태놓은 뒤 활동은 전혀 하지 않는 학부모 1인... 사실 돈도 조금 더 내고 일도 조금 더 할 의향이 있긴 한데, 이미 일하는 분들 (그나마 대부분이 백인 아줌마들이니) 사이에 끼기도 참 거시기 해요.
15/10/16 09:45
수정 아이콘
네 좋은일하시는거에요. 소외계층 자녀 지원도 많이 해주시고. 감사하죠. 저는 엄두도 못내는 일이라 더 대단해보이십니다ㅜ
새벽이
15/10/16 01:19
수정 아이콘
글만 봐도 좋은 선생님이신 것 같습니다. 초중고대학까지 전부 공립학교를 다녔던 저도 글쓴 분과 같은 선생님들을 꽤 많이 만난 것 같습니다. 그 때는 잘 몰랐지만 커서 보니까 제가 이만큼 성장하는데 엄청난 영향을 받은 것 같네요. 아무리 공교육이 무너지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좋은 선생님들이 많아서 다행인 것 같습니다.
15/10/16 09:54
수정 아이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항상 묻는 질문이 요즘 애들 가르치기 힘들죠? 그러는데 저도 따지자면 요즘 애들이라서 가르칠만하다. 그렇게 얘기하곤 합니다.
새벽이
15/10/16 10:43
수정 아이콘
오 현답이시군요. 제게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은 선생님이 두 분이신데, 한 분은 저와 비슷한 세대 (저희 학교가 첫 부임학교)였고 한 분은 저희 아버지 연세셨습니다. 특히 첫 분은 학생들을 엄청 사랑하는 분이셨습니다. 매번 방학마다 학생들 모아서 전국으로 여행을 다니셨습니다. 선생님께서 그 비용을 다 대셨죠...대학 졸업할 무렵에 마지막으로 찾아 뵈었었는데 작년에 부고를 들었습니다. 제가 몇 년째 외국 생활 중이라 찾아 뵙지 못하고 집 화장실에서 와이프 몰래 엄청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더 슬펐던 것은 선생님께서 아직도 미혼이셨다는 것입니다...작년 겨울방학까지도 학생들이랑 전국여행을 다니셨다고 들었는데 그게 마지막 여행이 되었답니다...두번째 선생님은 고1때 담임이셨던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좀 꼬장꼬장하셨어도 입시에 찌든 학생들을 엄청 챙겨주셨습니다. 저희 아버지와 연세가 같았는데 아침마다 매일 교문 앞 낙엽을 묵묵히 쓸으셨던 모습이 선합니다. 그 선생님이 더욱 기억에 남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그 어려운 "관동별곡"을 주구장창 외우게 하고 매주 토욜일마다 종례는 "관동별곡" 암송으로 마무리를 하게 하셨습니다...근데 저희 수능 때 그 관동별곡이 나왔습니다...그리고 아름답게 문제를 맞힐 수 있었지요...흐흐...아직도 "강호에 병이 깊어 듁님에 누웠더니..."기억하고 있습니다. 여튼 중고딩 때 선생님들의 역할은 너무나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진학도 중요하지만 학생들과 진심으로 교감하는 선생님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학생들도 그걸 좀 알아야 할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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