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시판
:: 이전 게시판
|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3/08/07 18:36
음, 이 글은 설국열차를 소재로 영화를 비롯한 서사 예술 전반을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설국열차에 대한 리뷰 격인 이하 글들의 연장선상에서만 보긴 어렵다는 판단에 게시글로 올렸습니다.
13/08/07 18:35
제가 이해한 바로는 동감합니다
특히 ....통찰만으로 위대해질 수 있는 시대는 대략 백 년쯤 전에 지났다.... 완전 동의합니다
13/08/07 18:40
이 글에 공감합니다.
저는 모든 영화가 하나의 잣대로 평가받아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영화와 상업영화는 분명 다른 맥락에서 평가 받아야 합니다. 다만 설국 열차는 '상업영화'의 카테고리 안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분명하므로, 설국 열차가 위대한 영화가 되기 위해선 본문에서 언급하신대로 '상업적인 재미도 한꺼번에 녹여내어, 주제에 골몰하기 좋아하는 영화들에 관심이 없는 관객들도 영화의 주제에 자연스럽게 골몰하게끔' 만들어졌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설국 열차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13/08/12 02:26
동감. 참고로 라이프 오브 파이는 두가지 다 해냈다고 봅니다. 숨겨진 뜻을 몰라도 충분히 흥미로웠고 알고 난 뒤에도 흥미로웠습니다.
13/08/07 19:47
동감입니다. 그 점에서 설국열차가 충실했던 부분과, 팬들이 설국열차를 고평가하는 부분 사이에 이율배반이 느껴져 위 글을 올린 것이구요.
13/08/07 19:12
잘 읽었습니다만 설국열차 관련한 내용이 나오는데
제목에 단순히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이라고만 하시면 아직 설국열차를 관람하시지 않은 분들이 그냥 들어오시지 않을까 합니다. 부제라도 달아서 인식할 수 있게 해두시는게..
13/08/07 19:25
저는 그리 동의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서사 예술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종합적인 면을 지니고 있으며, 물론 서사도 중요하지만, 서사가 약하더라도 다른 부분에서 출중하다면 좋은 영화로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바타를 매우 훌륭하다 생각합니다만, 아바타의 서사가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영상과 연출이 좋아서였습니다. 12 Monkeys를 매우 좋아합니다만, 그 영화 역시 서사를 강점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제가 좋아서였습니다. 물랑루즈를 좋아합니다만, 서사를 강점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음악이 좋아서였습니다. 훌륭한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는 주제, 서사, 연출, 영상, 연기 등 다앙한 요소가 있습니다. 당연히 그 중 어떤 요소가 매우 부족하다면 좋은 영화로 평가 받기 힘들겟습니다만, 서사가 부족하더라도, 다른 요소가 매우 출중하다면, 좋은 영화로 평가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서사 예술이라 규정한다면 대부분의 상업영화는 좋은 영화로 분류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영화는 종합 예술입니다.
13/08/07 19:32
언급하신 예의 작품들도 서사가 나쁜 작품들은 아니죠.
그리고 종합 예술이다와 서사 예술이다가 위배되진 않습니다. 통상적인 대중영화중 서사가 주가 아닌 영화 자체가 거의 없기도 하고 말입니다.
13/08/07 19:37
서사가 강점인 작품들이라 말하기도 힘들지 않을까요?
다른 요소가 일정 수준 이상이고 특출한 부분이 있다면, 좋은 영화라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설국열차를 못봐서 그 영화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사에 적당한 구멍이 있어도 그것이 거슬릴 정도로 치명적인 것이 아니고, 다른 장점이 있다면 좋은 영화로 인식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사가 영화를 평가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것은 맞습니다만, 다른 요소들도 그만큼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13/08/07 19:40
서사에 강점이 있다는 건 서사에서 타 작품과 차별되는 특출남이 있냐의 문제고
서사에서 특출남이 없더라도 기본값은 해야 사람들이 무리없이 몰입해 즐기게 됩니다. 설국열차는 그 지점에서부터 좀...
13/08/07 19:42
저도 각각의 요소가 기본값은 해야 된다고 말씀 드리고 있는 것이고, 설국열차는 저는 보지 못해서 어떤 영화인지 모릅니다.
기본도 못하는 요소가 있으면 아무리 특출한 부분이 있어도 몰입이 힘들죠.
13/08/07 19:39
예, 종합 예술이죠. 헌데 설국열차의 경우, 영화에서 중점적으로 파고 들어가는 부분이 그 영화의 주제의식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물랑루즈나 아바타와 같은 궤에서 보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매트릭스 2의 사례를 든 것이구요. 매트릭스 2를 본 관객들이 매트릭스 2가 별로였다고 비판하자, 이에 대해 매트릭스 2의 팬들이 반박이라고 논한 게 영화 말미에 등장한 설정과 그 설정이 내포하는 주제의식이죠. 그런데 팬들의 그러한 논박에 설득된 관객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봐도 매트릭스 2는 너무나도 많은 부분을 키아누 리브스의 액션에 중점을 맞추고 있었으니까요.
13/08/07 19:44
제가 본문에서도 언급했지만, 봉준호 감독이 치열하게 주제의식을 파고 드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으면, 그렇게 만들었으면 됩니다. 굳이 반란 과정 중 액션에 많은 비중을 할애할 필요없이요. 그랬다면 전체 서사에 무리없이 주제의식에 대한 사유를 녹여낼 수 있었겠죠. 헌데 봉준호는 그리 하지 않았습니다. 뭐 장난 아니게 투자를 받은 이상 상업영화로서도 일정 이상의 즐길 거리를 뽑아내야했기 때문일수도, 그외 다른 이유일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었건 간에 하나의 작품으로서 주어진 설국열차가 충분한 완성도를 갖추지 못한 것을 비호해주진 못합니다. 아바타나 물랑루즈는 자신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 들려주고 싶은 것에 철저하게 입각하여 그 부분의 비중을 극대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설국열차는 그랬는지 의문입니다. 특히 설국열차를 고평가하는 팬들에게서, 영화가 많은 비중을 할애한 부분과의 이율배반이 드러나구요.
13/08/07 19:44
제목을 영화 일반에 대한 것으로 하셨기에 설국 열차의 예로 영화 일반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서사 위주로 영화를 해석하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 것이구요. 그래서 서사에는 강점이 없어도 좋은 영화일 수 있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설국열차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이라면, 저는 설국열차는 보지도 않았으니 논할 입장이 아니네요. 설국열차에 대한 논의 였는데 제가 오독한 것이면 죄송합니다.
13/08/07 19:52
1. 설국열차에 대해 말씀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2. 그게 아니라면 제가 본문에서 말한 '서사'는 영화에서 제시되는 시간과 이야기를 지칭한다고 받아들이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글에 오해의 여지가 있었다면 이 부분 사과드리겠습니다. 저는 서사에 강점이 있는 영화를 찬양하는 게 아니라, 어떤 부분에 강점을 두든 그 부분을 확실히 강조하여야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럴 때에야 영화가 자연스럽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구요. 3. 그리고 이때 문제가 될만한 반론한 부분을, 설국열차라는 영화를 사례로 풀어낸 것인데...... 님께서 영화를 보지 않으셨다면 아무래도 사례로서 온전치 못했을 터이니 이 점은 아쉽네요. 그렇다면 아쉽게나마 매트릭스 2를(혹시 보셨다면) 대입해보셔도 전체 맥락에 무리 없으실 겁니다.
13/08/07 19:55
2번에 대해서. 설국열차가 아닌 다른 영화 일반에서도, 영화는 서사를 강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라면,
다른 부분에 충분한 강점이 있는 영화의 경우, 서사는 거슬리지만 않을 정도여도 좋은 영화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3/08/07 19:57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거슬리지 않는 수준조차 만족하지 못하는 작품들도 상당한데, 이 부분을 주제의식으로 비호하려는 주장이 간간히 보여서요.
13/08/07 20:10
흠..., 설국열차를 보지 못한 입장에서 정보만 접했을 때는 주제 의식은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것 같았고,
영화의 이야기나 연출에서 기대할 부분이 있을까 싶었는데 이런 평이 꽤 있는 걸 보니 의아하네요. 사실, 저도 영화가 설정한 세계관 내에서의 모순이나 개연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는 매우 싫어하는 편이라서... . 말씀을 나누고 보니, 크게 관점이 다른 것이 아닌데, 설국 열차가 중심이 되어 논란이 되다 보니, 설국 열차의 허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신 것이고, 저는 영화를 안 본 입장이라 그런 논란을 가급적 피하다 보니 그걸 모르고 오해한 부분이 있는 것 같네요. 이런 정보를 접하니 영화에 대한 기대는 뚝 떨어지는데, 그래도 궁금해서 보러는 가봐야 겠습니다.
13/08/07 21:41
뭐, 저는 영화를 보는 시간이 마냥 즐겁진 않았습니다만 영화를 보고 지인과 영화에 대해 말하는 시간은 즐거웠습니다. 이게 보편적일진 모르겠습니다만, 아래 룰루랄라님의 글을 보니 그리 특별한 케이스인 거 같지도 않네요. 마냥 감상적인 이야기만은 아닌데... 하물며 모니터로 마주했을 따름인 저와 님이라도 이 영화를 계기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적어도 그러한 소재로서 값할 영화이긴 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화제가 된다는 건, 해당 화제가 여러 사람들에게 공유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개인 간의 화제가 될 하나의 여지 정도는 만들어주니까요.
13/08/07 23:08
직접적인 반론치고는 논리적 근거가 부실하네요
훌륭한 영화에 서사가 중요하다는 본문이 틀리기 위해선 다른 부분에서 '매우' 출중한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하며 기본적인 서사가 뒷받침되어야 하고 어떠한 요소가 '매우' 부족하지 않아야 되는군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놀랍게도 영화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전문가들이나 수십년간 경험을 쌓은 사람들조차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정의내리기를 빈약한 논리구조에 자신의 감정적 경험만으로 하고 계시네요. 온라인이 아니라면 차후 신뢰도에 영향을 쌓을만한 허언이네요
13/08/07 23:33
저에게 하신 말씀인가요? 너무 맥락이 없는 이야기여서, 제게 한 말이 맞는 지 확인해야 했습니다.
영화는 서사 예술이며, 서사가 훌륭해야 좋은 영화라고 말한 것으로 본문을 파악하고, 영화를 구성하는 여러가지 기본 요소에 결격인 요소가 없다면, 기본을 충족하면서 서사가 훌륭하지 않더라도 다른 요소가 출중하면 좋은 영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어떤 논리적 결함이 있는지요 그 견해에는 당사자인 팟저님도 동의를 해 주셨는데요? 마지막에 제가 영화에 대해 내린 정의는 "영화는 종합 예술이다."라는 것인데, 영화는 이야기, 영상, 연기, 음악, 음향 등이 어우러진 종합 예술이 아닌가요? 이게 감정적 경험에 의한 정의인가요? 영화를 종합예술의 한 갈래로 보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견해입니다만? 전혀 놀랍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의 감정은 전혀 개입 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의 신뢰도는 온라인이던 아니던 상관이 없으며, 저의 말은 허언이 아닙니다. 후후하하하님의 말씀에서 일말의 논리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후후하하하님의 말씀이 허언 같은데요?
13/08/07 23:58
영화는 종합 예술이므로 그중의 일부분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은 틀렸고 모든 요소들을 전체적으로 보는 것이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이다라는 정의를 내린 것 아닌가요? 지금은 영화는 단지 여러 요소들이 포함되는 예술이다라고 하시는데 서사적요소가 중요하다는 말에 반론으로 영화에는 모든 요소가 포함됩니다가 적합한가요?
또 기본요소에 결격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서사가 약하더라도라는 잘못된 표현을 쓰면 안되셨죠. 만약 그런 뜻으로 말했다쳐도 서사는 중요하고 그것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영화는 좋은 영화가 아니다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도 될 수 없습니다. 윗 댓글대로라면 댓글의 논리만 부족한게 아니라 기본적인 이해가 그래보이시네요
13/08/08 01:21
전혀 위의 대화의 맥락도 논지도 파악 못하고 저를 물어 뜯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시네요. 안쓰럽습니다.
팟저님과의 대화에서 제게 부족했던 부분은 댓글의 논리가 아니라 '팟저님 글에 대한 오독'이었습니다. 저는 팟저님께서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시고서, 그 안의 내용에서 서사를 매우 강조하시기에 '영화는 서사 예술이다. 서사가 훌륭해야만 좋은 영화이다.'라고 주장을 하시는 것으로 오독을 하였습니다. 그에 대한 반박으로 '영화는 종합 예술이며, 다양한 각각의 요소에 결격 사유가 없다면 서사는 기본만 하더라도 다른 요소가 출중하면 좋은 영화일 수 있다.'라고 반박한 것입니다. 제 반박에 논리가 부족하거나 오류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팟저님께서 댓글로 '설국 열차라는 영화는 서사가 중요할 만한 영화인데, 그에 부족함이 있으며, 이를 주제 의식이 훌륭하다는 이유로 변호하는 의견이 있는데, 이는 적합지 않다. 영화는 그 영화에 맞는 강점을 강조해야 한다.'라고 입장을 명확히 해 주셨고, 그에 저는 설국열차라는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그에 대한 의견은 없으며, 영화 일반에 대한 의견은 유사한 것인데 오해를 하였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의 최초의 오독이 있었으며, 대화의 과정에서 표현이 부족한 부분도 하나둘 있었겠지요. 그러나, 이는 이리님과 팟저님과의 대화의 과정에서 제가 말하고자하는 바가 무엇인지 밝히었고, 표현도 정정하였으며, 오해에 대해서도 인정하였으며, 서로의 의견의 수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후후하하하님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가요? "훌륭한 영화에 서사가 중요하다는 본문" 운운하시며, 전체적인 논의의 흐름은 무시한 채, 팟저님의 진의가 아닌 내용에 여전히 집착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런 댓글이 지난 후에도 아직도 이해를 못하고 계시는 겁니까? 아니면 추후의 대화는 무시한 채, 최초의 댓글만을 근거로 이야기하시는 겁니까? 제 논리가 틀린 것이 아닙니다. 팟저님의 글을 오해하였을 뿐, 오해가 사실이라면 유효한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논리에 전혀 문제가 없는 제 주장에 후후하하하님이야 말로 아무런 논리 없이 제 주장에 논리가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가 정의한 것은 '영화는 종합예술이다.'라는 것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어디에 감정적 경험이 들어가 있습니까? 오독을 한 것은 제 실수입니다. 그러나, 그 오독과 실수를 인정하고 글쓴이와 의견을 수렴하였으며, 유사한 결론에 도달하였는데, 이것이 어떻게 제 신뢰도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후후하하하님의 마지막 줄에 비추어 보면, 팟저님의 주장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에서 제가 실수 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잘 못 이해한 것을 파악하고 인정하였는데, 후후하하하님은 여전히 기본적인 이해조차 못하고 계시네요. 그리고, 댓글이 어떻게 진행 되었는지 문맥 조차 파악도 못하고 계시네요. 팟저님 주장을 잘 못 이해하였을 뿐 논리에는 문제가 없는데 그 또한 파악을 못하시니, 논리도 없으시네요. 남을 공격하려거든, 최소한 글이라도 제대로 읽고 공격하세요.
13/08/07 19:32
뜬금 없는 덧글이지만 본문에 언급된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꼭 보시는걸 추천합니다. SF에 근본적인 거부감이 있는 분들도 전혀 부담없이 즐길수 있는 현시대의 SF 마스터피스입니다.
13/08/07 19:49
동감입니다. 굳이 SF란 장르로 한정할 것 없이, 그만큼 소재와 주제의식, 서사와 형식 사이의 팽팽한 긴장과 조화가 따박따박 맞물려 긴밀한 조응 관계를 형성하는 작품은 굉장히 드무니까요.
13/08/07 20:07
그런데 설국열차라는 영화가 그 정도로 서사와 영화의 주제 의식 사이에 괴리감이 있었나요?...
물론 저도 스토리의 개연성 부분에서 좀 고개가 갸우뚱 한 장면들이 있긴 하지만 큰 무리 없이 즐길 수는 있었는데요... 물론 저의 영화적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박리지 만큼이나 얇긴 합니다만...
13/08/07 21:35
워낙 화제작이니까요. 평소 생각하던 글감이 있는데 그냥 꺼내면 아무래도 뜬금없고 쓴 맥락에 대한 이해도 어려울 거 같으니 이런 기회를 타야죠. 완벽히 같진 않을지언정 개인이 정말 말하고픈 부분이 모두의 화제와 접점이 있는 순간은 그리 자주 찾아오지 않으니 말입니다.
13/08/07 21:41
본문 발췌
- 그건 아주아주 힘이 든 일입니다. 지극히 소수의 위대한 작품들만 성취할 수 있는 것이죠. 전 영화보다 역사가 긴 소설에서도 이러한 요구에 완벽히 부합하는 사례를 몇 알지 못합니다. 아니, [사실 개중 일부 충족한 작품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해질 수 있는 걸요.] 설국열차의 작가가 만약 그걸 하고 싶었다면, 자신이 사력을 다해 설국열차를 위대한 영화로 만들었으면 될 일입니다. ... 아, 혹시나 오해살까 싶어 한마디 남기자면 그냥 유머입니다.
13/08/07 23:26
pgr에 올라오는 설국열차 관련 글들을 보면 글들을 어렵게 써놔서 읽지를 못하겠어요 하하 물론 이 글 쓰신분의 의견에는 적극 공감합니다.
13/08/08 00:13
개연성에 입각해서 본다면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오렌지 같은 경우는 대단한 망작입니다. 시계태엽오렌지에 비하면 설국열차의 개연성은 탄탄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작의 반열에 오른건 스타일의 특별함과 소설에 기반한 알레고리로 기본도 안되는 개연성을 덮어버렸기 때문이죠.
본론으로 돌아가서 설국열차의 경우 개연성을 포기함으로써 쉬지않고 알레고리적인 요소를 배치하고 있습니다. 기나긴 전투씬도 결국 물고기와 해피버스데이와 횃불을 대중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며 앞칸을 한가롭게 여행하는 것 역시 수단일뿐이죠. 목적이 알레고리의 순조로운 배치라면 설국열차의 수단은 합목적적입니다. 다양한 알레고리들을 큰 거부감 없이 배치한것만으로 설국열차는 수작이라고 봅니다. 덧붙여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작이 될수 없는 까닭은 죽을때까지 잊지못할 명장면이 없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장면이 북극곰이 아니라 복잡미묘한 고아성의 클로즈업이었다면, 송강호의 분노가 조금더 폭발적이었다면, 유치원칸이 조금더 기계적인 느낌이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13/08/08 00:45
본문에서 저는 개연성을 한 적 없습니다.
1.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 태엽 오렌지의 경우, 체제에 불온한 태도를 취하는 이들의 저열함과, 이들을 처단하는 체제의 폭력성을 양 축으로 체제 안밖의 모순을 직시하고 영화 속에서 철저히 이 부분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덕분에, 미완인 소설을 두고 영화 작업에 들어갔다가 완성된 시계태엽 오렌지의 결말을 보고 큐브릭이 실망했다는 일화가 허툰 소리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전'의 반열에 들만한 작품을 만들어내죠. 2. 기나긴 전투씬의 과정 중 물고기, 해피 뉴 이어, 횃불이 등장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기나긴 전투씬이 알레고리적 요소를 효과적으로 녹여내는 매체로서 합목적성을 띈다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죠. 전투씬은 제가 생각하기에도 별로 나쁘지 않았습니다. 헌데 그러한 영화의 호흡이 결말부에 이르러 '사실은 이러했다!'는 식의 지리한 폭로전으로 뒤바뀌는 양상은, 글쎄, 아무리 보아도 맥이 빠지죠. 예컨대, 길리엄이라는 인물이 있을 텐데요. 최후의 순간 커티스에게 자신이 하던 '혁명'이 또 하나의 노예도덕이었음을 깨우쳐 주는 장치로서 기능하기 위해 안배된 캐릭터겠죠. 헌데 이는 커티스의 혁명을 이끈 내부정보원으로서의 윌포드란 장치와 중첩이 되고, 이야기 속에서 이 둘이 동시에 밝혀져,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길지 않은 영화의 러닝타임동안 굳이 둘 씩이나 필요했을까 의문입니다. 그 탓인지 영화 시작 초중반만 하더라도 엄청 중요하게 부각된 정보원의 존재는 갈수록 희미해지고, 관객도 별로 신경쓰지 않게 되지요. 초반에 서사를 이끌기 위해 그만큼 강세를 줘서 강조를 했다면, 그 비중에 걸맞게 마무리를 하고 분명한 매듭을 지어야합니다. 그저, 스파이 길리엄이란 충격에 은근슬쩍 묻어가는 식으로 끝날 게 아니라요. 3. 그리고 주제의식을 내포하는 알레고리가 숨어 있는 게 사실이긴 한데, 그 개별적인 장치들이 단일한 주제의식을 떠받치는 하나의 체제로서 미적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는 좀 의문입니다. 다시 한 번 길리엄 이야기를 해볼까요? 엔진 칸 윌포드의 말에 따르면 길리엄은 윌포드의 이해자였고, 열차의 균형을 지탱하는 축이었습니다. 윌포드가 만들어놓은 체제에 찬성하는 캐릭터였죠. 헌데 물 공급칸을 점령한 이후 끝내 엔진까지 점거하려는 커티스에게 길리엄이 한 이야기는, 윌포드의 입을 봉하고 그가 어떤 말도 꺼내기 전에 죽이라는 것이었지요. 그냥 흘려버릴 대사라기엔 그 말을 뱉는 길리엄을 잡는 분위기가 꽤나 의미심장했습니다. 그저, 자신에 대해 윌포드가 떠들 비밀이 두려웠던 것일까요? 글쎄,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지양하고자 자신의 팔뚝까지 잘라내 체제 유지를 강변하던 길리엄의 캐릭터상 어울릴만한 행동이 아닙니다. 아니면 윌포드를 처단해 엔진칸을 차지할 커티스 역시 결국은 이름만 바뀐 균형의 수호자가 되리란 걸 커티스 자신이 알게 하는 걸 원치 않았던 것일까요? 글쎄, 이러면 그 사실을 대놓고 떠들어댄 윌포드와 길리엄은 바라보는 방향이 달랐다는 말이 되어버리지요. 그럼 대체 윌포드와 구획되어 길리엄이 지시한 건 무엇인가요? 영화는 이 부분에 대해 말을 하지 않습니다. 너무 긍정적인 뉘앙스였나요? 영화는 이러한 알레고리들을, 잔재한 이러저러한 떡밥들을 회수하지 않은 채 그냥 방치해버립니다. 물론 모든 영화가 모든 떡밥들을 수습할 수는 없죠. 헌데 길리엄과 같은 경우 서사 상에 있어서든, 그 서사가 특정한 주제의식에 입각하여 굴러간다는 근거로서의 알레고리란 측면에서든 그냥 옥의 티쯤으로 처리할만한 캐릭터가 아니었습니다. 달리 말해, 이 영화는 시계 태엽 오렌지와 달리 자신이 상정한 주제의식에 철두철미하게 입각했다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거지요. 4. 해피 뉴 이어는 저도 참 인상깊게 봤고, 어느 면에서 보든 참으로 의미심장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영화의 격을 높여줄만한 부분이죠.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제가 본문에서 봉준호의 의도가 이러저러한 것이었다고 말할 (자신을 얻을)수 있었구요.
13/08/08 01:17
1 결국 서사에 대한 지적이 서사에서의 개연성에 대한 지적으로 보았습니다. 이글의 시발점인 이리님의 글 또한 개연성을 문제 삼고 있었구요.
2 시계태엽이 고전인건 저열한 폭력을 저열하게 보지않았기 때문이죠. 단순히 강간폭력을 저열하게 봤다면 원작의 결말을 바꿀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의 행동에 개연성이 요구되는데 상콤히 무시하죠. 소설에서 갖춰진 개연성을 위한 장치마저 모두 제거합니다. 덧붙여서 소설이 출간되고 십년뒤에 영화가 나왔는데 결말을 보고 실망한건 큐브릭이 아니라 소설가 앤서니 버지스였을겁니다. 3 길리엄과 윌포드의 분리는 반드시 필요했다고 봅니다. 커티스의 거울로써의 길리엄과 커티스에게 길리엄의 길을 제시하는 윌포드로써 역할분리는 반드시 필요하죠. 길리엄의 경우는 제가봤을때 충분히 포지션을 드러냈다고 봅니다. 물칸 점령이후 처음으로 앞칸을 가게되면서 날린 멘트고 결국 길리엄의 조언과 달리 행동하면서 길리엄의 길을 따라가는 커티스의 모습만으로 길리엄은 영화구조상에서 제역할을 다하죠. 4 다만 슈퍼맨 요원만큼은. 영화의 격을 떨어트리는 사족이라고 봅니다.
13/08/08 01:40
2-1. [체제에 불온한 태도를 취하는 이들의 저열함과, 이들을 처단하는 체제의 폭력성을 양 축으로 체제 안밖의 모순을 직시하고], 앞 부분만 보신 것 같네요. "저열한 폭력을 저열하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긴 어렵다고 보는데요. 그래서 저는 굳이 스탠리 큐브릭이 굳이 개연성을 무시했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마찬가지로 소설에서 갖춰진 개연성을 위한 장치는 아예 표방하는 주제의식이 달랐기 때문에 지적할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하구요.
2-2. 큐브릭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선가 주워들은 게 있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었나보네요. 제가 들은 이야기론 큐브릭이 시계태엽 오렌지를 접했을 당시, 소설이 출판되긴 했지만 소설판의 결말부는 덧붙여지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정확한 사실 관계는 나중에 한 번 알아봐야겠네요. 여하간 지적 감사하고 부주의는 사과드리겠습니다. 3. 길리엄과 윌포드의 분리가 필요했느냐와 그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갖가지 장치들을 온전히 수습했냐는 별개의 이야기죠. 윌포드의 편지 장난이 서사의 필요에 의해 존재한 건 맞습니다만, 그렇게 필요에 의해 존재했으면 그 써먹었던 비중에 걸맞게 수습해야한다는 게 제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님 말처럼 큐브릭이 그러한 '개연성'을 날려버렸다고 시계 태엽 오렌지를 본다한들, 시계 태엽 오렌지는 시종일관 그러한 개연성을 철저하게 날려버리는 반면, 설국열차는 그렇지 않죠. 에드가라는 캐릭터에게 실렸던 비중이나 불구인 길리엄의 신체는 철저하게 수습합니다. 문제는 그 수습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눈에도 대놓고 드러날만치 임의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길리엄 이야기로 넘어가보면, 길리엄이 윌포드의 입, 혓바닥 운운한 건 그냥 앞칸으로 가게 되면서 날린 멘트라고 하기엔 의문이라는 겁니다. 그냥 "윌포드를 처단하라"거나 "윌포를 대신하라"와는 확실히 다른 뉘앙스니까요. 헌데 주제의식에 입각해서든, 서사 상으로든 이 부분에 대한 답은 어디에서도 찾기 어렵습니다. 제가 위에 써놓은대로 나름의 답을 내놓을 경우, 그 답은 그냥 공중에 붕붕 떠다니게 되죠.
13/08/08 01:47
딴 얘기는 끼기 귀찮고(모바일이기도 하고..)
시계태엽오렌지 원작과 영화는 아예 다른 주제라고 봐도 무방하지요. 영화의 경우 "본성이 악한 존재(주인공)라도, 국가가 그것을 교정하는 것은 폭력이 아닌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의 개연성을 찾는 건 의미가 없죠. 그건 그냥 '설정'이거든요. 반면 소설 시계태엽오렌지는 주인공의 개화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더 설명이 따라오는 겁니다. 소설에선 불량청소년이라는 디테일이 있죠. 당대의 또래집단의 어휘사용 표현과 묘사에 있어서 시계태엽오렌지 소설은 손에 꼽을 만큼 뛰어난 묘사가 된 작품입니다. 그 리얼함으로 주인공의 악행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개연성을 쌓죠. 결국 이런 차이는 소설과 영화의 엔딩에서 극명하게 갈립니다. 영화에선 개화가 안되고, 소설은 되기 시작하니까요. 결국 영화에서 범죄에 개연성이 없는 건, 주인공의 악함을 좀 더 본성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린 의도적 연출에 가깝습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이유없는 악이어야 했습니다. 반면 소설은 그의 악을 개연성 있게 설명해야만, 그의 감화도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영화가 개연성이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범죄에 대한 부분이 그렇단거죠. 뭐 돌이켜보니 이게 설국열차가 허접하게 묘사한 혁명연출이 엉망인 이유랑 비슷하네요. 아무리 스킵하거라도, 중요한 부분은 개연성이 있어야한다는 거죠. 안 그러면 알레고리가 배치되어도, 디테일이 부족해 거슬리게 됩니다.
13/08/08 02:11
국가에 의한 교정에 대한 질문은 소설에서도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있게 다루어 지고있습니다. 그 부분이 소설과 영화의 차이는 아니죠. 주제가 달라 어느 한쪽에는 개연성이 요구되고 어느 한쪽에는 요구되지 않는게 아닙니다.
소설에서 알렉스는 이젠 재미없어졌을뿐이다라 답할뿐인데 이걸 개화라 할수있을지는 모르겠네요. 과거의 알렉스를 잊지말아 달라고 까지 부탁하는데요. 따라서 소설에는 개연성이 크게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개연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소설에서도 악에 대한 이유는 제시 안합니다. 그냥 구역질나서 하는거에요. 왜? 에는 답이없죠. 어차피 결말에서 청춘은 원래 그래라고 답하니까요. 그에 반해 영화에서 국가폭력부분의 물리적 비중은 오히려 줄었습니다. 더욱이 첫 강간과 폭력씬에서 우아한 클래식을 트는 장면은 원작에서는 없던 내용이고, 소설가의 부인을 강간하는 장면에서도 각종 복선과 알레고리는 삭제되고 폭력적미학만이 남습니다. 또한 결말부분에서 소설과는 다르게 알렉스는 다시 폭력을 저지르고 섹스를 하는 환상으로 끝나죠. 오히려 영화가 알렉스의 폭력성에 관심이 많고 긍정합니다. 알렉스의 비굴한 모습도 많이 사라졌구요. 그런데 소설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폭력을 묻고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알렉스의 폭력을 설명하고 왜 영화는 알렉스의 폭력에는 국가의 폭력과 달리 클래식을 틀어쥤는가를 설명할법한데 그런거없죠.
13/08/08 02:15
클래식을 틀어줬느냐는 이유는 충분히 설명됩니다. 알렉스라는 개인의 기호조차도 억압하는 폭력을 드러내기 위해서죠.
만약 님의 질문이 해당 영화의 폭력 과정 속, 그러니까 영사기가 돌아가는 와중에 왜 하필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나왔는지를 묻는 것이라면, 그 답은 역사에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해당 장면에서 제시되는 건 주로 2차 세계대전, 특히 나치와 관련이 많은데요. 당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나치의 선전 음악으로 활용되었으니까요. 특히 푸르트뱅글러가 1942년 나치의 간부들 앞에 서 베를린필이 연주하는 9번 교향곡을 지휘하는 영상은 굉장히 유명하죠.
13/08/08 02:19
오해가 있는것 같습니다. 그부분은 알렉스가 고문받는 장면이고 알렉스가 가장 좋아하는곡을 이런대 쓴다며 분노하죠. 그부분에 대한 해석에는 동의합니다. 궂이 해석이 없어도 작품 내적으로 개연성이 제시되어있구요.
제가 말한건 공장에서 강간하고 싸우는 씬에 깔린 밝은 클래식과 경쾌한 편집이야기였습니다.
13/08/08 02:32
글쎄... 뭐, 이를 두고 폭력적 미학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진 잘 모르겠네요(왠지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생각나면서 고개가 갸웃해지네요.). 그보단 알렉스 개인에게 쌈박질과 강간이 일개 유희거리에 불과하다는 것 드러내는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경쾌함은 보는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들지요. 지금이건 당대에 있어서건 영화에 있어서 선정성과 폭력성은 하나의 유희고, 오락인데, 정말 이를 유희거리로 여기는 알렉스를 보면서 관객은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알렉스의 폭력은 우리에게 불편하고, 불편한 만큼이나 경쾌합지요. 큐브릭은 이 두 감정 사이의 이율배반을 그러한 장면을 통해 드러내려한 것일테구요.
13/08/08 02:16
소설에서 국가의 폭력은 성선설적인 개화 가능성에 의해 비판되는 거고(즉 교정 자체의 무쓸모를 논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영화에서는 인간에 대한 국가의 교정, 교화 자체를 문제시하는 겁니다. 완전히 다른 얘기죠. 알렉스가 시시해졌다고 말하는 그 부분은 훨씬 더 많은 설명이 있습니다. 아기 사진을 갖고다닌다던지 기타.. 개화가 시작 했다고 이해할 근거는 충분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른 연유로, 다른 개연성 쌓기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청춘은 그래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청춘의 막나가는 디테일을 보여주죠. 그게 개연성이 없는 거면 무슨 개연성을 논하시는 지가 궁금하네요.
13/08/08 02:23
훨씬 더 많은 설명과 그에 반하는 또다른 많은 설명을 보았고 그에 반하는 많은 설명에 동의합니다.
영화에서 나온 교화장면은 소설에 고스란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소설에서도 국가의 폭력, 그 자체를 문제시 여기죠. 전혀 다른 이야기는 맞지만 그건 알렉스의 변화의 흐름을 어떻게 보았냐는지점이지 국가부분이 아니죠.
13/08/08 02:31
그러니까 지금 영화에서 알렉스의 범죄에 대한 개연성 여부를 지적하셨잖습까. 영화는 그 주제상 그 개연성이 중요하지 않다니깐요.
국가 얘기가 동일해도 의미가 달라지는 이유가 바로 이 차이, 그리고 엔딩의 차이란 겁니다.
13/08/08 02:38
만약 영화의 포인트가 이리님 말대로 국가에 의한 교정이라면 무조건적으로 개연성이 요구가되죠. 효과적 비판을 위해서요.
그냥 미친놈 이야기래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관객이 공감을 하죠. 주제때문이 아니라 스타일의 선택으로 개연성을 배재한겁니다.
13/08/08 02:43
시계 태엽 오렌지 영화의 방점은, 체제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도 있습니다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체제를 비롯하여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여러 가지 것들이 갖고 있는 불편한 부분을 드러내어 비꼬고 풍자하는 것이죠. 알렉스에게 유희거리인 폭력과 강간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것을 너무도 자연스레 오락으로 여기는 우리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체제의 폭력성은 이러한 우리 속 알렉스를 규율하려는 우리의 이중 잣대를 드러내구요. 그렇게 '교화된' 알렉스에게 문제가 나타나 알렉스를 멀쩡하게 '고치려'하는 체제의 모습에서 우리의 교활하고도 허약한 정치성이 드러납니다(아, 왠지 시계 태엽 오렌지를 이렇게 요약해버리니 참 무미건조해져서 아쉽네요.).
제가 보기엔 영화의 주제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될 것 같은데요. 미친놈 이야기라서 공감되지 않는다면, 눈 부시는 날 시비를 걸었다는 이유로 사람을 쏴죽인 이방인의 뫼르소는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13/08/08 02:44
그러니까 그 관점에서 쓰여진게 소설이라니까요. 악행에는 이유가 있고- 젊음의 방황이라는-, 그 이유가 사라지니까 나이가 먹으면서 어느 정도 철이들잖습니까. 인간의 성선설적인 교화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임의적이고 폭력적인 국가의 교정을 비판한 겁니다. 말씀하신 예이죠.
근데 영화는 아예 주제가 다르다니까요. 알렉스가 왜 악행을 했는지 이해하는 건 의미가 없고, 오히려 모르는 편이 좋으며, 더 자극적이고 탐미적으로 그리면 좋습니다. 그러면 알렉스는 본성 자체가 악인 쓰레기가 되어버리니까요. 이유가 없으니 해결책도 안보이잖습니까. '그럼에도' 국가의 교정 또한 폭력임을 대치시켜, 전혀 다른 주제를 끌어낸 겁니다. 뭔지는 위에 썼고. 그래서 영화의 알렉스는 마지막에 교화안된 악의 상태 그대로인겁니다.
13/08/08 02:54
모리님께서 품으신 의문이 이상의 필담으로 해소될지 의문인지라 큐브릭의 시계 태엽 오렌지에 대한 평 하나 첨부합니다.
http://www.dgugs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778
13/08/08 02:25
[소설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고 그와 이러저러한 부분이 다르니, 이 영화는 외형적으론 소설과 흡사하나 이미지 - 심상의 미학을 추구한다.]라는 말씀이시라면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왜 시계태엽오렌지라는 영화가 소설과 같은 식의 구도를 따라가지 않았느냐는 질문은 좀 불필요하다고 느껴지는데요. 체제의 폭력성이야 소설에서도 분명 드러납니다. 하지만 두 작품의 결말이 완벽히 다르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실상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죠. 소설의 경우 "어쨌든 알렉스와 같은 애들은 지양해야한다"는, 뭐 근래 영화 중에선 배트맨 2 다크나이트와 비슷한 논조라면 영화의 경우 아예 이러한 식의 어설픈 희망이 없죠. 고쳐진 알렉스는 다시 한 번 거리를 활보하며 애들을 쥐어패고 생면부지의 여인을 강간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소설판을 비롯하여 정치성으로 피어난 비루한 장미를 기어코 꺾어버리죠.
13/08/08 02:09
영화에서 꼬맹이가 성냥 하나 훔치는 장면을 이용하여 주제의식에 있어선 프로메테우스로서 남궁민수를 드러내고(프로메테우스는 기독교적 노예 도덕을 대체한 맑시즘에 있어서도, 이 맑시즘을 비판한 카뮈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신화적 상징으로서 차용되지요. 음, 봉준호가 후자까지 염두에 둔 것인지는 아리까리합니다만), 서사 상에 있어선 횃불을 통한 반격의 기회를 제시하는 봉준호는 관객으로 하여금 한 컷, 한 컷, 한 장면, 한 장면 주의깊게 살필 것을 요구합니다. 이는 또한, 에드가와 총리를 사이에 두고 고민하는 커티스의 모습을, 엔진칸 앞에 앉아 남궁민수와의 대화에서 드러나는 눈물의 과거사가 뒷받침하구요. 뿐입니까?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반성하게 만들었던 길리엄의 희생이나, 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균형을 잡기 위해 꼬리칸 승객들에게 쥐어준 단백질 블록은 기가 막히게 조응하여 이 둘의 공모 관계 및 표방하는 가치의 동일시가 서사 차원이 아니라 주제의식에 있어서도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이러한 디테일이 마련되지 않은 다른 부분이 설명되지 못한채 공중에 붕붕 떠다니는 장면들이 부각되는 것이죠. 어떤 액션 영화가 있다고 칩시다. 초중반에는 무슨 온갖 공중부양의 화려무쌍한 그래픽들을 동원해 싸움박질을 하다가, 결말에 이르러 동네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다면 누구나 이 둘 사이에 이물감을 느낄 것입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개싸움을 했다면 이런 이물감은 없고, 영화의 완성도에 있어서도 별 말을 할 수 없겠지만 앞, 뒤의 액션이 서로 상이한 수준으로 주어진다면, 그리고 그 상이한 수준에 대해 영화가 별다른 대답조차 해주지 않는다면 그 영화의 완성도는 결코 높은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못 될 겁니다. 어떤 장치를 하나 쓸 생각이라면 비교적 일관성을 띄어야한다는 말이죠. 헌데 설국열차는 그렇지 못합니다. 개별 장면, 개별 대사, 개별 인물에 대한 비중에 있어서 어떤 부분은 치밀하게 의도한양 수습하고 그 이유를 파헤치는데, 그렇지 못한 부분은 그냥 내버려두지요. 그렇지 못한 부분에 대해선 앞의 댓글에서 사례를 들어두었으니 굳이 들진 않겠습니다. 뭐, 또 하나 들자면 커티스의 직접적인 언급을 통해 제시된 요나의 투시력이 있겠네요. 그냥 주제의식 상에서 요나가 차지하는 바를 말하기 위함이었다면 관객으로 하여금 요나가 투시력을 갖고 있다는 암시만 주었으면 끝이었을테지만, 이걸 커티스가 간파하고 요나와 직접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순간, 이 투시력은 영화 속에서 설명하고 수습해야할 것이 됩니다. 그런데 설국열차를 이를 만족하지 못하죠(사실 이 부분은 굳이 영화 속 다른 디테일과의 비교가 아니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이질적입니다.).
13/08/08 02:35
밤이 너무늦어 마지막 댓글만 간단히 달게요. 길리엄의 멘트는 커티스가 윌리엄을 만난 뒤 변화과정을 통해 충분히 수습이 됬다고 봅니다. 왜 말하지 말라고 했는가, 왜 윌포드에게 동조 했는가 , 길리엄은 완전히 윌포드에게 공감 했는가 모두 커티스의 변화과정에서 답이 드러나죠.
두번째로 요나부분은 공감하지만 옥의티로 봐줄수있는 곁다리라고 봅니다 봉은 편집됬다고 하던데 이런부분윽 오류는 두시간 러닝타임이라는 씨제이의 술수외에는 설명이 안되서..
13/08/08 02:38
그 '변화 과정'이라 말미암은 엔진칸에 너무나도 많은 걸 때려밖았다는 게 제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길리엄의 멘트는 수용 가능한 것일지언정 영화의 다른 디테일과 비교할 땐 상당한 이질감이 느껴지며 따라서 다른 대사로 바꾸는 게 최선이었다고 생각하구요.
안녕히 주무시길.
13/08/08 03:43
봉준호 감독이 이 영화는 흥행에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었다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 영화의 마케팅은 CJ가 사활을 건 것처럼 보이네요. 영화 내에서보다도 이 지점에서 문제가 좀 생기지 않았나 싶어요.
이 영화가 매트릭스2 정도로 내러티브와 주제의식이 따로국밥은 아니지만 약간의 찝찝함을 남기는 이유는 이 사람 저 사람 한 모금씩 마시다보니 물컵에 기름이 뜬 격이죠. 최근 몇 년동안 이상문학상 심사평에 김윤식 교수님이 항상 이런 식의 말을 쓰시더라고요. "오늘날 소설은 가능한가?" 이 질문은 서사가 가능하냐는 뜻일텐데 소설도 이러한 회의가 주를 이루는 시점에서 나오는 영화에 서사란 과연 가능할까요? 그런 측면에서 봉준호 감독은 오히려 다른 영화에 비해 서사를 충실히 구현하는데 많은 노력을 한 셈이지만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떡밥에 먹혀들어버린 셈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본 덕분에 떡밥이라고 의도하지 않은 부분들조차 떡밥이 되어버린 것 같고요. 아마 팟저님도 이 글을 쓰게 된 이유가 물론 이러한 아이디어를 계속 머릿속에 갖고 계셨겠지만 이 영화 자체가 말하기 좋은 영화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분위기가 무르익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이제 앞으로 영화는 화려한 액션씬과 뻔뻔한 메타포 뒤에 최소한의 내러티브가 숨어서 끝내 노출되지 않을때 훌륭한 작품이 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13/08/08 03:50
그리고 아마 이러한 작품의 원류는 오타쿠의 요람, 일본애니메이션인 것 같아요. 에반게리온, 공각기동대, 이런 작품들과 그 팬층이 이를 소비하는 방법을 생각해보면 지금 설국열차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유사해보여요. 이게 향하는 방향이 서사의 종말인지 뼈다귀처럼 서사만 남는지 아니면 양극단으로 가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매체라는 그릇이 너무 빠르게 갑자기 변해버렸어요.
13/08/08 03:58
그게 컬트인데, 컬트의 역사는 안노가 회사 차리기 한참 전부터 존재했으니 에바를 굳이 꺼낼것도 없이 유구하죠. 이제와 새삼스럽게 부각받는다고 말하기엔 좀 이상하지 않나 싶습니다. 차라리 세기말 때면 모를까..
게다 여러 사람이 말했듯 설국열차는 너무 노골적인 상징들을 써서 컬트적 재미도 후집니다. 기본적으로 좀 어려워야 컬트가 될 정도로 덕질하는 재미가 생기죠.
13/08/08 04:11
컬트적...이라는 말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런 핀트에서 한 얘기는 아니구요. 에반게리온이나 매트릭스도 매우 노골적이죠. 사도라느니 아담, 리리스, 롱기누스의 창이라느니, 중앙 컴퓨터 이름이 센트럴 도그마고, 매트릭스는 대놓고 시뮬라시옹 시뮬라르크에요 이러고.
설국열차를 옹호하려는 건 아닌데 거꾸로 최근 나온 영화 중에 이 영화만큼 내러티브에 신경 쓴 영화도 많지는 않은 것 같은데 오히려 이 영화의 내러티브가 약점이 되어 떡밥에 잠식되어 가는 현상이 영화 자체 이외에서 찾아볼 점이 많지 않을까 하는 것이죠. 퍼시픽 림이나 더 테러 라이브를 놓고 내러티브를 논하면 좀 우습잖아요?
13/08/08 04:15
예, 내러티브에 신경을 썼다는 것, 그것이 제가 설국열차에서 이물감을 느낀 이유입니다.
https://cdn.pgr21.com/?b=8&n=45688&c=1627036 신경을 썼으면 끝까지 써야하고 영화의 방점으로 삼았다면 끝끝내 충실해야죠.
13/08/08 04:22
팟저님이 제시하신 기준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러한 측면에서 회의가 드는 게 있어요. 복합 예술로서의 영화...김윤식 교수님의 멘트를 빌려서, 그렇다면 "오늘날 영화는 가능한가?"
13/08/08 04:31
예, 사실 그래서 오늘날 영화에 기대하는 건 크지 않습니다. 설국열차를 보고 제가 별다른 실망을 느끼지 않은 것도 그러한 이유구요. 뭐, 매체에게 접근하는 방법론이 달라지고 있는 건 시시각각 느낍니다만 아쉽게도 제 미적 기준은 그와 다른 것에 반응하고 있으니 제 나름대로 제 잣대를 비호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다만 글쎄... 님께서 지적하신 부분이 하나의 미적 체계로서 말미암을 수 있을지에 대해선 좀 회의적입니다. '그러한 방향에서의 극단'이 도래할 경우, 그 안에서 이를 향유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테니까요. 음, 왠지 제가 쓰면서도 답이 좀 궁색하네요.
13/08/08 04:40
네. 그 점에 있어서 공감합니다. '고전'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것 같아요.
아마 날도 덥고 아직 개학도 안 했고 이 영화가 천만을 찍고 칭송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늘어갈 것 같아서 슬프네요 ㅠㅠ
13/08/08 09:11
뭐 이 영화가 천만을 찍을진 잘 모르겠는데, 찍더라도 단순히 '천만' 이라는 이유로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저같은 경우 순수히 영화 자체가 마음에 들어서 좋아하는 경우인데, 너무 막, 칭송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보기가 좋지는 않더군요.
13/08/08 04:17
최근에 마법소녀 마도카가 찾기 어려워서 오타쿠들이 꽤나 좋아했는데 찾기 어려운 거랑 또 그 메타포를 이해하기 어려운 거랑 다른 맥락인 것 같기도 하고요.
설국열차는 어떻게 보면 한국 대중이 이러한 현상을 처음으로 맞딱뜨린 작품이 아닌가 싶어요. 프로메테우스가 상징이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벌써부터 지겨워지거나 그냥 담담한 사람보다도 "송강호가 프로메테우스였어?"라면서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를 찾아보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 같거든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미 텍스트든 영상이든 매체를 소비하는 방식 때문에 작가가 서사를 완벽하게 녹여내는 방법은 이제 서사를 아예 숨겨버리는 방법 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요. 전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자기가 만든 링컨도 상영 못할 뻔 했다면서 이제 영화관은 테마파크처럼 변할 거라고 얘기한 걸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있어서요.
13/08/08 04:25
음, 이러한 맥락으로 하신 이야기인진 모르겠지만, 님 말씀에 첨언하자면 전 대륙철학적 인문학이 이미 '소설'의 새로운 장르로 자리 잡아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마냥 농담이 아니라요. 뭐, 대표적으로 파스칼 키냐르가 있겠고요.
13/08/08 04:47
그냥 "인문학적 저술을 써놓고 소설이라고 한다"고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서사를 숨겨버리는 방법"이 혹시 소설에 있어선 (일전에 대륙철학에 관한 이러저러한 논담들의 연장선상에서) 말씀하시는건가, 싶었거든요.
13/08/08 04:30
설국열차를 둘러싸고 나오는 주객전도적인 감상, "이 영화의 주제의식이 이렇게 대단해", "이 영화에 이렇게나 숨은 뜻이 많아"라는 식의 이야기들에 저도 굉장히 불만히 많은데, 이게 CJ가 이렇게 마케팅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현상이라는 것이죠. 실제로 보고 나온 건 기차가 열심히 달리고 도끼로 때려부수고 양갱 먹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상은 다른 지점에 존재하는 것이죠.
청룡열차를 타고 나와서 "이게 중력 때문이었구나"라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제 앞으로 모든 영화는 청룡열차고 일부 영화는 타고 나오면서 F=mg라고 쓰여 있는 팜플렛을 나눠줄 것 같아요.
13/08/08 04:36
헌데 이리님 말마따나, 컬트가 그리 일반적인 경향성을 띌진 좀 의문이긴 합니다. 뭐라건 간에 CJ가 기대한 게 그것은 아니었을테니까요. 아니, CJ의 기대가 배반되었다는 게 아니라, CJ를 만족시킬 것이 굳이 지금 우리 앞에 주어질 설국열차일 필요는 없을테니까요. 컬트라고 묻어버리기엔 이미 너무 보편적인 양상이 되어버렸습니다만, 그것이 '모두'라 총칭할만한 일반성을 가지리란 건 좀 다른 이야기니까요. 그렇다고 매체에 대한 달라진 접근 방법에 대해 (좀 구태의연한 표현이긴 한데 달리 무어라 대체할 것이 없어서)아카데믹한 비평이 입장을 선회해야한다기엔 그 자체가 완성된 체계로서 너무도 미흡하고 이질적이니까요. 사실, 어느 쪽이든 굳이 이를 의식할지 좀 고개가 갸웃하기도 하네요
13/08/08 04:51
CJ가 바라는 점은... 설국열차가 천만이 넘고 해외 흥행에도 성공하여서 이재현 회장이 창조경제를 구현한다는 사회적 책무를 띄고 특별사면으로 나오는 것?
13/08/08 06:42
굳이 위대할 필요 없죠. 그냥 볼만한 수준이면 되는 것이고.
두가지 입장이 있네요. 명작은 아니다/볼 가치가 없다. 세상에 누구의 기준에 완벽히 들어맞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온갖 기준을 가져와 재면서 그래서 이건 아니야 라고 말한다면, 그거 통과하기란 지난한 일이 될 겁니다. 세상에 지금까지 나온 소설이 수백만종은 될텐데 그 중에 위대한 작품이 몇개밖에 안된다고 하니 기준이 엄청날 듯하네요.
13/08/08 08:15
글도 재밌고 리플로 재밌네요. 재밌게 읽고 갑니다.
설국열차에 대해서 다들 한마디씩 던지는 분위기에 편승해서 정말 가볍게 영화나 대중문화를 즐기는 입장에서 몇마디 끼워볼까 하는 마음도 있긴한데 선뜻 용기가 안나네요. 저 역시 모든 영화가 위대함이 필요한지는 의문입니다. 영화는 영상을 매개로한 감독과 관람객의 대화이고 설국열차는 제개 느낌표 몇개와 물음표 몇개를 던져주었습니다. 그것몇개로 충분히 시간과 돈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던 영화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