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년 오의 승상이자 대도독 육손 백언이 사망합니다. 향년 60세.
육손의 본명은 육의陸議입니다. 다른 기록에 이릉에서 유비를 격파한 사람을 육의라 적어놓은게 많은데 도대체 육손은 뭐하고 있었냐 라고 물어보시는 분도 계시는데....둘이 동일인물입니다.
육손은 오군 오현 사람으로서 육손전에는 대대로 강동의 호족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오의 사성四性이라고 부르는 대호족 네 가문 중 하나인 육씨가문 출신입니다. 하지만 육손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당조부인 여강태수 육강에게 길러집니다. 육강은 여강태수로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손은 고향인 오군이 아닌 여강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평화로운 상황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원술은 남양에서 폭정을 저질렀고, 이로 인해 남양이 초토화되자 원술은 조조와 일전을 벌여 조조의 영역인 연주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하남에서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한 조조를 원술이 이길리 만무했고 원술은 한때 조조를 이기는 듯 했지만 그대로 박살나면서 수춘 지역으로 도피하게 됩니다. 이 지역에서 유력 군벌들을 흡수하면서 기반을 쌓았는데 남양주 일대로 세력을 넓히려던 원술을 저지한 것이 여강의 육강이었습니다. 육강과 원술이 사이가 나빠진 것은 기록에 따라 틀린데 손책전에는 원술이 서주를 공격하기 위해 육강에게 군량미 3만 곡을 요청했는데 육강이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후한서 육강전에서는 원술이 회하 지역의 태수들과 관리들에게 재물을 강탈하자 육강이 이 행동을 반역행위라 규정지어 원술과 싸울태세를 취했다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원술은 육강과 직접 싸울 생각이 없었습니다. 최훈은 원술이 왜 육강을 직접 공격하지 않은것은 자신의 체면치레가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회하지방의 군벌들을 흡수하는데 성공했지만 육강을 직접 처리할 전력을 따로 뺄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연주의 조조, 서주의 유비가 자신에게 적대적 세력이었기 때문에 병력을 빼서 공격할 수가 없었죠. 거기에 육강은 이전에 10만의 반란세력을 일거에 격파했었던 사람이라 군사적 능력도 뛰어났죠.
원술은 한 사람을 동원합니다. 바로 손책이죠.
손책은 아버지 손견이 죽은 이후 원술에게 의탁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손책 역시 육강에게 상당히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손책이 육강을 만나러 간 적이 있는데 육강은 그를 만나지 않고 주부를 시켜 접대하게 한 것 때문이었죠.
손책전에는 손책이 당장 달려가 육강을 박살낸 것으로 기록되지만 후한서 육강전에는 희대의 효웅 손책을 상대로 육강은 2년이나 손책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 전에 육강은 육손과 자신의 아들 육적 등 육씨 일가를 고향인 오군 오현으로 보냅니다. 하지만 2년이 지나고 육강은 손책에게 패배하고 병으로 사망합니다. 이 와중에 육씨 일족들은 고난을 당해 굶어죽는 등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거기에 육적이 나이가 어려 육손이 육씨 가문의 대표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육손은 183년생, 육적이 187년 생입니다. 단지 네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데도 육손이 육씨 가문의 당주가 된 것은 이 어린 아이들 외에 육씨 가문의 남성들이 죽은 모양입니다. 후한서 육강전에는 "육씨의 일족 백여명은 흩어지고 굶주리는 재액을 당해 죽은 자가 절반에 달했다"라는 기록입니다. 거기에 육적의 형으로 추정되는 육준이 낭중이 되었지만 이후의 기록에 없는 것을 봐서는 손책은 육씨 일가를 철저하게 학살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육손이 관직에 나아간 때는 그의 나이 21세, 손권이 장군이 되었던 해라고 합니다. 그 전의 나이에 관직에 나아간 사람이 많았던 만큼 오의 대호족 출신인 육손이 21세라는 나이에 관직에 진출한 것은 여전히 손책이 육씨 가문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모양이고, 손책이 죽은 후에야 육손이 관직에 나갈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육손은 손권아래서 하급관리로 시작한 후 동서조령사, 해창현 둔전교위가 되었고, 이후에는 회계의 반림, 파양의 우돌 등 반란군을 진압하면서 실적을 쌓습니다. 이후 이 공으로 정위교위가 되고 2천의 사병을 휘하에 둡니다. 그리고 빠르게 실적을 쌓아가는 육손은 손권에 의해서 손책의 딸과 결혼하게 되죠.
육손은 손권에게 산월을 평정하고 내부를 안돈시켜 그들을 병사로 키우자고 주장했고, 손권은 그에게 장하우부독의 직위를 내립니다. 육손은 이후 조조를 지지하던 단양의 반란군 수괴 비잔과 그를 따르는 산월을 토벌해 평정합니다.
그리고 이런 육손을 눈여겨 보던 사람은 노숙 사후 대도독이 되었던 여몽이었습니다. 육손은 여몽의 뜻에 따라 여몽을 대신해 육구에 주둔해 관우를 방심시켰고, 육손이 사전 계획을 잘 짜둔 덕분에 여몽은 비어버린 남군과 강릉을 장악하는데 성공합니다.
손권 : 누가 그대를 대신할 수 있겠소?
여몽 : 이 누른 터럭 제리야! 내가바로 한수정후 관우 운장이다!
손권 : 헉!!!
여몽 : 농담입니다. 육손이 저를 대신할 만 합니다.
육손의 가장 큰 실적은 다름아닌 촉오전쟁이었습니다.
촉오전쟁에 있어서 여대, 보즐, 반준이 형남 지역의 오계만이와 친촉 반란군을 제압해주었기 때문에 육손이 전공을 세웠다고 보시는 분도 계시지만, 촉오전쟁에서 육손이 유비를 격파하기 전에는 여대, 보즐, 반준 등은 오계만이와 친촉 반군을 그 자리에 묶어두고 촉의 본대와 연결되지 못하게 막거나 혹은 더이상 진격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완전히 토벌할 수 있었던 것은 육손이 유비가 이끈 촉군의 본대를 완벽하게 전멸하고 나서였기 때문에 육손이 오의 승리의 주역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이후 육손은 무창을 지키면서 형주 동부와 오군 서쪽을 안정시켰습니다. 손권이 그렇게 합비신성이나 강하지역에 들이대 박살이 나도 이후 문제가 많이 없었던 것은 육손이 이 지역들을 단단하게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육손은 손권이 저지른 삽질, 타이완과 하이난 섬의 원주민들을 잡아와 병력으로 삼는 일이나 공손연과 연계시도, 이후 공손연 공격이나 여일의 건에 있어서도 항상 상소를 올려 손권을 간합니다. 하지만 손권은 아집에 가득차 육손의 말을 듣지 않았죠.
육손은 대위전선에서 손권처럼 공세일변도보다는 내부 분열을 통해 이득을 얻으려고 합니다. 위의 신임 강하태수 녹식은 오의 변경을 공격합니다. 육손은 이때 한가지 정보를 획득합니다.
강하를 단단하게 지켜 손권을 박살냈던 문빙은 강하에 없었고 그 직위를 아들 문휴가 이어받습니다. 그런데 녹식과 문휴는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 이 첩보를 입수한 육손은 녹식에게 편지를 씁니다.
육손 : 니가 보낸 편지를 받았는데 너랑 문휴랑 싸워서 오나라로 오고 싶다고 했지? 그럼 나는 우리 오 조정에 네 편지를 올리고 병력을 준비해 당신을 영접할테니 태수는 몰래 빨리 준비해서 우리에 투항할 날짜를 알려줘.
그리고 육손은 이 편지를 접경 지역에 몰래 놓아두도록 하죠. 이를 녹식의 병사가 녹식에게 바쳤는데 이를 본 녹식은 문휴가 이를 알면 자신이 반역했다고 일러바칠까 두려워 바로 가솔들을 데리고 낙양으로 가버립니다. 전장에 자신들을 두고 가족들을 데리고 낙양으로 돌아간 녹식의 행동을 본 녹식의 부하들은 그의 명령을 거부했고, 이를 안 위 조정은 녹식을 면직시켜버립니다.
오의 중랑장 주지는 파양에서 병력을 모으자고 손권에게 주장합니다. 하지만 육손은 파양군 사람들이 위와 가깝고 이지역이 오의 통치를 수긍하려하지 않는다고 해 주지의 징병책을 반대합니다. 하지만 주지는 자신의 징병책을 고집했고, 이를 안 파양의 세력가 오거는 세력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주지를 죽입니다. 거기에 예장과 여릉 지역의 반오세력은 오거를 따라 반란을 일으키죠. 오거의 반란소식을 들은 육손은 바로 달려가 이들을 진압하고 오거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244년 사망한 고옹을 대신해 승상이 됩니다만, 이궁의 변 과정에서 육손은 손화편을 들면서 손권에게 간언을 올립니다. 하지만 손권은 이러한 육손의 간언을 무시하죠. 거기에 육손과 서신을 주고 받으며 상황을 알려주었다는 죄로 태자태부 오찬은 옥에 갇혔다가 처형당하기까지 하죠. 화가 난 손권은 무창으로 쫓겨난 육손에게 계속 사자를 보내서 육손을 질책합니다. 이에 홧병이 나버린 육손은 얼마 안가 사망합니다.
촉오전쟁에서 촉군을 물리쳐 나라를 구했고, 위와의 전쟁에서 승전했던 명장 육손을 죽인 손권은 그에 그치지 않고 육손의 아들 육항에게 사자를 보내 이미 죽은 양축이 모함한 20가지 일을 가지고 육항을 문책합니다. 거기에 장례를 아직 치르지도 않은 상황에서 빈객들의 왕래마저 금지시켜버렸죠. 한마디로 조문마저 허가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육항은 이에 대해 대답해 손권의 의심을 풀어줍니다. 그러던 251년 육항이 병에 걸려 건업으로 와서 치료를 받은 후 다시 임지인 시상으로 돌아가려 하자 손권은 육항을 찾아갑니다.
손권 : 내가 전에 간신들 말 듣고 네 아버지와의 군신간 대의가 돈독하지 않았고 그거때문에 내가 너를 멀리했어. 이제 내가 너를 힐문했던 글은 불태워 없애고 다른 사람이 못보게 하도록 해.
야이....
나라를 이끌어 가던 육손을 죽이고 그 아들에게 막말을 쏟아낸 손권이 이제와서 나중에 누가 보면 부끄러울까봐 그 글을 없애달라니, 적반하장이 따로 없죠.
저는 줄을 잘못 서서 재능을 못피워보고 죽은 사람들을 몇명 꼽습니다. 고순, 문앙 같은 사람들 말이죠. 저도 육손이 오보다는 유비나 독자세력화가 되었으면 오히려 더 좋은 효과를 가져올수 있다고 봅니다.
동오의 손가는 사소한 앙심으로 육손의 가문을 초토화 시켰고, 육손은 원수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수의 동생을 위해서 촉과 싸웠고, 원수의 나라를 위해 간언을 바치다 죽었습니다.
良禽相木而樓 賢臣擇主而事
양금상목이루 현신택주이사, 좋은 새는 나무를 잘 살펴 깃들고, 현명한 신하는 군주를 가려 섬긴다는 말입니다. 배반을 밥먹듯 하는 줏대없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자주하긴 합니다만, 육손의 처지를 본다면 이 말을 따르지 않는게 한스러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