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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8/02 17:11
'원죄'가 존재하지요. 또한 존재하는지 확인되지 않은 신이라는 존재를 숭배해야 할 의무가 부여되어있고. 결국 기독교가 만인을 죄인으로 규정한 후, 그 죄를 어떻게 갚을 것이냐를 통해서 구원의 자격을 부여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형이상학적 폭력이 논해지는 지점도 이 지점이며, 이건 기독교의 core지요. 저는 이 core가 명백한 폭력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나쁘'지요.
그와 별개로, 뭔가 좀 더 다른 core가 있다고 전제할때 그걸 현실 개신교회들이 대부분 못하고 있다... 라면, 그리고 개신교가 성립된지가 벌써 수 세기라는 걸 생각하면, 그냥 그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지나지 않는 걸 의미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 리플의 뒷부분은 좀 사족에 가까우므로 혹시 피드백을 하실 거라면, 앞쪽에 좀 더 초점을 맞춰주시길 부탁드립니다.
13/08/02 17:17
제가 알기로 구원의 자격은 어떻게 갚을 것이냐는 아닙니다
구원 자체는 그냥 주는 거죠. 갚고 말고는 그 사람의 의지입니다 구원자체를 받아가는 건 폭력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요하는거는 아니거든요. 구원 자체는
13/08/02 17:20
구원의 자격이 무엇인가는 종파마다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예정론, 의화론, 선행 의지론 뭐 엄청나게 많은데... 일단 말씀하신, 구원 그 자체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전제라면 굳이 구원이 선행의 인센티브가 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와 별개로, 존재유무가 불투명한 신적 존재에 대한 숭배의 의무와 원죄의 가능성, 또한 구원과 은총에 다가가기 위한 의무의 설정 등은 변하지가 않습니다. 형이상학적 폭력의 핵심은 존재하는지 안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한다고 가정하고' 넌 이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라는 논리적 무리수에서 기반합니다. 그리고 모든 종교는, 논리적으로 온전하게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게 문제죠.
13/08/02 17:23
선행과 구원은 다른 맥락입니다. 사실 숭배의 의무라는 것도 성경에 보면 숭배라는 말은 먼저가 아니라 나중이라고 저는 보거든요.
구원은 아무에게나 열려 있으니 받고, 그것에서 감사를 느낀다면 날 믿어라 라고 배웠거든요. 저는. 지금도 그런 생각이지만 기독교에서 무언가를 강요하는건 정말 자신이 믿고 싶고 믿겠다 라는 이후에 시작이지 믿어라부터가 강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제가 거기서 나오는것이긴 하지만.. 믿기 전에는 강요가 하나도 없고, 믿은 후에는 자기 양심(기독교에서는 믿음)에 따라 시작입니다. 그게 현재 가장 큰 문제가 되는 부분이라고 갠적으로 생각합니다.
13/08/02 17:26
십계명의 제1, 제2계명은 숭배입니다. 선행이 아니지요. 또한 성경에서 이미 '이교도'를 죄악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은 선택이 아닙니다. 필수지요 기독교적 교리에서는. 믿기 전에 강요가 없다는 것은 명백히 성경의 텍스트에 위배됩니다.
13/08/02 17:29
그 십계명 자체가 믿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거라서요. 믿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강요가 아니라는 거죠. "나 이외의 다른 신은 섬기지 말라" 라는 의미를 보시면 "나"즉 기독교를 따르기로 작정을 했다면 "다른 신은 섬기지 마라"는 거죠.
13/08/04 19:43
예수가 언제 우상숭배하는 무리를 때려부셨나요? 하나님의 성전을 장사터로 만드는 무리를 때려부셨지요. 아무튼 지금 한국교회는 장사하는 무리들로 성전이 가득하지요.
13/08/02 17:31
정론적인 해석이 아닙니다. 십계명이 주어진 시대는 구약 시대, 즉 '민족신'으로의 야훼의 정체성이 훨씬 부각되던 시절로 당장 십계명이 처음 나온 탈출기에서 이교도를 무찌르고 야훼의 위엄을 보여준 게 수 차례입니다.
13/08/02 17:32
모세 오경이나 여호수아서,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 등에 나오는 이교도와 이민족에 대한 정복 행위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엘리야가 700명의 이교도 선지자를 도륙한다 거나 등등...뭐 저는 사실 그런 것들이 해소할 수 없는 난점을 가져다준다고 보진 않습니다. 그게 <일신교의 본질>이니까. 다만 일신교의 본질에서 유래한 행위들이 아니라고 한다면 정당화하기 갑갑해지죠.
13/08/02 17:31
십계명 1조는 "나 이외에는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마라"입니다. "나"를 믿기로 작정했다면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는 강요가 시작되는 거죠. 구원이라는 것은 일단 선행이 어떤 식으로든 인센티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냥 주는 거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같이 매달린 강도는 아무 선행의 기록도 없지만 그는 "인정"해서 그냥 구원을 받은 기록이 있습니다. 강요는 아닙니다. 강도가 한 말에 예수님은 어떠한 명령하나 없이 그냥 같이 천국 갈 것이라고 하셨죠. 모든 의무는 말 그대로 "믿음" 이후이죠.
13/08/02 17:34
음....종교를 믿는 다는것은 일단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작되는것인데 십계명의 1과2가 숭배에 대한 내용이 들어가는게 당연한 부분아닌가요?
13/08/02 17:36
숭배가 선행에 선행한다(..)는 것이 논점입니다. 즉, 계율의 정체성이 상충될 경우 숭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 문제이며, 기독교 교리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숭배라는 점입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데 그건 종교 내적으로나 당연한 것이고, 저는 종교 외적인 논리를 근거로 종교를 비판하는 중이니까요.
13/08/02 18:20
글쓴이입니다.
그렇겠네요. 글을 다 쓰고 보니 읽어보니 '원죄' '숭배'와 같은 이슈가 제기될 수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인정을 하고 앞서 밝힌 것처럼 이것저것 읽어본 후 개인적인 의견이라 전제를 하고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1. '원죄'에 대하여 제가 알기로 성경에 '원죄'라는 단어는 안 나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신학적인 개념으로 나중에 등장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성경에 등장하는 부분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세상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부분과 '사망'이 한사람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내용이 기억이 납니다. '원죄'라는 단어를 최초 누가 사용했으며 왜 그랬는지는 저도 이번 기회에 찾아보겠습니다. 사실 저는 '원죄'를 '최초의 죄'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얘기하는 '죄'라는 것이 최초에 아예 세상에 존재 하지 않았다가 '선악과를 따 먹지 마라'라는 신의 명령(최초의 법)을 어긴 최초의 행동이 법을 어긴 첫번째 행동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인류가 행한 최초의 위법행위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신의 명령을 어기는 것(행동)'이 그 전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는데, '그 행동'이 발생했다는 것을 일컬어 '죄'라고 명명한다는 규칙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죄의 기원'이랄까요. 또한 이 위법행동으로 인해 '사망'이라는 개념도 같이 발생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죄'의 정의, '사망'의 발생원인에 대한 성경적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담의 죄(위법)으로 인해 제가 대신 용서를 구해야 한다거나 범죄자가 되었다는 해석(가르침)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아담의 죄로 인해 읽는 이(독자)가 회개해야 된다'는 내용은 못 봤거든요. 오히려 이 부분은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다른 사람)의 규칙위반으로 인해 사망(죽음)이라는 게 생겼고, 그로 인해 안 죽어도 되는 저(제 상상입니다. 하핫)까지 죽어야 되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2. '숭배'에 대해서는 '숭배'의 개념을 먼저 보면 좋겠습니다. 사족) 일신교가 아니라 다신교에서도 '숭배의 의무'는 존재합니다 제우스만 숭배하면 헤라가 미워하죠. -_-;;; 구약에 많은 규칙들이 있지만 신약에 와서 단 2가지 법만 존재합니다. "신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섬겨라. 복종하라. 갖다 바쳐라와 같은 의무는 폐지되었고 대신 '자유' '용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신을 사랑하라는 '의무'가 생겼지만 이는 '명령'이라기 보다는 '초대'나 '권유'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인간을 가리켜 '친구'라고 하니까요. 물론 구약보다는 조금 부드러운 '의무'이기는 하지만, 안 지키면...? '지옥'으로 가라는 거 아닌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 부분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사르트르의 '닫힌 문'에 있는 구절이 생각이 나네요. "지옥. 그것은 타인(혹은 타인의 시선)이다" 아마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옥'은 '활활 타오르는 불'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신이 부재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13/08/02 18:56
원죄에 대해서 말씀하신대로, 텍스트상에서 명료하게 등장하진 않습니다. 삼위일체와 비슷한데, 이쪽보다는 좀 더 유추가 쉬운 논리적 과정을 통해 성립된 개념입니다. 단지 아담의 죄가 현생 인류에게 유전되지 않았다는 것은 기독교의 정론적인 가르침과 좀 다르다고 볼 수 있는데, 창세기의 상당수 설화가 '왜 인생이 이렇게 고달픈지 아니?'에 대한 답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죄를 정의하는 종교라는 해석이 있는데, 그 해석이 이러한 이유에서 기반합니다.
신약에 와서 구약의 민족신과는 달리 보편신앙으로의 변화가 모색되면서 다소 그 배타성이 누그러진 것 역시 사실입니다. 성경 텍스트만 비교해도 명확하지요. 문제는 누그러져봐야 현대 사회 기준의 개인주의와 다원주의에 대해 충분한 해답이 되기엔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입니다. 지옥의 개념에 대해서는 좀 아예 다른 얘기가 필요할텐데,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말씀하신대로 기독교의 지옥은 불구덩이의 형벌보다는 신의 부재와 정의의 부재와 원칙의 부재를 의미하고 때로는 지금 이 세상을 메타포적으로 의미하기도 합니다.
13/08/02 19:39
그렇죠. 저도 그랬습니다.
아담의 죄가 현생 인류에게 유전되었다라는 설명을 듣고 자란 저로서는 '정말 그래..?'라고 의심했고 '이건 정말 너무한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죄'가 등장했다(=죄라는 개념이 최초로 등장했다)는 걸로, 이제부터는 그 누구라도 그에 해당하는 행동을 또다시 할 수 있다는 걸로 이해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일부 막 나가는 목사들이 '죄는 세습된다'고 윽박지르는 도구로 '원죄'를 사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원죄'보다는 역시 '최초의 죄' 혹은 '죄의 탄생'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요.
13/08/02 17:14
종교에 깊은 이해가 있으신 것 같기 때문에 이렇게 하실 수 있겠지만, 종교를 모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천주교나 개신교나 여러 가지 종교의 차이점을 전혀 모릅니다. 딱 하나 알죠. 예수를 믿는다는 것.
겉으로 보기에 갑자기 누군가 찾아와서 '너 죄인. 예수 안믿으면 지옥가요. 그러니 교회 빨리 나와요. 십일조는 뽀나스♡' 이렇게 이야기하면 좋을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위의 내용이 심한 비약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위의 멘트는 실제로 겪은 일을 압축한 것 뿐입니다.
13/08/02 18:25
글쓴이 입니다.
깊은 이해가 있는 건 아닙니다. 사실 기독교에 대한 반대글을 쓰라고 하면 더 잘 쓸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너 죄인' 얘기를 제가 듣거나, 다른 사람에게 하라고 강요를 받다보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제가 스스로 찾아본 것이죠. 아직 애매한 것이 더 많습니다. 말씀하신 경험은 저도 직접 겪은 일입니다. 맞는 내용이죠. 현실이구요.
13/08/02 17:14
무신론자인 제 입장에선 종교는 그냥 마음의 평안을 얻게 해주는 사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교인들은 고객이구요.
근데 일부 종교인들은 스스로를 좀 특별한 존재라 생각하는거 같아요.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건지 아님 그렇게 보이려 하는건진 모르겠네요 그리고 종교에서 제가 가장 싫어하는 부분이 배타성입니다. 자기와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놓고 배척하고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고 지금 세상어디에선가도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죠 그냥 종교라는것 자체가 인간의 불완전함을 입증하는 증거같아요.
13/08/02 17:15
외국쪽은 돈이랑 목사 보스화가 좀 덜한가요?
뭔가 믿어보고 싶은데 교회가 그나마 가까워서 가볼려고 했는데 헌금이나 기타 십일조 같은거 때문에 도저히 못가겟더라구요.. 나는 일주일에 천원이상 교회에 못줄거 같은데.. 천원이하로 내면 눈치 엄청 줄거 같고..
13/08/02 17:20
헌금을 강요하는 교회는 다니시지 않는게 좋습니다.
헌금은 개인적으로 자기가 내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내시면 좋습니다. 교회를 다니실때 갠적으로 교회를 구분하는 방법은 자주 모임에 나오라고 하는 교회, 헌금을 강요하는 교회, 길거리 전도를 강요하는 교회, 강제 선교를 하는 곳은 피하시는게 좋습니다. 위에 것들이 나쁘다는의미는 아니지만요
13/08/02 17:28
제가 교회에서 배운대로 말씀드리죠.
헌금은 의무가 아닙니다. 액수 또한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중요한거죠.. 만약 헌금을 강요하는 교회가 있다면 제가 다 말리고싶네요.
13/08/02 19:59
헌금을 내라고 설교때 하는거끼진 좀 봐주세요 ^^ 교회도 먹고 살아야죠?
신학교에서도 헌금(여기서는 옛날 성경에 쓰인 연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네요)설교믄 1년에 한 두번 정도는 하라고 가르칩니다. 다만, 그 이상이라던가, 액수를 이야기한다단가, 이쯤 되면 그냥 미친거죠. 헌금은 단순히 돈을 내는 것 이상의 종교적 헌신을 연습하고 실천하는 종교적 의미가 (사전상에) 있습니다. 현실이 시궁창이라 그렇지.
13/08/02 17:19
저는 개념찬 다른 국가의 개신교와 무개념한 한국 개신교라는 식의 도식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원래 일신교는 정의상 절대적이고 단일한 유일신을 믿는 것이고, 이를 믿지 않는 것은 모두 잘못된 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수의 신념>을 인정한다거나 <다원주의적 태도>를 견지한다거나 <신을 믿고 안 믿고는 저마다의 자유>라는 식으로 일관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일신교의 교의에 대한 배교행위죠. 그 자체가 그네들의 유일신을 상대화하는 신성모독인 걸요. 쉽게 말해 "우리의 신이 맞을 수도 있지만, 네 말대로 틀릴 수도 있다능. 그러니까 서로서로 인정하고 잘 지내보자능 ^^"이라는 식인데, 제가 유일신이면 이런 신자는 당장 때려죽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른 문화권에서 개신교가 강성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건 딱히 개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세를 잃어 어쩔 수 없이 시류와 타협한 거죠. 개신교는 아니지만 중세 시대 로만 카톨릭이나, 종교 전쟁 이후에 유럽 등지에서 개신교가 보인 독선적인 행태를 추려보자면 한도 끝도 없을 텐데요. 그리고 외려 한국 개신교가 (그 강경성에 있어서는) 보다 순수한, 초기의, 원초적인 개신교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거라고 봅니다.
13/08/02 18:10
제가 교리를 잘 몰라서 그런데 결국에는 자기 스스로만 구원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의 구원이야 어쨌든 소개의 문제이고. 문화권의 충돌은 교리 자체와는 관계 없을 듯싶고.
13/08/02 18:14
일신교라는 것 자체가 절대적이고 무제한적이며 초월적인 유일신이 있고, 교의와 진리와 신념은 여기에 죄다 종속되는 거니까요.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일신교 이외의 신념>은 인정해줄 수도 존중해줄 수도 없죠. 포교를 하고 말고야 권장 이상은 없지만, <복수의 신념>을 인정하는 건 이치에 닿지 않을 겁니다. <나 이외에 다른 신(신념, 종교관)은 믿지 말라>에 정면으로 배치 될 테니.
13/08/02 18:25
근본적으로 종교의 목적은 사후 세계에 대한 설명일텐데, 기독교에서의 영생이 불교에서의 열반 혹은 해탈 같은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신교에서도 유일신을 안믿고 죽겠다는 (지옥 혹은 불교에서의 윤회) 결정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주었다고 생각해서요. 어차피 일신교에서 구원은 신의 대리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닐터인데, 그냥 자기 오지랖이 넓은 게 아닌가 합니다.
13/08/02 19:46
글쓴이입니다.
한국기독교와 외국기독교로 나눈 것으로 비춰진다면 제가 표현이 서툴렀나보네요. (외국기독교와 관계없이) '한국' 현대의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3번에서 말씀드리려고 했던 겁니다. 한국에서만 보는 특별한 현상 혹은 한국에서 유달리 더 두드러진 현상이 있다고 느낀 점이 있어서입니다. '강요'에 대한 지적은 저 위 레지엔님에 대한 답글중 '선택'의 문제라고 답변을 드린 걸로 부족하지만 대신할까 합니다. 존 스토트나 제임스 파커등의 외국의 강해서적(성경을 연구수준으로 강해해 놓은 서적)을 볼 때마다 성경을 '공부'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적어도 '공부'는 못해도 제대로 읽거나 설명만 들었더도 이상한 표교는 안할텐데라는 생각이 드네요. 맨날 .... 주시옵소서라고 복권기도나 하니 현실이 참 이 모양입니다.
13/08/02 17:20
만약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라면 저는 예수님을 존경합니다
한국 기독교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 문제는 "게으르고 무식하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교인"입니다 일단 성경을 안봅니다 그냥 줄줄 따라 읽기만 하지 안봅니다 근근히 목사가 풀어주면 그마저도 이해를 못합니다(이해하려고 노력을 안합니다) 성경이나 신앙에 대한 이해와 고심이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 안합니다
13/08/02 19:44
저는 이 의견에 반대합니다. 그 말씀은 결국 '똑똑하고 성경 말씀 잘 이해하는 사람만이 구원받는다.'고 여겨지거든요. 평생 특별한 능력은 없어도 열심히 봉사해서 교회 장로나 안수집사가 된 사람들이, 저런 논리때문에 내가 이만큼 됐는데 성경을 몰라 부끄러워하는 부분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게, 이단들이 하는 소규모 성경공부 모임 권유죠.
13/08/02 19:54
한국 기독교가 성경 안보는데는 절대적으로 공감하고, 이해와 철학이 없어서 그 지경까지 오긴 했지만, 믿음은 이성으로만은 다다를 수 없는 부분이니까요.
한국 기독교가 가장 순수하고 힘이있었던 시기인 1907은 문맹들이 가득했던 시기입니다. 다만, 문맹이 없고 텍스트가 흔해진 이 시기에 기독교인이라면 진짜 믿음에 대한 미친듯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많이 공감합니다
13/08/02 17:20
신교 개혁파가 이후에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대가 올거라곤 예상못한게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_~;
그나저나 오늘 pgr은 덜덜....
13/08/02 17:38
제가 구약을 보면서 가장 충격 받았던 것 중 하난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그 죄를 본인이 아닌 자식의 죽음으로 대가를 치루는 장면이었습니다. 왜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라 아들이 대가를 치뤄야 하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13/08/02 18:16
아브라함과 이삭의 부분을 읽으신거 같은데, 핵심 메시지는 그건 아닙니다.
실제로 아들이 죽음의 대가를 치루지도 않았죠. 단지 아브라함의 마음을 보고자 했을뿐이지요.
13/08/02 18:26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상당수가 문제점을 가진 경우입니다. 베드로또한 배신을 했고, 바울도 원래는 예수의 제자들을 때려잡으러 다녔죠. 실제로 몇몇은 때려 죽였고.. 말씀하신 다윗도 유대인들에게는 위대한 왕이지만, 결국 단점과 모순을 가진 사람일뿐이다라는 것이 성경이 의도하는 바..
그런 인간군상의 단점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보여 준 점. 그리고, 그런 단점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 회심후에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성경에서는 보여주려고 한것이죠. 양의피를 바르지 않은 집 장자를 죽이는 건 제가 설명하기 힘드네요. 어떻게 보면 대량학살에 가까운 것이니.. 다만 당시 이집트는 유대인들을 노예로 데리고 있었고, 피라미드등의 건설등 사역에 상당수 유대인들이 죽음을 당했다는 배경은 있죠. 그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이집트 탈출) 이집트왕을 모세의 입을 통해 1단계부터 9단계까지 설득하는 과정은 있었습니다. 이집트왕은 불법적으로 데리고 있던 유대인들을 9단계가 되도록 풀어주지 않았고요. 그리고 그는 선택을 하고 자기 선택의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응하지 않았어요. 그 결과가 10단계로 이집트인들의 장자가 다 죽게 된 것이죠. 솔직히 성경이 의도하는 의미는 어떤지 잘은 모르겠네요. 다만 맥락은 그러하다라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13/08/02 18:29
저는 단지 단죄의 대상이 죄를 지은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것을 말한거에요. 교회 내에서야 어떤 의미를 부여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옳은 방법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니까요.
13/08/02 18:44
위에도 적었지만, 그건 제가 대답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잘모르겠어요. 이집트 파라오를 죽이면 깔끔했을 것 같은데.. 다만, 이후에 이집트를 빠져나와도 40년동안 아프리카대륙과 아라비아반도 북쪽을 뱅뱅돌면서 방황을 했죠. (그리고 파라오가 깔끔하게 죽었다면 이런 시나리오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왜냐면 유대인들 상당수가 모세의 메시지를 상당히 귀찮게 받아들였거든요.. 아마 이집트에 눌러앉았을지도..) 길을 못찾지는 않았을 텐데.. 경로보면 정말 뱅뱅 돌던데.. 그거를 통해서 이집트에 뿐 아니라 (신앙에 성실하지 못한) 유대인들에게도 메시지를 전하고픈 절대자의 의지도 있었던 것 같네요.
13/08/02 19:49
이 스토리를 통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출애굽기에서의 야훼는 자신의 피조물 전체가 아닌 이스라엘민족을 위한 민족신이라는 사실입니다. 확실히 구약에서의 야훼는 유태인들을 지키기 위해 별별 수를 다 써가면서 그들을 지키니까요.
13/08/02 18:49
이집트가 겪은 10가지 재앙은 현대 기독교에 비춰보면 모순적 행동입니다. 이건 민족신의 흔적이 남은 것으로, '나는 나의 신민을 이 정도로까지 사랑한다'를 보여주는 배타적이고 폭력적이고 유치한 비보편종교로의 모습이지요. 다른 글에서도 여러 번 남긴 이야기지만, 현재의 기독교는 이 모습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업데이트하지 못하지요(실제로는 지금 성경 자체가 업데이트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시간이 지날수록 현대사회의 다른 가치에 비해서 전근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13/08/03 00:19
글쎄요. 자업자득이라. 어찌보면 무서운 말일 수도 있겠네요. 실수로 '죄'를 범했을때도 역시 인과응보, 자업자득?
기독교는 죄에 대한 '용서'가 들어가기 때문에 이런 수학적 도식으로 접근하면 어렵게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 꼬아놓은 시스템이 뭘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13/08/02 17:34
제가 어렸을 때 교회에 다닐 때엔 전도를 하는 이유는 첫째 그 사람에게 구원을 전파하기 위해, 둘째는 전도가 천국에서 가장 많은 보상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이 개신교 전체의 생각은 아니겠지만 저는 두번째 이유가 잘 이해가 안되더군요. 이 세상도 차별때문에 살기 힘든데 왜 천국이라는 곳에서도 차별이 존재하는 건지... 다른 교회에선 어떻게 가르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13/08/02 17:42
이 본문도 그렇고 pgr에서 본 '나쁘지 않은 개신교 글'에서 나오는 교리 해석이라는건 주류 교리와는 심하게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그저 주류가 아닌 소수의 의견이라는 것이죠.
애초에 한국 개신교가 갖는 모순점이라는건 한국만의 독자적인 문제라고 하기도 힘들고요.(그 원류를 거슬로 올라가면 결국 미국->영국->카톨릭 까지 올라가죠.)
13/08/02 18:19
엇.. 소수가 아닙니다.
당연히 윗글 쓰신 분이 쓴게 맞고요.. 문제는 저대로 안하는 교회가 많고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13/08/02 17:45
하나 더 생각나서 코멘트 달아보자면, 저는 기본적으로 일신교도라면 신정일치 사회를 무조건 주장해야 하고, 그렇지 않는다면 진정한 일신교도가 아니라고 봅니다. 신이 터치할 수 없는 인간의 자치 영역...이란 게 있다는 것 자체가 유일신의 절대 권위에 대한 훼손이죠. 그런 점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야훼의 것은 야훼에게..라고 말한 예수조차도 상황에 타협한 거고요. 애초에 구약의 야훼가 무슨 제정분리를 긍정했습니까. 다윗이 인구조사 한 번 했다가 야훼의 뜻을 거슬렀다고 신나게 터졌는데(..).
결국 개신교를 포함한 일신교의 궁극 지상 과제는 세계정복일 수밖에 없고, 무신론자는 그걸 힘으로 억제하는 수밖에 없다고 보네요. 실제로 일신교의 폐혜가 현대에 와서 그나마 줄어든 것도, 개신교나 카톨릭을 포함한 일신교의 세가 약화되어, 일신교계가 제정분리와 정치적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국가적 영역에 종교적 교의를 강요할 수 없게 되고, 이러한 세속의 흐름을 (현실 국가와의 힘싸움에서 밀려 울며 겨자먹기로) 긍정하게 되어서가 아니겠습니까.
13/08/02 18:11
일신교와 신정일치 사회는 필연적이지 않을 텐데요? 중세나 현대 이슬람 원리주의가 꼭 그 예로 존재하는데
중세는 거의 근대인의 곡해에 가깝고 이슬람 원리주의는 정말 이슬람 사회에서 일부죠. 중세사나 이슬람 사로 보면 정말 일신교는 종교와 정치의 싸움의 역사였고 종교가 어떻게 정치에 종속되지 않을까의 역사였지 정치가 종교에 종속된 역사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행태에 대한 역사성이나 사회성은 꼭 무시되고 모든 죄는 종교에게 무는 것도 약간 웃기다는 생각도 들어요.
13/08/02 18:15
그 일부가 원론적으로 옳다는 이야기입니다. 유일신은 절대적이고 무한하며 초월적인 존재인데, 유일신이 터치할 수 없는 인간의 자치 영역이 있다는 건 비논리적이죠. 자연법칙으로부터 독립적인 법칙이 존재하는 관념의 세계가 있단 이야기와 다를 게 없습니다.
13/08/02 18:20
그것도 말이 안되는데 그럴 거면 왜 자유의지가 교회에서 잘 언급 됩니까?
그리고 신약에서 신의 것은 신의 것,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의 것도 상당히 인간 자치에 대한 유의미한 말이죠.
13/08/02 18:25
자유의지가 유일신적 진리에 영향을 끼치진 않죠. 인간이 자유의지로 구원론을 바꿀 수 있진 않습니다. 교의를 바꿀 수도 없죠. 신의 계율을 변경할 수도 없고요. 자유의지는 그저 절대적인 진리를 받아들일지 말지에만 한정될 뿐, 아무런 영향도 행사하지 못합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거나, 광속이 초속 30만 km에 달한다든가 하는 자연법칙을 인간이 자의적으로 부정한다고 해서 자연법칙이 부정되진 않는 것과 마찬가지죠.
정의상 유일신은 절대적인 존재일 테고, 유일신의 계율은 보편타당하고 무조건적, 무제약적, 무차별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텐데, 이것이 조건적이고 제약적이며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영역이 있다고 하면 그 순간 유일신은 유일신이 아니죠. 본질적인 차원에서는 다신교의 신과 달라질 게 없습니다.
13/08/02 18:31
왜 영향을 미치지 않나요? 애초 원죄 논쟁과 자유의지는 땔수가 없는 기독교 신학의 핵심입니다.
진리나는 결과를 이르게 하는 수단으로 자유의지가 중요하고 어자피 우리가 신의 뜻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자유의지는 신의 뜻에 대한 인지 틀을 바꾸게 만드는데 말이죠. 한 목사의 말이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해 신의 뜻을 인지할 수 있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인간의 자유 의지를 통해 신의 뜻 자체를 다르게 인지할 수 있는데 말이죠. 외려 구밀복검님이야 말로 어떤 목사의 말이 신의 뜻으로 인지하고 이를 통해 자유의지를 너무 과소평가하신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실 이걸 이해 못하면 에라스무스라는 격렬하게 신을 깐 사람 밑에서 예수회와 성 토마스 모어 같은 위대한 신학자가 탄생했는지 이해를 못하는 거죠.
13/08/02 18:37
영향을 못 미치지요. 어떤 신학적 입장에서 자유의지로 유일신의 계율을 변경가능하다고 하나요?
게다가 만약 그렇게 된다고 하면 문제가 더 커집니다. 제가 일관적으로 말하는 것은 이겁니다. 유일신은 절대적인 존재일 테고, 유일신의 계율은 보편타당하고 무조건적, 무제약적, 무차별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텐데, 이것이 조건적이고 제약적이며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영역이 있다고 하면 그 순간 유일신은 유일신이 아니라는 것. swordfish님 말대로 자유의지가 유일신의 법칙, 진리, 계율, 예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신의 <상대화>고 진리의 절대성에 대한 부정입니다. 신의 입장에서는 집에서 키우는 개미들만도 인간이 신에 대해 항변하고 타협하고 협의할 수 있단 이야기가 됩니다. 인간이 자의적으로 자연법칙을 따로 정할 수 있단 것과 마찬가지고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을 인간이 의지먹기에 따라서 아래에서 위로 흐르게 할 수 있단 것과 다를 게 없죠. 말하자면, 결국 죄다 "신의 가르침은 절대적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인간의 의지에 따라 조건적이다!"라는 식인데, 싸잡아서 말하자면 원칙적으로는 유일신관을 고수해야하나, 현실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세파와 타협해야 했기 때문에 내세운 일련의 꼼수, 미사여구들로 포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 발은 평등하지만, 두 발은 더욱 평등하다!"는 식의 이야기와 다를 게 없죠.
13/08/02 18:43
과정의 상대성은 인정하면서 진리의 절대성은 부정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등장한게 인간의 불완전성입니다. 구밀 복검님 논리로는 일신교 내는 극도로 전체주의적이야 하는데 가톨릭이나 성공회 같은 경우 상당히 사제 개인의 생각이나 연구 방법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겁니다. 어자피 절대적인 진리에 인간은 도달할 수 없으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해 여러가지 다양한 벙법을 통해 이 진리를 연구하게끔 하는 거죠. 다시금 말하지만 신의 뜻과 자유의지는 상충되는게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자율성이나 인간 자치가 신의 뜻 이러면 상당히 이런 충돌이 해소되기에 초기 교부들은 이런 간단한 논리적 구조를 많이 썼습니다. 신교 같은 경우 여기에 더 나아가서 이러한 신에 대한 자유 의지를 교회가 아닌 개인에게 넘겨 버렸죠. 뭐 저는 에리히 프롬 말대로 오히려 권위주의적 개신교회를 낳았다고 보지만요.
13/08/02 18:46
세속와 영역과 종교의 영역을 분리한 것은 단순히 과정의 상대성 문제라고 볼 수가 없지요. 인간의 정치영역이 유일신적 진리에 대해 독립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어떻게도 신의 절대성에 흠이 안 갈 수가 없는 걸요. 논리라는 것 자체가 만들고자 하면 안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니 못 짜낼 것은 없겠습니다만, 보다 지난하고 우회적이고 단순하지 않고 복잡한 루트를 거쳐야합니다. 그보다는, "신이 절대적이므로 인간의 자치 따위는 없어! 하찮은 인간레기들이 무슨 제정분리야 제정분리는!"이라는 게 훨씬 심플하고 간명하고 자연스러운 결론이죠. 그저 그렇게 했다간 종교가 존속이 안 될 뿐...
때문에 위에서 말했지만, 원칙적으로는 유일신관을 고수해야하나, 현실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세파와 타협해야 했기 때문에, 세속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기 위하여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일련의 꼼수, 미사여구들로 포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3/08/02 17:55
인터넷에서의 교회논쟁은 사실 무의미하다고 보는게
하도 종파랑 교단이 많이 갈라져있다보니 공통된 무언가가 제로더라구요 그러니 개신교에 대한 비판 논의의 실효는 제로죠 뭐. 어떤 논의를 해도 결국 우리쪽은 안그럼으로 끝나거든요 현실은 전혀 안그런데 말이죠. 꼭 조별과제 프리라이더 논란 보는거 같아요.
13/08/02 18:04
아닙니다. 그런면에서 레지엔님의 두번째로 다신 댓글이 의미가 있는거죠.
아무리 종파와 교단이 많더라도 예수님이 이땅에 온 목적과 의의, 죄와 구원론에 대한 이슈는 어느 교단도 피해갈 수 없거든요.
13/08/02 18:05
애초 초기 기독교나 가톨릭적 전통은 논리나 이성적인 설득에 가까운 것이었지 울고 불며 하는 신비주의적 체험이 아니었죠.
그게 십자군 원정 이후 신비주의가 다시 근동에서 재유입 되면서 들어온 습속입니다. 이런게 후의 청빈주의 운동이나 소형제회 같은 이런 류의 운동으로 연결되긴 하는데 이건 교회 정화 큰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중세 이단 논쟁의 경계에 있었던 것인지라 어느 정도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이런 신비주의적 습속을 많이 도입했기 때문에 이게 가톨릭 보다 심한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이마저도 미국에 거치면서 원리주의와 연결되어서 더 심해졌고, 우리나라는 무슨 이런 신비주의적 행태가 기독교회를 대표하는 이상한 현상으로 인식되게 되었죠.
13/08/02 18:30
일신교의 교리야 무신론의 관점에서 봐도 긴 역사의 결과물이니 다른 모든 역사의 산물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현 시대의 주류적 조류인 다원주의와 맞지 않긴 하지만 그렇다고 유일신교 신앙이 박멸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기엔 무리이죠.
뭐랄까, 이게 적절한 비유가 될런지는 모르겠는데요.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개인적인 경험임을 다시 강조드립니다) 저런 어설픈 선교시도를 볼 때마다, 골프격언이 떠오르더군요. 90타 골퍼는 남을 가르치려 들고, 싱글 골퍼는 남의 샷에 대해 가능한 왈가왈부하지 않으며, 프로는 돈을 받고서야 가르쳐준다는 말이 있거든요. 골프가 아니면 당구로 생각해보셔도 쉬운데, 100에서 120 지나 150으로 가고 할 때는 정말 모든 게 깨달음이고 옆에서 하수들이 하는 것 보고 있으면 입이 근질근질 하거든요. 기독교 교리에 대해 깊은 공부를 하고 성경의 피상적인 의미가 아닌 그 본원에 대한 이해를 갈고 닦고, 교회와 한국 사회에 대해 회의와 고민이 있는 신자라면 저런 일은 벌일 수가 없을겁니다. 다 얄팍한 이해, 얄팍한 믿음, 얄팍한 영접(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되어 적절한 두려움이 없는 상태인 것이죠. 글쓴분의 말은 고민하며 교회다니는 많은 기독교인들과 잇닿은 점이 분명히 있을겁니다. 저는 진정성이 느껴져서 좋은데요. 너무 공격적이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13/08/02 18:51
중간의 비유 부분에 대한 이견입니다만, 그렇다면 칼뱅을 비롯한 수많은 종교지도가들은 90타 골퍼 혹은 물다마라는 소리가 됩니다. 또한 말씀하신 형태의 비판 회피는 모든 분야에서의 비판에 대해, '잘 알면 그렇지 않아'라는 식의 일종의 정신 승리 선언에 가깝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mma에서의 리얼리즘을 입증하지 못한 중국권법이 외부에 대해 취하는 자세가 '진짜 고수는 산에서 내공 닦느라 안나와'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종교에 대해 사실상 절대적 우위를 입증한 것이 과학일텐데, 그 과학에서 잘난 사람은 논문도 내고 강의도 합니다.
13/08/02 19:02
칼뱅이 현재 한국에서와 같은 형태의 후진적 노방전도를 하라고 했나보죠.. 전 과문해서 그 부분은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저는 비판을 회피하고자 하는게 아닌데요. 잘 모르니 저런다는 현상에 대한 설명이지, 그렇다고 그런 행위에 면죄부를 주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분명히 잘못된 행동임에도 한국 교회가 현실적인 이유로 막지 못하거나 경우에 따라 조장하고 있고 분명히 개선되어야 하는 현상이죠. 다만 일신교리가 사회적 문화적으로 그 자체로 박멸의 대상이 아니라면 다원주의 사회에서 유일신교 신자는 적절한 discretion이 필요하기에 (어느 분이 말씀하셨듯 신정일치 사회를 추구하자는게 현재의 기독교도들은 아닐테니까요) 그 조화의 선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고 그를 위해서는 교리에 대한 천착이 선행되어야 할텐데 전반적으로 그런 부분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는 이야기였는데, 과학의 우위와 검증(종교에서 검증이라는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만)의 문제까지 제기하시게 만들었으니 제가 글을 잘못적어 오해를 불러일으킨듯 하네요.
13/08/02 19:08
칼뱅은 그 이상을 했습니다. 신정일치 사회를 만들어냈죠. 그리고 현재의 개신교를 만든 정신적 지주라고 불러도 틀리지 않을 정도고요.
제가 리플에서 이견을 제기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1. 기독교인이 뭔가 잘못하는 행동을 보이는건, 그 기독교인이 기독교에 충실하지 못해서 그런거지 충실하면 안 그럴 것이다. 2. 일신교의 교리는 박멸의 대상이 아니다. 1번에 대해서는 기독교에 충실하면서도 잘못하는 행동을 보인 사례, 그리고 그와 유사한 다른 사례를 통해 반론한 것입니다. 2번은 결과적인 반례로 곁다리로 들어간 것이고요.
13/08/02 19:14
1.에 대해서는 위 리플에서 말씀드린 것 같고, 2번은 일신교 교리가 박멸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신다는 건지.. 그렇다면 저는 특별히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전 불교도입니다.)
13/08/02 19:16
폐쇄적-비합리적 세계관은 타파의 대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예컨대 저는, 여론조사를 했더니 '창조설을 지지한다'라는 사람이 1명도 안나오는게 바람직한 사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13/08/02 19:14
제네바에서 칼뱅은 자신의 개신교 교리에 근거하여 정치지도자로서 독재를 햇으니까요. 노방전도는 아무리 비판적으로 보더라도 <참견> 이상은 아닌 반면, 칼뱅은 서슴없이 불신자들의 목을 잘랐으니..그렇다고 이를 두고 칼뱅이 이단적이었다거나 반동적이었다고 하진 않죠. 오히려 종교개혁기 개신교의 끝판왕으로 간주되곤 하니까.
13/08/02 19:22
박멸까지 필요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유일신적인 세계관이 보편적 헤게모니를 획득할 수 없어 여타의 신념체계와 다를 바 없이, 사실상의 다신교로 전락하는 정도로 제한되면 충분하겠죠. 다만 이 과정에서 유일신적 세계관과의 <원론적인 차원에서의 합의>는 불가하며, 오로지 힘의 논리, 세력관계 등에 의해서만 제어가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뭐 현대 사회에 이르러서는 비교적 잘 제어되고 있다고 보고요.
13/08/02 19:26
말씀하신 수준의 제어가 된다면, 그게 베스트는 아니겠으나 굳이 박멸을 위해 힘쓰지 않을 정도로 억제가 되는 well-controlled 정도가 되겠지요. 저는 현대 사회에서 이전보다는 제어가 잘 됐으나 아직 갈 길이 좀 멀다고 생각합니다. 창조설을 교과서에 실어야 마땅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나라가 있고 그 나라가 세계 표준을 선도하는 나라라는 점에서.
13/08/02 19:29
뭐 근데 일신교를 포함하는 비이성의 박멸 자체가 불가능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원과 인력과 시간과 노력과 인내와 극기를 너무 많이 요하는, 지난한 작업이라고 봐서..
그 정도는 그냥 멍청이는 어느 세상에나 있다는 정도로 익스큐즈하는 게 속 편하다 싶습니다. -0-;
13/08/02 19:38
일단 죄와 죄인에 대한 개념이 조금 다른것 같습니다.
기독교-좁게 표현을 하자면 개신교에서의 죄와 죄인의 개념을 조금 설명드리겠습니다. 일단 죄는 어떤 행위를 했다 안했다, 어떤 생각을 했다 안했다의 개념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끊어진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끊어진 상태를 죄라고 하고 죄를 지은 상태의 사람은 죄인인 것이죠... 율법을 지키고 안지키고의 개념이 아닙니다. 율법을 일점 일획도 어기지 않고 산다고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았다면 죄인인 것이죠... 그러다보니 본인의 행위 즉, 아무리 인격적이며 남을 위해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산다고 해도 개념적인 죄인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기독교를 독선적이고 편협적인 종교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겠죠
13/08/02 20:03
원죄에 대해 설명하자면..
예수님 믿는다고 원죄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앞에서 다른 분이 설명해 주셨듯이 원죄는 성경에 나오는 말이 아니라 나중에 생긴 개념인데, 죄를 지으려는 성향, 죄성을 원죄라고 하는 거죠. 바로 이 원죄에서 자범죄가 나옵니다. 자범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죄, 즉,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같이 십계명 같은 겁니다. 원죄가 사라지면 자범죄가 설명이 안됩니다. 기독교인들도 자범죄를 짓고 회개를 하거든요. 원죄가 없으면 자범죄가 없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만 믿으면 그냥 죄가 하나도 없어지는 겁니다. 그건 말이 안되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들은 이부분은 두루뭉실하게 설명합니다. 예수 믿으면 모든 죄가 다 사라진다구요.. 정확히 말하면 모든 죄가 사라지는게 아니라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된거죠. 원죄는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 죄성을 신앙으로 억누르면서 살아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됐다고 할지라도 평생 구도자의 삶을 살아야 되는 거죠. 그런데 현대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예수님 믿으니 우리 죄없음, 너네들 죄인 크크..' 요런 태도입니다.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너희는 못 받았으니 이 불쌍한 것들 쯧쯧..' 요런 시선이 일반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거죠. 교리를 똑바로 안 가르치니까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13/08/02 20:14
아시는분은 알겠지만 기독교글에 종종 출몰하는 메이저교단의 전도사입니다.
3번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한국 교회는 올바른 지식과 올바른 실천, 그리고 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도 제왕을 세우려는 근성이 남아있는게 문제죠. 2번은 딴지 걸 이야기 있나요. 그래도 '예수천국 불신지옥'으로 단순화되는 교리(40년전에 전도 쉽게 해보고자 단순화했던게 시초입니다) 는 점점 사그라드는 추세니까요. 기독교를 싫어하시는 분들이라도,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무작정 전도지를 나눠주는 분들은 50대 이상이라는거는 공감하실 수 있을거니까요. 20댄 저도 노방전도를 하지만 그때 제일 강조하는건 사람에 대한 예의와 그분들이 매력적으로 전도지를 받아보게 만들게 하는 방법이니까요. 1번때문에 리플을 달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에 이르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으리라.(정확히 못 외워서 대충 씁니다) 라는 구절처럼 교리는 언제나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합니다만, 이 교리는 사실 철학적 성취에 가깝습니다. 모든 사람이 물리적인 죄를 저질렀다기보다는 완전할 수 없다는 부분이니까요. 믿는다고 말해도 자신의 죄를 놓고 꺼내어보고 회개함은 해야하니까요. (실제로 믿으면 믿을수록 죄가 많아진다는 느낌입니다.. 크크) 이걸 범죄의 의미로 섞어쓰고, 교묘하게 혼용해서 죄책감을 강화하는 구조로 쓰인다는게 문제이고, 안 믿는 사람 입장에선 기분이 무지무지 나쁘죠.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죄의 개념은 sin인데(성경도 sin으로 번역됐을겁니다) 우린 교묘하게 crime을 섞어쓰거든요. 그런식으로 믿는 사람에게 죄책감을 더하고, 우린 그 복음을 전하더보니 crime의 개념으로 일반인이 죄를 받아들여서 우리가 재수없으보인단 생각입니다. 다만 애석하게도 선교단체나 교회에선 이 죄의 개념을 알게모르게 섞어쓰는 방향으로 강화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잘나가는 청년 목사님들 설교를 들어보면 인간에게 선한것이 어디있냐는 논지입니다. 현재가 이런 설교메타의 정점이라는 생각이 드니, 죄책감을 줄이고 sin과 crime을 구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겠지요(현재 진보적인 사람들이 주장하는게 딱 이쪽입니다. 초 마이너라는게 문제지)
13/08/02 20:21
질문을 좀 드리겠습니다.
1.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점점 사그라든다고 하셨는데, 기독교 교리의 근본 중 하나가 예수천국 불신지옥 아닌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는 말을 심플하게 바꾸면 결국 예수천국 불신지옥 아닌가 싶습니다. 2. 죄를 짓고 회개하고 죄를 짓고 회개하고 하다보면 제대로 된 구원은 언제 어떻게 받을 수 있나요?
13/08/02 20:33
1. 공감하고, 그게 기독교의 본질이고 우리가 어떤말로 바꿔도 이게 불편하고, 비기독교인들에겐 무슨 소리를 들어도 할말없는 우리의 배타성입니다.
하지만, 다짜고짜 '너 님 지옥'이라는 폭력성은 사라지는거니까요. 그리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너무 심플한 8글자때문에 담지 못했던 기독교의 철학들이 살아난다는 희망이기도 합니다. 2천년을 살아온 종교답게 생각보다 다양성에 대한 철학이 많습니다. 2. 구원은 믿는 순간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전도사인데 몇장 몇절인지도 못외우네요 죄송;; 크크) 다만,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순간에서 완전하지 못한 그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회개가 필요한거죠
13/08/02 20:33
당사자는 아니지만 일단 1번에 대해 답변을 드리자면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일종의 프로파간다라고 봅니다. 2천년이 넘는 역사에 수많은 종교들이 융합되고 이단들이 분리되고 세계를 지배했고 지금도 부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종교가 단 8글자로 정리된다는 건 말이 안되는 거죠. 단적으로 예수천국에서 예수는 뭐고 천국은 뭔지부터 설명해야 합니다. 여기서 천국은 옥황상제가 사는 하늘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천국은 저기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이뤄집니다. 그런데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란 말의 뉘앙스는 죽어서 가는 천국, 죽어서 가는 지옥이라는 의미죠. 거기에서부터 예수천국은 이미 오류가 생긴 겁니다. 그리고 예수를 설명하는 수많은 교리들.. 기독론이라는 학문으로 따로 다뤄질 정도로 복잡한 영역입니다. 예수의 인성 신성부터 시작해서 삼위일체론도 이야기해야 되고 성찬식 때 예수의 몸을 먹느냐 기념하느냐 하는 문제인 성례전 문제까지 들어가면 머리 터집니다. 절대로 단순한 교리가 아닙니다. 중세 천년을 유럽의 머리좋은 사람들이 다 이것만 팠는데 그렇게 단순화되지는 않죠.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현대의 팽창을 지향하는 교회들이 만든 프로파간다입니다. 일종의 마케팅용 카피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13/08/02 20:50
천국이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이뤄진다는 얘기는 종종 들어왔지만 기독교의 구원관은 죽어서 가는 천국과 혼용되서 쓰이는 것 같더군요. 확실히 기독교의 구원은 무엇인지 명확하지가 않은 느낌입니다.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는 듯 하고.
13/08/02 20:56
사실 천국이라는 말 자체가 잘못된거죠. 한국에선 도교의 개념이랑 섞어쓰니까요.
원래 성경에서의 천국의 개념은 Kingdom of God 입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법으로 통치되는 왕국이니까요.
13/08/02 21:04
덧붙여서, 지옥 개념도 불교적 개념이랑 섞여서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죠. 헣헣
이래저래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습니다.ㅠ_ㅠ
13/08/02 20:59
헷갈리네요. 그러면 기독교에서의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는 건가요? 어렸을 땐 그렇게 배웠던 것 같은데 말이죠.
13/08/02 21:16
죽어서라기보다는 육신을 벗어나서... 에 가깝지요. 정확히는 기독교 계열 종교 자체가 일종의 말세 신앙이고, 이 세계에 신의 왕국이 도래해서 모든 번뇌(..)를 제거해줄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합니다. 문제는 이게 시대가 흐르면서 결국 종말은 안왔고, 그 과정에서 도덕적 우열에 대한 가치관으로의 기능을 포기할 수 없으니 재정립된 것이 천국-연옥-지옥설이 됩니다. 연옥은 종파에 따라 인정하지 않기도 하고요. 현재 성경에서 천국이라고 적힌 건 모두 다 '하느님 나라'를 의미하고, 선한 자에 대한 보상 혹은 이승에서의 업에 대한 저승에서의 보답이 아닙니다. 지옥 역시 악마가 거하는 곳, 지금 이 세상, 신의 왕국이 정복하지 않은 영역 등의 의미가 상충돼있지요.
13/08/02 21:03
이제야 자리에 앉아서 댓글 쓸 수 있게 됐네요. 헣헣 저 댓글 못 다는 사이에 이런 떡밥이 한 바탕 휩쓸고 지나가서 아쉽아쉽네요.
(심지어 개고기 관련글은 제가 올려달라고 부탁했던 글인데 이미 잠겼네요.ㅠㅠ)
13/08/02 22:01
기독교에서 말하는 개념을 우리나라에서 잘못된 해석과 공포화시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원죄(혹은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근본적인 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단절 구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회복, 즉 원죄로 부터의 구원을 의미. 회계= 죄에 대한 반성과 구원에 이른 존재로서의 자기 성찰 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내가 구원"이라고 하는 말씀과 예수님의 존재가 "복음(Gospel)"이라 정의 하는 것은 교리내에서 합리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언제나 기독교를 가장한 사이비종교들(이라고 스스로 정의내리고 있습니다.)이 "말세론"과 "종말론"같은 공포이론을 가지고 들어와 사람의 나약함을 건드리고 그것을 통하여 사기 및 기타범죄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13/08/02 22:20
본문에는 공감합니다. 다만, 기독교는 한국의 주류 교회가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묵시적이고 종말론적인 종교입니다.
초기 교회의 카타콤 신앙은 우리를 핍박하는 악에 가득한 로마제국(당시에는 세계로 상징되는)의 멸망입니다. 이 신학은 신약성서 중후반부를 관통하는 사상이기도 하죠. 물론, 현실에 대한 기대도 완전히 놓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도행전 28장에서 사도바울이 로마에 가는 것, 로마서 13장(바울의 마지막 저서인)에서 현실에 대한 충성을 이야기하는 것을 이야기하지만, 최소한 지금의 한국 교회처럼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이 복이라는 이야기를 하진 않죠. 물론 사이비들이 이야기하는 말세와 종말을 이야기하는 공포이론과는 궤를 달리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차이는 '쟤는 죽고 나만 살아남는다'는 사이비와 '나는 살고 쟤는 살릴 수 있다'는 기독교 신앙의 차이인거 같습니다.
13/08/02 22:40
그렇죠. 결국 신약성경 전체로 본다면
예수님의 탄생 (과거)-> 죽음과 부활 (과거) -> 재림약속 (미래) 이기때문에 종말론에 기인한 것이 맞습니다. 다만, 성경에 쓰여저 있듯이 "예수님 본인도 그 날이 언제인지 모른다"라는 것에 방점을 두어야 하지 종말에 방점을 두면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필연적으로 온다고 가정한다면, a. 언제인줄 모르는 종말을 대비해서 신앙을 가지고 매일 충실히 살아야 한다는 말과 b. 언제인줄 모르니 지금일 수도 있으니 두려워해라는 말은 분명히 다른 말일테니까요. 물론, 제 개인적 신앙관은 a입니다.
13/08/02 23:42
제가 와이프 때문에 교회에 1년을 다니며
남들은 한달걸리는 초심자 교육을 6개월을(매주 2~3시간씩) 목사님과 토론하며 초심자 교재의 첫장을 넘어가지 못했던 이유입니다. 원죄를 인정하고 죄인이 되라는 .. 6개월을 돌이켜보면 검사와 변호사의 법정 싸움 비슷했었죠 법정 싸움을 위해 성경을 읽고 히브리 역사를 공부하고 해석서를 사보고 영문성경도 읽었네요.. 결국 저는 원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도 결국 저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습니다.. 이 토론속에서 제가 배운 건 "믿음" 의 무게 입니다. 교회에 나가서 목사님의 말씀을 듣다가 급작스런 가슴뭉클한 뜨거움이 밀려와 눈물을 흘리고 신앙고백을 한다고.. "믿음의 무게"는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오순절의 다락방처럼 방언이 터져나온다고 "믿음의 무게"는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죽은지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삼위일체를 믿는다고 "믿음의 무게"는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불교가 오랜 고행과 참선을 통해 욕망으로 부터 자유로워진다면 기독교는 "믿음"을 통해 이 과정을 뛰어넘을 수 있는 어드벤티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믿기 때문에 지켜야하는 말씀의 무게는 가벼워지지 않죠.. 저는 믿음 -> 구원 이라는 공식은 포교를 원활하게 하고자하는 교회의 목적이지 예수님의 뜻은 아니라고 봅니다. 믿음 -> 말씀의 실천 -> 현세가 천국 이 주된 뜻이나.. 모두가 말씀의 실천을 하기전까지.. 현세가 천국이 아님으로 그 시작에서 오는 자기 희생과 부조리함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합니다. 니가 말씀을 신천한다해도 당장 현세가 천국이 되진 않음으로 너의 희생은 천국에서 보상하겠다는... 로직이죠.. 목사님에겐 마지막으로 이 "믿음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라고 최후 변론하였고.. 목사님은 현세 교회가 믿음의 무게를 강요하기 어려운 현실을 이해해 달라 말씀하셨죠..
13/08/03 01:07
님도 좋은 분이고, 목사님도 좋은 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복음은 힘이 있지만 그것이 이땅에서의 '믿음의 무게'를 줄이진 않으니까요.
이 사실을 감추거나 애써 부정하면서 그냥 다니는 척 하는 양반들이 전체 기독교인의 절반은 훌쩍 넘고, 이걸 숨기고 감언이설로 꾀려는 목회자도 전체의 7할은 넘으니까요 희생을 천국에서 보상한다는 로직은 확실히 개소리입니다. 이익으로 종교를 가지면 그건 이미 종교와 믿음이 아니니까요. 해줄말이 "Have a nice day"라는 말밖에 없는거 같아요. 이 용기와 솔직함에 대해서요
13/08/02 23:53
기독교 교리도 2천년을 지나면서 - 구약부터 치면 3천년 - 어마어마하게 변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이야말로 예수와 야훼에 대한 가장 올바른 해석 방식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방어적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혼방으로 된 옷만 입어도 죄인이었지만 다른 민족을 여자와 어린이까지 학살하는 것은 괜찮았습니다. 신약이 되고나니 좀 변했고, 중세에는 다시 심해졌다가 지금은 다시 좀 변했습니다. 이런 것은 기독교인 스스로 일구어낸 변화가 아니라 그냥 당시 사회 조건에 맞춰서 옷을 갈아입은 것이라고 보아야 맞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중심 개념은 사랑입니다" 라는 명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권위였던 유럽의 중세 천년간 그 사회가 그다지 사랑이 가득찬 이상사회가 아니었다는 것으로 이미 얘기 끝이라고 봅니다. 그냥 저 명제가 21세기 현대 사회에 잘 맞기에 써먹을 뿐이지요.
13/08/03 01:11
종교는 상상이상으로 문화적이죠. 저는 기독교인이니 그 와중에도 그 문화적인 흐름에 따라 흘러온 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님은 그렇게 생각하시진 않으시겠죠. (전에 무신론에 대해 쓰신글과 종종 나눈 토론에서 항상 제가 배운단 느낌이었습니다)
다만, 저도 님처럼 언제나 변해오지 않았다고 말하는 교회의 행보에 구역질이 난다는 점에서 님 글이 통쾌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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