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년 이래로 천하의 대세는 옛날과 판이하게 되었다. 영국·프랑스·미국·러시아 같은 구미 여러 나라에서는 정교하고 이로운 기계를 새로 만들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사업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들은 배나 수레를 타고 지구를 두루 돌아다니며 만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병력으로 서로 견제하고 공법으로 서로 대치하는 것이 마치 춘추 열국의 시대를 방불케 한다. 그러므로 천하에서 홀로 존귀하다는 중화도 오히려 평등한 입장에서 조약을 맺고, 척양(斥洋)에 엄격하던 일본도 결국 수호를 맺고 통상을 하고 있으니 어찌 까닭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겠는가? 참으로 형편상 부득이하기 때문이다." - 고종 19년(1882년 8월 5일), 척양비를 뽑으라고 명하면서
강화도 조약 후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는 건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외국에서야 일본을 따라 조약을 맺길 원했지만 조선의 여론도 일본도 반응이 좋지 않았으니까요. 아직 척사는 죽은 게 아니었습니다. 일본이 원한 부산포 외의 두 곳의 항구, 이들이 개항된 건 각기 3, 6년 후였죠. 원래 약속은 20개월 후였는데요. 일본에 보내는 수신사도 유림들을 피하기 위해 암행어사로 위장해 부산까지 가야 했습니다. 애초에 그나마 일본과 조약을 맺기가 쉬웠던 이유가 예전의 교린관계를 그대로 이어가는 거다는 명분이었죠.
일본이야 혼자 먹던 거 나눠먹기 싫었을 거고요.
"만약 일본이 뒤에서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여러 나라들과 결탁하여 개항에 대한 이득을 가지고 유혹시키거나 혹은 북쪽으로 러시아와 결탁하여 영토 확장의 음모로 유인한다면 귀국은 고립되는 형세가 될 것이니 은근한 걱정이 큽니다." - 고종 16년(1879년 7월 9일)
조선에 개항을 적극적으로 권한 것은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이었습니다. 서양인들의 부탁도 부탁이고 그들을 통해 일본을 견제한다는 거였죠. 그에게 있어 주적은 일본이었으니까요. 조선은 이를 일단 거부합니다만 뜸 들이는 것일 뿐이었죠. 2년 후인 1881년에는 영선사를 청에 파견했고, 중국식을 받아들여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합니다.
한편 전해에 수신사로 갔던 김홍집이 책 한 권을 들고 오죠. 그 유명한 조선책략입니다. 이를 지은 황준헌은 이홍장과 달리 주적을 러시아로 보고 있었죠.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결합하고 미국과 연대해야 된다고 간단히 요약되죠. 이런 참 요사스러운 책에 대한 유림의 반대가 계속됐고, 대원군과 연결됐다는 의혹이 있는 역모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고종은 개항을 밀어붙입니다. 고종 19년(1882년) 미국부터 영국, 독일, 러시아 등이 뒤따랐죠.
그리고 이런 흐름 속에 큰 사건이 하나 일어납니다.
-----------------------------------------------------------------
세상이 급변하면 안정적이던 과거가 그리워지기 마련입니다. 필연이었다 하나 일본의 경제, 정치적 침투가 진행되고 있었고 그런데도 다른 양놈들한테 또 문을 열겠다는 상황이었죠. 거기다 고종과 민비의 대표적인 과로 꼽히는 민씨 세도가 큰 문제였습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대원군이 10년동안 모은 걸 1년만에 탕진했다고 쓰고 있죠.
최초의 근대적인 군대인 별기군이 만들어진 후, 구식 군인들은 소외됩니다. 당시 5군영도 2영(무위영, 장어영)으로 개편됐고 (별기군은 무위영에 소속) 여기서 많은 병사들이 붕 뜨게 됩니다. 이들은 임금이 밀릴대로 밀렸고, 그나마 한 달 치 준다는 것도 먹을 게 못 됐죠. 임오군란입니다.
고종은 좀 잘 타일러 보라고 했지만 선혜청 제조 민겸호는 주동자들을 구속했고, 구식 군인들은 폭발합니다. 그 대상은 민씨와 민비가 굿 할 때 썼던 절들, 그리고 일본인들이었죠. 불은 여기서 꺼지지 않습니다. 이들은 대궐로 향했고 대원군의 형 이최응부터 민겸호 등을 죽였고, 민비를 찾아 궐을 들쑤시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대원군이 나타나자 불은 삽시간에 꺼지죠.
그가 언제부터 개입했을진 말이 갈리겠지만 개입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겁니다.
다시 권력을 잡은 대원군, 그는 실종된 민비를 죽었다고 하고 국상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통리기무아문을 혁파하고 중앙군 역시 5군영으로 되돌리죠. 이렇게 간만에 권력을 잡고 나라도 전으로 돌아가나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었죠.
6월 말, 두 나라의 군대가 도착합니다. 청군과 일본군이었죠. 양란 이후 첫 외국군의 진주, 이번엔 둘 다 왔군요.
둘 다 명분은 있었습니다. 청은 김윤식과 어윤중의 요청으로 왔고 그 배후로 민비가 꼽힙니다. 한편 일본군은 일본인 보호 및 군란 때의 피해를 보상받는다는 명분이었죠. 청이 먼저 왔고 병력도 많았으며 명분 쪽에서도 앞섰습니다. 주도권을 잡았죠. 대원군은 이들을 환대하고 초대에도 기꺼이 갔습니다만... 납치되죠. 7월 13일, 다시 정권을 잡은 지 겨우 한 달만이었습니다. 청은 임오군란의 수괴를 잡아간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원나라 때 충선왕, 충혜왕을 잡아간 것에 비유하면서요. 대원군이야 친청이었겠지만 그 때는 청도 조선의 개화를 바랐습니다. 대원군보단 다른 파트너가 필요했죠.
7월 26일, 민비가 돌아옵니다. 청군의 호위를 받으면서 말이죠.
고종은 개화로 다시 방향을 돌립니다. 이 때 그가 개화의 당위를 설명한 것이 맨 위의 기록이죠. 외국과의 조약을 차례차례 진행했고, 내부의 개혁도 진행하죠. 척사는 아직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개화를 막지 못 합니다.
다른 게 있다면 이전이 친일 쪽이었다면 이번엔 친청 쪽이었다는 것이죠. 이홍장이 추천한 묄렌도르프를 고용하고, 군사교관으로 위안 스카이(원세개)가 파견됩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통해 조선의 경제에도 손을 뻗었죠. 물론 이 역시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이홍장이 원한 건 근대적인 종주관계였겠죠.
일본과의 관계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원래도 사대했으니 거부감은 아마 청이 가장 덜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걸 통해 사대를 넘어 정치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고, 경제적으로도 침투해 왔죠. 그럼에도 청에게 배워야 했습니다. 청에게 도움받은 민씨부터 김윤식, 김홍집 등 온건개화파가 이를 주도했구요.
그리고 이를 거부하는 이들이 있었죠.
박규수, 오경석, 유흥기 등에게서 개화사상을 배웠던 이들이었습니다. 개항 이후 외국을 돌아다니며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이들이었죠. 특히 일본에서 말이죠.
그들이 원한 건 청으로부터의 자주독립... 하지만 그 힘은 일본에서 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조정은, 개화파는 친청파와 친일파로 나뉩니다. 그리고 급진개화파는 일을 벌이죠.
일본 공사 다케조에의 지원 아래 시작된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맙니다. 위안 스카이가 신속하게 진압했고, 급진개화파는 죽거나 망명해야 했죠. 뜻이야 참 장했겠습니다만... 덕분에 개화의 길은 더 멀어졌을 뿐입니다.
이후 청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는 톈진 조약을 맺죠. 양군 철수, 훈련 교과는 제 3국 인물을, 어느 한 쪽이 파병할 경우 상대에 알리고 상황이 끝나면 철군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나중의 상황을 보면 이런 거 없어도 얼마든지 왔겠습니다만, 어쨌든 참 중요한 명분이 생긴 거죠.
뭔가 계속 하게 되는 말입니다만... 어느 나라든 조선을 위해 퍼주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움직였고, 그 과정에서 조선의 이권을 가져갔죠. 하지만 그걸 각오하고 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나라가 정치에 개입하는 걸 감수하고 배워야 했구요. 근대화엔 너무도 많은 돈이 들었고, 이권을 내주면서 그 돈을 외국에서 얻어야 했구요. 군사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마 고종은 외국의 군사를 빌리는 것도 다르지 않을거라 생각했을 겁니다. 민비도 마찬가지였겠죠. 사실 청도 일본도 마찬가지 선택을 했으니까요. 두 나라 다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외국군을 빌렸고, 대신 이권 정도를 내줬습니다. 나라가 먹히지는 않았죠.
여기에 대원군과의 갈등,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이어지는 목숨까지 걱정해야 했던 상황... 중앙군은 자기를 지켜야 된다는 거겠죠. 뭐 따져보면 이해는 갑니다.
동학군이 일어났을 때 그는 청에 지원을 요청합니다. 서울의 중앙군은 내려보낼 수 없다, 대신 외국군을 부르자는 거였죠.
이 선택이 가져올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 한 채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