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역을 뒤흔든 삼번의 난이 그 불꽃을 태우던 1673년, 삼번의 일익인 복건의 경정충은 황용이라는 수하를 보내 정경을 설득, 이 바다의 무리들을 대전투에 참가시켰습니다. 기실 경정충의 본래 목적은 그 세력이 여러 지역을 장악하는데 문제가 생길것을 우려하여 정경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삼번의 난 초기에 그의 세력은 당초의 예상보다 수월하게 여러 지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전개되자 경정충은 정경을 끌어들인 행위가 과연 최선의 판단이었는지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의문을 증폭시킨 결정타는 경정충의 수하가 올린 보고였습니다. 그 사람은 양대 세력의 연결을 위하여 정경의 세력이 미치는 하문에 들어섰지만, 직접 보니 하문은 황폐해진 모습에 들에는 풀이 가득하며, 선박은 드문드문 있고 사람이 적어 처량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보고를 받자 애를 써서 정경을 끌어온 경정충은 되려 그 세력이 도우러 오자 이들을 무시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아예 양대 세력의 왕래를 금지시켰습니다.
졸지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 꼴이 되어버린 정경이 분통이 터졌을 것이라는건 굳이 어려운 추측이 아닙니다. 그는 수하 장수인 풍석범과 유국현(劉國軒) 등에게 명령하여 해징, 천주와 장주를 함락시키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이 지역은 다름 아닌 경정충의 세력권 입니다. 그때서야 경정충은 서로 피차 통상 무역을 금지하지 말자고 했지만 정경은 경정충이 먹물도 마르기 전에 약속을 배신했다고 비난했고, 그 비난은 충분히 충분히 일리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분쟁은 조정의 정책이 절묘하게 먹힌 탓도 있습니다. 강희는 가장 중요한 적은 오삼계이며, 오삼계와 싸우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정책을 취했습니다. 따라서 다른 반군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회유를 병행했고, 특히 끌어들여 봐야 성가신 대만에 대해서는 더욱 이러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렇게 되어 청군과 싸울 이유도 없어진 정경의 정군은 경정충이 청군과 싸우는 사이에 비열한 기회주의자의 뒤를 사정없이 후려 갈겼습니다. 경정충은 오히려 골치 아픈 상대만 끌어들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삼번의 난 전반기와 중반부 동안 청군과 정군은 제대로 된 교전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양군이 격돌하기 시작한 것은 이 반란의 기세가 한풀 꺾이던 1677년 이후부터 입니다. 이때 삼번의 쌍익인 상지신과 경정충이 모두 항복 의사를 청나라에 보였기에, 청군은 동남 지역에서 정군과 싸워볼 여유가 생긴 참이었습니다.
싸움에 앞서, 조정에서 파견한 강친왕 걸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항복을 권유했지만 정군의 장수 풍석범은 아군에게 식량을 지원해주고, 얻은 지역을 지키기 해준다면 병사와 민중을 쉬게 하겠다고 요구했습니다. 서로간의 요구 조건이 상충되어 화의는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강력한 선공은 정군이 먼저 때렸습니다. 유국헌은 수만명의 정군을 이끌고 각지의 청군을 공격하였고, 강친왕은 수하 장수들을 해징으로 파견해 이를 막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국헌은 청군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청군은 바다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나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는 조수의 높낮이를 이용해서 동서를 사정없이 찔러대었습니다. 깃발을 휘날리며 강동으로 들어가서 적을 공격하다가, 갑자기 조수를 따라서 해징으로 물러나는가 하면, 다시 조수가 갑자기 불어대는 틈에 기세를 올려 장주를 공격하고, 조수가 낮아지면 쏜살같이 빠져나가더니 갑자기 육지에 올라 적을 공격하자면 청군은 전혀 대응조차 못하고 얻어 맞기만 하는 것입니다.해상전에 있어 정군의 스페셜리스트들의 모임이라면 청군은 갓난아기들의 몸부림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청나라의 해징공 황방세는 유국헌에게 상대도 되지 못하고 농락당하여, 말에서 떨어졌다가 주위의 도움으로 간신히 말에 올라타 장주성으로 도망갈 수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유국헌은 여유롭게 해징을 포위하여 해자를 구축하고는, 성 안쪽으로 통하는 물길을 막아버렸습니다. 청군의 장수들이 기병 수만명을 이끌고 공격해왔으나, 오히려 대패했습니다. 해징 내부에서 밀고 나가려는 공격도 모두 막혀버렸습니다. 성 내는 외부의 원조가 단절되고, 양식도 부족해서 싸우는데 쓸 좋은 말을 잡아먹어야만 했으며, 참새와 쥐를 잡아먹었고 가죽을 물에 담구고 끓여먹었습니다. 성내의 관병은 굶어 죽거나 물에 빠지거나 혹은 투항하여, 결국 해징이 함락되었습니다.
해징이 함락되자 각지에서 항복을 요청하는 서신이 몰려왔고, 기세를 탄 정군은 천주까지 포위했습니다. 강희는 다급하게 강남의 병력을 복건으로 투입하는 한편, 현장에 파견된 강친왕 등에게는 너무 기죽지 말라고 격려 했습니다.
"해징을 빼앗겼다고 실망할 것은 없다. 더욱 격려하고 적을 물리치고 강토를 수복한다면, 이전의 죄는 모두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강희가 그저 아무런 대응책도 없이 사람 좋은 미소만 짓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노련한 황제는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이전의 복건 순무는 나이가 많다는 핑계로 모양새 좋게 관직을 바꾼뒤에, 전문가를 이쪽으로 파견했습니다. 다름 아닌 요계성(姚啓聖) 이었습니다.
요계성
적군이 프로라면 이쪽도 만만찮은 스페셜 리스트로 대응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건 포정사였던 요계성은 이에 가장 적절한 인물 중에 하나였습니다. 강희의 긴급 인사 조치에 따라 그는 복건 총독으로 승진되었는데, 현장에 급파된 그는 지금 가장 필요한 방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핵심을 파악했습니다.
당시 정군은 겉으로는 세력을 일시에 얻어 대단히 강대해보였지만, 실제 그 핵심 전력은 기세이 비하면 허약하다고 할 법했습니다. 대만의 섬에서 끌고 온 병력은 제한되어 있었고, 전선은 장기화될 가능성이 충분했습니다. 그러므로 군사력의 분산을 가져오면 정군은 대응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요계성은 정군의 핵심을 살펴 수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적의 병력은 3만에 불과하지만, 모여 있으면 강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러 읍(邑)을 얻으면 반드시 무리를 나누어 방어해야 한다. 무리가 나뉘면 세력이 약화되고, 세력이 약화되면 무너뜨리기 쉽다. 이는 병법에서 말한 바, 병력이 많으면 분산이 중요하고, 병력이 적으면 통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세는 요계성만이 파악한 것은 아닙니다. 당시 정군의 명장이었던 유국헌 역시 병력의 부족 사태는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현지의 장정들을 억지로 충당해서 병력으로 삼았고, 그들의 가족은 대만으로 보내어 일종의 인질로 삼아버렸습니다. 수대, 아니 수십년 동안을 농사짓고 살던 땅에서 쫒겨난 사람들은 당연히 불만이 가득했고, 천주 지역은 금세 빈한해지고 군수도 부족해졌습니다. 더욱이 각종 명목으로 세금을 뜯어내 백성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지만, 그래도 물자 부족은 여전했습니다.
이러한 전황을 치밀하게 살펴보던 강희는 3군을 파견하여 3가지 길로 천주를 구원하라고 명령했고, 유국헌은 이에 천주에서 물러나 장주를 공격하는 대응책으로 응수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요계성은 천주에 있던 2만여 녹기병을 파견하여 장주를 구원하려고 했는데, 아무리 구원 요청을 해도 천주의 장수들이 겁을 먹어 싸우려고 하질 않았습니다. 삼번의 난 기간 동안 수없이 있었던 이런 겁쟁이 장수들을 설득하려고 한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요계성은 그런 시간낭비로 대사를 망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현지의 장수들을 무시하고 강희에게 곧바로 서신을 올렸습니다.
"군대를 움직이려고 해도, 반드시 대장 및 왕의 명령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앉아서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장에 파견된 전문가의 의견을 수리한 강희는 즉시 총독이 녹기병을 파견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요계성에게는 굳이 왕들의 허가를 기다려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을 들은 요계성은 언제 올지 기약도 없는 천주의 구원병에 미련을 끊고, 당시 청조에 항복한 정남왕 경정충, 장군 뇌탑 등에게 연락하여 전혀 다른 곳에서 병력을 충당했으며, 스스로는 직접 경정충 등과 함께 전선을 독려했습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요계성의 기민한 대응 탓에 정군은 결국 크게 무너져 익사자만 1만여 명이 나오는 대패를 당했습니다. 유국헌은 어쩔 수 없이 장주를 포기하고 해징으로 철수 했습니다.
이쯤되자, 요계성은 정경에게 연해 도시에서 물러나 대만으로 돌아가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하지만 기껏 해징이라는 내지에 근거지를 마련한 정경은 미련이 생겨 이에 응하지 않았고, 요계성은 그 즉시 강희에게 보고하여 현지의 백성들을 강제로 내지로 이주시켜 버리는 초강경 정책으로 대응했습니다. 또헌 포위망을 펼치면서 정군의 식량 공급을 틀어막기까지 하는 치밀함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양군이 대치하는 가운데, 강친왕은 초조한 정군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만일 지금 정경이 무장을 풀고 귀순 한다면, 조선의 사례에 따라 처리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변발을 하지 않아도 되는 '외국' 의 개념으로 대만을 바라보겠다는 뜻으로, 정경은 즉시 찬성했습니다. 그러나 정군의 유력한 장수였던 풍석범은 이에 반대했습니다.
"해징은 하문의 문호이므로, 절대로 포기할 수 없습니다."
향후 정씨 왕조의 결말을 보면, 이는 명백히 풍석범의 실수 였습니다. 이전, 그리고 이후에도 대만 정씨 왕조와 청나라와의 주요 쟁점 논의는 '변발을 하지 않느냐' 즉 변발을 해야 하는 '내국인' 의 관점으로 대만의 복속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변발을 하지 않아도 되는' 외국인의 관점으로 청나라에 복속 되는지에 대한 여부였습니다. 따라서 이때의 조건은 정씨 왕조가 청나라에서 얻어낼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지만, 해징이 아까웠던 풍석범은 앞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강친왕이 파견했던 사자는 해징을 아까워 하는 풍석범에게 손사래를 쳤습니다.
"만일 조선의 사례에 따르고자 하면, 귀하의 번은 마땅히 대만으로 물러나야 한다. 모든 해도는 조정에 귀속되므로, 팽호를 경께로 삼고 통상 무역을 하면 그만이다. 해징은 조정의 판도 안에 있다."
하지만 풍석범의 의견에 솔깃한 정경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병사를 쉬게 하고 지방을 지키는데 어찌 현재의 토지를 포기해야 하는 근거가 있는가. 해마다 무역으로 얻은 이익 중 세금 6만 냥을 납부하면 된다."
땅을 내주는 일은 일개 대신이 함부로 정할 일이 아닙니다. 역사상의 수많은 불평등 조약 중에서도 영토 할양은 최악의 행위로 간주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강친왕은 혼자서 결정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요계성에게 의견을 물었지만, 요계성은 절대로 해징을 포기 하지 않겠다는 정경의 주장에 대단히 격노했습니다.
"조그마한 지역이라도, 모두 왕에게 속한다. 누가 감히 판도의 봉토를 공소로 삼고자 하는가?"
이렇게 되자 모든 논의는 중단되었습니다. 이때 오삼계가 죽고 청군이 호남을 석권하자, 청나라는 더욱 많은 병력을 정군과의 전선에 파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네덜란드 함대에 도움을 요청하고, 수군을 훈련시켜 청군의 수군을 정군에 비슷한 역량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현지에 파견된 지휘관들은 이제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치열하게 논쟁했습니다. 문제는 당초 협조를 약속한 네덜란드 선박이 싸움에 끼어드는데 비하여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적자 실망하여 협조를 하지 않으려고 한 일 때문입니다. 육지의 전장에서 선발된 청군의 지휘관들은 자신들의 해군 역량에 대해 몹시 우려를 나타내었습니다. 그들은 직접 창설된 수군에 신뢰를 보이지 못하고 반드시 네덜란드 협판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의정왕대신회의는 현지의 보고를 듣고 논의를 거듭했습니다. 의정대신들은 확실히 네덜란드 선박의 도움을 받는다면 효과는 확실할 것이며, 다만 청나라 수군 자체적인 역량으로도 일이 가능하다고 여기면 잘 상의해서 한번 해 보라는 답을 내렸습니다. 강희는 현지 지휘관들의 이런 생산적인 논쟁을 격려했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우려가 되면, 이전에 문서를 갖추고 보고했다는 이유로 바꾸기를 꺼려하여 억지로 수행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즉 현장에서 즉시 떠오르는 효과적인 작전이 있는데, 이미 보고한 전략과 달라 향후 문책을 두려워 해서 이전의 정책을 밀고 나가는 관료제의 폐단을 꿰뚫어 보고 이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현장 지휘관들 중에 총독 요계성과 강친왕등은 신중론을 펴는 입장이었고, 제독 만정색(萬正色) 등은 네덜란드 선박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공격이 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모두 양쪽에서 쌍방의 형세를 구체적으로 판단하고 분석하여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강희에게 보고했습니다. 강희는 만정색의 제안을 보고 기뻐하여, 즉각 진격을 명했습니다.
이리하여 1680여년 2월 4일, 만정색은 수군을 통솔하여 정군과 교전하여 3,000여명을 전사시키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강친왕 걸서는 항주에 주둔하는 만주 녹기병을 이끌고 정군의 식량 근거지인 여러 섬을 압박했으며, 유국헌을 패퇴시켜 달아나게 했습니다. 유국헌이 달아나자 해징 등도 함락되었습니다. 총독 요계성과 장군 뇌탑은 수륙 관병을 이끌고 공격을 감행하여 빼앗긴 여러 곳을 수복했고, 순무 오홍조는 직접 하문으로 진격하여 정군을 몰아내었습니다. 다시 요계성은 정군의 장수 주천귀를 회유했고, 주천귀는 다른 장군 마흥룡을 바다에 빠뜨려 죽이고 2만의 관병과 300여 척의 선박을 이끌고 청나라에 투항했습니다.
1680년 5월, 정군은 모조리 대륙에서 튕겨져 나왔습니다. 이제는 청군이 역공을 취할 시간이었습니다.
과거 정성공의 남경 공략전. 그 당시 정씨 세력은 한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하여 대륙에서 쫒겨나 대만을 찾아 이동했고, 이번에도 역시 비슷한 모습의 재판이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판단 미스의 문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힘 대 힘의 대결에서 튕겨져 나온것입니다. 삼번의 난도 끝난 지금, 대만의 세력이 다시 한번 중국 내륙으로 진입하기에는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정경은 본래부터 그다지 개인적인 행실이 좋은 편은 못되었지만, 이렇게 삶의 큰 목적도 잃어버리게 되자 이전의 위풍도 모조리 상실하고 일 정자에서 술을 마시거나, 애첩을 희롱하며 즐기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혹은 문사나 무장을 불러 말을 타고 활쏘기를 하고 연회를 하며 놀았을 뿐, 정치는 아들인 정극장이 맡아서 처리했습니다.
정극장이 1664년생이고 정경이 중국 본토에서 세력을 모두 철수시킨것이 1680년이니, 바로 그때부터 본다면 16살의 아이에게 모든 일을 일임한것입니다.
하지만 정극장은 정성공의 좋은 부분을 많이 물려받아, 어린 나이에 정사를 대리하면서 정경의 숙부들과 부하들, 장수들과 빈민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들을 엄격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이용했습니다. 정경 역시 놀고 마시면서도, 어린 아들이 모든일을 도맡아 하는 상황에 약간의 불안감은 있어 사람을 시켜 배후에서 정극장의 평소 정치하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보고나 처리된 문건이 매우 뛰어나고 흠 잡을 곳이 전혀 없자 아주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정경의 친척들과 권신들은 꿈틀거리는 불만을 가슴에 담기 시작합니다
정극장에게 힘을 실어주는 인물은, 진영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진영화는 정극장의 장인 입니다. 그는 정경이 본토에서 공격 작전을 벌일때 대만을 지켰던 인물로 자신의 본거지를 선뜻 내밀어주었다는 점에서 보듯, 그의 능력과 충성에 대한 정경의 신임은 보통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진영화는 또한 정극장의 교육도 도맡아 했고, 자신의 권위로 정극장을 보호해주기도 했습니다.
본토에서 싸우다 돌아온 풍석범이 대만의 현 상황을 보니, 실제적인 권력은 진영화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정경이 또 정극장에게 일을 일임하니, 자연히 진영화의 힘은 커지고 풍석범은 아쉬운 처지가 됩니다. 게다가 진영화의 사위가 정극장인데, 공고롭게도 풍석범의 장인은 정경의 다른 아들 정극상(鄭克塽)이었습니다.
결국 풍석범은 권력을 위해 본토 공격에서 맹활약을 한 유국헌을 끌어들입니다. 그들은 우선 진영화의 권력을 일소하기로 계략을 짜내었습니다. 유국헌은 하나의 꾀를 내놓았습니다.
풍석범은 진영화를 방문하고는, 평소와는 달리 매우 의기소침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진영화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정경을 모시고 서정했는데, 조그마한 공적도 세우지 못했소. 이에 직책과 권력을 내놓고 세상과 떨어져, 유유자적하며 여생을 보내고자 하오."
진영화는 이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풍석범은 본래가 무인이지만 이렇게 겸손하고 또한 물러날 시기도 알고 있는데, 문신인 자기가 권력에 연연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미련없이 은퇴해버렸던 것입니다. 진영화가 은퇴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정경은 이를 수리해야 할지 풍석범과 논의를 했는데, 당연히 풍석범은 적극 동의했습니다.
그리하여 은퇴한 진영화의 권한은 유국헌에게 넘겨졌지만 풍석범은 이전과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 자리에 당당히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제서야 사태를 깨닫게 된 진영화는 울화병으로 사망해버렸습니다. 진영화가 사라지자, 정극장의 권위도 약화되고 맙니다.
이때, 주색에 빠져 지내던 정경은 병환이 위중해져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숨을 거두기 전, 그는 일말의 불안감으로 유국헌을 침상으로 불러 정극장을 잘 보좌 하라고 부탁했고, 이에 유국헌은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어서 풍석범이 도착하자 그는 풍석범에게도 똑같고 부탁을 했고, 사망했습니다. 1681년 정월 28일, 밤이었습니다.
충성의 맹세와 정경의 시체가 식기도 전에 풍석범이 교활한 역모를 꾀했습니다. 정성공의 다른 네 아들이 모두 풍석범을 지지하고 나섰고, 정극장은 정경의 아들이 아니며 친부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주장했습니다. 정극장은 그들이 자신을 부르자 아무 생각도 없이 처소에 들어섰지만, 이내 살기등등하게 바라보는 4명의 숙부를 보고 경악했습니다. 그는 흑인 노예의 손에 잔인하게 교살되었습니다. 현명한 정극장을 대신한 인물은 11세의 소년으로 정경의 차남인 정극상이었습니다.
대만은 풍석범이 사실상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반항하는 자들을 억눌렀고, 때마침 기근이 대만을 감돌았습니다. 풍석범과 유국헌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살육을 하자 정씨 정권은 곧 매우 혼란한 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4월, 정경의 사망 소식은 청나라 변방에도 알려졌고, 총독 요계성은 지금이야말로 하늘이 도운 시기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또한 일전에 정씨의 함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만정색은 출병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기에, 만정색을 대신할 능력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요계성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다름아닌 시랑입니다.
시랑은 그야말로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왔고, 그 경험은 청조의 어느 장수들도 따라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물을 집으로 삼고 선박을 목숨으로 삼는' 정씨 집단에서도 시랑의 존재는 전설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적절한 인물은 제대로 쓰여지지가 못했는데, 사실 일전부터 요계성은 강희에게 시랑을 추천하였으나 오히려 비난만 받았습니다. 시랑의 아들 시제(施齊), 그리고 조카 시해가 정씨 집단에서 요직을 맡고 있었던 탓입니다.
1680년 즈음하여 요계성은 시제, 시해와 연락을 취하고 정경을 사로잡아 오라고 명령하였으나 일이 발각되어 두 집 가구 73명은 모두 살해되고 바다에 시체가 던져졌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강희는 1681년 2월 대학사 이광지(李光地)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이광지
"시랑에게 이 일을 맡길 만한가?"
그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시랑은 어려서부터 군대의 경력이 많고, 해상에 익숙하며, 바다의 일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고 있습니다. 해적은 그를 두려워합니다."
강희는 우선 이광지에게 직접적으로 묻고, 그 후에 다시 명주를 이광지에게 보내어 한 번 더 물어보았습니다. 이광지는 시랑의 장점을 말했습니다. 하나, 그는 대대로 내려오는 해상의 집안이고 둘, 그는 해상의 정세를 숙지하고 있으며 셋으로 시랑이 계략을 갖추고 있어, 바다에서 시랑을 두렵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시랑 본인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강희는 그 후에 다시 한번 이광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진정 그만 한 사람이 달리 없는가?"
이광지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재략으로 논한다면, 실제로 그에 비할 바가 없습니다. 성공한 이후에 황제꼐서는 비로소 훌륭한 처신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에 결심을 굳힌 강희는 시랑을 수사 제독으로 재임명했습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난리가 벌어졌습니다.
시랑이 누구입니까. 과거 정성공의 시대부터 정씨 집안에서 선단을 이끌던 인물이며, 청군과 격돌하면 반역자 출신입니다. 조정 대신들은 그의 출신 성분을 들어 시랑은 반드시 정씨 집단에게 동조할 것이며,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강희는 이미 생각을 굳혔습니다.
시랑이 아니면 대만을 정복할 수 없다고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강희는 문제의 당사자를 불러 직접 음식을 내려 주었고 이렇게 단호하게 믿음을 전달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그대의 출신을 가지고 무엇이라 하지만, 그대가 아니라면 이 일을 해결할 사람이 없다."
이렇게 어려움 속에 출발한 시랑이었지만, 본래 자존심 강한 그는 눈치를 보아 몸을 사린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출발도 하기 전에 온갖 요구를 조정에 올린 것입니다. 우선은 자신의 측근이자 시위인 오계작(吳啓爵)을 데리고 가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지만, 병는 이를 기각했습니다. 오계작이 일개 시위에 불과한데다 별다른 공훈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이었습니다.
하지만 강희는 시랑이 청한 바대로 처리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랑이 휘하 부하에게 작위를 주려고 하자, 이부에서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강희는 시랑이 사람을 써야 한다며 그의 요구대로 전부 처리해주었습니다.
이렇게 황제의 비호를 받고 갑갑한 북경에서 간만에 바다로 나온 그는, 하문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선박을 정돈하고 병사를 훈련시키며, 전투의 준비를 했지만, 동시에 해전에 익숙하지 않은 순무와 총독이 자신들을 방해할까봐 주도권을 가져오려는 정치적 시도를 벌였습니다. 그는 부임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수군을 통솔하고 정씨 정벌에 관한 모든 일을 자신에게 일임하라고 강희에게 요구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화가 난 사람이 바로 시랑을 천거한 요계성입니다. 요계성은 시랑의 상소를 읽어 보고 대단히 분개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대만 정벌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치더라도 여한이 없겠다며 주도권을 내줄 생각이 전혀 없음을 돌려서 표현 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능력은 실로 대단하고 열의도 엄청난데다, 자존심은 곧 죽어도 꺾을 인물들이 아닌 상황. 바로 이런 상황에서 군주의 용인술이 필요한 법입니다. 게 중 한명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 기를 꺾는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 강희는 시랑의 요구에는 바로 동의하지 않고, 우선 요계성은 성 전체의 병마를 통괄하도록 했습니다. 다만 제독 시랑과 더불어 팽호와 대만을 정벌하라는 식으로 답했습니다. 요계성은 전권을 시랑에게 넘겨 주지는 않았지만, 시랑의 간섭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1682년 3월, 시랑은 군대와 선박이 아무런 문제도 없으며, 곧 대만으로 진군하겠다고 의사 표시를 했습니다. 그리고 요계성에 대해서는 병력을 관리하고 무기를 제조하고 사졸을 격려하는데 전혀 허술함이 없다고 그의 과단성을 칭찬하였는데, 그러면서도 요계성이 북방에서 성장하여 비록 재주가 뛰어나지만 바다의 풍랑에 직면하면 부족함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총독은 하문에 주둔하여 군량 운반을 도와주고 자신이 싸움은 다 하겠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요계성은 또다시 분노했습니다. 그는 곧바로 반박 상소를 올렸습니다.
"신이 비록 북방에서 자라 지금 바다에 나온 지 며칠 되지 않았으나, 또한 편안하여 조그만 허물도 없었는데, 어찌 신에게 잘하느 바가 없다고 합니까! 차라리 해상에서 전사할지언정, 하문으로 돌아와 구차하게 살기를 바라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강희는 우선 시랑의 요청을 재고하면서 둘이 확실하게 의견을 교환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시랑과 요계성의 파워 게임과 서로간의 갈등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1681년부터 1682년까지 몇번의 출정 계획이 있었으나, 시랑이 뜻을 바꾸어 실행되진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1682년 여름에 팽호로 출발하자고 정하였는데, 여기서 시랑과 요계성이 계획을 두고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는 바람에 또 연기되었습니다.
시랑은 여름의 남풍을 타고 가야 보름 동안 선박은 뱃머리를 이어 일제히 움직일 수 있고, 장수와 병사는 또한 뱃멀미를 겪지 않으며, 교전 시 바람에 불어오는 쪽 상류에 있게 되고, 적은 도리어 바람이 불어 가는 쪽 하류에 있게 된다는 전문적인 의견을 내었습니다.
이에 대해 요계성은 겨울과 봄 사이의 북풍을 이용하여 진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팽호와 대만은 북풍이 불면 정박할 곳이 많다는것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남풍이 불면 정박할 수 있는곳이 한곳밖에 없으므로, 적이 그곳에 있다면 정박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7, 8, 9월에 태풍이 연속하여 발생하기 때문에 보급도 하기 어렵다고 주장했습니다.
열흘 가량 최고 지휘관들이 이렇게 싸움만 벌이고 있자, 결국 원정은 시작하기전에 파토가 되어 다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랑은 오기가 생겨 정찰선을 보내 남풍을 타고 유국헌이 있는 팽호까지 정찰을 시키고 다시 귀환시켰습니다. 정찰선은 아무 문제도 없이 남풍을 타고 진군했고, 이는 시랑의 자신감을 더욱 증폭시켰습니다.
요계성의 경우에는 회유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의 회유 전략과 첩자들의 공작은 대만 내에서 각종 분쟁과 반란의 씨앗을 뿌려 투항군을 받아들이면서 이득을 보았습니다. 다만 요계성은 중국 수군의 역량에는 크게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일전에도 그는 정경의 세력을 모조리 대륙에서 일소하는 일에, 반드시 네덜란드 선박들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고 여긴 바가 있습니다. 그는 강희에게 시랑이 빨리 싸우려는것은 시랑의 애국심이 매우 강하고, 또 피를 흘리는 전투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생각이 강할뿐, '본래 기회가 적당하다거나, 적을 토벌할 수 있는 상황' 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요계성은 실질적인 군사 작전보다도 회유와 반락 책동, 경제적 봉쇄와 압박을 주요 전략으로 내걸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시랑은 결코 유국헌 등은 순순히 항복을 할 인물들이 아니며, 정씨가 회유를 받아들일것이라고 여기는것은 애초부터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씨와 결판을 내려는 마음이 매우 강해, 정씨의 사자가 하문에 와서 서신을 보여주려고 해도 아예 처음부터 면담을 거부했습니다. 요계성이 시랑을 돌려서 비난한것과 마찬가지로, 시랑 역시 요계성이 바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돌려서 비난했습니다.
시랑의 요청은 명확했습니다. 바다에 대한 일은 모두 자신에게 일임하라는것입니다. 또한 정예병 2만, 크고 작은 전선 300여 척을 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것만 적을 모두 파멸로 몰고 갈 수 있고, 만약 일이 잘못되면 자신에게 모든 처벌을 내려주라는 것입니다.
시랑의 어마어마한, 실로 터무니없을 정도로 자신만만한 태도와 각종 요구, 그리고 그가 이미 여러차례 공격을 하려다 상황을 보고 연기했던 행적 때문에 강희는 이 보고를 받자 처음에는 화를 냈습니다. 그렇지만 기왕지사 시랑에게 맡긴 일이기도 하여 대학사들의 의견을 묻자 명주는 두 사람이 군을 이끌고 가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사태가 나타날 수 있음으로, 시랑에게 일을 맡기자고 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강희의 최종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시랑은 이를 절대적인 권위로 삼아 불만스러운 주변 관리들에게서 득의양양하게 병력 2만 1000여명을 얻어내고 큰배 70척을 포함해 200여척에 가까운 전함을 배치하였습니다. 시랑의 공격 시도가 노골화되자 대만에서도 허둥지둥 전투 준비를 했지만, 토착민들을 강제로 징발하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식량을 운반하게 한 탓에 불만이 심해졌습니다. 군사들은 그들에게 매질을 했고, 공방에서 무기를 만드는데 힘을 쓰다보니 농사의 적기를 놓쳐 수확량에 당장 문제가 생겼습니다. 토착민들은 식량을 탈취했고, 정씨 정권이 이를 진압하자 산으로 숨어버렸습니다.
시랑은 승리의 기회를 눈치채고 1683년 4월, 최후의 상소를 올렸습니다.
"해역(海逆)은 날로 위축되고 있습니다. 무력 토벌하여 무너뜨릴 좋은 기회입니다."
6월, 마침내 시랑의 대규모 수군이 바다를 뒤덮을듯 하여 진군하였습니다. 청조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남중국해의 바다에서 벌어지는 대격전의 시작이었습니다.
고집불통이자 자만심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만만하며, 뭇 뱃사람들에게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전설적인 인물인 시랑이 대만 원정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대만쪽에서도 쉽게 파악할 수 있을만큼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습니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실제로 원정이 시행되려고 하자, 대만의 정씨 정권도 각 방면에서 준비를 철저히 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정예병을 선발하고, 농촌의 장정을 뽑아 군대에 집어넣고, 무역선을 모두 전투용 함선으로 개조하면서 개인 선박들을 정비했습니다. 그 숫자를 모두 합치니 200여척이 넘고 병사는 2만여명이 넘었는데, 시랑의 부대와 별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이 대부대를 이끈 지휘관은 삼번의 난 당시 관군을 수차례 격파했던 정씨 정권의 명장 유국헌이었습니다. 그는 함대를 이끌고 팽호로 진각하여 해안에 낮은 담을 쌓고 총을 배치하면서 팽호에서 한바탕 싸워볼 준비를 끝냈습니다.
시랑은 6월에 출발을 했습니다. 그리고 14일 날이 되었을때, 유국헌에게 그 모습이 포착 되었습니다. 유국헌 역시 만만한 인물은 아니라 싸움에 앞서 철저하게 준비를 했습니다. 이때 정씨의 다른 장군인 구휘(邱輝)는 적극적인 공세를 주장하며, 저녁에 조류가 낮아지는 틈을 타 신속히 공격하면 시랑을 공격하면 승리는 손 쉽게 거둘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유국헌은 깔보는 말투로 거절했습니다. 무려 정지룡의 때부터 활약한 시랑은 대만의 정씨 세력에게 있어 하나의 전설이었으나, 그는 시랑을 대단치 않게 여겼습니다.
"시랑은 허명일 뿐이다. 지금 태풍이 불어오는 시기인데, 감히 수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원정하는가. 만일 밤에 바람이 불어온다고 해도, 저들은 초류(焦類 : 야간에 경보를 울릴 떄 사용하는 그릇)가 없다. 우리의 정예병을 감추고 적의 공격을 기다린 뒤, 적이 피로한 틈을 타서 공격하면, 싸우지도 않고 공적을 세울 수 있다. 공들은 우려하지 말라."
바다의 전설과 이를 대단찮게 여기는 무서운 신예. 16일부터 시랑이 팽호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의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청나라 군의 유격 남리 등은 정군의 전선 7 ~8여척을 격퇴했는데, 정군은 아랑 곧 하지 않고 수군으로 대오를 결성하여 청군을 포위 공격했습니다. 시랑은 날아오는 포탄 불꽃에 얼굴을 맞아 얼굴 오른쪽이 좀 떨어져 나가는 커다란 부상을 당했지만, 전혀 신경쓰지 않고 지휘를 계속하는 초인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남리 역시 전투 중에 복부에 포탄을 맞아 복부가 파열되었지만 계속 전투에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군의 지휘관들은 거친 바다 사나이들 답게 서로 죽고 다치는것을 전혀 개의치 않으며 미친듯이 싸웠습니다. 이는 삼번의 난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모습들입니다. 시랑은 부상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싸웠으며 정군의 수사 총독 임승 역시 세번의 화살을 맞고 포탄이 날아들어 왼쪽 무릎이 절단되었습니다. 정군의 여러 장수들은 화염으로 죽었습니다. 격렬한 싸움 중에 시랑이 물러나기 시작했고, 정군의 구휘 등은 이를 추격하려고 했지만 유국헌은 저지했습니다. 야간에 습격을 하겠다는 구휘를 유국헌은 이렇게 말렸습니다.
"저들 수군이 정박하고 있는 곳은 오른쪽에 얕은 암초가 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불면 싸우지 않고도 자멸하게 되어 있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6월 한 달 동안에는 36폭(暴)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오늘은 16일이고, 다가오는 17일, 18일, 19일은 곧 관음폭, 세징롱폭이다. 폭풍이 없는 날이 없지 않은가. 저들은 곧 무너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유국헌의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폭풍은 불지 않았고 바다는 괴이할 정도로 조용했습니다. 예상이 완전히 벗어나자 군대의 사기는 동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시랑은 자신이 정군을 너무 애송이처럼 여겼음을 반성했고, 열심히 싸운 남리 등에게는 2천냥의 보상을 주고 도망치던 사람들은 처형을 명령하면서, 우선은 살려둘 터이니 싸움에서 공을 세워 이를 면하라고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좀 더 차분하게 형세를 살펴보고, 탄탄하게 진영을 갖추어서 다시 한번 싸움에 나섰습니다. 22일의 일이었습니다.
시랑은 수군의 배치를 끝내고 자신은 1대를 이끌고 한가운데에서 친히 전선을 독려하였습니다. 유국헌은 청군이 나타나자 즉각 발포에 들어갔습니다. 치열한 싸움끝에 청군의 총병 주천귀가 포탄을 맞고 사망했고, 유국헌은 구휘 등을 독려하여 10여척을 이끌고 청군을 포위 공격했습니다. 화약 항아리, 볼화살, 돌화살, 포화가 팽호 앞바다에서 굉음을 내며 발사 되었습니다.
유국헌등에게 포위 당한 선박을 구하려 청군의 유격 허영이라는 인물이 6척의 선박으로 외부에서 공격했고, 이러자 유국헌은 역으로 포위당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청군의 기세가 매우 위협적이라고 느낀 유국헌은 모든 함대에 총공격력을 내렸고, 시랑도 이에 대응해서 모든 함대가 진군하게 했습니다. 곧 엄청난 싸움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청군의 총병 오영은 오른쪽 귀가 화기를 맞고 파열되었고, 부영기 탕명은 화살 여러 대를 맞았습니다. 정군은 구휘 등이 많은 선박을 이끌고 예리하게 기습했습니다.
그러나 노련한 시랑은 이미 철저히 대비를 해놓은 후 였습니다.
그는 전함을 5척씩 대오를 형성하여 함께 움직이도록 했고, 이를 오매화(五梅花)라고 명명했습니다. 시랑의 오매화 전술에 따라 전함 한두척이 포위를 당하더라도, 바로 뒤에서 다른 아군이 도와주어 포위에서 벗어나게 술수를 부린것입니다. 이에 오히려 정군의 함선들이 청군에 포위가 되어, 양쪽에서 화포들을 얻어맞고 나가떨어졌습니다. 역으로 이제는 시랑의 오매화가 1척의 함선을 포위하여 격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떤 함선은 불 항아리에 불탔고, 어떤 함선은 포탄으로 침몰되었습니다.
구휘는 죽을 힘을 다해 공격을 했고, 가지고 있는 화염병, 불화살, 돌화살들을 마구 퍼부으면서 저항했습니다. 그는 왼발과 오른발 모두 큰 부상을 당했지만 위축되지 않고 싸우다가, 결국 중과부적임을 느끼자 화약통을 일제히 던지고 불에 타서 죽었습니다.
이 때에 이르러 유국헌이 판세를 보자 이미 정군의 수군은 7, 8할이 모두 괴멸되었습니다. 그는 전멸을 피하기 위하여 청군을 돌파하고 탈주하였습니다. 탈주하는 길에 암초가 매우 많은 지대에 이르자 그는 투구를 벗어던지고 무릎을 꿇은 뒤 하늘에 기도를 올리고는, 조타수에게는 계속 전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돌연 풍랑이 일어나고, 바람이 순조롭게 돌면서 아무런 막힘 없이 갈 수가 있었습니다. 유국헌의 인도에 따라 도망쳐 나온 정군의 선박들은 모두 대만을 향해 탈출했습니다. 시랑은 추격을 하려고 했으나, 청나라 병사들이 대만으로의 물길에 익숙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추격하지 않고 잔존한 병력을 투항시키고 물에 빠졌으나 아직 익사하지 않은 정군 병사들을 건져내었습니다. 시랑은 이들 모두에게 변발을 시켰습니다.
팽호의 싸움은 아편전쟁 이전까지 청군이 겪은 가장 거대한 바다에서의 대격전입니다. 이 싸움으로 정군의 장군 급 인물만 47명이 몰살당했고, 자잘한 지휘관들은 모두 300여명이 죽었습니다. 병사의 사망자는 2만 명 중 1만 2,000여명에 달했으며, 전함도 150여척이 깨져버렸습니다. 반면에 시랑의 부대는 사상자 2,000여명 정도 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요계성은 청군의 대승에 기뻐하는 한편, 승리의 기세를 이어 바로 대만에 상륙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만만한 시랑은 요계성의 의견 따위는 무시하고 정비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팽호에서 머물며 준비기간을 갖추었습니다. 요계성과 시랑의 의견이 모두 강희에게 올라갔는데, 강희는 "장수와 병사가 피로하고, 백성이 상해를 입는다." 라는 이유로 시랑의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동시에 정극상에 대한 회유 작전이 벌어졌습니다.
대만과 팽호 제도의 위치
시랑은 이미 정군의 군사적 역량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여겨 대만 정복 후의 작업에 벌써 착수했습니다. 그는 포로를 관대하고 우대하여 대접했고 백성들을 위로했습니다. 또한 전쟁 포로를 함부로 대하지 않게 하면서 단 한명의 포로라도 죽이면 사형에 처하겠다고 엄명을 내리는 동시에 부상당한 포로들은 의원들을 총 동원하여 구하고 약을 제공했으며, 일부 포로는 아예 대만으로 보내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게 조취했습니다. 시랑은 귀환하는 포로들에게 아주 다정하게 말했습니다.
"조정은 부득이하여 무력을 사용한 것 뿐이다. 너희는 이미 투항했으므로, 모든 죄는 사면되었다. 너희는 돌아간 뒤 대만 백성들에게 신속히 투항할 것을 알려라. 조금이라도 늦으면 팽호의 연속이 될 것이다."
시랑이 노골적으로 회유 작업에 들어가자, 대만에서는 앞으로의 방안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투항을 가장 열렬하게 주장한 사람은 팽호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시랑의 무서움을 처절하게 맛본 유국헌이었습니다. 패전의 여파로 이미 대만의 민심은 흉흉해졌고, 오직 투항밖에 방법을 없다고 여긴 유국헌은 만사를 제쳐두고 어서 투항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일부에서는 아예 필리핀으로 이주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일전에 정성공이 필리핀 정복 계획을 세우다가 사망한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필리핀의 지도를 보여주면서 이 곳을 취해야 하는 이유를 역설했습니다. 정극상과 풍석범은 동의했지만, 유국헌은 반대했습니다.
"지금 이미 팽호를 빼앗겼으며, 민심은 의심을 품고 있다. 적어도 군수품은 선박에 있다. 만약 병사들이 이를 이용하여 등을 돌리면, 이후의 결과를 어찌 감당할 것인가?"
할 수 없이 필리핀 공격 계획을 포기한 풍석범은 병력을 나누어서 사수하자고 주장했지만, 유국헌은 이미 군중의 뜻이 와해되어 방어가 여의치 않다며, 청나라의 관대함에 기대는 편이 더 낫다고 반박했습니다. 그는 정극상에게 말했습니다.
"민심은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방어한다고 해도 변한다. 그리고 장수와 병사는 피로에 지쳐 싸워도 예측하기 어렵다. 마땅히 투항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시랑이 보낸 사람이 와서 투항을 권유했는데, 공교롭게도 사신으로 파견된 인물이 일전에 유국헌의 부하로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자 유국헌은 더욱 투항을 주장했고, 풍석범이 계속 반대하자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이전에 두 명의 사신이 섬에 와서 회유를 의논했을 때, 신하로 칭하지 않겠다고 하여 결국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올해 봄에 다시 대만에 사람이 와서 회유를 의논했지만, 변발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팽호를 빼앗기기에 이르렀다. 모두 그대의 뜻이 정해지지 않아서가 아닌가? 그런데 이에 이르러 아직도 의심을 품고 있으니, 만일 하루아침에 내부에 변화가 일어나면 어찌하겠는가. 이전부터 사태를 명확히 인식하는 자를 호걸이라고 부르는 것이니, 대사가 이미 정해지면 빨리 하늘에 순응해야 한다."
풍석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극상은 이미 투항에 마음이 기울어졌습니다. 그는 시랑에게 사람을 파견하여 항복의 의사를 표시했고, 이에 시랑은 시위 오계작을 대만에 보냈습니다. 오계작은 시랑의 명령에 따라 백성들에게 즉각 변발을 하라고 권유했습니다.
이에 유국헌은 대만이 청나라에 투항하는것에 민심이 동요하여, 누가 변란이라도 일으키면 책임이 커질것을 우려, 시랑에게 어서 대만으로 와서 치안을 유지하라고 권유했습니다. 이에 시랑은 스스로 출발하여 8월 13일 대만에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정극상은 유국헌, 풍석범 등 문무관원을 대동하고 나와 시랑을 공손하게 영접했고, 모두 변발을 했습니다. 시랑은 대만 백성들이 놀라지 않게 주의하면서, 추수철이 멀지 않았으니 농사 일에 즐겁게 힘쓰라고 다독이고는 자신을 쫒아낸 정성공의 묘에서 제사를 올리고 정지룡, 정성공, 정경이 대만을 개발한 공적을 치하하는 노련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강희는 승리의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 시랑을 정해후(靖海侯)로 봉하여 세습하도록 했고 병사들에게도 모두 상을 내려주었습니다. 1683년, 정극상, 유국헌, 풍석범은 북경에 도착했고, 강희는 정극상에게는 공작, 유국헌과 풍석범에게는 백작의 지위를 주어 토지를 내려주었습니다. 시랑은 유국헌이 사람이 뛰어나고, 또 대만의 평화적으로 항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면서 추천했습니다. 이에 강희는 유국헌을 직접 만나서 말했습니다.
"대만과 교류가 막힌지 60여 년, 그대는 충성심을 가지고 시랑이 군대를 이끌고 무력 토벌한다는 이유로 먼저 투항하였으니, 이에 특별히 총병관을 제수하여 그대를 우대하겠다. 마땅히 방어에 힘써서 병민을 편안히 하고 도적을 막도록 하라."
그리고 토지와 저택을 내려주었고, 3대에 걸쳐 관직을 그대로 세습할 수 있게 허락했습니다. 문제는 이제 대만의 향후 처후였습니다. 조정의 의견은 두가지로 나뉘었는데, 대만을 포기하자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해외에 고립되어 도적의 소굴이 되기 쉬우므로 포기하고, 오로지 팽호를 방어해야 한다. 그곳 사람들을 옮기고 땅을 포기하자."
이 말을 들은 시랑과 요계성등은 깜짝 놀라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비난하였습니다. 무엇보다 대만을 점령하고 탐색한 시랑은 노련한 정치적 감각으로 장기적인 안목의 상소를 올려 강희에게 보고했습니다.
"첫째, 대만은 인구 밀도가 높고 호구가 많으며, 농민과 상인이 각기 그 생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모두 이주시키고 토지를 옮기게 되면 생업을 잃고 떠돌아 다니게 될 것입니다. 둘째, 해당 지역은 심산유곡으로 은둔자가 많습니다. 이들이 토착민들과 결탁해 무리를 모으고, 긴급할 때 내지의 도주한 군민과 당을 결성하여 피해를 입히며, 선박과 무기를 제조하여 해안을 약탈하면 좋지가 못합니다. 셋쩨, 대만은 동남의 해안 방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입니다. 대만은 비록 해상의 한 섬이지만, 강소, 절강, 복건, 광동 4성의 왼편 보호막이 됩니다."
"넷째, 네덜란드가 대만을 정탐하면, 반드시 변방을 노리고 우리의 문전에 가까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우환이 훗날 연해의 여러 성에서도 없으리라고 생각하기에는, 매우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대만을 포기하고 팽호를 지킨다. 이는 틀린 말로 팽호와 대만은 하나이고 대만이 없으면 팽호 역시 지킬 수 없습니다. 대만을 지키면 팽호를 굳건히 할 수 있습니다. 대만과 팽호는 같이 지켜야 합니다."
강희는 의정왕대신회의에서 이를 논의하게 하였고, 명주등은 시랑의 말이 지극히 옳다고 보고했습니다. 이리하여 대만에 1부 3현이 설치되었고, 총병관 1명, 부장 2명, 병력 8,000여명을 두고 수비하게 하는 한편 팽호에도 2,000여명을 두어 수비하게 하였습니다. 강희는 대만에 파견되는 관원들에게 극히 주의할 것을 명령했고, 이익을 탐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렇게 청나라 문무 관원들이 계속하여 대만으로 파견되어, 마침내 대만이 중국에 예속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시랑에 공적에 크게 기쁨을 표시했고, 마침 중추절이었던 까닭에 "중추일문해상첩음"이라는 시를 써써 시랑을 칭찬하며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시랑에게 하사하겠다고 밝히고, 적을 토벌한 시랑의 지혜와 용맹함이 청사에 남을것이라고 칭찬했습니다. 10년 뒤에 강희제에게 특별히 황족이나 고관들이 쓰던, 모자 뒤에 드리우는 공작의 꼬리를 주십사 하고 부탁하자 전례가 없는 일이었기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강희제는 흔쾌히 이를 허락했습니다.
이제 남풍은 모두 잦아들었습니다. 이제 제국은 북쪽으로 그 말머리를 돌려야 했습니다. 거대한 폭풍이 중앙 아시아와 시베리아에서 불어 닥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