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5세가 죽고 나자 그의 아들이었던 헨리 6세가 왕위에 오릅니다. 이때가 1422년이었는데 그 당시 헨리 6세는 태어난 뒤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왕이 너무 어렸기에 베드포드 공작인 존이 섭정이 되어 잉글랜드를 통치했습니다. 하지만 존은 프랑스와 벌인 100년 전쟁의 막바지에 크게 패하면서 당시 프랑스에 있던 잉글랜드의 영토를 대부분 잃어버리게 되었고 아직 본격적으로 통치를 시작하지도 않은 헨리 6세를 이미 인기가 없는 왕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헨리 6세..."인기는 거품과 같은 것..."
헨리 6세가 어느 정도 성장해서 나라를 다스리게 될 즈음에는 또 왕이 한 때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는 바람에 요크 공작인 리처드가 호국경(Lord Protector)이 되어서 왕 대신 나라를 다스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리처드가 요크 가문의 수장이었기 때문에 당시 궁중에 있던 랭커스터 가문의 일파들은 이 리처드에 대한 반대가 아주 심했습니다. 특히 그 반대의 선두에는 헨리 6세의 부인인 앙주의 마거릿이 있었지요.
요크 공작 리처드...
앙주의 마거릿 (Margaret of Anjou)
왕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게 되자 리처드는 호국경의 지위를 박탈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권력의 맛을 본 그는 그냥 그렇게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습니다. 자신의 가문인 요크가를 중심으로 해서 귀족들을 규합하고 특히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워윅경(Earl of Warwick)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왕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지요.
워윅경..."나는야 반전맨..."
1455년 리처드는 세인트올번스(St. Alans)에서 헨리 6세를 지지하는 랭커스터 가문의 군대와 격돌하여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바로 장미 전쟁(The War of the Roses)이 서막이 열린 것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랭커스터 가문의 군대를 이끌었던 서머셋 공작이 죽게 되고 리처드는 다시 한 번 호국경의 자리에 올라 잠시 잃어버렸던 실질적인 권력을 되찾아 오게 됩니다.
요크 가문 1 : 0 랭커스터 가문
1459년까지는 불안 불안한 현상 유지가 계속 되었지만 그 해 마침내 다시 한 번 양 가문은 권력을 두고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번엔 요크 가문의 리처드와 워윅경이 패하게 되었습니다. 둘은 국가를 배신한 배신자들로 낙인 찍혀 해외로 달아났고 헨리 6세는 다시 한번 권력을 되찾게 되지요.
요크 가문 1 : 1 랭커스터 가문
하지만 그 이듬해 워윅경은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와 요크 가문의 군대를 이끌고 왕에게 도전합니다. 그는 노샘프턴(Northampton)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헨리 왕을 사로잡습니다 (헨리 6세 1차 포획). 이때 헨리 6세의 부인인 앙주의 마거릿은 가까스로 스코틀랜드로 도망가는 데 성공합니다. 리처드는 다시 한 번 호국경의 자리에 오르게 되지요.
"좀 쪽 팔리긴 하네..."
요크 가문 2 : 1 랭커스터 가문
스코틀랜드로 피신한 앙주의 마거릿은 북부 잉글랜드에서 다시 랭커스터 가문의 세력을 규합하고 남으로 진군합니다.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리처드의 군대를 무찌르고 2차 세인트올번스 전투에서도 마저 승리를 거두면서 요크 가문에 붙들려있던 왕을 구출하게 됩니다.
요크 가문 2 : 2 랭커스터 가문
하지만 당시 런던은 여전히 요크 가문의 수중에 있었습니다. 런던은 잉글랜드 정치의 중심이었지요. 요크 가문은 헨리 6세를 폐하고 호국경 리처드의 아들인 에드워드를 왕의 자리에 옹립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에드워드 4세입니다. 에드워드와 워윅경은 군대를 이끌고 북진하였고 1461년 3월 29일 남하하는 랭커스터 가문의 군대를 맞아 요크셔 근방의 Towton에서 영국 땅에서 벌어진 전투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알려진 전투를 벌이게 되지요. 이 전투에서는 헨리 6세 측이 다시 지게 되었고 헨리 6세와 마거릿은 다시 스코틀랜드로 도망칩니다. 뒤이어서 Hexham에서 또 한 번의 전투가 벌어지고 이 전투에서도 랭커스터 측이 패하면서 헨리 6세는 다시 한번 요크 가문에 붙잡히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헨리 6세 2차 포획).
에드워드 4세...
"아까보다는 마이 쪽 팔리네..."
요크 가문 3 : 2 랭커스터 가문
이제 요크 가문의 승리가 공고해지는 가 싶던 순간 뜻하지 않던 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에드워드 4세가 이미 평민 여성인 엘리자베스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 것이었지요. 왕이 평민과 결혼한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요크 가문의 든든한 지원 세력이었던 워윅경은 안 그래도 에드워드 4세를 프랑스 공주와 혼인 시키려고 막후 노력을 기울이던 참이었습니다. 워윅경은 이 일에 대해서 크게 분노합니다. 거기다가 그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일이 발생하는데 엘리자베스가 왕을 조종하여 왕의 행정부에 그녀 가족들이 요직을 차지하도록 손을 썼고 이는 결국 그 동안 요크 가문의 동지였던 워윅경을 랭커스터 가문 쪽으로 합류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나는야 반전맨..."
앞선 전투에서의 큰 패배로 의기소침해 있던 랭커스터 가문쪽에서는 위윅경의 합류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고 이에 힘입어 마거릿은 프랑스에서 새롭게 랭커스터 가문의 군대를 일으켜서 잉글랜드로 넘어옵니다. 그녀가 잉글랜드에 상륙하자 여러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던 에드워드 4세는 잉글랜드를 버리고 플랑드르 지역으로 도망을 칩니다. 헨리 6세는 또 한번 요크 가의 손에서 벗어나 잉글랜드의 왕으로 재 옹립되지요.
요크 가문 3 : 3 랭커스터 가문
하지만 플랑드르 지역으로 피신했던 에드워드 4세는 처남인 부르고뉴 공작의 도움으로 다시 한 번 군대를 일으키고 한 때는 본인의 동지였던 워윅경과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여기서 에드워드는 승리하고 워윅경은 전투에서 사망합니다. 여세를 몰아 에드워드는 Tewkesbury에서 마거릿의 군대마저도 무찌르고 헨리 6세를 다시 사로잡습니다 (헨리 6세 세 번째 포획). 헨리 6세의 운은 여기까지였습니다. 그는 런던탑에 갇혀 있다가 마침내 처형 당하고 말지요.
"뭐라 할 말이 읎네..."
요크 가문 4 : 3 랭커스터 가문
드디어 요크 가문의 승리로 장미 전쟁이 마무리 되는 가 싶었는데 마지막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12살 난 그의 아들, 에드워드 5세가 왕위를 물려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너무 어렸기에 에드워드 4세의 형제인 글로스터의 리처드(Richard of Gloucester)가 호국경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글로스터의 리처드는 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에드워드 5세가 겨우 두 달 정도 왕위를 지키고 있었을 때 리처드는 왕을 런던탑에 유폐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선왕이었던 에드워드 4세와 평민이었던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은 무효라는 발표가 나오게 되고 이로서 그들의 자식인 에드워드 5세도 자연히 왕위를 물려받을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 발표가 나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워드 5세와 그 당시 겨우 9세였던 그의 남동생 리처드는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두 형제를 글로스터의 리처드가 죽였다는 물증은 없었지만 심증은 너무나도 분명했습니다.
Richard of Gloucester
글로스터의 라처드가 조카들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자 민심이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죽은 헨리 6세의 먼 조카뻘 되는 랭커스터 가문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헨리 튜더는 기회를 포착합니다. 그는 난리를 피해 프랑스의 브르타뉴 지역으로 망명을 가 있던 상태였습니다. 1485년 그는 소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웨일즈로 상륙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는 군대를 일으키는데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여기 저기서 그를 지지하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장미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마지막 전투가 벌어집니다. 헨리 튜더가 이끄는 군대는 리처드가 이끄는 군대와 레스터셔에서 양 가문의 운명을 결정지을 최후의 전투를 벌이게 되고 이 전투에서 헨리 튜더측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헨리 7세가 마침내 튜더 왕조를 열게 되었습니다. 헨리 7세는 즉위한 후 5개월 뒤에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오랜 세월을 끌어왔던 양 가문의 반목과 갈등을 끝내고 (헨리 7세 (랭커스터 가문) + 엘리자베스 (요크 가문)) 두 가문의 통합을 이루어내게 됩니다.
헨리 7세
최종 스코어
요크 가문 4 : 4 랭커스터 가문